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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오귀스탱 베르크 지음 | 미다스북스
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오귀스탱 베르크 지음/김주경 옮김

미다스북스/2001년 12월/354쪽/10,000원



제1부 현대성의 한계

1. 휴머니즘에서 그 반대로

인간의 활동이 환경을 개조하면서 생긴 문제점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환경 개조는 문화에 따라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인류가 지구를 변형시키는 활동은 긍정적으로 여겨진 편이었다. 인간 활동으로 부정적인 결과들이 생겼지만 다시 인간 활동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는 환경에 대한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날엔 이 새로운 시각이 단연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근대문명이 환경에 미친 부정적인 결과들을 결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며, 대개의 경우 통제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성은 반환경적인가? 환경의 위기 앞에 서 있는 현재의 체제는 수많은 비판의 화살을 근대성에다 돌리고 있다.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이, 근대성에는 생태학적 균형을 파괴하는 특별한 것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경향을 ‘근대성이 세계를 해체한다.’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곧 생태계의 균형과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는 원리가 근대성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무생물 사이에는 우정이 성립할 수 없다고 썼다. 사물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근본적으로 근대성이 사물에 대한 윤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따라서 환경에 대한 윤리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근대성은 이러한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환경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사물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이처럼 뚜렷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기(氣)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환경을 구성하는 사물 안에서도 순환하고 있다고 봤다. 즉, 삶의 모든 양상이 기와 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원론이다.

어쨌든 이런 이원론에 따르면, 과학은 ‘당위’와 구분된 ‘존재’여야 한다. 그것은 객관적인 모든 인식의 조건이다. 이런 구분의 원칙에 따르면 환경에 관련된 학문은 도덕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어떤 태도도 요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자신과 사물 사이에 이원론을 정립함으로써, 주위 세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세계를 자신과 완전히 구분된 객체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근대적 주체는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본질적으로 분리된 모든 인식의 대상을, 무생물을 바라볼 때처럼 무심한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환경주의자들이 서구의 근대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점은 그동안 우리가 다른 생물과 자연은 외면한 채 오직 인간에게만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인간중심주의 개념으로 요약된다. 자칫하면 중대한 오해를 할 수 있으므로 인간중심주의를 두 종류로 분명하게 구분하자. 첫 번째는 17세기 과학혁명 이전에 모든 문명에 나타나는 인간중심주의이다. 두 번째는 서구문화의 특성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서구문화는 처음에는 기독교와 함께, 그 후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과 함께 강화되더니 마침내 현대에 들어와 개인이라는 주체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개개의 주체는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하면서 전 세계를 자기의 관점 아래 두기 시작했고,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것이 근대성에서 볼 수 있는 특성으로 현대 과학이 지닌 우주중심주의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모순이긴 하지만 근대성 안에 인간중심주의와 우주중심주의가 공존한다는 것은 주체/객체의 이원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주중심주의는 객체에게 유효하며, 반면 인간중심주의는 주체에게 유효하다. 이 두 세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 곧 관점의 차이가 있다. 현대의 이원론은 다양한 기원을 갖고 있는데,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 철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플라톤은 하나의 사물이 우리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물의 존재는 그 사물과 별개인 이상적인 형태(이데아) 안에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는 방식은 그리스 문화가 세계에 내재하는 법칙을 표현하는 능력, 즉 언어로 나타나는 인간 이성의 능력인 로고스에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때 이성의 능력은 실천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우선 관상(觀想 : 테오리아)을 거치고, 즉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관계를 넘어 그 다음에 이론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듯 이성을 실천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경향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근대성과 함께 부단히 발전해왔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언제나 실천이 이론보다 우위에 있었다. 예수회 신부들이 유럽의 수학을 소개했을 때 중국의 수학자들은 유럽인들의 논증을 지루하고 쓸데없이 기운만 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성이 점점 더 추상적인 법칙을 향해 가는 사고 과정은 오히려 철저한 실용주의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자 보완요소였다. 물체 상태로 축소된 세계를 다루는 실용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냉정한 이성과 사물이 직접 일치하는 경우로, 여기에는 윤리의 영역이 남아 있을 수 없다. 오직 이성과 사물의 일치에 의한 효율성만 남게 된다. 이로 인한 위험의 구체적인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근대성이 원자폭탄과 함께 휴머니티를 완전히 말살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윤리를 절대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윤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요, 이성의 절대적인 결여, 즉 정신과 실재 사이의 절대적인 단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분야에서 지식이 진보함에 따라 점차 근대성의 기초를 의심해보게 만든 것은 - 전통적 가치를 내세워 ‘근대성을 거부했던 움직임’이 아니라 - 바로 근대성 자체였다. 이 반성들 가운데 가장 전반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휴머니즘, 즉 인간 중심의 가치체계에 대한 것이었다. 휴머니즘은 르네상스에 자리를 잡은 후 18세기 계몽시대에 특히 강화되었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근대적 주체의 출현은 휴머니즘과 관계가 있다. 인간이 휴머니즘적인 가치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또한 자신과 타인 사이에 가치론과 윤리론의 이원론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의식을 갖고 책임을 지는 주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원론을 통해 현대과학이 발전해가면서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인간주체가 ‘의식과 책임을 지닌 존재’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었다. 주체에 대한 이런 반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자연과학을 통한 방법이고, 또 하나는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사회과학적 접근은 인간의 자연적 결정론을 배척하고 문화적 결정론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개인의 의식 대신 사회적 결정론을 강조하는 경향은 1960년대와 70년대 구조주의에서 절정에 달했다. 구조주의가 보여준 것들 중 하나는(특히 미셸 푸코의 공헌에 힘입은 것인데), 사회를 구조화시키는 ‘권력의 관계’는 세계 질서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구유럽의 건축물이든, 아시아의 의식(儀式)이든 상징성은 권력을 드러나게 해 보여주되, 그 권력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해준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수도를 건설하는 데 주요한 지표인 북극성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사실만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축제 의식의 지표가 되는 계절의 순환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성은 권력이 자연적인 것이기보다는 인간적, 사회적, 역사적인 것임을 점차 드러내주었다. 그리고 근대의 사회과학들은 이런 상징을 하나하나 분석해버렸다. 그 결과 상징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런데 근대성은 세계를 탈상징화하면서도 새로운 상징적 장치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이 새로운 장치는 전 우주적인 상징이기보다는 기능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의 장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 특정 분야에서의 효율성만을 목표로 할 뿐 더 이상 세계의 일반적 질서를 상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인 윤리의 의(義)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뚜렷한 한 가지 목적에 필요한 행동규칙만 내세울 뿐이다.

