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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지음 | -
저자 서문



보편적 문화사의 어떤 문제를 연구하든, 근대 유럽 문명의 산물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자문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하듯이) 「보편적」인 의의와 가치를 지닌 발전선상에 놓여 있는 듯한 문화적 현상이 서구 문명에서 그리고 오직 서구 문명에서만 나타난 사실은 어떤 일련의 환경들에 귀속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오직 서구에서만 우리가 오늘날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발전단계에 오른 과학이 존재한다. 이는 우리의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획득에의 충동, 이윤과 화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화폐에 대한 추구 그 자체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다. 아마도 이 충동은 그것의 객관적 가능성이 있는 혹은 있었던 곳이라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든 종류와 조건의 인간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획득을 위한 무제한한 탐욕은 결코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욱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제행위를 교환기회의 사용에 의한, 즉 (형식적으로) 평화적인 이윤기회의 사용에 의한 이윤기대에 의존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사고가 이루어 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경제행위를 화폐소득과 화폐지출의 비교에 적응시키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점인데, 이런 의미에서의 자본주와 자본주의적 경영은 자본주의적 계산의 상당한 합리화를 갖춘 식으로 이미 지구상의 모든 문명화된 나라들에 존재했었다. 근대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바빌론, 이집트, 고대 지중해, 중세에도 존재했었다. 즉 어떤 경우든 자본주의적 경영과 자본주의적 기업가, 즉 일시적인 기업가가 아니라 상시적인 기업가는 모두 매우 오래된 것이며, 또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서양은 자본주의를 양적인 정도로 그리고 (이 양적 발전과 더불어) 이전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매우 다른 형태로 발전시켰다. 즉 (형식적으로)「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가 그것이다. 이윤을 위한 정치적 기회나 비합리적 투기적 기회에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은 서구 자본주의에만 독특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영의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은 그 발전에 있어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근대적 경제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가사와 사업의 분리, 그리고 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합리적 부기가 그것이다.



보편적 문화사에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이한 문화에서 단지 형태적으로만 다른 -모험가적 유형, 혹은 이윤의 원천으로서 무역, 전쟁, 정치, 행정상의 자본주의- 자본주의적 활동 자체의 발전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를 갖춘 착실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기원이 문제가 된다. 혹은 문화사의 용어로 말하자면 문제는 서구 부르주아 계급과 그 독특성의 기원에 대한 것이다.



Ⅰ. 문제



종파와 계층

여러 종파가 혼합되어 존재하는 지방의 직업통계를 보면 특히 한 가지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가톨릭계 신문이나 문헌에서 자주, 그리고 독일의 가톨릭 회의에서 활발히 논의된 현상이다. 즉 그 현상이 자본 소유자와 경영자층, 상급의 숙련 노동자층, 특히 근대적 기업에 있어 높은 기술적, 또는 상인적(商人的) 훈련을 받은 구성원들이 매우 현저한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프로테스탄트는(특히 나중에 특별히 다루게 될 그들 중의 몇몇 분파가) 지배층으로서든 피지배층으로서든, 다수로서든 소수로서든 경제적 합리주의를 향한 특수한 경향을 보였고, 가톨릭은 어느 경우든 간에 그러한 경향을 보이지 못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이러한 행동상의 차이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과 몇 가지 근대적인 인상에 입각해서 가톨릭의 강한 「비세속성」, 가톨릭의 최고 이상인 금욕적 성격이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에 재물에 대해 보다 강한 무관심을 보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가톨릭적인 삶의 영위가 갖는 (실제로건 아니면 말뿐이건) 금욕적 이상에 대한 비판에 이용하며, 가톨릭측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한 삶의 세속화 결과로 주장되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답한다.



그러나 영국, 네덜란드, 미국의 청교도들에게는 주지하다시피 「현세적 쾌락」과는 정반대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이러한 엄숙함과 생활에서의 종교적 관심의 강력한 지배를 「비세속성」이라 부른다면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은 적어도 지구상의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톨릭교에 열렬한 북부 독일의 가톨릭만큼 비세속적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즉 이러한 평행관계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소위!) 가톨릭의 「비세속성」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유물론적인 「세속성」 따위처럼 애매한 표상으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아무런 출발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상은 과거에 대해서나 현재에 대해서 조금도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루터, 칼뱅, 녹스(Knox), 보에(Voёt) 등의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오늘날 「진보」라 부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종교가들도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인정하는 근대적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해 초기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정면으로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초기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일정한 특징과 근대의 자본주의적 문화 사이에 어떤 내적인 친화성이라는 것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좋건 나쁘건 간에 그러한 친화성을 (소위) 그것의 다소간 유물론적인 혹은 반금욕적인 「세속성」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순수한 종교적 성격에서 찾아야만 한다.



