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조너선 카우프만 지음 | 생각의힘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조너선 카우프만 지음
생각의힘 / 2023년 2월 / 448쪽 / 22,000원
상하이가 부른다
가부장유대인들은 기원전 587년에 처음 바그다드에 왔다. 그때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포위전을 치러 승리하자 1만 명의 유대인 장인과 학자, 지도자들을 바그다드로 끌고 왔는데, 이는 성경에서 ‘바빌론 유수’라고 부르는 일이다. ‘바빌론 유수’는 유대의 학문과 종교적 혁신이 꽃피어 다음 몇천 년에 걸쳐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생존하고 번창하는 데 활용하게 될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도구, 사고방식을 제공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지만 그렇다고 노예처럼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바그다드의 경제를 튼튼히 하는 일을 유대인들에게 의존했다. 유대인들이 상인이 되어 문어발처럼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왕국의 여러 지역들 간 무역에 종사하도록 장려했다.
그런데 이 역동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공동체를 주관하는 중추에 서순 가문이 버티고 있었다. 중동 전역에 걸쳐 금과 비단, 향신료, 양모를 거래하는 서순가는 바그다드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집안이 되었다. 1700년대 후반부터 오스만 튀르크는 서순 가문의 리더를 ‘나시(Nasi)’, 즉 바그다드의 유력한 유대인 주민들과 상대할 때 중재자 역할을 하는 ‘유대인의 태수’로 임명했고, 이러한 지위에 힘입어 서순가는 바그다드에서부터 페르시아만을 거쳐 아시아까지 뻗은 다국적 경제 제국을 건설했다.
데이비드 서순은 1792년에 태어나 장래 나시가 되도록 교육받았다. 그런데 데이비드가 나시 역할을 승계할 준비를 하던 때에 서순가와 바그다드 유대인들이 그동안 누렸던 지위에 위기가 닥쳤다. 오스만 통치자들 간 권력투쟁이 벌어져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분파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경제를 부양할 돈이 절실했던 오스만 튀르크인들은 몸값을 요구하며 서순가와 부유한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투옥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나빠지자 일부 유대인들은 영국 식민지 당국의 보호를 구하며 인도로 달아났다.
일촉즉발의 정치적 상황에 겁을 먹은 데이비드의 아버지도 나시 직위에서 물러나 데이비드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드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나시 직위가 더는 큰 권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 대신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바그다드 통치자들의 부패를 고발하고 바그다드의 유대인과 서순가를 대표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오스만 술탄에게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중앙정부를 믿었던 그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그가 배신했다는 소문은 곧장 바그다드에 전해졌다. 데이비드는 체포되었고 오스만 파샤는 가족이 보석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태를 직접 처리하기로 한 연로한 아버지는 뇌물을 써서 감옥에서 아들을 빼낸 다음, 변장을 시켜 그를 안전한 곳으로 실어다 줄 배에 태웠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분노와 무력감에 사로잡힌 채 바그다드를 떠났다. 그는 첫 아내가 죽은 뒤 바로 얼마 전에 재혼했는데, 갓 결혼한 신부와 자식들을 버리고 가는 셈이었다. 그에게 약속되어 있었던 서순가의 찬란한 영화, 그들의 부와 지위가 이제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데이비드는 출항하는 배 위에 서서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기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데이비드는 오스만 튀르크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이란의 항구 도시 부시르에 상륙했는데, 상황이 나빠지면서 바그다드를 떠난 피난민들 다수가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었다. 한편 이전에 서순가와 거래했던 여러 상인들이 그에게 돈을 빌려주어, 그는 기반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바그다드에 있던 그의 아버지는 상품과 돈을 실은 캐러밴을 몰래 반출해 아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1830년, 데이비드가 바그다드에서 도주한 지 일 년 뒤에 나머지 가족도 부시르에 있는 그에게 합류했다. 그런데 연로한 아버지는 바그다드에서부터 부시르까지의 긴 여정이 너무 무리였는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품에서 세상을 떴다. 아내와 자식들과 재회한 데이비드는 이후 봄베이에 놓여 있는 기회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했고, 몇 년 뒤 갓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마침내 영국의 지배가 제공하는 안전과 기회를 찾아서 그곳으로 옮겨 가기로 결심했다.
