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 현대지성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현대지성 / 2025년 1월 / 408쪽 / 11,500원
전쟁 중의 일본인어떤 문화든 전시 관행을 비롯한 전통적인 전쟁의 관행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전제 자체부터가 미국과는 달랐는데 대동아 여러 나라와 동일한 인종이므로 이 지역에서 먼저 미국을, 다음엔 영국과 소련을 쫓아내서 ‘자기네의 알맞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대동아의 이상은 이 전쟁이 군비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인의 물질에 대한 신앙과 일본인의 정신에 대한 신앙과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미국이 시종일관 물량의 증대에 전력을 기울인 것처럼 일본은 ‘정신’이라는 비물질적 수단을 시종일관 이용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저항한 일본 포로들은 극단적인 군국주의의 원천을 천황에 두고 있었다. 천황은 모든 사람에게 전부였으며, 천황은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였다. 일본군의 지휘관들은 일본인 거의 전부가 지지하고 있는 천황 숭배를 이용하여 부하 장병에게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천황의 뜻에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만약 그것이 천황의 명령이라면 싸움을 멈추게 할 수도, 혹은 싸우게 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었다. 천황에 대한 이러한 무조건, 무제한의 충성은 천황 이외의 다른 인물과 집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이 가해진다는 사실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반물질주의적 편향에서부터 천황에 대한 태도에 이르는 전쟁 중의 일본인의 행동에 관한 이러한 모든 중요한 문제는 전선에서뿐만 아니라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에게도 관련된 문제였다.
적합한 자리 찾기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를 알아야 한다. 계층 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생활 등과 같은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일본은 근래 두드러지게 서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족주의적인 사회다. 사람들과 인사하고 접촉할 때는 반드시 서로 간의 사회적 간격의 성질과 정도를 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은 남을 향해 “싯 다운(Sit down)”이라고 말할 때도 상대방과의 친밀도, 나이에 따라 각기 다른 말을 쓴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는 인사와 꿇어앉는 예의도 세밀한 규칙과 관례에 의해 지배된다. 이러한 것들이 단순히 계급적 차이는 아니어서 성별이나 연령, 두 사람 사이의 가족 관계나 종래의 교제 관계 등이 모두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같은 두 사람 사이에도 신분이 변하면 그것에 따른 알맞은 존경이 요청된다.
일본에서는 가정에서 예의범절을 배우며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진다. 그들에게는 성별과 세대의 구별과 장자 상속권에 입각한 계층 제도가 가정생활의 근간이다. 그리고 효도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 중국과 공유하고 있는 숭고한 도덕률이다. 연장자가 정식으로 은퇴할 때까지는 그 연장자의 명령이 엄중히 지켜지며, 앞서 언급한 일본에서의 ‘알맞은 위치’는 단지 세대 차이만이 아니라 연령의 차이에도 적용되어 장남은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 집에 머물러 낡은 관습에 매여 있는 반면, 차남은 대체로 넓은 세계로 진출하여 교육도 많이 받고 수입도 장남보다 더 많다. 일본인은 누구나 우선 가정 내부에서 이 같은 계층 제도의 습관을 배우고 그것을 경제, 정치 생활 등 넓은 영역에 적용한다. 또한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실제의 지배 관계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권 관계는 변경, 수정되지 않는다.
일본인 생활의 계층적 조직은 계급 간의 관계에서도 가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철저하다. 일본은 일본 역사의 전체 기간 동안 현저한 계급 카스트적 사회였다. 아래로는 천민에서 위로는 천황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규정된 형태로 실현된 봉건 시대의 일본 계층 제도는 근대 일본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75년 전 일본의 봉건 제도가 법적으로 종말을 고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정치가들은 계층 제도의 많은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인은 이러한 제도 아래 있으면서 무력적인 계층 제도의 지배하에 놓였던 다른 나라의 국민들처럼 온화하고 순종적인 국민이 되지는 않았다. 각각의 계급에 가해지는 제한은 컸지만 그 대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와 보증 그리고 ‘부’를 이용하여 상층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공인된 수단이 있어 ‘유연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근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귀족 계급이 보존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일본 근대화 초기의 구호는 ‘손노조이(尊王攘夷)’, 즉 ‘왕정을 복고하고 오랑캐를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을 외국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천황과 쇼군의 ’이중 통치‘ 속에 있었던 10세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 천왕 지지자들에게 존왕파, 다이묘, 농부, 사무라이 계급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익이 확대되기를 원했을 뿐 결코 봉건 제도를 규탄하지는 않았다.