자본주의 「정신」

본 연구의 제목에는 약간 야심적인 듯이 보이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 개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개념에 대한 확정적인 파악은 (역사적 현실의 복합적인 관련으로 역사적 현실에서 취해질 개별적 구성요소로부터 점차로 합성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탐구의 시초가 아니라 탐구의 마지막에 얻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자리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뜻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장 잘 -즉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고 있는 관점에 가장 적합하게- 정식화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그리고 그 논의의 본질적인 결과가 지적하는 바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화폐취득은 -그것이 합법적 방법으로 얻어진 것인 한- 근대적 경제질서 안에서 직업상의 유능함의 표현이며 이 유능함은 쉽게 알 수 있듯이 프랭클린 도덕의 실질적인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즉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이 「윤리」의 「최고선」이다. 그것도 모든 적나라한 향락을 엄격히 피하면서 행복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모든 요소들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 돈 버는 것을 그저 자기 목적으로 여기므로 개인의 「행복」과 「효용」에 대립되는, 전혀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즉 인간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것이다.



「윤리」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규범부여적인 일정한 생활양식이라는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우선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적수는 전통주의라 부를 수 있는 관점과 태도였다. 근대적 기업가가 '그가 고용한' 노동자로부터 가능한 한 극대의 노동 성과를 올리기 위해, 즉 노동강도를 증대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기술적 수단 중 하나인 성과급의 경우, 성과급의 비율을 향상시키면 동일 시간 안의 노동성과는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감소하는 결과가 뚜렷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성과급의 인상에 대해 하루 노동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키는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잉여수입보다는 노동을 적게 하는 것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즉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극대화시키면 매일 얼마를 벌 수 있는지를 묻지 않고 자기가 지금까지 벌었고 또 자신의 전통적 필요에 알맞던 그 액수를 벌려면 하루에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주의」라 불리는 태도의 한 사례이다. 즉 인간은 「그 본성상」 더 많은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살고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려고 한다. 이러한 전통주의적 구습을 극복하고 노동을 자기 목적, 즉 자본주의가 요구하듯이 「직업(소명)」으로 파악하는 최선의 기회는 종교적 교육의 산물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추진력에 대한 문제는 우선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화폐재고의 원천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에 대한 문제이다. 그 정신이 개화하여 작용하는 곳에서는 그 정신이 화폐재고를 자신의 작용수단으로 변형시켰던 것이며 그 거꾸로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정신의 도래가 대체로 평화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방식」의 기업가들이 냉정한 자제심을 잃지 않고 도덕적 경제적 파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비상하게 굳건한 성격을 필요로 했으며, 그러한 혁신과정에 불가결한 고객과 노동자로부터의 신뢰를 얻도록 해주고 무수한 저항의 극복을 위한 활력을 유지시켜 주며, 특히 이제부터 기업가에게 안락한 생활향락과는 결합될 수 없는 것으로 요구되던 무한히 집중적인 노동능력을 가능케 한 엄격하고도 단호한 「윤리적」 자질이 명석한 시야와 추진력 못지 않게 필요했었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과거의 전통에는 맞지 않는 특별히 다른 방식의 윤리적 자질이었다.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은 합리주의의 전체적 발전의 부분현상으로 간단히 이해될 수 있고 또 궁극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주의적 원리의 입장에서 도출되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단지 그것이 순수한 합리주의적 인생관의 「설익은 결실」 따위의 역할을 행한 한에서만 역사적인 고찰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탐구를 해보면, 그러한 단순한 문제설정은 합리주의의 역사가 결코 여러 생활영역에서 평행적으로 진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부적절한 것임이 즉시 드러난다. 순수한 세속적인 합리적 철학은 18세기에 단지 자본주의적으로 매우 발달한 나라에서만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며 주로 그런 나라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다.