데이비드 서순이 봄베이에 상륙한 그때 대영 제국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인도 곳곳과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해 세계의 거의 삼분의 일이 영국 치하에 있었고, 수십 년 동안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와 아시아 내 국가가 인가한 독점무역권을 보유했다. 그런데 데이비드가 봄베이에 도착한 해인 1832년에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의 독점을 폐지하여 아시아 전역의 무역을 민간 회사와 개인들에게 개방했다. 새로운 자유방임 경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봄베이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데이비드는 영국인들과 손잡고 대영 제국의 팽창이라는 한배에 탔다.
참고로 바그다드에서 서순가는 중동 전역에 걸쳐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연줄과 인맥에 의지해 왔다. 하지만 이제 데이비드는 새로운 지역에서 기존에 자리 잡은 네트워크 없이 새 출발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네트워크를 일구어 낼 것인가? 그의 사업 기법을 배우고 새로운 통신과 산업화, 운송 수단으로 창출되고 있는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된 충직한 인력 집단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
데이비드는 서순 학교라는 발상을 들고 나왔다. 그는 처음에는 바그다드에서 그다음에는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온 유대인 피난민을 끌어들여서 그들을 충직한 직원들로 탈바꿈시킬, 일종의 서순 기업 도시를 세웠다. 당시 가난과 싸우는 여러 가족들은 바그다드와 시리아,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 십 대 아들들을 보내왔는데, 그들은 데이비드 서순 자선 기구에 등록했고 거기서 데이비드가 만든 교과서를 가지고 아랍어, 지리, 산술, 회계, 히브리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사무원으로 고용되어 서순 창고에서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기록하거나 영국 구매자들에게 면화 포대를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유대교의 안식일이면 서순 창고는 문을 닫았고, 직원들은 데이비드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거나 나중에는 그가 건립한 봄베이 최초의 시너고그에 모였다. 직원들은 몸이 아플 경우 데이비드가 설립하고 기부한 서순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면 데이비드 서순 기술학교에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은퇴했는데 돌봐줄 가족이 없는 직원들은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돈을 받았고, 죽으면 그들은 서순이 기증한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이처럼 학교부터 무덤까지 이어지는 데이비드의 사회적 네트워크 덕분에 서순가의 창고와 사무실로 직원들의 행렬이 갈수록 줄을 이었다. 참고로 그 네트워크 유지비용은 오늘날 가치로 연간 약 30만 달러가 들었고 그는 그만한 투자로 야심과 재능, 충성심을 살 수 있었다. 아무튼 봄베이에 도착한 지 10년이 지나지 않아 데이비드는 인도 최대 갑부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인도는 데이비드 서순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그는 영국인이 되었다.
데이비드가 바그다드를 한밤에 허둥지둥 도망쳤던 때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성공했었다. 부시르에서도 성공했었다. 봄베이에서도 성공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기회가 손짓하고 있었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봄베이는 이제 중국과의 무역 전망으로 들떠 있었다. 데이비드는 리스크를 마다 않는 사업가다운 눈길을 북쪽의 중국으로 그리고 상하이로 돌렸다.
아들들의 제국이자 아편의 제국1843년, 중국은 상하이를 비롯해 5개 항을 영국과의 무역에 개방하는 조약에 억지로 서명해야 했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저녁, 소형 영국 기선이 상하이 바닷가에 닻을 내렸다. 첫 영국인들이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7년 뒤 데이비드 서순의 둘째 아들 일라이어스 서순이 상하이에 발을 디뎠는데, 그의 도착은 서순가가 진정으로 지구적인 사업체로 확장하는 다음 단계를 의미했다. 참고로 자다인 매티슨이 중국을 개방시키고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하는 데 영국의 포함과 대포에 의존한 반면, 데이비드 서순은 자기 아들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아들들은 그의 대사이자 정보 요원, 판매원이자 자문이 되었다.