더 일반적으로 볼 때 근대성은 철학자 이마미치 토모노부가 ‘기술연관’이라고 부른 것을 무한하게 발전시켰다. 이 표현은 현대 기능주의가 지닌 상징적 장치와 비슷하다. ‘도로법규’도 신호, 사물, 모든 통제된 행동과 함께 이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장치는 인간에게 ‘성찰이 없는 기계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이 점에서 이런 장치는 기계적으로 신호에 복종하는 동물 수준으로 인간을 격하시킨다. 이리하여 근대성의 첫 번째 목적이 휴머니즘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이 만들어낸 기술적 체계는 이런 이상의 정반대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앰으로써 인간을 종속시킬 뿐 아니라, 윤리의 조건 자체도 제거하기 때문이다.

2. 자궁에 대한 노스탤지어

근대성에는 한 가지 양식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화만큼이나 많은 양식이 있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이 다양한 양식들을 크게 두 개의 범주로 묶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서구의 문화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의 문화양식이다. 근대화는 사실 유럽에서 먼저 일어나, 그 뒤를 이어 다른 세계로 퍼졌다. 바로 여기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긴다. 서구 국가들에게 근대성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시간의 현상으로 느껴진 반면, 그밖의 세계에서는 우선 공간적인 면에서 서구와의 대립으로 느껴진 것이다. 이 중요한 차이는 근대화되는 동안 관련사회들의 태도를 끊임없이 좌우하였고, 그 안에서 근대성은 각 사회의 정체성 문제 앞에서 지속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은 자연이다. 이때 자연은 생태학적 의미의 자연인 동시에 ‘한 존재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의미의 자연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인공적인 것과 대립한다는 공통점을 지니는 한편 서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이런 시각에서 환경문제와 관련된 반근대적 이데올로기의 몇 가지 양상을 일본의 예에서 찾고자 한다. 일본은 비서구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근대화된 국가이며 오늘날 근대성을 반성하는 대열의 선두에 있기 때문이다. 고대기후학 연구로 유명한 지리학자인 야스다 요시노리는 환경파괴의 책임을 현대과학에 돌리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현대과학은 그 근본부터 악할뿐더러 기독교와 무신론, 두 개의 요소로 구성된 유럽문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쟁과 전투의 원칙에 근거한 서구과학’을 비난하고 있으며, ‘공존이라는 동양적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과학’을 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자연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일본의 영화, 정원의 자연미 등의 예에서처럼 일본 정체성의 본질적 지표가 되었다. 또한 이후 소위 일본인 성향으로 정착된 이 주제는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상태학적 의미’의 자연과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의미’의 자연이 비유적으로 동일시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이제 정체성의 욕구가 갖는 시간적 차원을 살펴보자. 시간적 차원에서는 우리와 타인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인류의 현재 상태와 예전 상태를 구분하고 있다. 모든 신화가 이런 식으로 옛날과 오늘을 구분하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재료 가운데 주목할 만한 점은 그것이 지금은 잃어버린 ‘이상적인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기독교, 중국 어디든 낙원을 나타내는 이런 재료를 지배하고 있는 주제는 ‘인류와 자연과 신들의 공생’이다. 이런 재료는 문명 이전의 상태, 다시 말해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기 이전의 상태를 상징하고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이 자궁에서 분리되기 이전 상태를 상징하는데, 개인의 차원에서는 모태이며 인류의 차원에서는 자연상태이다. 인간은 이런 자연상태를 잃어버렸지만 그에 대한 향수는 간직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원초적인 자궁으로 회귀해서 ‘대우주적인 일치’, 다시 말해 인간을 어머니처럼 감싸고 있는 ‘대자연’과 ‘인간의 본성’이 완전한 하나가 되어 다시 녹아들기를 꿈꾸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동일시의 태도로 흐르게 된다. 즉, 인간의 권리를 동물에게까지 확대하는 것, 지구를 권리를 지닌 주체로 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자연의 권리’를 말하기 시작했을 때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알다시피 윤리는 존재론적 근거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존재가 어떤 자격으로 권리, 의무, 미덕 등과 같은 윤리적 범주에 속해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라면 충분히 권리와 의무 두 개념 사이에 균형이 이뤄질 수 있지만 인류의 범위를 넘어설 때는 이 균형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자연의 권리라는 개념은 그 원리에서부터 부조리하다. 