「합리주의」란 무수한 대립적 내용을 안고 있는 역사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적 구성요소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러한 요소인 「직업」사상과 -앞서 말했듯이 순수한 행복주의적인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보면 그토록 불합리한- 직업노동에의 헌신을 낳은 구체적인 「합리적」 사고와 삶의 형식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우리의 관심대상은 모든 직업개념에 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이 직업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그 비합리적 요소의 근원이다.



루터의 직업개념ㆍ탐구의 과제

루터의 직업개념은 전통주의적인 것에 머물렀다. 즉 직업은 인간이 신의 섭리로 받은 것이며 그 섭리에 「순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색이 직업노동은 신이 부여한 임무, 아니 유일한 임무라는 그의 또 다른 사랑을 가려 버렸다. 더욱이 루터에 있어 -그리고 루터교회에 있어서는 더 심하다- 합리적 직업윤리에 대한 심리적 토대가 신비가들보다 상당히 불안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루터주의는 신비가들보다 퇴보한 것을 의미하며, 특히 루터가 금욕적 자기연마의 경향에 위선이라는 혐의를 두었고 따라서 루터 교회에서는 그것이 더욱더 뒷전에 밀렸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루터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단순한 「직업」사상은 -이 점만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야 한다.- 현재 알려진 한에 있어, 우리가 탐구하는 것에 대해 기껏해야 불확실한 중요성밖에는 갖지 못한다. 그렇다고 종교생활을 루터주의적 형태로 재편성한 것이 우리의 고찰 대상에 아무런 실천적 중요성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단지 이 중요성은 분명 세속적 직업에 대한 루터와 그의 교회가 갖는 태도에서 직접적으로는 도출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파에서 가능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쉽게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생활실천과 종교적 출발점과의 관련을 루터주의보다 쉽게 탐구할 수 있는 형태의 프로테스탄티즘을 고찰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물론 이 책에서 잠정적으로 사용된 의미에서)은 종교개혁의 일정한 영향에 따른 결과로만 발생할 수 있었다든가, 경제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종교개혁의 산물이라는 등의 어리석은 공론적 테제는 결코 옹호될 수 없다. 이미 종교개혁 훨씬 이전에 몇 가지 중요한 자본주의적 영리기업의 형태가 있었다는 주지의 사실은 그러한 견해를 단적으로 부인한다. 오직 다음과 같은 것들만이 확인될 필요가 있다. 즉 그 「정신」의 질적인 규정과 세계로의 양적인 팽창에 있어 종교적 영향이 함께 작용하였는지, 작용하였다면 어느 정도인지 하는 점과, 자본주의적 토대에 입각한 문화의 어떤 구체적인 측면이 종교적 영향에 의한 것인지 하는 점이다.



Ⅱ.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16세기와 17세기에 자본주의적으로 가장 발달한 문화국가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위대한 정치투쟁과 문화투쟁을 수행했던 것이 칼뱅주의였고 따라서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신앙은 칼뱅주의이다. 그 당시에 그리고 대체적으로 현재도 예정설은 칼뱅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교리이다. 물론 예정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교리인지 아니면 「부차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칼뱅의 경우 이른바 「가공할 신의 결정(decretum horribile)」은 루터에 있어서처럼 체험된 것이 아니라 안출(案出)된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만 쏠리는 그의 종교적 관심의 방향에서 사상적 철저화가 진전됨에 따라 그 이론의 중요성은 더해 갔다. 신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위해 있는 것이며, 모든 것 -따라서 칼뱅이 결코 의심치 않았던,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부름을 받는다는 것도- 은 오직 신의 위엄을 영광케 한다는 목적의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신만이 자유롭고, 즉 아무런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고, 신의 결단은 당신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서 좋다고 생각하시는 한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상의 「정의」의 척도로 신의 지고한 섭리를 측정하려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신의 위엄을 침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진리의 이러한 단편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그 밖의 모든 것 -우리의 개인적 운명이 갖는 의미- 은 어두운 비밀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을 탐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도 외람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일부는 구원 받고, 나머지는 저주 받았다는 사실뿐이다. 신의 은총은 그 은총을 받은 자가 잃을 수 없고, 그 은총을 거부당한 자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이론이 그 격앙된 비인간성을 통해 그 장엄한 결론에 몸을 맡긴 한 세대의 감정에 낳은 결과는 무엇보다도 전대미문의 개인적인 내적 고립감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에게 결정적이었던 삶의 관심사, 즉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인간은 태초로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을 향해 홀로 길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이 신과 무한히 멀리 있고 또 무가치하다는 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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