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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헤로도토스 지음 | -
역 사 ?στορα



헤로도토스 (B.C. 484~425?)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년~425년?)에 관해서는 사실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대강 알려진 것으로 헤로도토스는 이오니아 지방과 인접해 있는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 명문가에서 태어나 나중에 당쟁에 휘말려 망명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여행을 많이 했는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긴 여행을 하고, 이를 통해 세계적인 넓은 시야를 갖게 됐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10세기 경에 출간된 《스다》 사전에는 비교적 구체적인 사실들이 언급돼 있다. 그에 따르면 헤로도토스의 아버지는 릭세스, 어머니는 도리오였으며 테오도로스라는 형제와 당시 유명한 서사시인이었던 파니앗시스를 종형제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 출생지인 할리카르나소스는 카리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지로 기원전 10세기 경에 그리스 본토인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아르고리스 지방의 옛 도시 트로이센으로부터 온 이주민이 건설했다. 생년월일 역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90년에서 480년 사이라는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비극작가였던 에우리피데스와 거의 동년배인 셈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의 지도자는 여왕이었던 아르테미시아 1세였다. 그후 그의 아들(혹은 손자)인 리그다미스가 독재를 일삼아 반란이 일어났고, 헤로도토스는 거기에 연루돼 사모스 섬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종형제로 전해지는(다른 곳에서는 숙부라고 하기도 한다) 파니앗시스가 이때 목숨을 잃었다. 첫 번째 시도는 좌절됐지만, 다시 일어난 반란으로 리그다미스의 독재가 끝나고 민주정이 시작됐다. 기원전 454년 초에 할리카르나소스가 델로스 동맹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난 것은 그 즈음으로 추정된다. 오랜 망명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헤로도토스는 곧 여행을 시작한다. 그 기간 등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의 10여 년간 근방을 비롯, 굉장히 넓은 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전해진다.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방랑했고, 이집트로 가서 남쪽의 엘레판티네(아스완)까지 내려갔으며, 리비아, 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란 왕국의 수사, 리디아 및 프리지아도 방문했다. 또한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비잔티움까지 올라갔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가서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너머까지, 동쪽으로는 흑해의 북해안을 따라 스키티아까지 여행했으며, 돈 강 유역을 지나 좀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그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페리클레스 통치기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그는 많은 문화 및 정계 인사들과 친분을 나눴다. 특히 유명한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와 친밀했으며 《역사》에 보이는 문학적 소양 역시 아테네의 문화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44년경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남부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 투리로 떠난다. 기원전 6세기 말에 멸망한 고도(古都) 시발리스의 유적지에 새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일이었는데, 당시 아테네의 통치자였던 페리클레스의 발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역사》에 언급된 마지막 사건은 기원전 430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후 언제 어디서 그가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에서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31년부터 몇 년 동안은 아테네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사실로 그의 사망시기를 기원전 430년 이후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역사》 이야기

