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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지음 | 푸른숲
서문



아렌트의 사상과 판단이론 - 칸트 『판단력 비판』의 정치철학적 재구성




아렌트에게 단숨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책은 『전체주의 기원들』(1951년)이다. 전체주의는 정치영역의 파괴를 바탕으로 성립한다. 아렌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전례 없는 현상인 전체주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전체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용서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만든 세계와 화해함으로써 그 속에서 전체주의와 투쟁할 수 있는 참된 길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을 끝낸 뒤 아렌트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서를 준비하여 『인간의 조건』(1958년)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것들 간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활동을 행위에 한정하는 현상학적 분석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노동을 중심으로 정치에 접근하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정치 영역의 존립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입론을 풍부한 자료와 통찰력으로 입증한다. 판단 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고민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어 『과거와 미래 사이』(1968년)에 수록된 논문들 속에서 언급된다. 전체주의는 전례가 없는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나 사고의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가 없는데 어떻게 길이를 잴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칸트의 반성적 판단 개념의 도움을 받아 전개된 판단이론을 통해 설명된다. 1960년부터 벌어진 아이히만 재판은 아렌트에게 또 다른 문제의식을 제공한다. 「뉴요커」 통신원으로 재판을 참관한 후 발표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1963년, 1965년)에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학살의 책임자에게서 발견한 악이 평범한 것이란 분석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직도 윤리학적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이 경험은 아렌트를 인간의 정신에 대한 새로운 연구로 이끌게 된다. 아렌트의 연구는 아이히만에게서 보여진 평범한 악, 즉 무사유(toughtlessness)가 어떻게 가능하며, 도대체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인간의 정신능력 분석으로 이어졌다. 이 연구는 『정신의 삶(The Life of Mind)』이라는 제목 하에 사유(thinking)와 의지(willing), 그리고 '판단(judging)'의 세 부분으로 계획되었다. 처음 두 부분을 완성한 뒤 아렌트는 심근경색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판단에 관한 것이라고는 타자기로 찍혀진 '판단'이라는 제목과 머리 인용문뿐이었다. 그러나 아렌트의 제자인 로널드 베이너는 칸트 정치철학에 대한 아렌트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칸트 정치철학 강의』(1982년)를 내놓는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가 아렌트 정치사상의 정점에 해당된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초기의 글들에서 형성된 문제 관심인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처방을 제시하는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정치 개념의 핵심에는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한 개인들이 함께 모여 정치 공간을 마련하고 여기서 언어를 사용하는 가운데 의사 합일을 이루어 나가고, 합의된 생각을 바탕으로 '공동의 행위(action-in-concert)'를 이룩하는 것을 정치의 원초적 모습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정치 개념은 이전의 정치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 사상가는 다양성의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진리·주장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기존의 정치철학사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의 결과인 것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실천이성의 원리에 기초한 정치철학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칸트의 판단력 개념에서 진주와 같은 것을 발견한다. 개별적인 것, 다양성을 보편적 원리로 환원하거나 그의 적용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개별자를 개별자 자체로서 다루는 것으로 칸트의 판단력 개념을 발견한 것이다. 나아가 칸트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의 본래의 정치철학은 실천이성이 아니라 판단력에 근거했던 것임을 이 강의의 전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아렌트의 초기 분석적 작업을 넘어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지침은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명백하게 나눈다. 해야 할 것이란 '세계적 관찰자'의 시각을 갖는 것이며, 해서는 안 될 것이란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시야가 가려지는 일이다.

1부 아렌트의 텍스트



칸트 정치철학 강의 - 첫 번째 강의




칸트의 정치철학에 대해 논구하는 데는 그 자체의 난점이 있다.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칸트는 정치철학에 대해 쓰지 않았다. 법의 개념은 인간을 입법적 존재로 이해하는 칸트의 실천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많은 논문들이 역사와 관계된 것이어서 마치 칸트가 그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철학을 역사철학으로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칸트의 역사 개념이 비록 그 자체로서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철학의 핵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과거사에 대해서는 결코 관심이 없었다. 그의 흥미를 끈 것은 종으로서의 인간의 미래이다. 18세기의 주도적 개념인 진보는 칸트에게는 오히려 우울한 개념이다. 그는 이 개념이 개인의 삶에 대해 명백히 가지고 있는 슬픈 함축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번 학기 강의에서 내 자신의 의견을 미리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만일 칸트의 작품을 잘 알고, 그의 전기(傳記)적 상황을 고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칸트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을 세계에 속한 인간의 한 조건이자 멍에로서 의식하였으나 이를 의식하게 된 때는 그의 말년이었다는 것과 이때는 그가 이러한 특정문제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형성할 힘과 시간을 더 이상 갖지 못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인생이 짧아서 『제4비판서』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3비판, 즉 『판단력 비판』이 칸트의 위대한 저작들 가운데 다른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바로 그 저술이 되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1770년에 있었던) 인간 정신의 인식기능과 그의 한계에 대한 발견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이 발견을 잘 다듬어서 『순수이성 비판』으로 출간하는 데 10년 이상 걸렸다. 1770년의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그는 『도덕 형이상학』을 써서 곧 출간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책이 『도덕적 취미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예고되었다. 18세기 전체에 걸쳐 선호된 '취미'라는 주제의 배후에서 칸트는 전적으로 인간의 새로운 기능, 즉 판단력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이 새로운 기능의 능력으로부터 도덕 명제를 배제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취미나 판단력이 아니라 이성으로만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 다섯 번째 강의



