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논어》
기무라 에이이치 지음 | 에코리브르
공자와《논어》
기무라 에이이치 지음
에코리브르 / 2020년 10월 / 792쪽 / 39,000원
공자의 전기
공자의 가계ㆍ출생ㆍ유소년 시대 완성된 형태의 공자 전기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사기》의〈공자세가〉다. 사마천은 공자를 매우 존경하여 열전(列傳)에 넣지 않고 특별히 세가(世家) 한 편을 만들었는데, 이〈공자세가〉에 공자의 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다. 방숙은 백하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을 낳았다. 흘은 안씨(顔氏)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다”라는 한 구절이 겨우 공자의 가계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의 ‘야합’으로 공자가 태어났다는 것 이상은 말하고 있지 않다. 생각건대 자랑할 만한 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공자의 출생과 가정환경을 볼 차례다.〈사기세가〉에 아주 세련되지 않은 기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흘(紇)은 안씨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니구(尼丘)에서 기도한 뒤 공자를 얻었다. 노양공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구(丘)라고 이름하였다. 자는 중니이고 성은 공씨다. 구가 태어난 후 숙량흘이 세상을 떠나 방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방산은 노나라 동부에 있어서 공자는 아버지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궁금해 했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숨겼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곧 오보의 거리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대개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소를 알려주어 그 후에야 비로소 방산에 합장했다.’
정리하면, 공자의 유소년 시기는 하급 사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고아로 성장했다는 의미에서 온갖 고난을 맛본 박복한 것이었다. 다행히 타고난 건강한 심신과 탁월한 소양으로 고학자습(苦學自習)을 통해 육예를 몸에 익히고, 점차 남 못지않은 성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가 살던 노나라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커다란 전환기였다. 따라서 머잖아 그가 성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이런 환경이 그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공자의 청소년 시기 중국 주대(周代)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 중 사(士)족은 농ㆍ공ㆍ상과 달리 공직에 나갈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공직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설령 말단 사무직이라 해도 역인의 역할을 분담하자면 최소한의 획일적인 교양은 필요했다. 주대에 사족은 취직하는데 필수 과목으로 육예, 즉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를 배워야 했다. 그래서 사족의 자제는 소년 시기에 가숙이나 향당의 학교에서 스승에게 육예를 배웠다. 그러나 공자의 유소년 시기를 고찰한다면, 어머니의 체면이 떳떳하지 못한 데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빈곤으로 도저히 스승이 있는 학교에 갈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머니로서는 공자가 어떻게 하든 육예를 익혀 남 못지않게 사족으로서 일신을 세워주기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을 것이고, 공자도 체력과 사려가 받쳐주는 성실한 노력가여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했을 것이다. 결국 공자는 육예의 학습을 고학자습으로 마쳤을 것이다.《논어》〈자한〉편은 후년에 공자가 유년 시대를 회상한 말의 단편을 싣고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기를 …… “내 젊었을 적에 가난하고 천했기 때문에 비천한 일에 능함이 많으니, 군자는 능한 것이 많은가? 많지 않다.” 뇌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세상에 등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주를 익혔다’고 하셨다.”’ 이 두 공자의 말 중 전자는 “자신은 소년 시절에 가난하고 천했기에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하급직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자신은 스승 밑에서 배울 기회가 없어 취직 자격도 갖추지 못했기에 닥치는 대로 육예를 자력으로 배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서른 살에 자립하였다(三十而立)’는 공자의 말은 “서른 살에 이르러 이미 자타가 인정하는 독자적인 학자로 성장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공자가 추구한 학문이 사족의 이상인 교양 있는 위정자로서 군자의 학문인 점을 감안하면, 이 말은 한편 공자가 점차 정치가와 교양인으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공자세가〉에 30세부터 40대에 걸쳐 나열되어 있는 다수의 사건을 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런 설화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미 공자가 대외적으로 이름난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한편 공자가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사기세가〉에 의하면 42세 때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귀국한 것은 물론 정계가 정상화될 즈음 관직에 임명될 것을 고려해서였겠지만, 선군 소후(昭候)를 국외에서 객사하게 만들고 정공을 옹립한 삼가의 세력은 더욱더 강해져 있었다. 게다가 실력자 계평자 사후 대를 이은 계환자(季桓子)가 가신의 대립ㆍ횡포에 크게 고뇌할 정도로 정계는 하극상의 양상이 한층 더 심각해져 공자가 정상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관직에 임용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공자는 각 방면에서 관직을 권유받았고 공자 자신도 어떻게 해서든지 일찍 관직에 나아갔으면 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지만, 50세에 이르도록 결국 때가 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 기간인 7~8년 동안 생활의 문제도 있었으며 연구의 문제도 있어 개인 학교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 기간의 사정에 대해서는〈사기세가〉가 다음과 같이 가록하고 있다.
