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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계보학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
서문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그것은 삶의 위기와 빈곤, 퇴화의 징조인가? 아니면 반대로 거기에는 삶의 충만함, 힘, 의지가, 그 용기와 확신이, 그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는 우선 그 자체로 문제시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변화해온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를 주어진 것으로, 사실로, 모든 문제 제기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일이나, 대체로 선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의 미래를 포함하여) 촉진하고, 인간에게 공리, 번영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일에 조금도 의심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그 반대가 진리라고 한다면, 사정은 어떤가?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았다고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좀 더 높은 지배 종족이 좀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 이것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이러한 기원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좋음'이라는 용어가 저 도덕 계보학자들의 미신이 억측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비이기적' 행위와 결부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기적', '비이기적'이라는 대립의 전체가 인간의 양심에 더욱 떠오르게 되는 것은 귀족적 가치 판단이 몰락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이며,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를 지닌 '좋음'이 발전해 나오는 것이다 : 언제나 저 다른 발전과 평행해 진행되는 또 하나의 발전이 있는데, 이는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을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



성직자 민족인 유대인, 이들은 자신의 적과 압제자에게 결국 오직 그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전도시킴으로써, 즉 가장 정신적인 복수 행위로 명예회복을 할 줄 알았다.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무력감의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즉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 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부정적인 개념인 '저급한', '천한', '나쁜'은 철저히 생명과 정열에 젖어 있는 고귀한 가치 평가 방식의 긍정적인 근본 개념인 '우리 고귀한 자, 우리 선한 자, 우리 아름다운 자, 우리 행복한 자!'에 비하면 늦게 태어난 창백한 대조 이미지일 뿐이다.



억압당한 자, 능욕당한 자가 무력감이라는 복수심에 불타는 간계에서 "우리는 악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자. 즉 선한 존재가 되게 하자! 그리고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복수를 신에게 맡기는 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긴 채 사는 자, 모든 악을 피하고 대체로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이 적은 자, 즉 우리처럼 인내하는 자, 겸손한 자, 공정한 자이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이것은 본래, 냉정하게 선입견 없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약자는 어차피 약하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니와, 이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론을 내려보자.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대립되는 가치는 이 지상에서 수천 년간 지속되는 무서운 싸움을 해왔던 것이다. 이 싸움의 상징은 '로마 대 유대, 유대 대 로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는 유대인 가운데서 반(反)자연 자체와 같은 어떤 것, 마치 자신과 반대되는 괴물을 느꼈다. 로마에서 유대인은 '전 인류에 대한 증오의 죄를 지은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인은 강자이며, 고귀한 자이다. 그들보다 강하고 고귀한 자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결코 꿈꾸어본 적도 없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모든 것, 하나하나의 비명(碑銘)은 만일 거기에 씌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사람을 매혹시킨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저 탁월한 원한을 품은 성직자적 민족이며, 유례없는 민중 도덕의 천재성을 구유하고 있는 민족이다.



모든 이상의 대립 가운데 최대의 것인 저 대립이 영원히 해결되었는가? 아니면 단지 연기된 것일 뿐인가, 멀리 연기된 것인가? 나의 독자들처럼 여기서 숙고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이 문제의 결말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의 내 저서에 적합하게 들어맞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저 위험한 표제어를 내가 사용하고자 한다는 것, 즉 내가 원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 충분히 밝혀졌다고 가정한다면, 내게는 결말을 지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의 저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



'자유로운' 인간, 즉 오랫동안 지속되어 부수기 어려운 의지를 소유한 자는, 이것을 소유할 때 또한 자신의 가치 척도가 있다: 그는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타인을 바라보며, 존경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 강한 자, 신뢰할 수 있는 자들(약속할 수 있는 자들)을 존경한다. 또한 필연적으로 그는 약속할 수 없으면서 약속하는 허약 체질의 경솔한 인간에게는 발길질을 해댈 것이며, 입에 약속을 담고 있는 그 순간 이미 약속을 깨버리는 거짓말쟁이에게는 응징의 채찍을 가할 것이다. 책임이라는 이상한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 이 희한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가장 밑바닥 심연까지 내려앉아 본능이, 지배적인 본능이 되어버렸다. 주권적 인간은 이 지배적인 본능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달구어 찍어야 한다 :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감스럽게도 가장 오래 지속된) 심리학의 주요명제다. 인류가 '기억에 남겨둔 것'이 나쁘면 나쁠수록, 인류의 관습의 모습은 더욱 무섭게 된다. 특히 형법의 냉혹함은 인류가 망각을 극복하고, 순간적으로 감정과 욕망의 노예가 된 이러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회적 공동생활의 몇몇 원시적 요건들을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고대 형벌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사회생활의 편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약속했던 일에 관해 대여섯 가지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 속에 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기억 덕분에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이르렀다!- 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 불리는 이러한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 이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채권자에게는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즉 금전이나 토지, 어떤 종류의 소유물로 보상을 받는 대신- 배상이나 보상으로 일종의 쾌감을 누릴 권한이 주어졌다. 즉,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한다. 보상이란 즉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