사업의 모든 측면과 모든 나라에 익숙해지도록 데이비드는 아들들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몇 달씩, 때로는 한 번에 여러 해 동안 순환 근무시켰다. 그리고 서순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훈련받고 공통의 종교와 문화로 서순가와 하나로 묶인 직원들이 아들들을 따라다니며 보좌했다. 아버지 데이비드는 지구적인 가문의 제국을 하나로 유지하고 아들들이 아버지의 뜻을 충성스럽게 따르도록 만드는 데 기민한 능력을 과시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봉급을 넉넉히 주었고 그들이 자체적으로 투자하도록 장려했다. 하지만 아들 중 누구도 회사의 동업자가 될 수는 없었다. 가부장 혼자서 회사를 지배했다. 참고로 그는 가족과 자식들, 손주들의 장래에 기대하는 바를 상세히 적은 유언장을 작성했다. 서순 집안 아들들은 바그다드 출신 유대인 여자와 결혼해서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 계속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한편 일라이어스는 임대료를 내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상하이에 자체 창고를 지었다. 그는 아편과 인도산 향신료와 모직을 중국인들에게 팔고, 비단과 차, 가죽을 구입한 다음 인도로 돌아갈 때 텅 빈 배를 채우고자 하는 아편 화물선 선장들에게 팔았다. 또 중국 상인들과의 인맥을 이용해 인도로 상품을 발송하려는 다른 상인들에게 중개인 역할을 했고, 그들의 화물 적재 공간을 채워 주었다. 그러자 상하이로 오는 선박들은 일라이어스의 부두에서 공간을 얻으려고 다투기 시작했다.
다른 무역상들과의 경쟁은 치열했다. 일라이어스는 염탐의 위험을 늘 걱정했는데, 중국어를 할 줄 몰랐으므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중국인 중개인에게 의존해야 했다. ‘매판’으로 알려진 이 중개인들은 거래를 성사시키고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사업을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왔지만, 부패의 기회가 넘쳐 났다. 또 일라이어스는 자신의 물건을 중국의 다른 지방으로 보내기 위해 ‘갈취’라고도 불린 뇌물을 중국 관리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다른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불만을 가졌다. 그는 서순 상사의 돈을 훔치고 유용했다는 이유로 매판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소송을 제기했다.
일라이어스는 외국인들이 들어오자 자극을 받고 그들과 손잡고 싶어 하는 새로운 중국인 기업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며 사업 기회를 모색했다. 한편 중국 내부적으로는 긴장이 고조되며 반란과 봉기가 잇따랐고 황제는 진압에 애를 먹었다. 수만 명의 중국인 피난민들이 안전을 찾아 영국인이 다스리는 상하이 구역들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들 중 다수가 부유한 중국 상인들이었다. 일라이어스는 토지를 매입하고 단순한 목조 가옥을 지어 피난민 가족들에게 세를 주기 시작했다.
한편 봄베이에서는 데이비드가 일라이어스의 여섯 동생들을 인도와 중국 사이 곳곳에 파견했고, 그중 일부는 일라이어스와 함께 일하도록 보냈다. 이처럼 한 도시에 같이 산 적이 거의 없던 서순가의 8형제는 1860년부터 1900년까지 서로 7,0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데이비드는 아들들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그들은 집안에서 도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면화와 아편 가격을 서로 비교했으며, 사업 기밀이 유출될까 걱정하고, 직원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한 복지 개선안에 관해 논의했다.
일라이어스에게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임무를 주고 상하이에 파견한 뒤 거의 20년 만인 1862년 데이비드는 아들을 봄베이로 불러들여 가업의 승계 문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제 일흔이었다. 일라이어스와 큰형 압둘라가 함께 일하며 사업을 물려받을 때가 온 것이다. 장남이라는 이점을 가진 압둘라가 승계자로는 더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형은 일라이어스가 상하이 시절을 거치며 얼마나 성장하고 바뀌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더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했다. 그는 사업을 확장했고, 지사들을 개설하며 중국 곳곳을 누비고 일본까지 갔다. 그는 가문과 아버지의 사업을 성공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목표에만 매진한 삶을 살았다.
