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 -
갈라진 암벽에 피는 꽃이여
나는 그대를 갈라진 틈에서 따낸다.
나는 그대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제1부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1. 개관'소유'와 '존재'간의 선택은 상식에 호소할 것이 못 된다. '소유'는 누가 보더라도 우리 생활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살기 위해서는 물건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물건을 소유해야만 그것을 즐길 수가 있다.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소유이며, 만일 인간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어질 것이다. 긴 세월에 걸쳐 나는 이 구별을 깊이 마음 속에 새겨왔고, 그 경험적인 근거를 찾아 정신분석의 방법에 의한 개인 및 집단의 구체적인 연구를 해왔다. 나의 연구는 나를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끌어주었다. 즉 이 구별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사랑간의 구별과 더불어 존재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반영하며, 경험적인 인류학적·정신분석적 데이터는 '소유와 존재는 두 가지 기본적인 존재양식이며, 그 각각의 힘이 개인의 성격과 여러 가지 유형(類型)의 사회적 성격간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삶에 있어서의 소유양식과 존재양식 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서론으로서 고(故) 스즈키 다이세스가 『선(禪)에 관한 강의』에서 언급한 비슷한 내용을 지닌 두 편의 시를 실례로 들겠다. 우선 19세기의 영국 시인 테니슨(Tennyson)의 시이다.일본 시인 바쇼(芭蕉:1644∼1694)의 하이쿠(俳句)를 옮기면 대략 다음과 같다.자세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이 두 시의 차이는 현저하다. 테니슨은 꽃에 대한 반응으로 그것을 '소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꽃을 '뿌리째' 뽑아낸다. 꽃 자체는 꽃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서 생명을 빼앗긴다. 우리가 이 시에서 보는 테니슨은 살아 있는 것을 해체하여 진리를 찾으려는 서구(西歐)의 과학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쇼의 꽃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다르다. 그는 꽃을 따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것을 '자세히 살펴볼' 뿐이다.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테니슨은 아무래도 사람과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꽃을 소유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꽃을 '소유'함으로써 꽃은 파괴되고 만다. 바쇼가 바라는 것은 '보는 것'이다. 꽃을 그대로 살려두면서 자신을 꽃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테니슨과 바쇼의 차이는 괴테의 다음 시로 충분히 설명된다.꺽으려는 손을 보고
꽃은 상냥하게 말했다.
어째서 나를 꺾으려 하세요
곧 시들어버릴 텐데. 나는 그것을
뿌리째 파내어
아름다운 정원에다 심으려고
집으로 그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꽃을 다시 심었다.
이제 그것은 많이 자라
꽃이 피게 되었다.괴테에게 있어서 꽃은 당당히 살아 있는 존재이므로 꽃이 그에게 말을 하며 경고한다. 그리고 그는 테니슨과 바쇼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그 꽃을 '뿌리째' 파내어 다시 심기 때문에 그 생명은 파괴되지 않는다. 괴테는 말하자면 테니슨과 바쇼 사이에 있는 것이다. 테니슨의 꽃에 대한 관계는 소유 - 물질의 소유가 아니고 지식의 소유 - 양식에 속한다. 바쇼 및 괴테의 꽃에 대한 관계는 존재양식에 속한다. 존재와 소유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아니다. 그 차이는 오히려 사람을 중심으로 한 사회와 사물을 중심으로 한 사회 사이에 있다. 소유 지향은 서양의 산업사회의 특징이며 거기서는 탐욕이 인생의 지배적 주제(主題)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산업화가 2,3세대 진행되면 일본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테니슨을 갖게 될 것이다.
2.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학습 : 삶의 소유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즉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단단히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보존한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사실 '소유'형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主題)에 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면 오히려 당황한다. 그러나 학습의 과정은 세계에 대하여 존재양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에게 있어서는 전혀 다른 특질을 가지고 있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그들은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들 자신의 사고과정을 자극한다. 새로운 의문, 새로운 관념, 새로운 전망이 그들 머릿속에 생긴다. 그들이 귀기울이는 행위는 하나의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며 강사의 말을 듣고 들은 것에 반응하여 자발적으로 생명을 얻는다. 학생 개개인이 강의를 통하여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다.
