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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정치판단 이론

김선욱 지음 | 푸른숲
제1장 서론 - 우리 시대에 아렌트 읽기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나 1975년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70년이라는 짧지 않은 생을 치열하게 살다간 한나 아렌트. 나치 독일의 통치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아렌트는 실존주의와 종교적 사유에 몰입하려 했던 철학적 열망을 접으며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고민했다.

아렌트는 1924년 마부르크대학에 들어가 하이데거와 불트만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운다. 아렌트는 하이데거, 후설과 야스퍼스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3년 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저술활동과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독일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던 아렌트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석방 후 프랑스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던 파리에서 급기야 수용소에 갇히게 되나 탈출하여 남편과 함께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1941년 뉴욕으로 건너간다.

처벌받은 유대인으로, 국적 없는 파리 이주민으로, 새로운 미국 이민자로, 무국적자로 그리고 마침내 시민권자로서 20세기의 정치를 몸으로 경험한 아렌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거친 전체주의와 냉전시대에 대한 이론적 증오와 모험담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의 근거이다.

정치에 냉소적인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의 지평을 새롭게 정립하고, "인간의 복수성", "인간다움", "비판적 거리", "세계적 관찰자", "악의 평범성", "판단" 등의 개념들을 정치철학 영역에서 유행시키면서 정치적 행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각인시킨 아렌트의 사상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품위를 세워가면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아렌트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정치란 말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며, 정치가는 추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놀랍게도 다양성과 개인의 주체적 자각을 논하는 까닭에 문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 상당한 정도의 적용 가능성을 갖는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문화의 시대라는 시간적 자기 이해를 가지고 아렌트를 읽을 때 그녀의 정치사상의 독창성은 더욱 빛난다. 이는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정치에 대한 이해가 차이와 다양성을 화두로 삼고 있는 문화적 삶에 대한 이해와 문화 간의 소통에 관한 담론에 정확히 조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세계적으로 '아렌트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현상, 그리고 국내에서 점증하는 아렌트에 대한 관심을 설명해 준다.

'아렌트 르네상스'라는 말은 아렌트에 대한 지속적이고 점증적인 관심을 가리키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렌트가 학문세계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이미 최초의 정치철학적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전체주의의 기원들(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이 출간된 1951년부터였다. 아렌트 사상에 대한 연구서들도 마찬가지로 해를 거듭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그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아렌트 사상이 이처럼 지속적인 관심을 끌게 된 원인은 그녀의 사상적 독창성에 있다. 그 독창성은 우리가 어떤 정치사상을 규정할 때 사용하는 범주 어디에도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아렌트 자신도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한 학회에서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라는 질문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아렌트가 기존의 정치철학의 어느 노선을 취하여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독자적 관점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형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장 아렌트의 정치사상의 전개



『전체주의의 기원들』은 반유대주의의 연원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동시에 제국주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상론하면서 이 양자가 나치즘에서 어떻게 종합적으로 작용하고 또 전체주의로 전환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전체주의의 기원들』의 목표는 전체주의에 대한 이해이다. 현실이 그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대해 사전에 이론적인 무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대면하고 또 거기에 저항하려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이해'의 방법이고 취지이다.