반도쿠가와 세력이 승리를 거두어 1868년 왕정복고에 의해 ‘이중 통치’가 종말을 고한 후에는 서양인의 예상과는 달리 개혁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계급 사이의 모든 법률상의 불평등이 철폐되었고, 상층 계급이 소유했던 특권이 사라졌다. 갓 태어난 메이지 정부의 이 같은 괄목할 만한 개혁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개혁 조치를 폐기하고 봉건 제도를 존속시키려는 반란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토록 철저하고 평판 나쁜 개혁을 단행한 ‘정부’는 특수한 일본의 여러 제도가 이미 봉건 시대부터 육성시켜 온 하층 사무라이 계급과 상인 계급의 ‘특수한 연합’ 세력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일본을 세계열강의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봉건 계급을 욕하지도 않았고, 무일푼의 상태로 몰아넣지도 않았으며, 이들에게 많은 질록(지위에 따라 지급되는 봉급)을 주어 그 미끼로 메이지 정부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메이지 정부를 운영한 정치가들은 일본의 계층제를 없애려는 모든 사상을 배척하였고 오히려 중앙 집권적 지배를 한층 강화시켰다. 정치, 종교, 경제 등을 비롯한 모든 활동 분야에서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국가와 국민 간의 ‘알맞은 위치’의 의무를 세밀히 규정하였고 국민 혹은 국민이 선출한 의원들에 대한 발언권을 규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렇게 하여 중요한 정부의 지위를 어디까지나 ‘각하’들의 수중에 두었다.
1920년대 일반적으로 여당과 야당 간의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전국적인 정당이 생겼지만 일본의 지방 행정은 여전히 공동체 전체를 위해 일하는 원로들에 의해 지휘되었으며, 지방 행정 기관은 이를 구성하는 인력의 임명에 대해서 자치권을 이양받지 못했으며, 학교와 경찰과 재판소에 대해서는 지방 자치권을 갖지 못했다.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종교 분야에서는 국민적 통일과 우월의 상징을 선양시키는 종교는 국가 관할에 속하게 하고, 다른 모든 종교는 개인 신앙의 자유에 맡기도록 하였다. 국가의 통제를 받는 영역이 바로 ‘국가신토’인데 이는 학교에서는 신화시대 이래의 일본 역사와 천황의 숭배로 되어 있으며, 국가에 의해 지지되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와 유사한 이원성이 육?해군, 산업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일본인은 끊임없이 계층 제도를 고려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다듬어 나갔다. 가정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 종교, 군대, 산업에서는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그 특권의 범위를 넘어서면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은 일본인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인 장교나 사병들이 각 점령국에서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주민들을 보고 놀란 것도 “일본은 그들에게 비록 낮은 위치지만 계층제 속에 하나의 위치를 부여하려고 하고 있다는, 그리고 계층제란 낮은 계층에 놓여진 자에게도 바람직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일본만의 산물인 것이다.
시대와 세계에 대한 채무자동양인들은 과거로부터 빚을 진 사람들이며, 그들에게 조상 숭배는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체에 대해서 인간이 지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동양인에게 과거, 다른 사람과의 나날의 접촉은 그들에게 채무를 증대시키는 요소이며, 또한 이 채무가 일본인에게 갖가지 큰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 지고 있는 모든 채무를 나타내는 ‘오블리게이션(obligations, 의무)’에 해당하는 일본말은 ‘온(恩)’이다. 이 말은 의무, 충성, 친절, 사랑에 이르는 여러 가지 말로 영역되지만 모두 원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온의 여러 가지 용법 전부를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그리고 윗사람이 아니거나 또는 적어도 자기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 행위는 불쾌한 열등감을 준다.