‘환자가 총애하는 신하 중에 중양회(仲梁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호는 중양회를 내쫓으려고 하였으나 공산불뉴(公山不?)가 그것을 말렸다. 그해 가을, 중양회가 더욱 교만해지자 양호가 그를 체포했다. 환자가 노하자 양호는 환자마저 가두었는데, 더불어 맹약을 한 후에야 풀어주었다. 양호는 이로 인해서 더욱 계씨를 가볍게 여겼다. 계씨 또한 분수를 모르고 공실보다 지나치게 행동했기 때문에 가신이 국정을 잡은 꼴이 되었다. 이에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가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시ㆍ서ㆍ예ㆍ악을 편찬했다. 제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글을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자의 천하 유세 공자는 50대 후반부터 70세에 가까운 시기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다. 공자의 천하 유세에 대해서는 논할 바가 매우 많으나 그중 한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공자의 유세가 14년간에 걸쳐서 위→포→위→광→송→진→채→섭→진→위로 계속되었다고 보았지만, 그가 각지에서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는 전부 서술하지 않았다. 다만 위나라에 대해서는《논어》20장에 걸쳐 관련 기사가 있으므로 언급할 것 역시 매우 많다. 이것이 한 가지다.
공자가 망명ㆍ유세의 대상으로 어째서 위→진 코스를 택했는지도 한 가지 문제다. 생각건대 제나라로 가지 않은 것은 일찍이 유년에 제나라에서 유학하여 그곳 실정을 알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상 실현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시 천하 정세로 볼 때 북방 여러 나라의 중심인 진(晉)나라와 남방 여러 나라의 중심인 초나라에는 갈 의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다. 단, 초나라와는 진ㆍ채에서 접촉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 정나라에 관한 기사는《논어》4장이 있고 몇몇 설화도 전하지만, 이것도 송ㆍ진 사이에서 다소 접촉한 정도일 것이다. 이런 것들의 실정에 대해서도 아직 아무것도 논하지 않았다. 이것이 또 한 가지다.
셋째로, 공자의 천하 유세를 좇은 제자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논어》의 위나라에 관한 기사를 보면, 자로ㆍ염유ㆍ자공 세 사람은 처음부터 유세의 대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좌전》에 의하면 정공 15년 봄, 주(?)의 은공이 노나라에 왔을 때, 자공은 친히 그 예를 살펴보았고 애공 7년 증(?)의 모임에는 계강자의 청에 의해 교섭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때는 일시적으로 공자의 허락을 받아 유세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유세의 의미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면, 어려움의 연속이었던 14년간의 유세는 공자 자신의 생애로 보나 그것이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으로 보나 또 훗날 전국제자(戰國諸子)의 유세의 근원을 이룬 점으로 보나 대단히 유의미하다. 당시 및 후대에 미친 다각적 영향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고찰하기로 하고, 지금은《논어》〈위정〉편의 다음 두 구에 주목하고 싶다. ‘나는 ……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곧 그 이치를 알고 따를 수 있었고, ……’
공자의 만년과 그 사업 만년의 공자:《좌전》에 의하면 공자가 천하유력을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온 때는 예공 11년 겨울(기원전 484년, 공자 68~69세)이다. 그리고 공자가 죽은 것은《좌전》에 의하면 애공 16년(기원전 479년, 공자 73~74세) 4월 기축으로, 그동안이라고 해봐야 만 4년 반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간의 업적은 그의 생애에 걸친 사업의 총결산이자 학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후세를 위해 실마리를 제시하고 계통을 이어준 진실로 위대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그 자신의 사회적 위치는 말하자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정치가로서 생명은 이미 끝났고 불우한 처지에서 만년을 지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판정은 그와 다르다.
그가 생애의 최종 단계에서 이룬 문화 사업과 교육 사업이야말로 세계사에 보기 드문 대성공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이상주의에 입각해 늘 전향적으로 진리 추구와 그 실현을 의도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해 보이는 만년이라 할지라도 결코 무사평정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신변에는 불행한 사건이 잇따라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건을 견뎌내고 나이가 들어 약해진 심신과 싸우면서 의연하게 인류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모조리 불태운 지조가 있다. 그리고《논어》의 여러 장이 전하는 바처럼, 그 자신이 “일흔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규범에 벗어나지 않았다”(《논어》〈위정〉)고 술회한 것처럼, 진실로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투철한 성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이 시기다.