따라서 이런 개념 위에 환경의 윤리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개념이 그 부조리로 인해 선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고 악을 합리적으로 배척하는 윤리의 동기마저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재가 어떤 범주에 속해 있는지를 먼저 살피지 않고서는 행위의 선악을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악한 일이지만 아이를 막 물려고 하는 코브라를 죽이는 것은 선한 일일 수 있다. 이렇게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관련자의 존재범주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생태론에서 ‘자연의 권리’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이처럼 윤리의 첫 번째 조건인 존재범주의 문제가 혼돈에 빠지게 된다. 생태적 전체론에서 말하는 존재범주에는 인간과 다른 생물의 구분 없이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포함된다. 따라서 생태적 전체론의 중심에는 본질적인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을 비주체의 수준으로 격하시킬 것을 내포하므로 비도덕적이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격하시킴과 동시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기 때문에 비논리적이다.



제2부 에쿠멘적 관계

3. 인간의 거주지에 대한 존중

에쿠멘이란 용어는 전통적으로 ‘지구상에서 인류가 살고 있는 부분’을 뜻한다. 오늘날 인류는 에쿠멘의 영역을 지구 전체로 확장시켰고, 활발한 활동으로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높은 대기권, 혹은 그 너머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인간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인간이 지구를 온통 뒤덮고 있다는 이러한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에쿠멘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환경윤리’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에쿠멘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것은 생태계와 생물권의 차원과는 다른 것이다. 에쿠멘의 윤리는 인간 문제인 윤리와 환경 문제인 생태학을 합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쿠멘은 인간과 대지의 관계이다. 따라서 인간과 대지와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정립하려면 인간 행동에 대한 고찰(윤리)에서 출발해서도, 자연과학에서 출발해서도 안 된다. 인간과 대지와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검토하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윤리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제 에쿠멘의 본질인 풍토성을 검토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주위세계의 시공간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적 차원이 확립될 수 있는 까닭은 에쿠멘이 공간하고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시공간적인 성격까지 띠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풍토의 투과성은 시공간적이며 따라서 에쿠멘의 투과성 역시 시공간적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물체(현대과학에서 다뤄지는 물체)와는 달리 에쿠멘의 현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독특한 풍토성과 시대성이 만들어낸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결정론을 이런 현상에 적용할 때 오류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다양한 풍토에 대한 역사학적, 지리학적 연구는 우리가 지금까지 추상적으로 살펴본 원리를 확증해주고 있다. 어디에서건 실재는 반드시 풍토성과 시대성을 매개로 해서만 존재한다. 풍토성을 구성하는 매개물의 총체를 우리는 문화 혹은 문명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인간 실존의 윤리적 차원은 에쿠멘적 관계 안에 그 뿌리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또 짚어볼 것은 모든 것은 한 시대나 풍토와 관련되어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지구라는 생태적 균형을 고려하는 것도 세계현상의 하나로 20세기 시대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는 공장의 연기가 매우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상징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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