전체주의의 근원으로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분석한다.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이 유대민족을 선택하였고, 신은 그들에게 수난의 운명을 부여하였다는 생각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한다. 아울러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적 경향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의 힘을 결집하려는 많은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그들에 대한 증오는 그들이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공적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였을 때 유럽에서 발생하였다. 결국 제국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부가 지녔던 정치적 중요성이 상실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유대인들은 그들의 막대한 부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을 발견하지 못한 대중들에 의해 경멸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역할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적 비극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한편 제국주의는 부르주아들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발생하였다. 부르주아의 도덕은 홉스가 설명하는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개인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몰두함으로써 갖는 정신 자세이다. 부르주아들은 국가와 사회의 갈등을 야기하고 팽창을 국가의 대외정책의 궁극 목표로 만들어 버렸다. 권력의 본래적 근원인 정치공동체는 제국주의의 경제팽창의 노력 가운데 붕괴되고, 대신 권력은 국가의 행정력과 관료조직의 작용에 의한 국가적 의지의 실현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더불어 권력과 폭력의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국가 조직에 의한 폭력적 잠재력이 무한히 집적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폭력과 권력의 무한집적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게 된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는 이와 같은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전체주의는 일반적으로 공포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기능한다. 독일의 나치즘이 만든 죽음의 수용소나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만든 시베리아 수용소는 단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 가운데 근원적인 공포를 체험하도록 하여 전체주의가 가능하도록 만든 필수적 장치였다. 전체주의 정부가 형성하는 공포는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전체주의의 목적은 인간을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에서 주어진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수동적인 집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아렌트가 지적하는 것은 전체주의가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의 모습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에서 인간은 복수성을 잃고 모두가 오직 하나의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민주적 자유는 법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에 기초하지만, 전체주의는 사회·정치적 조직체를 결성하여 개인을 그 조직의 수직적 위계질서 가운데 한 지점에 놓고 통제를 일삼았던 것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지배체제는 곧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아렌트의 예견은 동구권과 구소련의 붕괴로 그 타당성이 입증되었다. 이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옳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2차 대전의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참관하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가 아렌트를 격론의 한가운데에 몰아넣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렌트가 유대인들이 악의 화신으로 여겼던 아이히만의 '악마성'을 부정하고 오히려 그 악의 근원은 평범한 곳에 있다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모범적인 시민이었던 그가 유대인 학살을 수행한 것은, 아무런 생각없이 임하는 현대인의 평범한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범한 악은 평범한 성격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아렌트는 인간의 정신적 삶에 대한 근원적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필요에 의해 그녀는 『정신의 삶』을 기획하지만 그녀 사상의 정점이 될 '판단'에 관한 제3부는 쓰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후에 그녀의 제자 로널드 베이너가 '판단'에 관한 자료를 모아 출간한 것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이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판단이론은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이론이자 자신이 이해한 복수성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내는 정치적인 문제에 어떻게 응대할 것인가에 대한 아렌트 자신의 대답이다.

아렌트 저술의 특징은 파리아의 관점, 현상학적 방법, 그리고 이야기 글쓰기 등 세 가지를 든다. 아렌트 연구의 주인공인 유대인 여성 라헬 파른하겐은 독일 사회의 핵심에 서지 못하고 항상 주위에 떠돌아야 했던 파리아(pariah : 주변인)의 지위를 넘어서 파브뉴(parvenu : 벼락부자)가 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교계의 핵심인물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라헬은 파브뉴로서의 심리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이 유대인 여성이라는 입장을 근본적으로 자각하고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며, 이러한 변화를 아렌트도 스스로 체험하게 된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주변인의 운명을 경험하며 자신의 실존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관점에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자각한 파리아"의 관점이라고 한다.

아렌트의 현상학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차이에 반응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사변적 구성에 의존하지 않고 주어진 현상들로 범위를 제한하여 사유를 집중하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이 같은 방법에 대해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나는 일종의 현상학자이다."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하이데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그녀의 현상학적 방법은 타인이 보기에 '자의적'이라고 할 만큼 자유로운 취사선택을 통해 과거를 이용하고 있다. 이는 과거를 설명하는 개념들을 문헌학·어원학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정치적 경험의 핵심을 포착하는 데 아렌트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진주를 캐내어 보이는 작업이나 이를 현대화하여 미래의 행위를 위해 도움이 되도록 제시하는 방법으로 아렌트는 '이야기' 글쓰기의 방법을 사용한다. 전적으로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논리전개는 과거로부터 건져온 진주를 꺼내놓은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경험의 결정체를 미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이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를 그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끄집어내야 한다. 이야기 글쓰기는 이러한 목적의 글쓰기 방식인 것이다.