나는 인간사의 영역에 대한 철학자로서의 칸트의 태도가 다른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의 태도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지적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잠시 이 주요 문제, 즉 지상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그대로의 인생 자체에 대한 철학자들의 태도를 살펴보자. 플라톤에게 참된 인식은 감각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정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칸트의 입장이 아니다. 그의 이론철학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감각과 오성의 상호작용과 협동에 의존하는데 그의 『순수이성 비판』이 감각에 대한 예찬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그에 대한 정당화라고 평가된 것은 적절하다. 그는 육체와 감각이 오류와 악의 주요 근원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칸트는 플라톤에 반대하여 철학자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철학자의 말을 기꺼이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철학적 생활방식이 가장 고차적이며, 정치적 생활방식은 결국 관조적 삶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위계질서의 철폐는 모든 위계질서 구조의 철폐를 의미하는데, 이와 더불어 정치와 철학 사이에 존재하던 오랜 긴장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 결과 정치철학을 써야할 필요가 더 이상 철학자들의 긴급한 과업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칸트에게 정치철학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정치철학을 쓰지는 않았다는 내 생각이 옳다면, 일반적으로 정치철학이라는 제목으로 편집한 논문들 속에서 우리가 그 정치철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저작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임이 명백해 보인다.

오늘날 누구에게도 놀랄 만한 것이 아니면서 아직 연구대상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칸트 이전이나 이후에 사르트르를 제외하고는 "비판"이라는 제목이 붙은 유명한 철학적 저술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정신을 사용하여 칸트는 "이성의 추문", 즉 우리가 길을 잃게 되는 것은 전통과 권위 때문만이 아니라 이성의 기능 자체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비판"은 "이성의 근원과 한계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비판은 그 자체로서 모든 다른 철학적 체계들에 대한 평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비판이란 단어는 한편으로는 독단적 형이상학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에 이중적으로 대립한다. 비판은 그 자체로서 새로운 사고방식인 것이지, 새로운 학설을 위한 단순한 준비는 아니다. 칸트에 다르면 비판과 계몽의 시대 - 인간이 성년이 된 시대 - 에 철학 자체가 비판적으로 되었다. 비판적 사고가 독단론(dogmatism)과 회의주의(skepticism)의 중간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은 큰 오류가 될 것이다. 비판적 사고는 사실상 이러한 선택을 물리쳐버리는 길이다. 비판적 입장은 이 두 관점에 반대하며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주장을 한다. "비록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과정을 규제하는 진리에 대한 견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마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절대적 진리를 가질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한편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인간의 기능과 같은 것을 탐구할 수는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또 무엇을 알 수 없는지에 대해 한번 분석해 봅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을 가지게 된 이유이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 아홉 번째 강의



