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바실리 칸딘스키 지음 | -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
러시아 출신의 독일 표현주의 화가.
표현주의는 내면적 정신의 필연적인 울림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정립했다.
법학도에서 활동적인 화가로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처음에 법대를 다녔다. 그러면서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인상주의의 그림들을 보았다. 그림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1896년 그가 법학 및 정치학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그 해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뮌헨으로 가 안톤 아츠베의 개인 미술학교를 거쳐 아카데미에 들어가 프란츠 폰 스툭의 지도를 받았다.여기서 그는 폴 클레(Paul Klee)와 같이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학생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젊은 동료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통찰을 열심히 들려주곤 했다. 그는 다재다능했다. 예술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예술에 관련된 이론서들을 출판하고, 전시회를 조직하고, 유럽 전체에 퍼져 있는 화가, 문인, 작곡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고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했다. 20세기에 막 들어서면서 칸딘스키는 ‘팔랑스(Phalanx)’ 화파를 창립했다. 이는 나중에 1909년에 뮌헨의 ‘신예술가협회(the New Artists’ Association)‘로 발전했다. 그리고 1911년 이 협회가 깨진 뒤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독일 표현주의의 기초가 되는 ‘청기사’(靑騎士: Blue Rider)파를 만들었다. 그의 주저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1910년에 완성됐다. 또 다른 저작인 《점․선․면》은 1926년에 출간됐다. 칸딘스키의 회화 스타일도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했다. 인상주의, 상징주의, 아르 누보 및 민속 장식 예술을 거쳐 마침내 순수 추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표현주의 계열의 추상화 길 열어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혁명이 끝난 고국에서 그는 문화 사업에 열의를 보이면서 러시아 박물관을 재설립하는 데 열중했다. 그의 회화 작업은 혁명적인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속한 것으로 평가받았고,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 모스크바 미술문화 박물관 관장, 모스크바 대학 교수 등을 거친다. 그리고 그의 나이 55세인 1921년에 러시아 예술원을 창립한다. 칸딘스키가 현대 미술사에 끼친 영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 추상화의 길을 작품뿐 아니라 이론으로까지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가 추상화의 또다른 길을 마련했다면, 표현주의 계열에서 추상화의 길을 연 사람이 칸딘스키다. 표현주의란 그가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보여줬듯 내면적 정신의 필연적인 울림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프란츠 마르크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그와 함께 칸딘스키는 프랑스의 탁월한 색채주의자인 들로네에게서 색채와 구조의 조화를 발견했다. 칸딘스키는 들로네를 세잔의 직접적인 후계자로 생각했다.마르크와 함께 뮌헨의 ‘신예술가협회’를 탈퇴한 칸딘스키는 《청기사 연감》을 통해 문명화된 미술뿐 아니라 인간의 희망과 공포의 전달 수단으로서 종교 미술까지 예술에 포함시켰다. 더 나아가 독일 작품뿐 아니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로부터의 새로운 미술, 즉 새로운 표현 수단을 통해 인간성의 내적 본질을 전달하는 모든 작품들을 포괄해 다뤘다. 칸딘스키의 생각은 특히 당시의 이념이나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의 종교적 배경인 러시아 정교는 그에게 신비적 성향을 띠게 했다. 파리 생활을 통해 그는 베르그송 철학을 포함한 그곳의 다양한 창조적 영향을 흡수했다. 그는 신지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뮌헨에서는 슈타이너의 강의에도 참여했다. 그는 과학과 기술 발달에 도전해, 미래주의자나 구성주의자들이 선택했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그는 물질 세계를 거부했다. 아니, 적어도 예술을 정신 세계에 위탁함으로써, 이 세상이 물질적 진보를 지나치게 강조해 생긴 불균형을 바로잡고자 했다.
인간의 정신을 인식케 하는 미술
칸딘스키는 미술의 시각적 내용을 인간의 내면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짓고자 하였다. 추상이 그의 작품의 본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회화적 방식을 예술가의 감정적 또는 정신적 충동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었다. 물질 사회에서의 그릇된 가치를 강조하는 대신, 그의 예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었다.이처럼 정신세계를 강조하면서 구축한 칸딘스키의 회화이론은 색채와 형태와 구도에 집중됐다. 개별적인 색채와 형태는 그 자체로 고유한 정신적 울림을 갖는다는 것이었고, 그런 울림들이 조화로운 구도 속에서 전체적인 정신적 울림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한 원칙이 어떤 것인가를 자세하게 분석함으로써 추상화가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상 회화보다 훨씬 더 깊은 예술적 감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널리 인식시켰다.그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응용미술 운동의 본산 바우하우스의 벽화를 담당하는 교수가 됐다. 여기서 그는 이전의 유기적 형태들을 차츰 버리고 견고하고 기하학적이고 엄밀한 구성을 추구했다. 미적인 원리와 미술의 기능성을 동시에 강조한 바우하우스의 기풍은 그의 그림에서 추상적 형식으로 변형돼 나타났다.늘 새로운 것, 그리고 물질적인 것 저편에 놓여 있던 세계를 추구했던 칸딘스키는 1944년 78세로 프랑스 뉠리-쉬르-세느에서 사망했다. 이 책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예술, 특히 회화가 어떻게 인간의 정신적인 내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 책이다. 예술이 그저 장난은 아닐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서 그런가를 알려주고, 예술가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예술 작업을 하더라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기초적인 원리들을 담고 있다. 직접 예술 작업을 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에 대한 감식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의 내용 구성
1. 서론
진정한 예술은 무엇인가
2. 운동
예술은 적절한 자기 고유의 수단을 갖는다.