헤로도토스의 고향 할리카르나소스는 카리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지였다. 아버지의 이름이 카리아계고, 어머니의 이름이 그리스계인 걸로 봐서 그는 혼혈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고향은 도리스계였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 이미 이오니아어로 쓰인 비문이 발견될 정도로 북방이었던 이오니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여러 민족과 문화가 혼합된 지역에서 자란 헤로도토스가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이오니아는 인류사상 처음으로 과학적인 관찰 및 사고방식을 창출해낸 이오니아의 영향을 받았으니 더 말할 나위없다. 헤로도토스는 본토 그리스인의 고집스런 중화사상도 없었고, 평생 이민족과 접촉하고 여행을 즐겨 편견없이 자유롭게 사고했다.이런 배경은 그의 저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페르시아인을 비롯, 바빌론, 이집트, 스키타이인의 관습을 기술할 때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고 있다. 고대에 창작된 최초의 위대한 이야기체 역사서인 《역사 Historiae》(《페르시아 전쟁사》라고도 함)의 서두에서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각별히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밝히기 위해 ‘탐구의 결과를 발표(στορη? ?πδεξι?, 히스토리에스 아포덱시스)’한다”(I.1) 하지만 소위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하겠다고 하면서도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동방의 여러 민족의 역사나 민속, 지리 따위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동방의 역사를 다뤘던 헤카타이오스 같은 로고그라포이(산문작가, 서사시 작가 에포포이오스)과 비슷하지만 산문작가들을 최초의 역사가라고 말하지 않고 헤로도토스를 최초의 역사가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헤로도토스 저작의 가치가 있다. 산문작가들은 듣거나 읽어서 알게 된 동방 여러 나라의 역사를 그들의 책 속에 기록했지만, 그것은 비판정신을 가지고 진위의 여부를 따져 진짜로 일어났다고 판단되는 것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산문작가들은 동방역사를 그리스인들에게 전한 전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산문작가들처럼 동방을 두루 여행했지만, 그의 글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탐구의 결과(στορη? ?πδεξι?, 히스토리에스 아포덱시스)’로 나온 것이다. 그는 보고 듣고 읽은 것을 단순히 전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아내려고 애썼던 것이다. 사건에 대한 진실을 도무지 알아낼 수 없을 경우에는 상반된 자료들을 병기하기도 하며,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 판단을 유보하거나 자신의 추측을 추측이라고 밝히며 기록한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또는 사실을 구명해내려고 애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서두에서 두 민족이 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을 찾아내고자 저술하게 됐다고 기술했는데,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정확히 알아야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 외에도 구비전설, 설화, 풍문 등을 모두 담고 있다. 이같은 태도의 기본 원칙은 “이것이 믿기는 사람은 이집트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각각그이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다.”(제2권) 혹은 “내 의무는 전해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나의 주장은 본서 전체에 걸쳐 적용될 것이다.”(제7권) 하지만 헤로도토스의 책에서 오늘날의 역사책과 같은 일관된 사관 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책 곳곳에서 설화나 신탁 등을 지나치게 길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는 여전히 신탁이나 예언의 진실성을 아주 솔직하게 믿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의 매력을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꺼운 책을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저자 스스로 책 앞에서 밝히고 있듯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어떤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됐는가 하는 내용에 중점을 둔다. 본격적인 서술은 최초의 역사적 인물인 기게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리디아의 왕 기게스는 리디아의 왕위와 왕비를 함께 수중에 넣는다. 하지만 그 후손인 크로이소스에 이르러 그 패권을 페르시아에게 빼앗긴다. 동방에서 페르시아에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면 서방에서는 그리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성장한다.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의 반란에 아테네가 가담하고 사르디스를 파괴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적대적인 관계로 접어든다.다리우스 통치기에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공격하지만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정복이 좌절되고, 그 다음 통치자인 크세르크세스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 책의 뒷부분은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이 주요 내용을 이루는데,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 전투, 작은 전투로 미칼레 전투, 세스토스 함락 등이 다뤄졌다.


▣ 《역사》 읽기

제 1 권

서두에서 헤로도토스는 강국들만이 아니라 약소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중으로 기술하겠다고 말한 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일찍이 강대했던 나라 대부분이 오늘날에는 약소국이 됐고, 우리 시대에 강대하게 된 나라도 전에는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번영이 결코 오래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국도 소국도 똑같이 다루면서 서술해 가고 싶다(I.5).”

한 인간이나 한 국가의 번영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 번영이 히브리스를 야기시키고 곧 신의 네메시스를 불러올 것이기에. 헤로도토스는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도, 즉 “인간의 역사의 추이라는 것도 히브리스-네메시스 개념으로 단순화시켜 파악하고 있다.” 우선 할리스강(오늘날의 키질이르마크 강) 서쪽에 위치한 리디아 제국의 크로이소스 왕이 히브리스로 말미암아 몰락한다. 그 왕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을 정복해 조공을 강요하거나 혹은 우호 관계를 맺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 왕에 의해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자유(自由)를 빼앗기게 됐다(I.6). 헤로도토스는 크로이소스의 왕가가 어떻게 개창됐는지 말한다. 크로이소스의 5대조 선조인 기게스는 왕의 일개 시위로서 왕위를 찬탈했다. 그가 새로운 왕이 돼도 되는지 리디아의 사람들이 신에게 물어본다.

“신탁은 기게스를 리디아의 왕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기게스의 왕권은 확고해졌다. 다만 델포이의 무녀는 기게스의 5대손에 이르러 헤라클레스 가문(=왕위를 찬탈 당한 가문)의 보복이 행해지게 되리라 부언했지만, 리디아의 국민도, 역대왕들도 이 예언이 실현될 때까지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I.13)”

크로이소스에 이르러 리디아는 번영을 맞는다. 그는 그리스의 현인 솔론을 왕궁에 초청한 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자기라고 생각하면서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누구냐고 질문을 한다. 솔론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뿐 그를 거명하지 않자 화가 난 크로이소스는 “아테네에서 온 손님이시여, 그렇다면 우리의 번영이 당신에게는 대단치 않게 생각돼 보통 사람들의 번영과도 견줄 바가 못된단 말이요?”라고 언성을 높인다. 그러자 솔론은 “저는 신을 이해하고 있는데, 신은 질투심이 강하시며 인간을 괴롭히기를 좋아하십니다(I.32)”라고 말하면서 떠난다. 지나친 번영은 신의 질투를 사게 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번영 자체가 신의 질투를 사는 것은 아니다. 솔론이 크로이소스의 궁전을 떠난 후 헤로도토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러나 솔론이 떠나자 ‘신으로부터의 큰 징벌’이 크로이소스에게 떨어졌다. 필자(=헤로도토스)가 생각하기로는, 크로이소스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I.34).”헤로도토스는 번영으로 인해 그 사람이 품게 되는 생각 때문에 신의 질투를 사게 된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자신감에 빠진 크로이소스는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경계인 할리스강을 건너 페르시아로 침입했으나,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게 된다.헤로도토스는 크로이소스의 몰락을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로 설명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게스의 온당치 못한 왕위찬탈에 의해 이미 예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게스는 자신의 죄과를 자신의 대에 치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5대손을 통해 치르게 된 것이다.