대화·독서 :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는 두 가지 대화의 예에서 쉽게 관찰될 수 있다. A가 X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고, B가 Y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각자는 자신의 의견과 동일화된다. 이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의견을 지키기 위해 보다 나은, 즉 보다 합리적인 논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양쪽 모두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또 상대방의 의견이 달라지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 의견이 자기의 소유물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상실하는 것은 자신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의견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소유형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억제를 버리고 반응할 용기만 가지면 어떤 새로운 것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한 걱정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 없으므로 대화할 때에는 아주 활기를 띤다. 이리하여 대화는 상품(정보·지식·지위)의 교환에만 그치지 않고, 또한 누가 옳은가 하는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대화가 된다. 이들은 함께 춤추기 시작하며 승리 혹은 슬픔 - 둘 다 무익하다 - 을 가지고 헤어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헤어진다. 대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을 독서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대화이며, 또 대화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소유와 인식 : '인식'의 영역에 있어서의 소유양식과 존재양식 사이의 차이는 다음 두 가지 정식(正式)으로 표현된다.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와 '나는 알고 있다'로. 삶의 존재양식에서의 인식의 특질에 대해서는 불타, 유태의 예언자들, 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지크문트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들의 통찰을 통해서 이해를 높일 수가 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인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적 지각의 기만성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의미는 우리들이 보고 있는 물질적 현실세계의 모습이 '참으로 현실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들이 참되고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이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암시적인 힘에 의해서 생긴 환상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인식은 따라서 쳐부수는 것,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식은 근원까지, 나아가서는 원인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표면을 꿰뚫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은 끊임없이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표면을 꿰뚫고 비판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타, 즉 '각자(覺者)'는 깨어나서 물질에 대한 갈망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환상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유태의 예언자들은 깨어나서 너희들의 우상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환상임을 알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지식은 어떤 특별한 사고라기보다 오히려 '모든 덮개를' 벗겨버리는 것이며 이기심을 갖지 않고 벌거숭이로 신에게로 달려가 그와 접촉하며 그를 끌어안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자기지식의 개념은 무의식적인 현실을 깨닫기 위해 환상('합리화')을 파괴한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 사상가들은 모두 인간의 구제에 전념했다. 존재양식에 있어서 최적(最適)의 지식은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양식에 있어서의 그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신념 : 종교적, 정치적 또는 개인적인 의미에 있어서 신념은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아무런 합리적인 증명도 없는 대답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창조한 정식(正式)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을 내리는 일의 어려움을 덜어준다. 신념은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확실성을 준다. 그것은 궁극적이고 확고부동한 지식을 선언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믿어지는 것은 그 신념을 전파하고 지키는 사람들의 권력이 확고부동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본래 신은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의 상징인데,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하나의 우상이 된다. 예언자의 개념에서의 우상은 '사물'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들고 우리 자신의 힘을 투입함으로써 자신을 약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우상은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지만, 내가 그것에 복종함으로써 동시에 '그것'이 '나'를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존재양식에서의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적 지향이며 '태도'이다.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사람이 신념 '속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사랑 : 사랑 역시 그것이 소유양식에서, 아니면 존재양식에서 이야기되느냐에 따라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사랑은 하나의 사물이어야 하며, 우리가 갖고, 점유하고, 소유할 수 있는 실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는 사물은 없다. 실제로는 '사랑한다는 행위'만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것은 생산적인 능동성이다. 그것은 인물·나무·그림·관념을 존중하고 알고 반응하고 긍정하고 향유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이 소유양식에서 경험될 때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감금하고 또는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고 약화시키며 질식시켜 죽이는 행위이다.