3. 정신적 전환
위대한 예술은 어디에서 탄생되는가?
4. 피라미드
모든 장르의 뛰어난 예술가는 정신적인 피라밋을 공동으로 구축한다.
5. 색채의 작용
색은 어떻게 정신적 동요(動搖)를 만들어 내는가?
6. 형태 언어와 색채 언어
색채와 형태가 만들어 내는 울림에 대하여
7. 이론
무한한 자유 속에서의 필연적인 예술 원칙
8. 예술 작품과 예술가
참된 예술 작품은 무엇에서 성립되는가
9. 결론
자기 작품을 구성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예술은 시대의 산물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의 작업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힘이나 운동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산물인 측면이 있지만 보편적 내용을 지닌 것이다. 예술의 본령은 ‘어떻게’라는 방법에 있지 않고, ‘무엇’이라는 내용에 있다. 이 ‘무엇’을 먼저 형성하지 않으면 그 어떤 예술도 진정한 것일 수 없다. 시대를 삼각형으로 본다면, 이런 예술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 삼각형의 꼭대기에 존재한다. 삼각형의 넓은 밑변에는 대중들이 있고, 꼭대기와 밑변의 사이에는 어중이떠중이 뭇예술가들이 포진해 있다. 이제 이 예술 상황의 삼각형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 전선에는 정신의 내면적인 필연성과 싸우는 예술가들이 경멸과 혐오 가운데서 싸우고 있다. 무한한 예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그들의 싸움은 미술의 경우, 색채와 형태 그리고 구성이 그 자체로 어떤 내면적 울림을 갖고 있으며, 그 내면적 울림들을 어떻게 잘 조직해 낼 것인가를 두고 이뤄진다. 진정한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자기 내면의 울림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색깔은 피아노의 건반이요, 눈은 피아노 줄을 때리는 망치요, 심성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심성에 진동을 일으키기 위해 합목적적으로 건반을 두드려 연주하는 손과 같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읽기
1. 서론
시대를 거치면서 생겨난 예술 형식들은 기본적인 필연성에 기초를 두는 일종의 외적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순수한 예술가들은 이러한 외적 유사성을 외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들을 내적으로 파고 들어 본질적인 유사성을 찾아내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미래에 대한 씨를 간직한다. 슈만은 “인간의 마음 속 어둔 곳에 불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전시회의 그림을 보면서 ‘훌륭하군’, ‘흥미롭군’ 한다. 뭔가 말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도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이처럼 색채의 생명을 이루는 내적 음향을 없애버리는 것, 예술가의 힘을 없애버리는 것이 곧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이 예술은 물질주의 예술과 상통한다. 예술가가 야망과 탐욕을 만족시키려 하고, 재물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그에 따라 예술의 과잉 경쟁과 과잉 생산 속에 증오, 당파, 파벌, 질투, 음모가 난무한다. 시대의 아들인 예술은 시대가 지나가면 함께 사라져 버린다. 당대의 정신을 반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신을 반영할 뿐 아니라 당대의 정신을 넘어서는 인식운동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예술가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자칫 경멸을 당하거나 혐오를 받으면서도, 인간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전진시키고 상승시킨다.
2.운동
정신적 생활은 예각 삼각형으로서, 세 변이 일정치 않으며, 그 중에 가장 좁은 각이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밑으로 내려올수록 폭과 깊이와 면적은 점점 더 커진다. 때때로 가장 높은 정점에 한 사람만이 외롭게 서 있다. 그에게 기쁨에 찬 ‘봄(vision)’은 내적인 슬픔의 척도다. 그에게 가장 가깝게 서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삼각형의 아래 넓은 변에 있는 일반 대중이 위대한 예술가가 서 있는 정점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가. 대중들에게 갈채를 받는 예술가들은 그들과 가까운 변에 포진하고 있다. 정점에 서 있는 예술가에게 정신적인 ‘빵’은 자양분도 되지만 독약이 되기도 한다.오늘날 천연 그대로의 생소재(生素材)에서 예술의 내용을 구하는 물질주의적 예술 시대는 곧 칠흑의 어둔 밤과 같다. 그들은 정제(精製)된 소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무엇’을 표현했느냐는 문제는 없어지고, ‘어떻게’ 표현했느냐는 문제만 남는다. 말하자면 동일한 물질적 대상이 어떻게 예술가에 의해 재현되는가 하는 방법만이 ‘신조’가 될 뿐이다. 예술은 그 정신을 잃고 있다. 모든 ‘예술센터’에는 수천 명의 이런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가슴은 차갑고 정신은 잠에 취한 채 아무런 흥미도 없이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오로지 새로운 매너리즘만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예술가의 감정적 힘이 이 ‘어떻게’를 압도할 수 있다면, 예술가는 자기가 잃어버린 ‘무엇’ 즉, 예술을 위한 정신적인 빵을 갖는 문턱에 이미 들어선 것이다. 이 ‘무엇’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없고, 또 침체한 시대의 객관적인 ‘무엇’도 이미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실체요, 정신이다. 이 ‘무엇’은 예술만이 포괄할 수 있는 실체, 예술만이 자기 고유의 수단을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실체인 것이다.
