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체
플라톤 지음 | -
국가ㆍ정체(政體) Politeia
플라톤 지음
1권 올바름에 대해 통용되는 몇 가지 견해
이 이야기는 여신의 축제일 저녁에 이뤄졌다. 소크라테스는 벤디스 여신의 축제를 보러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로 갔다 오는 길에 평소 알고 지내던 케팔로스 노인의 아들을 만나 케팔로스 노인의 집에 가게 되어 ‘올바름(dikaiosynē)’이란 뭔가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된다.
1)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와 소크라테스가 나누는 얘기를 옆에서 듣던 트라시마코스는 부질없는 논의를 한다고 화를 내며 ‘올바름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고 일갈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쪽이 힘을 행사하는 쪽이고, 더 강한 자라고 ‘더 강한 자’의 정의를 내린다. 또한 법률은 지배자의 편익을 위한 쪽으로 제정되고 그런 법률을 공표함으로써 지배받는 자에게 무엇이 올바른지 지시한다고 말한다. ‘해야 할 것(올바른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올바르지 못한 것)’을 결정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통치술도 일종의 기술이기 때문에 통치술은 그 통치술을 가진 통치자에게가 아니라 통치를 받는 사람에게 편익이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반박한다. 모든 기술은 기술 자신이 아니라 기술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술이 의술 자체에 좋은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좋은 것인 데서 알 수 있다.
2) 여기서 트라시마코스는 논점을 바꿔 ‘올바름은 남에게 좋은 것이며 자신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올바르지 못함은 자신에게는 좋은 것이며 남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 된다. 그 근거로 그는 실제로 계약 관계에 있어서나 나라일을 보는 데 있어서도 올바른 자는 손해를 보고 욕을 먹는 반면 올바르지 못한 자는 이익을 얻는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집단의 경우에 올바르지 못한 집단이라도 그 집단이 분열하지 않고 유지되려면 내부적으로라도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강력하다. 또한 올바른 이들이 올바르지 못한 자들보다 더 훌륭하고 행복하게 산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사는 것은 혼의 기능인데 혼에는 훌륭한 상태가 있다. 그런데 ‘올바름은 훌륭함’이기 때문에 올바름은 혼의 훌륭한 상태다. 따라서 올바른 혼과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게 살게 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게 된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며 올바르지 못함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대화를 마치면서 소크라테스는 정작 이 대화가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한다. 1권에서는 ‘올바른 것이 도대체 뭔지’ 정작 캐내지 못하고, ‘올바름’이 ‘나쁨’, ‘무지’, ‘지혜’, ‘훌륭함’ 등의 성격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만 훑어봤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정작 ‘올바름이 나쁜지, 훌륭한지’ 등에 대해 제대로 알 가망도 없다. 왜냐면 정작 ‘올바름이 뭔지’를 모르고서는 그것이 어떤 속성을 가질지 안 가질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권 이론상의 나라를 세워 올바름을 검증함
논의가 끝났으려니 했던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그 자리에 같이 있던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공격을 받는다. 우선 글라우콘이 트라시마코스가 포기한 주장을 더욱 강화시켜 소크라테스를 공격함으로써 소크라테스로부터 올바름에 대한 적극적 주장을 끌어내려 한다. 그는 먼저 좋은 것들을 구분한다. 좋은 것들에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 이렇게 세 가지 있다고 말한다. 아데이만토스와 합세한 글라우콘은 짐짓 올바름은 그 자체로는 기피할 성질의 것이지만 그것이 갖다 주는 보수나 평판 따위의 결과 때문에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는 것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더욱더 강화된 논의에 오히려 기뻐하는 소크라테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올바름이 도대체 뭔지 밝히는 일에 착수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쉬울 것이라며 이론상으로 한 나라를 수립해 보자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그 나라의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역시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론상으로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그 기원은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하고 다른 이들에게 동의를 얻는다. 이런 필요에 따라 맨 처음 세워지는 나라는 ‘최소 한도의 나라(최소 필요국)’다.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하기 위해 성립한 이 나라를 소크라테스는 ‘참된 나라’요 ‘건강한 나라’라고 말하지만 글라우콘은 그것은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돼지들의 나라’라고 못마땅해 한다. 글라우콘은 사람들은 그런 최소한의 욕구에 만족할 수 없고, 고생스럽게 살고 싶어하지 않으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만 먹지 않고 즐기기 위해서도 먹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를 떠나 ‘호사스런 나라’를 고찰하게 된다.