제3장 '인간의 조건'과 정치 개념



아렌트가 새로운 정치이론을 제시했다고 할 때, 그 핵심에는 항상 아렌트가 현상학적 방법으로 드러낸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의 본질인 '정치적인 것'이 자율적으로 존립하는지를 해명하는 일, 즉 정치의 자율성을 구명하는 작업이 그녀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아렌트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엄격히 분리하고, '정치적인 것'이 다른 여타의 것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아렌트가 주장하는 정치의 자율성에 대한 근거는 먼저 '인간학적' 해명방식에 의하면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정치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현상이고, 둘째, 인간의 복수성, 즉 인간은 모두 다르다고 하는 사실이 정치의 존재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의 논거인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사실도 정치가 가능한 인간적 조건으로 설명된다. 네 번째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정치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활동을 행위론적 분석을 통해 구명하는데 이는 『인간의 조건』의 인간학적 근거가 된다. 끝으로 다섯 번째는 인간관계망이 정치영역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든다.

그런데 이 다섯 논거들이 인간적 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서 정치가 자율적이라는 주장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자율성은 이상의 논거 가운데 행위론적 분석과 연관하여, 정치 행위가 다른 인간활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 구명될 때 비로소 주장될 수 있다. 아렌트는 노동과 정치행위의 질적 차이를 주장하면서 정치행위는 노동활동의 연장이 아니며,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으로 아렌트는 역사적·이론적 분석을 통해 '정치적인 것'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한 현대인들이 어떤 이유에서 정치적인 것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분석되는 개념은 사적/공적, 사회적/정치적이라는 개념 쌍들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사적/공적 개념에 대하여 설명할 때 아렌트는 칸트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그가 사용했던 개념과 다르지 않다. 칸트와 아렌트 모두에게 있어서 '공적'이란 타인의 현존 가운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 소통할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사적'이란 자유로운 소통과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정치적인 것이란 차이와 개성을 인정하고 다양성과 특수성을 중심으로 개체를 있는 그대로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의 절대적 기준을 거부함으로써 대화와 소통의 필요성, 또는 정치적 행위와 정치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렌트의 역사적·이론적 설명의 목적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방식이 지향하는 것은 정치의 자율성을 입증하는 데 있다. 정치의 자율성은 정치영역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행위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정치적 공간(공적 영역, 세계)의 존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공간이 있는 곳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공동의 관심사를 합의에 의해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제4장 정치에서의 진리, 진실, 그리고 사실



정치와 진리의 관계는 플라톤 이래로 정치철학의 전통에서 끊임없이 연구되어온 과제이다. 정치는 자유로운 공간이며 인간의 복수성이 확보되고 진작되어야 할 장이다. 그러나 진리는 불변의 것이며 이러한 불변성은 자유와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 정치는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철학은 마치 둥근 사각형이란 말처럼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정치의 본질과 진리 추구의 본래적 성격이 서로 상충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개념적으로 볼 때 진리란 말은 대단히 다의적인 개념이다.

정치와 진리의 관계를 다룬 논문 「진리와 정치」를 아렌트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구절로 끝맺는다. "우리가 변경할 수 없는 것을 개념적으로 우리는 진리라고 부를 수 있다. 은유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서 있는 땅이고 우리 위로 펼쳐져 있는 하늘이다." 이 비유를 풀어서 넬슨은 "정치 영역은 순전한 경험적 사실의 땅 위에, 그리고 개념적 진리의 하늘 아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정치영역에서 진리주장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는 세 가지 문제가 놓여 있다.

첫째는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또는 초월적 직관의 필연성에 바탕을 둔 진리주장이 아니라 보다 소박한 의미에서 옮음에 대한 주장, 즉 사실의 확인이나 간단한 논증의 차원에서의 타당성 주장에 대해서도 거부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간의 평등함, 인간의 존엄성 등과 같은 주장이라든지 "인간은 고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명제는 정치영역에서도 확고한 진리로서 간주되어질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주장이 제기하는 문제이다. 이와 연관된 것으로 셋째의 문제는, 비록 "영원한 진리의 빛 아래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정치영역에서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다수의 선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사실 확인이나 간단한 논증의 차원에서의 타당성 주장과 같은 진리주장에 대해 아렌트는 이를 정치적 논의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논의대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인 문제란 분명한 기준이나 준거가 있어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명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반면, 정치적 문제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말한다. 두 번째 문제는 그러한 주장이 갖는 자명성에 대한 검증을 통해 대답이 가능하다. 끝으로 세 번째 문제는 정치에는 과연 목적이 있는가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아렌트는 정치가 어떤 수단적 가치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정치란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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