3. 정신적 전환
정신적인 삼각형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인다. 정신적 삼각형의 정점 근처에는 은폐된 불안과 신경과민, 불안정 같은 것이 잠적해 있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이같은 불안과 불안정이 더욱더 분명하게 예각으로 나타난다. 미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정신은 감정에 의해 알 수 있고, 예술가의 재능은 이 감정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삼각형의 정점에 다가가면 혼란된 정신적 도시가 나타난다. 이 도시에는 정신적인 건축가나 수학자들도 짐작하지 못한 갑작스럽고 불가항력적인 힘이 작용한다. 그러나 ‘불멸의’ 정신적 기둥으로 세워진 탑이 폐허 속에 있다.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태양에 점들이 나타나 점점 커지면서 햇빛은 점점 어두워진다. 무슨 힘이 그 어둠 뒤에 숨어 있을까. 과학이 비물질 또는 우리 감각이 접근하기 어려운 물질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다룰 때, 과학의 방법은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과 같이 흔히 우리가 ‘야만’적이라고 경멸하는 민족들에게 이런 방법이 남아 있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산 블라바츠키(1831~1891) 여사가 주창하는 ‘신지학(神智學)’은 위대한 정신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정신적 환경에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구원의 종소리요, 길을 가리키는 손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바깥 쪽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이다. 문학 영역에서는 메테를링크(1862~1949)는 환상적이고 초감각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가 펼치는 문학 세계에는 정신적인 어둠, 무지에 대한 불안과 공포 등이 깔려 있다. 그는 물질적인 수단(음침한 산, 달밤, 늪, 바람, 올빼미의 울음)에 상징적 역할을 부여하고, 그것들 스스로 내면적인 소리를 내게 한다. 그에게서 언어는 내면의 소리였던 것이다.시적인 단어를 내적인 필요성에 따라 여러 번 반복하면, 많은 상징적인 의미들이 사라질 수 있지만 순수한 음향만은 남는다. 순수한 음은 표면으로 나와서 심성에 직접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 심성은 대상 없는 진동을 얻는데, 그 자체는 초감각적인 것이다. 보통 쓰이는 말도 메테를링크가 사용하면 어둠침침하게 변한다. ‘머리카락’과 같은 단순하고 친숙한 단어도 일정하게 감각된 방식으로 사용돼 슬픔이나 절망의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이것이 메테를링크의 방법이다. 바그너(1831~1883)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일종의 정신적 분위기를 만드는 음악적인 모티프를 통해 음악극 전체가 정신적인 인격을 얻게 된다. 드뷔시(1862~1918)는 가장 현대적으로 정신적 인상을 창조해 낸다. 그는 사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현상이 지닌 내적 가치를 이용해 자기 예술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쇤베르그(1874~1951)는 관습적인 미를 완전히 포기하고, 열광하는 몇 사람에게만 인정받을 뿐 외로운 길을 걷는다. 그는 “오늘날 나는 이런저런 불협화음을 쓸 수 있게 하는 일정한 규칙과 조건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에서의 무제한 자유는 있을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항상 척도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다만 그 척도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기에 미래의 예술이 가능한 것이다. 회화에서 ‘외적인 것’을 통해 ‘내적인 것’을 추구한 사람들로는 로제티(1828~1882), 뵈클린(1827~1901), 세간티니(1858~189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가시적인 물질적 형태를 사용하면서도 언제나 추상적 형상들을 창조해 낼 줄 알았다. 또 다른 방향에서, 형태의 새로운 법칙을 추구한 화가는 세잔(1839~1906)이다. 그는 찻잔을 생명있는 물체로 만들 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찻잔에서 하나의 존재를 인식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가 모든 사물에서 내적인 생명을 간취해내는 천부의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인데, 그가 색을 칠하는 것은 바로 내적인 회화 악보다. 사람, 나무, 사과 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하는 내적인, 회화적인 사물을 구성하기 위해 오히려 그것들을 사용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