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
김준혁 지음 | 더봄
리더라면 정조처럼
김준혁 지음
더봄 / 2020년 6월 / 367쪽 / 18,000원
공부하는 군주
엄청난 독서를 통해 지식을 넓히다정조는 천성적으로 책을 통해 지식 얻기를 좋아한 것도 있지만, 스스로 노력도 엄청나게 했다. 신하들은 정조가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여 더 이상 책을 보지 말라고 건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조는 환관이나 궁녀들과 노닥거리기보다는 사대부들과 더불어 경전을 논의하고 함께 책읽기를 즐겼고,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발견하곤 했는데, 이때마다 피곤함을 잊고 다시 책을 보았다.
그렇다면 정조의 독서법은 어떠한가?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반드시 책을 두 번씩 보았다. 이는 정조와 혜경궁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정조는 일단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한 번 익히고, 두 번째로 다시 정독을 해서 그 책이 갖고 있는 내용을 깊이 파악하는 방법을 취했다. 정조는 독서를 함에 있어 글 뜻을 깊이 음미하려면 참을성 있게 독서를 해야 하는데, 이를 잘 기억하려면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대목에 감동받았는지, 혹은 깊이 생각할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을 했는데, 그 기록들의 상당수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는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신기한 것을 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다 보면 절로 환히 깨닫는 곳이 있고, 평상적인 내용 중에 자연히 오묘한 부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정조는 당대의 사대부들이 대부분 많이 보려고만 들고 치밀하게 읽는 데는 힘쓰지 않으며, 신기한 것만 좋아하고 평상적인 것은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도(道)를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많은 책보다도 한 권을 깊이 있게 읽어 그 안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세상의 진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조는 책을 읽을 때는 먼저 대요(大要)를 평가하라고 했다. 대요를 파악하면 만 가지 현상이 하나의 이치로 꿰어져서 반만 노력하고도 효과를 배로 거둘 수 있지만, 대요를 파악하지 못하면 모든 사물이 서로 연관되지 않아서 종신토록 힘써 외우고 읽어도 이루는 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독서에 대한 이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책을 읽는 시대가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지식을 얻는 시대로 변했다. 이것이 시대의 대세이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튜브를 통해 영상으로 만나는 지식과 깊은 밤 홀로 앉아 종이책을 읽으며 깨닫는 지식은 비교할 수 없다. 세상을 이끌어나가고 싶은 리더들은 반드시 정조처럼 역사공부를 기본으로 실용적인 책을 선택하고 정밀하게 책을 읽고 자신이 읽은 것을 기록하여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지식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기 바란다.
무예 수련으로 신체를 단련하다리더가 건강이 좋지 않으면 조직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관리가 되는데, 이때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운영될 수가 있다. 그래서 리더는 항상 건강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필수이고,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 역시 리더십의 중요한 기본이다. 정조는 공부도 많이 했지만 신체단련을 위한 운동도 중요시했다. 정조가 가장 많이 한 신체단련은 단연코 활쏘기이다. 그러나 활쏘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정조는 검술과 창술도 함께 연마했다. 기초적인 체력훈련을 지속적으로 한 것이다. 정조가 이처럼 검술, 창술, 활쏘기 등의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것은 사도세자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사도세자는 무예광이었다. 실제로 엄청난 무예의 고수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18기 무예’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도세자가 정리한 무예이다.
정조가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게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할 것을 명령한 것도 본인이 이 무예에 정통했었기 때문에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정조는 보통의 무예인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무예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이 무사들보다도 더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일반 문반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무반들 역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조가 이렇게 무예 실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는 반드시 무예를 수련했다고 한다. 현대의 리더들 역시 시간을 정해놓고 운동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매우 효율적인 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리더들은 반드시 건강을 위해 시간을 정해놓고 운동을 하기 바란다. 그도 아니라면 짜투리 시간에라도 걷기를 통해 신체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다.
시대의 변화를 읽다
국가 개혁의 이념을 명확히 밝히다건국할 때나 창업할 때, 그리고 사회를 위한 조직을 만들 때는 반드시 명확한 이념과 목표가 서야 한다. 대의명분이 올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비록 조직은 창립될 수 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망가진다. 정조는 정치를 함에 있어 명분을 충분히 마련하고 이를 재위 내내 실천하기 위해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가 국왕이 된 후 천명했던 명분, 즉 4대 개혁정책은 정조 시대 가장 중요한 정당성이었다.