‘호사스런 나라’에서는 욕구가 필수적인 것들을 넘어서게 되고, 따라서 나라의 규모가 확장돼야만 한다. 이 나라는 구성원들의 계층이 다양해질 뿐만 아니라 영토 역시 커져야 하기 때문에 최초로 전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반대로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에 따라 나라를 수호할 계층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욕구를 넘어서는 기개를 지닌 계층이 출현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수호자 계층이다.
수호자층은 그 본성이 용감하면서도 지혜로워야 한다는 데 사람들은 뜻을 모으고 그것이 좋은 의미에서 개의 본성과 닮았다는 데 합의한다. 그런데 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뒤따른다. 이들이 먼저 하게 되는 교육은 시가 교육이다.
3권 수호자층의 교육과 선발
시가 교육은 한 마디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리한 소크라테스는 이어 체육 교육을 논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체육은 훌륭한 혼이 자신의 훌륭함에 의해서 몸을 최대한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체육이라 해서 몸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시가와 함께 혼을 위한 것임을 소크라테스는 강조한다. 시가 및 체육을 통해 혼의 격정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이 적절하게 조장되고 이완됨으로써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시가․체육 교육의 일차적 목표가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이런 교육 과정을 거친 아이들 가운데 장차 완벽한 수호자들, 즉 통치자가 될 사람들을, 넓은 의미의 수호자들 즉 그들의 보조자들 또는 협력자들과 구별해서 선별해 내기 위한 온갖 시험을 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시험기준은 그들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신을 끝까지 지켜내는가다.
이들의 선발이 끝난 다음, 이들의 성향을 무시한 신분 이동을 막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를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언제라도 성향에 맞게 지위를 변경시켜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수호자들에게 그들의 성향, 즉 주인격인 시민들을 깔보고 해치지 않으며 그들에게 온순해야 하는 성향에 걸맞은 거처와 생활 방식을 줘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 되고, 출입이 통제되는 사적인 집이나 곳간도 없어야 하며, 식사와 생활을 공동으로 하고 나아가 처자까지 공유해야 한다. 또한 이들이 황금을 멀리 하게 해야 자신들의 성향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4권 행복한 사람의 올바름
이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수호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이 특혜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엄격히 통제된 공동 생활을 하도록 강요 당하기 때문에, 이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가 특정한 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상기시킨다.
덧붙여서 소크라테스는 한 나라가 지나치게 부유해지고 그 부가 특정한 계층에 집중돼 더 이상 한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한 지시사항을 밝힌다. 그것은 나라가 커지더라도 하나를 넘지 않는 한도까지만 키워야 하고, 시민들이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통치를 하는 최선자 정체가 탄생했다.
그런데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이유는 그런 나라에서 올바름이 가장 잘 구현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 나라에서 올바름 혹은 올바른 상태는 이 나라를 구성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일을 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바로 이것이 올바름에 대한 의미 규정이다.
그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지니는 것이 올바름인지 알기 위해, 그보다 먼저 이 나라에서 확인한 올바름이 개인에게도 타당한지 따져보기로 한다. 이것이 ‘혼의 삼분설’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의 한 가지로는 배우고, 다른 한 가지로는 발끈하며, 셋째 것으로는 음식과 생식 또는 이것들과 동류인 것과 관련된 쾌락을 원한다. 혼이 헤아리는 부분은 배우는 부분이고, 그것으로써 격하게도 되는 부분은 격정이며,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 상태가 되는 부분은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부분이다.
이렇게 해서 헤아리는 부분에는 지혜가 있고, 격정에는 용기의 덕목이 있게 된다. 욕구하는 부분 자체에는 독립적으로 어떤 덕목도 속하지 않지만, 절제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헤아리는 부분과 욕구하는 부분, 발끈하는 부분들끼리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는 일을 받아들이는 데서 생긴다.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의 각각이 제 일을 하면, 이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요, 제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될 때 혼에는 올바른 상태가 실현돼 올바름의 덕목이 생긴다.