상하이에서 고독하게 사업에 전념했던 일라이어스와는 대조적으로, 압둘라는 봄베이의 새로 지은 대저택에서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얼마간 성공적으로 근무하고 돌아온 뒤 아버지 곁에 머물며 사업을 보좌했다. 데이비드는 큰아들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고 압둘라는 가문의 자선 사업을 관장하며 공개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그리고 1864년 11월 어느 오후에 데이비드 서순은 상수시 저택의 정원 한 군데를 산책한 다음 침실로 물러가 홍콩, 상하이, 봄베이, 런던으로 멀리 나가 있는 아들들에게 매일같이 보내는 지침 편지를 썼다. 이후 잠자리에 든 그는 72세로 영면했다. 아들들 모두 추도식에 참석했고 서순가 소유의 선박들과 창고에는 유니언잭을 조기로 내걸었다.
데이비드의 유언장에 따라 압둘라가 새 회장이 되고 일라이어스는 부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미래가 점차 분명해지면서 일라이어스의 원망은 커져 갔다. 압둘라는 일라이어스와 일라이어스의 아들인 스물셋의 제이콥에게 상하이, 홍콩, 페르시아 항구들을 관장하는 순회 경영자 자리를 제의했는데, 이는 20년 전 일라이어스의 여정 상당 부분을 되풀이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압둘라가 회장직을 그만둘 때가 오면 서순가의 지도자 자리는 당연히 그의 아들에게 갈 것이었다. 일라이어스는 다른 형제들을 부추겨 큰형에게 반기를 들려고 했지만, 압둘라는 동생들을 런던으로 파견하고 넉넉한 수입을 약속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상하이에서 일군 성과는 일라이어스가 아버지의 사업 감각을 물려받았다는 점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압둘라는 아버지한테서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이 못 지난 1867년 가을 일라이어스는 가족의 회사에서 물러나 자신만의 새 회사를 차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른 형제들은 아무도 합류하지 않았다. 모두 압둘라 곁에 남기로 했다. 압둘라는 가족들에게 일라이어스가 상하이에 작은 무역 회사를 세우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생의 회사가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는 더 강력한 모회사를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아들인 제이콥과 손을 잡고 일라이어스는 새 회사의 이름을 E. D. 서순 회사로 정하고 상하이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두 회사가 헷갈리는 중국인들은 압둘라의 회사를 구 서순 회사로, 일라이어스의 회사를 신 서순 회사로 불렀다. 그리고 ‘신 서순 회사’의 사세가 커지면서 일라이어스와 다른 형제들 간의 사회적 접촉도 끊겼다. 그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만나고 생일이면 격식을 갖춘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그들 최대의 투자이자 그들의 부와 영향력을 다져 줄 상품으로부터 이득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편이었다.
로라와 엘리한 세대 만에 데이비드 서순과 그 아들들은 바그다드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에서 영국 재계와 사교계의 정점으로 뛰어올랐다. 그들은 식민지 인도의 의회에 참여했고 영국 식민 정부에 자문을 했다. 자택에 국왕을 초대해 함께 어울리거나 윈저성으로 국왕을 직접 만나러 갔다. 그들은 증기선과 전신, 현대적인 은행 등 현대 자본주의적인 여러 수단들을 선구적으로 활용했다. 외국 무역상들에게 상하이를 억지로 개방해야 했던 중국 황제는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궁극적으로는 몰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서순가는 계속해서 사세를 확장했고 중국과 비즈니스에 대한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상하이의 영자 신문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1881년에 “유럽에서 서순이란 이름은 로스차일드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중국 상인들 사이에서 “그 이름은 마법의 이름”이라고 썼다.
한편 서순가를 비롯한 성공 스토리가 퍼지면서 영국과 미국, 유럽에서 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붙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속속 들어왔다. 그런데 데이비드 서순의 가장 두드러진 혁신―매년 새로운 직원을 가족 회사에 공급하는 서순 학교―은 한편으로 위험을 안고 있기도 했다. 중국에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가난한 바그다드 출신 사람들이 모여들며 야심을 키워갔다. 서순은 찍어 내듯 돈을 벌고 있었는데, 실은 경쟁자도 숱하게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