온은 순수한 헌신적 애정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일본인은 항상 무한한 헌신(최대의 채무)이라는 의미에서 천황, 부모로부터 받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보살핌과 수고, 교사와 주인에 대해서도 온을 느낀다. 이와 같은 채무의 윤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자가 지고 있는 의무를 이행하는 데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이 큰 빚을 지고 있는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부서적 관습들이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은 그 도덕적 채무를 서양인들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존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용법의 영향으로 그리고 카스트적 차별을 없애려는 국가의 노력의 결과로 온의 부담을 가볍고 지기 쉬운 것으로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일본에서 감정을 상하지 않고 온을 입는 것은 행복한 경우이다. 일본인은 우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음으로써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어에는 온을 받음으로써 느끼는 마음이 편치 않음을 표현하는 ‘감사하다’라는 뜻의 많은 화법이 있다. 그중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리가토’라는 표현은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를 의미한다. ‘스미마센’은 “나는 당신에게 온을 입었지만 현대 경제 조직하에서 나는 당신에게 진 온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입장에 놓여진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의미이다. ‘가타지케나이’는 “나는 모욕을 당하였다.”는 의미로 지금도 전통적인 상인이 손님에게 예의를 나타낼 때 쓰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어떤 개괄적인 논의보다도 더욱더 온의 힘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상반되는 기분을 품으면서 온을 입는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구조화된 관계에서 온이 내포하는 커다란 채무는 때로는 사람들을 자극시켜 한결같이 전력을 다하여 은혜를 갚게 만든다.
이러한 예는 일본에서 가장 저명한 소설가 중 한 사람인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라는 유명한 소설 속에서 선명히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도련님은 고슴도치라는 별명을 붙인 한 사람으로부터 빙수를 한 그릇 얻어먹는다. 며칠 뒤 그가 도련님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다고 누군가 고자질하자 도련님은 이를 그대로 믿고 고슴도치로부터 받은 온을 마음속에 걸려 한다. 다음 날 그는 고슴도치의 책상 위에 빙수값을 내던지는데 이것은 빙수 한 그릇의 온을 입은 것을 갚은 뒤라야만 두 사람 사이의 당면 문제, 즉 도련님에게 한 고슴도치의 모욕적인 언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존중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는 데에는 더없이 타고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만분의 일 갚기일본인은 양에서나 기한에서 무제한적인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과 똑같이 깊고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양친에 대한 보은인 고(孝)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忠)라는 두 종류의 의무를 일괄하여 가리키는 명칭이다. 기무라는 이 두 개의 의무는 모두 강제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중된 것이며, 또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기무는 모두 무조건적이다. 다만 일본에서 효행이란 천황에 대한 의무와 충돌할 경우에만 폐기할 수 있는 것으로 부모가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든가 자신의 행복을 깨뜨린다는 이유만으로는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실생활에서도 결혼한 뒤에 이처럼 무거운 효행의 의무를 지게 되는 사람의 예는 흔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일들이 효행 속에 포함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채무에 대해 자식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보은이다. 또한 효행은 가장의 어깨에 걸려 있는 수많은 책임을 하나하나 이행하는 것, 즉 아이들을 부양하고, 자식에게 교육을 받게 하고, 재산 관리의 책임을 맡고, 보호가 필요한 친척을 맡아 보호하고, 기타 모든 일상적 일을 다할 것을 명령한다.
일본에서 천황은 전 국민을 통일하여 반감 없이 국가에 봉사하도록 하는 수단으로써 필요했기 때문에 단순히 천황을 국민의 아버지로 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였다. 왜냐하면 가정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든 의무를 다하여 은혜를 갚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존경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최고의 덕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주(忠)는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선량한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받들어야 한다.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들은 이를 위해 헌법에다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될 수 없는 존재’로서 국무장관의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조항을 삽입하였다. 사실 천황은 거의 700년간 실권을 지닌 통치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황을 무대 뒤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쉬웠지만 모든 일본인이 마음속에서 무조건적인 최고의 덕인 주를 천황에 대하여 바치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메이지유신에 그간 쇼군에 대한 의무였던 주를 상징적 천황에게 전환시켰다. 천황의 실권은 변하지 않았지만 정신적 영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 주는 최고 사제이며,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인 신성한 수장, 곧 천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되었다.
주를 천황에게로 옮길 때 더욱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에 걸쳐 유일한 왕실이 계속하여 왕위에 등극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이제까지 왕조가 교체되는 일이 없이 항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져 왔다. 그리고 근대 일본에서는 주를 특히 천황 한 사람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는데 이를 통해 일반 행정에서는 주는 죽음에서부터 납세에 이르는 모든 의무를 수행시키는 강제력이 되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의 최고 의무, 즉 고온(皇恩)을 갚는 일이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세계는 이 주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 사실을 목격하였다. 끝까지 항전할 것이라는 서구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던 것이다. 천황의 목소리가 방송되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 선언이 읽혀진 다음에는 모든 사람이 그것에 승복하였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