따라서 ‘장차 행복하게 될 사람은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지녀야만 할 것인가’란 문제에 대해 거의 결론이 내려진 상태가 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결론을 잠시 미루고 사태를 좀더 명확하게 볼 수 있기 위해 훌륭한 상태의 반대가 되는 나쁜 상태의 여러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5권 철학자란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소크라테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폴레마르코스와 아데이만토스를 비롯한 모두가 이를 제지하고 앞에서 언급된 처자의 공유와 그에 따른 혼인 및 출산 문제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먼저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개와 흡사하다고 말했던 논의에 따르라고 한다. 개가 그렇듯 남녀는 신체적인 능력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수호자로서 동일한 의무를 져야 한다. 또한 여성에게도 같은 양육과 교육을 해야 한다. 이는 관습과 습관에 기대 판단하기보다는 합리적 추론에 따른 결론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이 어떻게 다른가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성과 여성이 어떤 기술이나 다른 일(업무)과 관련해 서로 다른가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향상 알맞다’는 말을 정의해야 한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뭘 쉽게 배우거나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고, 신체적 기능들이 그 사람의 생각에 충분히 봉사한다’는 말로 정의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이 수호자가 되는 일은 가능하고 다만 여성은 개인적으로 적합하거나 부적합할 뿐이다. 이는 남성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문제의 출발은 처자의 공유였으나 남녀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었으니, 이는 ‘공유’의 문제는 ‘공동 관여’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런 제도의 유익함에 대해 논의한다. 이런 제도의 유익함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 대신 여럿으로 만드는 최대악을 피하고 나라를 단결시켜 최대선을 실현함에 있다. 왜냐면 공유에 의해 이 나라 사람들은 한몸과 같이 같은 한가지 일에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치 한 몸과 같이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처자의 공유가 필연적이라고 소크라테스는 결론 내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이런 제도의 성립 가능성이다. 이에 대해 먼저 소크라테스는 이 논의가 실현 가능성보다 본보기로 제시됐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런 제도를 최소의 변혁만으로 실현할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이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라를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있어서 나쁜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플라톤은 경고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철학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반발을 일으키거나 조롱거리가 될 소지가 크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문제는 진정한 철학자를 정의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철학자들이 어떤 사람인가 분명해지면,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철학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게 성향에 적합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철학에 종사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제격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모든 반론을 막아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것을 사랑하다’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 왜냐면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배움을 선뜻 맛보려 하고 배우는 일에 반기며 접근하고, 또한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경거리를 좋아해 합창 가무를 쫓아다니며 듣지만 논의를 하는 데는 열성이지 않은 사람들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부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구분한다. 이들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그리고, 이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온갖 걸 반길 뿐, 이들의 사고(마음 상태)는 ‘아름다움(아름다운 것) 자체’의 본성을 볼 수도 반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도 아름다움 자체는 믿지 않고, 누군가 그것의 인식에 이르도록 그를 인도할지라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은 꿈꾸는 상태로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 자체’를 믿을 뿐 아니라, 이것과 이것에 ‘관여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그래서 ‘관여하고 있는 것들’을 ‘그것 자체’로 생각하거나 또는 ‘그것 자체’를 ‘관여하고 있는 것들’로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은 ‘깬 상태로’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사고는 알고 있는 자의 것으로 이를 인식(epistēmē)이라 함이 옳겠으나, 앞엣 사람의 사고는 의견을 갖는 자의 것으로서 의견(doxa)이라 함이 옳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다음으로 걸리는 문제는 도대체 인식하는 자의 인식 대상이 뭔가 하는 문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먼저 인식하는 자는 ‘뭔가’를 인식하며 그 인식 대상은 존재하는 것임이 분명하고, 완벽하게 있는 것은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은 무슨 방법으로도 인식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완벽하게 있는 것은 있다가 없다가 하지 않는 것이고, 있기만 한 것이다. 이것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고 한 모습만을 가진 것이지만,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은 없기만 한 것이다.
반면 의견의 대상은 ‘있으면서’ ‘있지 않기도’하는 그런 상태, ‘순수하게(절대적으로) 있는 것’과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과의 ‘중간에(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감각적 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에 상대적이고 가변적 판단 능력에 대응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해서 있는 것에는 인식이, 있지 않은 것에는 무지가, 무지와 인식의 사이의 어떤 것에는 의견이 대응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각각의 실재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로 불러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