죄의 감정과 개인적인 의무의 감정은 그 기원을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개인 관계에, 즉 파는 자와 사는 자,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 두고 있다 : 여기에서 비로소 개인이 개인과 상대했으며, 여기에서 비로소 개인이 스스로를 개인과 견주었다. 여기에서 가장 오래된 종류의 명민함이 길러졌고,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 가진 긍지나 우월감의 싹도 최초로 얻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지상의 모든 선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정의의 자기 지양 : 이것이 어떤 미명으로 불리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 - 이것이 자비이다. 그 자체로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좀더 강한 자의 특권이며, 더 잘 표현한다면, 그가 가진 법의 저편이다.

형벌은 죄지은 사람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회한'이라 불리는 저 정신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고유한 도구를 형벌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현실과 심리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형벌이란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단련하며 냉혹하게 만든다. 형벌은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형벌은 소외감을 격화시킨다. 형벌은 저항력을 강화한다. 형벌이 사람의 활력을 꺾고 비참한 굴종과 자기 비하를 초래한다면, 그러한 결과는 확실히 건조하고 음산한 엄숙함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형벌의 평균적인 효과보다도 더 생기를 돋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역사 이전에 존재하는 저 수천 년을 생각한다면, 바로 형벌을 통해서만 죄책감 발달이 가장 강력하게 억제되었다고 주저하지 않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본능은 밖으로 발산되지 않고 안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이것으로 인해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난다. 처음에는 두 개의 피부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얇았던 내면 세계 전체가 인간이 밖으로 발산하는 것이 저지됨에 따라 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 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 - 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에 속한다 - 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폭력으로 잠재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유의 본능, 억눌리고 뒤로 물러나고 내면 세계로 유폐되어 마침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발산하고 드러내게 되는 이러한 자유의 본능 : 오로지 이것이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시작인 것이다.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자기 학대를 하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를 낳는 전제가 된다.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병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임신이 병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병인 것이다.



자기를 괴롭히려는 의지가 내면화되어 자기 안으로 내몰린 동물적 인간, 길들이기 위해 '국가'에 갇힌 동물적 인간의 저 뒤로 물러난 잔인함. 이 갇힌 인간은 이러한 고통을 주려는 의욕의 좀더 자연적인 출구가 막힌 후에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양심의 가책을 고안해 냈다. 양심의 가책을 지닌 이러한 인간은 자기 고문을 소름끼칠 정도의 냉혹함과 준엄함으로 몰고 가기 위해, 종교적 전제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미래의 인간은 지금까지의 이상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해주며, 그 이상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 즉 격렬한 구토에서, 허무를 향하는 의지에서, 허무주의에서 우리를 구원해주게 된다. 이러한 정오와 위대한 결단의 종소리는 의지를 다시금 자유롭게 만들며, 대지에는 목표를, 인간에게는 희망을 되돌려준다. 안티크리스트이자 반(伴)허무주의자, 신과 허무를 초극한 이 자, 그는 언젠가 올 수밖에 없다.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간에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 안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 사실, 즉 인간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이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한 철학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신봉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힌트는 그 철학자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철학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이렇다 - 이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 철학자는 최고의 가장 대담한 정신성을 추구할 수 있는 최적 조건을 바라보면서 웃음짓는다. 따라서 그는 '생존'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긍정한다. 그는 아마도 이것을 "세계가 망할지언정, 철학은 살고, 철학자도 살고, 나도 살아남으리라!"는 불경스러운 소망이 그에게서 멀리 있지 않을 정도까지 긍정하게 될 것이다……. 이 철학자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가치에 대한 청렴한 증인이나 재판관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퇴화되어가는 삶의 방어 본능과 구원 본능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삶은 모든 수단을 강구해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 이것은 국부적인 생리적 장애와 피로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해 삶의 가장 깊은, 제 기능을 발휘하며 남아 있는 본능은 끊임없이 새로운 수단이나 착상으로 투쟁하고 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그러한 수단이다 : 따라서 사정은 이러한 이상을 찬양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며, 삶은 이 이상 속에서 그러한 이상을 통해 죽음과 싸우며 죽음에 대항하여 싸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인 것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우리에게 병든 무리의 예정된 구원자, 목자, 변호인으로 생각된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의 거대한 역사적 사명을 이해하게 된다. 고통 받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 그의 왕국이며, 그의 본능은 그에게 이 지배를 지시하고, 이와 같이 지배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가장 특이한 기교, 자신의 대가다운 실력, 자기 나름의 행복을 갖게 된다. 병든 무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과 더불어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병들어야만 하며, 근본적으로 병자나 실패자와 밀접하게 관계해야만 한다. 성직자적 실존의 가치를 가장 간결한 형식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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