구애(求愛)기간 중에는 어느 쪽도 아직 상대방에게 자신이 없으며, 각기 상대방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애쓴다. 어느 쪽도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사태가 곧잘 근본적으로 변한다. 약혼은 파트너 각자에게 상대방의 육체·감정·관심의 독점적 소유를 인정한다. 이미 사랑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즉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의 환심도 살 필요가 없다. 이제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즉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의 공동소유로 만족한다. 이리하여 어떤 경우에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시작된 결혼이 사이가 좋은 소유형태로 변모해 버린다. 그것은 두 개의 자기중심주의를 하나의 합동자본으로 삼은 회사, 즉 '가정'이라는 회사인 것이다. 어떤 부부가 지난날의 사랑의 감정을 회복해 보고 싶다는 열망을 억제할 수 없을 때,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은 새로운 파트너(또는 파트너들)가 그 열망을 충족시켜 주리라는 환상을 가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사랑에 있어서 좌절하게 되고 결국 사랑을 숭배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수동적으로 되기 때문에 무료한 인간이 되고, 그 또는 그녀에게 남겨진 지난날의 모든 매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 결혼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난점은 결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그리고 결국은 그들 사회의 소유 및 존재의 구조에 있다.
3. 구약·신약성서 및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저작(著作)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구약성서 : 구약성서의 주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존재하라!" 유대의 여러 부족의 역사는 최초의 유태의 영웅인 '아브라함'에게 나라와 친척을 버리라는 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아브라함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 - 땅과 가족 - 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가야만 했다. 두 번째 영웅인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나라(결국은 노예의 나라가 되어버렸지만)가 된 땅에서 그들을 인도해 내어 '의식을 행하기 위해' 황야로 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유태인들은 마지못해 커다란 불안을 안고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따라 황야로 간다. 황야는 이 해방에 있어 중요한 상징이다. 황야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는 유목의 땅이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생활을 위한 필수품이며, 소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들 유목민의 전통이 모든 비기능적 재산에 반대하는 경향을 결정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위한 준비로서 황야의 생활을 택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적 요인들은 속박을 받지 않고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생활의 상징으로서의 황야의 의미를 오히려 강조할 뿐이다. 유태인들은 오래 살 수 있는 나라를, 가난할지라도 보장된 식사를 그리워한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그리워한다. 재산이 없는 황야생활의 불안정을 두려워한다. 다른 모든 해방의 역사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들의 정신적 약점에도 응답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침에는 '떡'을,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줄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두 가지 중요한 계율을 덧붙인다.그 하나는 각자는 자기 필요에 따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계율은 축재(蓄財)와 탐욕과, 그리고 소유욕에 대한 계율이다.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저축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결말로 진행되어 간다. 유태인들은 '소유'없이 산다는 것에 견디지 못한다. 비록 그들은 일정한 거주지가 없어도 살 수 있고 매일 하나님이 주는 음식 이외에 다른 음식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현존(現存)하는 '지도자'가 없으면 살수가 없다. 이리하여 모세가 산 위에서 사라졌을 때 절망한 유태인들은 아론으로 하여금 그들이 숭배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어떤 이미지, 즉 황금 송아지를 만들도록 한다. 유태의 예언자들은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그 땅에서 살 수 없게 된다면 그들은 그 땅에서 다시 추방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고 예언했다. 예언자들에게는 그 땅으로부터의 추방을 하나의 비극이었으나 궁극적인 해방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신약성서 : 신약성서는 삶의 소유구조에 대한 구약성서의 저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 저항은 그 이전의 유태인이 행한 저항보다 더 철저하다. 구약성서는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계급의 소산이 아니라 유목하는 목양자(牧羊者)나 독립적인 농부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천년 후 탈무드라는 학문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학식이 풍부한 바리새인들은 중류계급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멸시 당하는 사람들, 짓밟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그들은 부자와 권력자를 심하게 비판했고, 부와 세속적 권력과 성직의 권력을 순연한 악으로 보고 타협하지 않고 탄핵했다. 초기 기독교의 이 혁명적 정신은 복음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속에 아주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말들 속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탐욕과 소유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