“정해진 운명은 신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5대 선조(=기게스)의 죄값을 치른 것뿐이다. 그는 헤라클레스 왕가의 일개 시위의 몸이면서 여자의 반역에 가담해 주군을 시해하고, 주군 대신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I.43)”

크로이소스의 몰락에는 크로이소스 자신의 탓만이 아니라 선조의 죄업도, 아마도 더 크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이오니아인들은 리디아가 페르시아에 정복되자 곧 키로스에게 사자를 보냈다. 크로이소스에게 예속돼 있을 때와 동일한 조건으로 키로스를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키로스는 예전에 자신이 이오니아인에게 사자를 보내 크로이소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줄 것을 요청했을 때에는 들어주지 않더니, 일이 끝난 지금에 와서 자신을 따르려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결국 키로스는 사모스 섬을 제외한 이오니아 지방을 모두 평정한다.

제 2 권

헤로도토스는 키로스의 부왕인 캄비세스의 이집트 침입 건을 계기로 삼아 기원전 ?세기 이집트의 첫 파라오 민(=메네스)으로부터 기원전 7세기에 이르는 이집트의 역사, 지리, 풍습 따위를 소개한다. 나일강 악어의 습성이라든가, 미이라 제조법, 기자에 있는 대(大)피라미드에 관해 기술하기도 한다. 그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널리 알려진 말을 한다.

“적어도 지각 있는 자라면 설사 예비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한 번만 보면 알 수 있는 바지만, 오늘날 그리스인이 배로 왕래하고 있는 이집트 지역은 이른 바 나일 강의 선물이라 할 만하다(II.5).”제 3 권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의 이집트 정복, 사모스 섬의 독재자 폴리크라테스와 이집트 왕 아마시스 사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폴리크라테스 일화에서도 그의 히브리스-네메시스적 역사관이 잘 나타나 있다. 사모스 섬의 지배자 폴리크라테스의 성운은 이집트 왕 아마시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아마시스는 폴리크라테스의 행운이 갈수록 더 성대해짐을 보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사모스로 보냈다.

“아마시스가 폴리크라테스 전하께 한 말씀 올립니다. 친교를 맺은 동맹국이 행운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기쁜 일이긴 합니다만, 신들이 질투심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소생으로서는 전하의 지나치게 성대한 행운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III.40).”

기원전 520년, 페르시아의 계략에 빠진 폴리크라테스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제3권의 후반부에는 캄비세스의 죽음과 다리우스의 등극, 다리우스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이에는 아라비아와 인도도 포함된다)과 다리우스의 초기 치세가 기록돼 있다.

제 4 권

다리우스는 흑해 지방인 스키티아를 침공하려고 계획했다. 스키티아는 목초와 물이 풍부한 평원이고 아주 많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특히 목초들은 다른 지방의 목초보다 가축의 담즙 분비를 촉진시키는 작용이 강하다. 스키티아가 숭배하는 신은 제우스, 게아(땅의 신) 등이고, 왕족은 포세이돈에게도 희생을 바친다. 목재가 부족해 고기를 삶을 때는 짐승의 뼈를 태운다. 전쟁을 할 때는 처음 죽인 적의 피를 마시고 살해한 적병의 머리를 가져와 머리 가죽을 벗겨 손수건을 만들기도 한다. 다리우스는 스키티아를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이오니아인 등을 이용해 진격했다. 한편 다리우스는 리비아로의 진격도 준비하고 있었다. 리비아는 유목인으로 고기를 먹고 우유를 마시지만 소고기는 먹지 않는다. 리비아의 복식에서 그리스 신상의 의상인 아이기스가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집트를 출발한 페르시아군은 바르케를 9개월에 걸쳐 포위하고 공격로로 지하도를 팠지만 공격했지만 모두 격퇴당하고 말았다.

제 5 권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를 중심으로 다리우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경위를 기술하고 있다. 아리스타고라스가 아테네에 도착한다.

“아테네인은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설복돼 군선 20척을 이오니아인에 대한 원군으로 파견하기로 의결했고... 이 함대 파견이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불행한 사건의 발단이었다. (V.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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