공자 학교: 공자 시대는 주나라 봉건제도가 붕괴되던 때로, 이윽고 전국시대로 들어가려고 하는 춘추시대 말기였다. 결국 봉건제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새로운 사태가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었다. 주의 봉건제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서민을 위한 학교는 없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사(士) 이상의 신분에 속하는 지배계급의 자제를 유사ㆍ대부ㆍ경ㆍ제후ㆍ천자 등의 적격자로 양성하는 학교는 주나라 봉건제도 하에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춘추 이래의 봉건제도의 붕괴로 당연히 이 학교 제도도 무너졌다. 그런데 공자는 전통적인 삼대의 문화정신을 존중하고 주봉건제도를 합리화하여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가 만년에는 교육에 집중하여 학교를 연 것이므로 당연히 그 학교는 고래로 이어온 학교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합리화한 모습을 취했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가르치는 데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고, 또 “[사람의]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에 의해서 서로 멀어진다”고도 하여, 사람은 누구라도 교육ㆍ학문에 의해 진보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편 “10호쯤 되는 조그마한 읍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어도,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는 자신의 체험에 의한 서술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직 상지와 하우만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여 선천적인 능력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신분의 귀천에 의해 천성을 차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군자이면서 인하지 못한 자는 있어도 소인으로서 인한 자는 아직 없다”는 것도 군자는 교육을 받은 계층이고 소인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공자의 집에는 각계각층의 사람이 출입했고 호향(互鄕)의 동자와 궐당(闕黨)의 동자라도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은 소외시키지 않고 가르침을 주었다. 공자는 “포 한 묶음 이상을 가지고 와 스승 뵙는 예를 차리기만 해도,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교육 목적은 선비답고 부끄럽지 않은 교양 있는 인격자로 군자를 길러내는 것이어서, 농ㆍ공ㆍ상민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이 아니었음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번지가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자, 선생님께서는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하셨다. 채전(菜田)을 가꾸는 것을 배우기를 청하자, “나는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 하셨다. 번지가 나가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소인(小人)이구나! 번수(樊須)여!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실정대로 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올 것이니, 어찌 농사짓는 것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선비를 군자로 양성하는 교육이기 때문에 전통에 따른다면 보통교육으로서 예악사어서수의 육예를 닦고 고등교육으로서 시서예악을 학습하게 된다. 실제로 공자 학교는 고등교육의 도량이었던 만큼 그 전제로서 육예의 교양을 중요시하면서 시서예악의 연구를 필수 과목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필수 과목이 그것만은 아니었다.〈술이〉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네 가지로써 가르치셨으니, 문ㆍ행ㆍ충ㆍ신(文ㆍ行ㆍ忠ㆍ信)이었다.’
제자 가운데 누군가가 공문의 교과를 이 네 개로 전했던 것이리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하고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훈시한 바의, 교과 일반에 대한 안내다.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하고 ……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라는 말에 행(行), 충(忠), 신(信)이라는 3과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문(文)의 과일 것이다.
공자의 문화 사업과 학교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유가 후학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격변하는 사회ㆍ정치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자백가의 화려한 모양에 압도되어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도 여겨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족계급 일반에 의해 착실하게 지반을 다져가면서 장래 관료제 국가를 위한 관리 적격자 계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300년 뒤 한무제가 중앙집권적 대통일국가를 완성하여 관리가 대거 필요한 시기가 되었을 때 결국 그것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은 유학 말고는 없었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2000년간 중국의 관료 지배는 유학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논어》의 성립
《논어》20편의 구성 현존하는《논어》에는 500에 가까운 장이 20편에 담겨 있다. 주자의《집주(集注)》본에 의해, 전체의 편과 각 편의 장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학이〉제1(16장),〈위정〉제2(24장),〈팔일〉제3(26장),〈이인〉제4(26장),〈공야장〉제5(27장),〈옹야〉제6(28장),〈술이〉제7(37장),〈태백〉제8(21장),〈자한〉제9(30장),〈향당〉제10(1장 17절),〈선진〉제11(25장),〈안연〉제12(24장),〈자로〉제13장(30장),〈헌문〉제14(47장),〈위령공〉제15(41장),〈계씨〉제16(14장),〈양화〉제17(26장),〈미자〉제18(11장),〈자장〉제19(25장),〈요왈〉제20(3장).’ 이 중 몇 편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