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지음 | -
자유론 On Liberty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제1장 서론
종래에는 정치적 지배자들의 권력행사에다 여러가지 제한을 가하기만 하면 국민의 자유는 보장되리라 생각했지만, 이젠 새로이 ‘다수자의 전제’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민주주의가 확대될 때 특히 경계해야 될 것이 바로 교육받지 않은 다수자가 수적 우세를 통해서 소수자의 의견을 억압하는 ‘여론의 압박’이다. 따라서 사회적 간섭과 개인의 자유에 관한 일정한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논문의 주제는 이른바 필연적 결정론에 대립되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자유, 사회적 자유에 대한 것이다. 즉 사회가 개인에 대해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그 권력행사의 한계를 다룬다. 고대에는 자유와 권위 사이의 싸움이 백성과 정부 사이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자유란 정치적 지배자의 압제에 대한 보호를 의미했다. 게다가 지배자들의 권위가 대체로 세습이나 정복에 의해 얻어진 것이어서 피지배자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런 지배 권력에 제한을 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자유 또는 권리라는 면책조항을 받아들이게 하거나 아니면 헌법에 따라 억제, 입헌적 제약을 확립시키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인류가 진보함에 따라 통치권력은 일반 국민들의 위탁자나 대리인으로 자리잡았다. 즉 국민의 정기적인 선택(선거)을 통해 그들의 이해와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자치’니 ‘국민의, 국민 자신에 대한 권력’이니 하는 것도 실상, 국민들 중에서의 다수자, 자신들을 다수자로 인정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국민이 그 성원의 일부를 억압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다른 권력 남용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즉 ‘다수자의 압제’가 오늘날에는 가장 경계해야 될 해악이 됐다.
다수자에 의한 사회적 압제는 정치적 압제와 같이 과중한 형벌을 수반하진 않지만, 일상생활의 세부에까지 훨씬 더 깊이 침투해 인간의 영혼을 노예화시키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단조차 남겨주지 않는다. 따라서 행정관리의 압제에서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지배적인 여론이나 감정에 대해서도 보호가 필요하다. 사회가 법적 형벌 이외의 방법을 통해서 지배적인 사상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행위의 규칙으로 강요하려 하고, 그 사회의 방식과 조화되지 않는 온갖 개성의 발전을 방해하며, 가능한 그런 개성의 형성 자체를 저지시켜 모든 사람들의 성격을 획일화하려는 사회 경향 자체도 방어해야 한다. 개인의 독립성에 대하여 집단의 의견이 정당하게 간섭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에 침해되지 않도록 강구하는 것이 정치적 압제를 막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집단의 의견이 간섭할 수 있는 한계를 대체 어디에다 두어야 할 것인가, 개인의 독립과 사회적 통제 사이를 어떻게 적절하게 조정할 것인가. 대체로 사회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 사회의 유력한 계층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의 기준은 법률이나 여론에 의한 형벌과 같다. 그 기준이 일반 사람들이 준수하도록 정해진 규칙을 사실상 결정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강제와 통제의 형태로써-법적 형벌 같은 물리적인 수단이거나 또는 여론 처럼 정신적인 강제이거나간에- 사회가 개인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리의 원칙을 주장하려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 성원 가운데 누군가의 자유를 간섭할 수 있는 정당한 경우란 자기방어일 때뿐이다. 즉 문명사회의 일원에게 그의 의사에 반하는 권력을 행사해도 정당화되는 단 한가지 이유는 다른 성원에게 미치는 위해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에서 그 사람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다른 사람과 관계가 있을 때뿐이다. 자신에게만 관련된 행위에서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각 개인은 그 자신에 대해서, 즉 그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주권자다.
이러한 이론은 성숙된 인간들에게만 적용된다. 민족 자체가 아직 미성년기라고 생각될 만큼 뒤떨어진 사회는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도 좋다. 전제정치라 해도 만일 그 목적이 미개인의 생활 개선에 있고, 그 통치수단이 실제로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된다면, 미개인을 다루는 정당한 통치형태가 될 수 있다. 자유는 원칙적으로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서 진보할 수 있는 시대의 사회상태에서만 적용된다.