1778년 1월 1일은 정조가 국왕이 된 지 햇수로 3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전 국왕들과 달리 새해 첫날 백성들을 위한 특별 신년사인 윤음을 전국에 하교했다. 사실 정조는 자신이 아무리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국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노론이 권력을 독점해 온 상황에서 자신이 국왕이 된 지 만 2년도 안 되어 개혁을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개혁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조는 스스로가 부족한 국왕임을 이야기하며 바로 지금이 국가 개혁을 추진할 때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아, 내가 정사를 시작할 때 책임지고 잘해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선왕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독실하지 못하고 크게 변화시키는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아 풍속이 어그러져서 인재(人才)가 흥기하지 못하고 기강이 무너져서 재용(財用)도 고갈되었다. 게다가 반역의 무리들이 연이어 생겨나 국세(國勢)가 안정되지 않으니, 오늘날의 정세를 옛날과 비교하면 어느 때에 해당하겠는가. 과인은 부덕하여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더라도 아, 너희 모든 직위에 있는 백관들은 어찌 감히 각기 너희의 직위를 공경히 지키고 맡은 직분을 생각하여, 나 한 사람을 받들지 않는가. 더구나 지금 새해가 되어 봄기운이 돌아 만물이 모두 소생하고 있다. 천도(天道)는 만물을 발육시키는 계절에 이르렀고 왕정(王政)은 유신(維新)해야 할 기회이니, 시기에 맞게 만물을 발육시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개혁의 의지를 천명한 정조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제활성화 정책을 제시했다. 농업과 잠업을 활성화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만들고, 국가의 토목공사에 강제로 노동하는 각종 요역(?役)과 세금을 가볍게 해주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고통을 없게 하고, 백성들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여 안정된 생활의 즐거움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을 국왕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중앙의 관리들과 지방의 관리들이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몇 달 뒤 영조의 삼년상을 마치고 정조는 1778년 6월 4일에 처음으로 대소신료들을 모아놓고 인정전에서 조회를 개최했다. 정조는 이 자리에서 국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4가지 개혁의 방향을 이야기했다. 이른바 ‘경장대고’(更張大誥)라는 것이다. ‘경장’은 개혁을 말하는 것이고, ‘대고’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크게 고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대고’는 원래 중국 고대 이상국가인 주나라의 문왕이 백성들에게 자신이 국왕이 되고 나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 정조는 주나라 문왕을 계승한 이상적인 군주라는 것을 조정 관료와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는 당시의 조선은 큰 병이 든 사람이 진원(眞元)이 허약해져서 혈맥이 막히고 혹이 불거진 상황과도 같다고 인식했다. 언제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이를 고치는 것이 국왕이 할 일이라고 정조는 생각하고 개혁을 선언한 것이다. 정조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불평등 관계에 있는 하층민의 소외정책을 개선하고 인권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싶었다. 아울러 기득권층의 특권을 분산시키고 싶었다. 정조는 양반사대부 중심의 사회에서 ‘민국’(民國)의 주체인 백성 중심의 사회로 만들고 싶었다. 더불어 백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노론 위주의 기득권층을 압박하여 조선의 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정조는 이를 위하여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4대 과제를 제시했다. ‘민산(民産), 인재(人才), 융정(戎政), 재용(財用)’ 개혁이다. 이는 백성들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고, 인재를 육성하여 나라 발전의 기반이 되게 하고, 국방을 개혁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리더들 역시 새로운 창업을 시작하거나 조직을 구성할 때 조직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힘 있는 명분을 정확히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제시 없이 시작하면,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사심(私心)만 읽혀질 뿐이다. 반드시 올바른 명분을, 즉 정명(正名)을 만들어야 한다.