이제 우리는 전쟁의 문제에 관한 칸트의 입장을 다룰 것이다. 그런데 혁명의 문제에 관한 그의 공감은 명백히 평화와 연관되어 있다. 『영구 평화론』에서 "이성은 최고의 도덕적 입법기관의 권좌에서 합법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절대적으로 경멸했으며, 비록 평화가 국가 간의 조약에 의하지 않고서는 성립되거나 유지될 수 없기는 하지만 평화 상태를 직접적인 의무로 삼고 있다."라고 하였다. 평화는 어떠한가? 평화란 죽음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정체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칸트는 인류의 행적과 역사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일어난 전쟁에 대한 그의 의견을 한 차례 이상 진술했지만 『판단력 비판』보다 더 인상적으로 진술한 곳은 없다. 그는 이 주제를 숭고에 대한 절에서 아주 특징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전쟁 자체는 숭고한 어떤 것을 그 안에 갖고 있다. 한편 오랜 평화는 일반적으로 상업적 정신을 우세하게 만들어내고, 그와 더불어 저급한 이기심, 비겁함, 그리고 유약함을 낳게 되며 사람들의 기질을 저급하게 만든다." 칸트가 "진보"와 문명과 연관하여 '전쟁은 어떤 유익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때 칸트의 대답은 분명하다. "전쟁이 인류를 찾아올 때 가져오는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평화시에 전쟁을 끊임없이 준비함으로써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더욱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여전히 문화에 기여하도록 모든 재능을 최고조로 발전시키는 동기가 된다." 간단히 말해 전쟁은 "전제군주제의 무기력처럼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민족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갈등과 마찬가지로 진보의 추진력이다. 이러한 미학적이고 반성적인 판단의 통찰은 행위를 위한 실천적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다. 칸트의 전쟁에 대한 평가에서 전쟁은 진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전쟁은 평화를 향한 진보를 초래하기도 한다. 전쟁은 너무나 끔찍한 것인데, 전쟁이 끔찍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합리적이 되어 결국에는 평화를 이끌어낼 국제 조약을 체결하려고 더욱 힘쓸 것이다. 그런데 칸트에서 그것은 진보이며, 인간의 배후에서 이루어지는 계획이고, 자연의 책략이며, 또한 나중에 역사의 책략이라고 부른 것이다.

모든 칸트 철학의 용어는 법적 비유와 유사하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등장하는 이성의 법정이다. 칸트로 인해 이런 오랜 관념에 하나의 새로운 관념이 더해졌다. 이는 사람들이 판단할 때 의존하는 기준이 되는 진보의 관념이다. 그는 실제로 개별 사건, 특정 행동에 관심을 가졌다. 칸트에게서 이야기나 사건의 중요성은 그 종국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존재한다. 칸트에게는 세계사의 주체는 인류 자신이다.(헤겔에 따르면 역사에는 종말이 있다.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절대정신이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진보는 항구적이다. 거기에는 결코 종말이 없다. 역사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내장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결정될 수 없다. 그리고 '왜 인간은 존재하는가'라는 칸트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질문은 대답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철학의 중심에는 개인이 존재하고, 역사철학(또는 그의 자연철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존립한다. (그러므로 일반적 관점에서의 역사가 있다.) 일반적 시각 또는 관점은 "세계시민", 또는 오히려 "세계관찰자"라고 할 수 있는 관찰자에 의해 점유된다. 그가 바로 전체에 대한 관념을 가짐으로써 어떤 단일한 특정 사건 속에서 진보가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자이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 열세 번째 강의



이제 아주 특별한 칸트적 의미에서의 상식(common sense)에 대한 우리의 토론을 정리해 보자.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사적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공통감(sensus communis)이다. 이 공통감은 판단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호소 때문에 판단은 특별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일단 반성에 의해 변형되어서 다른 모든 사람과 그들의 감정을 고려하게 될 때 소통을 위해 열리게 된다.

『판단력 비판』 41절 - 미에 대한 경험적 관심에 대하여



"확장된 심성"이 바른 판단의 필수조건임을 보았다. 사람의 공동체 감각이 자신의 심성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상상력과 반성력은 우리로 하여금 사적 조건들로부터 우리 자신이 해방될 수 있게 하여, 판단의 특수한 덕목인 상대적 불편부당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 소통 가능성이 시금석이 된다. 칸트에게서 불편부당성은 "무관심성"이라고 불려지는데, 이는 미에 대한 무관심적 기쁨을 의미한다. 41절에서 "미에 대한 관심"이 언급될 때, 이는 실제로는 무관심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이다. 여기서 관심이란 유용성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자기관심 없이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리고 이 관심의 고유한 특성은 그것이 "단지 사회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이다.

그의 논문 「인간 역사의 추정적 기원」에서 칸트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목적은 사교성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칸트는 판단의 기능이 타인의 현존을 전제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정신의 기능은 우리가 용어상으로 부르는 판단력만이 아니다. "감정과 정서"가 일반적으로 소통되는 한에서만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견해이다. 『판단력 비판』은 별 어려움 없이 영원한 평화 가운데 살고 있는 통합된 인류에 관한 칸트의 숙고와 이어진다. 칸트가 전쟁의 제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상한 종류의 평화주의자가 된 것은 충돌의 제거나 전쟁의 잔인성, 유혈사태, 잔혹성 등의 제거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확장된 심성이 가능한 최대한 확장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다.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모든 개인 속에 현존하는 인류의 이념에 의해서이며, 인간이 문명화되었다거나 인간적으로 되었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이 이념이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판단의 원리가 된 정도에 따른다. 행위자와 관찰자가 연합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원초적 계약이 일반적 법칙으로 실현될 수 있는 한에서의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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