나는 공리가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인 판정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항상 발전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항구적 관심에 기초를 두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공리다. 이와 같은 항구적 이해에 비춰 볼 때, 각자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관계될 경우, 개인의 자유의사에 대한 외적 통제가 인정될 수 있다.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한다면, 법률적 형벌이나 여론의 비난을 통해서 처벌해도 좋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공적인 의무를 행하지 않을 때도 사회적 간섭이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사회적 통제나 간섭이 훨씬 더 큰 해악을 가져온다든가, 그냥 개인의 재량에 맡겨둘 때 그 개인이 더 잘 행동할 것 같은 경우에는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동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련되는 행위야말로 인간 자유의 본래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본래적 자유의 영역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내적 영역인 의식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실제적 사색적 과학적 도덕적 신학적인 모든 문제에 관한 의견과 감정의 절대적인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기호의 자유와 목적 추구의 자유다. 각자의 생활을 각자의 성격에 맞도록 설계할 수 있는 자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다. 셋째, 각 개인이 갖는 이와 같은 자유로부터 개인 상호간의 단결의 자유. 역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결합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
이와 같은 자유가 존중되지 못하는 사회는 그 통치 형태가 어떻든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라고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한, 또는 행복을 얻으려는 다른 사람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다. 각 개인은 육체적인 건강이든 정신적인 건강이든 각자 자신의 건강의 수호자이다. 각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생활하게 하는 편이,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개인 생활을 강요하는 것보다 오히려 얻는 바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제2장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관하여
지배적인 사상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상을 부당하게 억압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상의 진리성은 항상 자유로운 토론과 오류와의 싸움에서 밝혀지게 마련이다. 다양한 사상들에 대해 열린 자세로 포용할 때 더 나은 사상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진보할 수가 없다.
가령 한 사람만을 제외한 전 인류가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단지 한 사람만이 그것에 반대 의견을 갖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인류가 그 한 사람에게 마음대로 말 못 하도록 침묵케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말 못 하게 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의견의 발표를 억제할 때 따르는 해악은 그것이 전 인류로부터 행복을 빼앗는다는 점에 있다. 즉, 현대의 사람들뿐 아니라 후세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빼앗으며, 그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행복도 빼앗게 된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사람들은 잘못을 버리고 진리를 포착할 기회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고, 만일 그 의견이 잘못되었다면, 진리와 오류가 서로 충돌할 때 진리가 마침내 오류를 물리치게 되는 데서 생기는 진리에 대한 더 뚜렷한 인식과 보다 더 선명한 인상을 받게 되는 이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권위에 의해서 억압받는 의견이 어쩌면 진리일지 모른다. 그 의견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분명 그것의 진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한다는 걸 이유로 그것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자기들의 확신을 절대적인 확실성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일체의 토론을 억압하려는 것은 자기의 절대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는 사실, 그리고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없이 자명하다. 어떤 의견이 온갖 논쟁의 기회가 부여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논박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그걸 진리라고 가정하는 일과, 처음부터 논박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그것을 진리라고 가정하는 일과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우리들의 의견을 반박하여 그 반증을 제시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우리들이 활동의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의견을 진리라고 가정케하는 조건이다.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확실성과 그 확실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서 시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해진다. 자기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의 의견과 서로 대조시킴으로써 자기 의견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여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착실한 습관은 자기의견을 실행할 때 회의나 망설임을 갖게 하기는커녕 자기 의견에 대한 정당한 신뢰감을 갖게 만든다.