인재등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다조선이 건국되고 처음부터 서얼제도가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들과 동생들은 조선 건국의 주체였고, 할머니가 천민이었던 정도전도 조선 건국의 주체이자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은 정도전 같은 이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정실부인 이외의 자식들은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서얼제도의 시초이다. 서얼차별은 이후 계속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었고, 차별을 철폐하자는 서얼허통 논의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허통논리는 사람의 재능과 품성이 출생처의 귀천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등용하되, 청요직(淸要職)은 주지 말자는 제한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신분질서와 관련하여 반대했다. 그 요지는 첫째, 존비(尊卑)의 등급을 엄격히 해야 하고, 둘째, 선왕의 법을 지켜야 하며, 셋째, 이들을 등용하면 명분이 문란해진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지키겠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가 지배세력들에게 만연해 있었으니 조선이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광조나 율곡 이이 같은 이들은 서얼을 반드시 허통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조선 후기까지 서얼 허통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777년(정조 1) 3월 21일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신분제 개혁안이 발표되었다. 바로 ‘서얼허통’에 대한 정조의 결단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발표한 4대 개혁과제의 두 번째가 인재 육성이었기 때문에 서얼허통을 통한 인재 찾기가 매우 중요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뛰어난 인재들을 두루 찾을 수 있었고, 성균관에 서얼 출신들이 입학을 했다. 성균관에서 서얼출신들을 뒤로 앉게 하여 배척하려는 적자들의 횡포에 대해 정조는 성균관 안에서는 적서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모두 나이 순서대로 앉게 했다. 정조의 평등사상과 인재육성 계획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조의 서얼허통은 현실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1785년 2월 17일에 서얼허통을 강력하게 시행하라는 특별 명령을 다시 내렸다. 이러한 정조의 강력한 의지로 서얼허통은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백성들과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다. 정조가 능력 있는 인재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했듯이 오늘 이 사회의 모든 분야의 리더들도 사사로운 인연으로만 사람을 선발하지 말고 능력과 인품을 갖춘 이를 뽑아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게 했으면 한다.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좋은 인재를 찾아 기용해야 진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강건한 군주
끊임없이 함양하고 성찰하여 분노를 통제하다정조와 같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깊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정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 한이 가슴 깊숙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고생했다. 여기에 더해 동궁 시절부터 자신을 해치고자 하는 이들이 늘 염탐하여 이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컸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화가 심각하게 올라오는 기질이 있었다. 화를 잘 내는 국왕은 신하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고, 이는 군주권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정조는 신하들의 옳지 못한 태도를 보면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정조 역시 자신의 이러한 부분을 정확히 알았고, 이것은 제왕의 본색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가 날 때 그대로 화를 내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에 집중했다. 바로 함양 공부(涵養工夫)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함양 공부가 가장 어렵다. 나는 함양 공부가 부족해서 언제나 느닷없이 화를 내는 병통이 있다. 함양은 바로 정양할 때의 공부이고, 성찰(省察)은 바로 행동할 때의 공부이다. 그러나 본체가 확립된 뒤에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학자의 공부는 당연히 함양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함양만 중요한 줄 알고 성찰에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기에 덕성을 존중하고 학문을 하는 것 중 어느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된다.”
정조는 함양공부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세를 성찰하는 훈련도 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훈련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지만 이를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정조의 일기 이름이 『일성록』인 것이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吾日三省)의 의미를 담아 자신도 하루에 3번씩 성찰하고자 한 것이다. 스스로가 매일같이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게 되면 이후에 나타날 잘못된 말과 행동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어려운 처지에서 일을 시작해서 온갖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분노를 참고 사람들을 배려하며 그들의 실수나 무능력을 비난하지 않고 부드럽게 깨우치는 리더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이끌어갈 리더이다. 정조처럼 말이다.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다리더가 조직을 장악하는 힘이 없다면 리더가 계획한 원래의 방향과 달리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리더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민주사회인 21세기에서는 조직 장악력이고, 전근대 국왕들에게 있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참고로 조선 후기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국왕은 군사적 힘이 없었다. 인조반정의 주체들이 중앙오군영의 대장 임명권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하면서 국왕의 군사력 장악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서인들에 의한 군사권 장악은 국왕의 힘을 미약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이후 국왕들은 군사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인정권과 각을 세우기도 하고 타협을 하기도 했다.
정조는 국왕이 되면서 군사제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군영 대장들에 대한 임명권을 되찾았다. 이는 정조 시대 새로운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조는 군영 대장 임명권만으로는 군대를 장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바로 자신이 대규모 군사훈련을 주도하며 국왕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는 이전의 국왕들에게서 볼 수 없는 정조만의 특별한 군권 장악 방법이었다. 정조는 수도권 일대의 선대왕 능행 시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수도권의 방위 상황을 점검하고, 국왕을 수행하는 중앙군의 무예를 단련시키는 기회로 활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능행 시 궁궐을 출발할 때부터 융복을 갖춰 입고 이동할 때는 말을 이용했다. 따라서 백성들이 보는 국왕의 모습은 전장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모습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