내가 절대무오류성의 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이론을 확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의 반대편에서 제시될 수 있는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려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에게 반대입장의 주장을 듣는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의견의 허위성 뿐 아니라 그 해로운 결과에 대하여 아무리 확신이 강하다해도 그런 개인적인 확신만으로 그 의견이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막아버린다면 그것은 자신의 절대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 된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나 가장 숭고한 여러 가지 이론들을 근절해버리기 위해서 법의 힘이 사용된, 역사상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여러 실례들이 바로 이런 경우에서 보여진다. 오늘날 인류의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인정받고 있는 소크라테스도 당시의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유죄선고를 받았었다. 예수그리스도 역시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었다. 그 두 사건을 보면, 그 당시의 박해자들은 단순한 악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종교적 도덕적 애국적 감정에 충실했던 평범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절대 군주로서 가장 뛰어난 지성과 덕성을 지녔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사회적 유대를 해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었다. 인류의 역사는 진리가 박해에 의해서 억압된 실례로 가득 차 있다. 진리에는 단지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만으로 감옥이나 화형에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고유한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은 헛된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법적 사회적 형벌로 얼마든지 진리의 전파나 오류의 전파를 막을 수 있다. 진리가 가지는 참된 강점은, 그것이 박해를 받아 몇 차례 소멸된다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에 그 진리를 재발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운 좋게 좋은 시기를 맞아 박해를 면하게 되어 그 이후의 모든 억압에 저항할 정도로 강력해 질 수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예전처럼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 커다란 위해를 가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그러나 우세한 의견에 대항하는 이단적 의견의 활동도 왕성한 편이 아니다. 정통적인 결론으로 귀착하지 않는 일체의 연구를 금지시킴으로써 손해를 입는 것은 이단자들의 정신이 아니다. 최대의 손해를 입는 것은 이단자가 아닌 사람들, 이단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적 발전이 전면적으로 위축된 그런 사람들이다. 자기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의 주장만 맹종하는 사람들의 진실된 주장보다는 오히려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다하여 스스로 사색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진리에 공헌하는 바가 더 많다.
자신의 의견이 아무리 진실된 것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충분히 자주,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토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 진리로서가 아니라 죽은 독단으로서 신봉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신봉된 진리는 그만큼 미신을 하나 더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관해서 단지 자기 자신의 주장만을 아는 데 지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문제 전반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논거가 정당하고 아무도 그것을 논박할 수 없을지라도, 만일 그가 반대편의 이유를 논박할 수 없고 반대편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하면 그는 어느 편의 의견도 선택할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의 백명 중 99명까지는 이런 상태에 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사람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공언하고 있는 학설을 참된 의미에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만일 모든 중요한 진리에 대해서 반대자가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일부러 반대자를 상상해 내서 그 반대자에게 가장 노련한 악마의 대변자 역할을 맡겨 가장 유력한 논증을 제시하게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자유로운 토론이 행해지지 않으면 단지 의견의 근거가 망각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견의 의미 자체도 망각되어진다. 자유토론 금지의 폐해는 지적 폐해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폐해이기도 하다.
의견의 다양성을 유익한 것으로 보아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근거는, 서로 싸우는 학설이 한 쪽은 진리이고 다른 쪽은 거짓인 경우가 아니라, 진리를 두 편이 부분적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경우에서 보여진다. 이 때는 일반적인 의견이 진리의 일부분을 구현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반대편의 의견으로 진리를 보충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체로 여론의 변혁은 진리의 일부분을 드러냄과 동시에 진리의 다른 부분은 억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우세한 의견은 비록 올바른 근거에 입각해 있는 경우라도 부분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일반적 의견이 망각하고 있는 진리의 부분을 다소라도 내포하고 있는 일체의 의견은 설사 그 속에 아무리 많은 오류와 모순이 섞여 있다할지라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 지성의 현재 상태에서는 오직 의견의 차이를 통해서만 비로소 진리의 모든 측면을 공평하게 다룰 기회가 생겨진다. 진리를 위해서는 의견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즉 의견의 다양성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
의견의 자유와 의견을 발표할 자유가 인류의 정신적 행복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네가지 근거를 정리해보자. 첫째, 어떤 의견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경우, 그 의견이 어쩌면 진리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절대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 된다. 둘째, 설사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실제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또는 지배적인 의견이 전적으로 완전한 진리인 경우는 드물거나 절대로 없거나 하기 때문에, 진리의 나머지 부분이 보충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충돌됨으로써만 부여되는 것이다. 셋째, 일반적인 의견이 진리일뿐만 아니라 진리의 전부라 하더라도, 만일 그것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고 실제로도 논쟁되지 않는다면, 그 의견을 품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마치 편견을 품은 것과 같이 그것의 합리적인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넷째, 만일 자유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의견 그 자체의 의미가 상실 또는 약화됨으로써 그 의견이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생한 영향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