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사람그릇
진규동 지음 | 레몬북스
다산의 사람그릇
진규동 지음
레몬북스 / 2019년 10월 / 272쪽 / 14,800원
PART 1 : 금수저의 황금시대
뼈대 있는 집안의 금수저로 태어나
다산은 18년 유배에서 돌아온 지 4년 뒤인 회갑 때, 집필한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태생에 대해서 자세히 적었다.
다산의 아버지 휘는 재원으로 과거를 보지 않고 조부의 공으로 벼슬을 받아 진주 목사까지 하였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였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 지금의 남양주인 한강가의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정씨의 본관은 압해로 고려 말엽에 배천에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하면서 도읍을 정하자 한양에 살게 되었다. 집안에서 벼슬한 조상은 승문원 교리에서 시작해 이로부터 계속하여 홍문관 부제학, 병조판서 옥형, 의정부 좌찬성, 대사헌, 강원도 관찰사, 홍문관 교리, 병조참의 등으로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시운이 막혀 고향인 마현에 옮겨 살았는데 3대가 모두 무위무관으로 벼슬 없이 마쳤다. 다산은 어려서 매우 영리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으며, 9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학문의 열의: 다산은 10세가 되어 비로소 학과에 힘썼는데 이때부터 5년간 부친으로부터 자율학습을 통해서 경사와 고문을 꽤 부지런히 읽을 수 있었고, 또 시율로 칭찬을 받았다. 15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그때 부친이 다시 벼슬하여 호조 좌랑이 되어 서울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근본으로 그 뜻을 받들고 계승한 매부 이승훈의 뜻에 동참하여 성호 이익의 저서를 보고 학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가운데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나가게 되어 그 이듬해에 동림사에서 독서하였다. 1780년(정조 4년) 봄, 부친이 예천 군수로 옮겨져 예천으로 와서 황폐한 향교에서 독서하였다. 그리고 1782년 가을에 봉은사에서 경의의 과문을 익히고 학습을 하였다.
정조의 핵심인재로 등극: 1785년 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정조가 “중용강의” 80여 조에 대한 숙제를 내리면서 답을 작성토록 하였다. 이때 다산은 학식이 넓고, 성품이 우아한 친구 이벽을 찾아가 함께 왕이 낸 숙제를 하였다. 정조 임금이 답을 보고 칭찬하여 제일로 삼았다고 하였다. 도승지인 김상집이 사람들에게 “정약용이 이와 같은 칭찬을 얻었으니, 반드시 크게 떨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1787년 이래 다산에 대한 왕의 총애는 더욱 성대하였다. 1789년 문과에 합격하여 규장각에 마련한 교육 및 연구과정인 초계문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한강에 주교를 설치하는 공사에 참여하여 규제를 저술하여 올렸다.
1790년(정조 14년) 2월에는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자 괘씸죄로 해미현으로 유배되었으나, 10일 만에 귀양이 풀려 돌아와서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0월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겨울에는 시경의 800여 조항을 바쳐, 정조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1792년 3월에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부친 상중인 겨울에 수원성 축조의 규제와 “기중가도설”을 지어 올렸다. 1794년 7월, 성균관 직강이 되었고 8월에 군사 기밀을 다루는 비변랑이 되었다. 또 겨울에 홍문관 교리, 수찬이 되었고, 11월에 암행어사가 되어 적성, 마전, 연천, 삭령의 민정을 살피었다.
1795년(정조 19년) 1월, 사간이 되었다가 곧이어 동부승지가 되었고, 2월에 병조 참의가 되었다. 1796년 11월, 병조 참지가 되었으며, 1797년 6월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변방사동부승지소”를 올려 자신을 천주교 신자라고 비방하는 것에 대해 젊은 날 한때 마음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나 30세 이후 명에 따라 오직 직무에 몰두했음을 밝히고, 사직을 청하였다. 그해 윤 6월,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가 되었다. 그리고 1799년 4월, 병조 참의가 되었다.
다산은 이처럼 정조 즉위 동안 정조의 측근으로 치열한 당파싸움 속에서도 정조의 보살핌 속에서 다양한 업무는 물론 다산의 학문 세계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정조가 다산을 미래 핵심인재로서 육성코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산은 젊었을 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구실로 반대 세력으로부터 수많은 비난과 비방 그리고 상소를 받아 한직으로 쫓겨나기도 하고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정조는 정약용을 감싸며 자신의 확실한 미래 인재임을 믿고 신뢰하였던 것이다.
백성을 배부르게 하는 길은 3농 정책
왕이 묻는다. “노력하여 토지에서 생산되는 재물을 늘어나게 하는 것이 농사이다. 농사는 백성들의 생활을 후하게 하고 국가의 경제를 넉넉하게 하는 것이다.”
다산은 대답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선비와 농사꾼 두 갈래로 나누어지면서 천하의 농사가 날로 폐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 조정에서 벼슬한 사람으로서 시골에서부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나라의 주공은 농사짓는 어려움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고달픔을 고루 맛보았으므로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선비들이 과거시험에 매달리고 시험과목이 늘어나게 되자 혀만 나불대며 놀고먹는 백성이 푸른 띠를 늘어뜨리고 붉은 사슴가죽 인끈을 걸치게 되면서부터 백성을 좀먹고 농사를 피폐하게 하는 법이 진실로 이런 무리들에게서 연유한 것입니다.”
다산은 1790년 여름 임금께 드리는 ‘농책’을 통해서 농사에 대하여 상세하게 글을 올렸다. 이는 ‘조선은 농경사회로 모든 경제 활동의 기본이 농사다’라는 것을 적시하고 있다. 농사 결과에 따라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데 갈수록 피폐해지는 농정에 대하여 정약용은 누구보다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 농민들이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이 되어야 나라의 살림살이는 물론 군량미도 쌓이게 되는데 농사를 천시하고 모두가 양반행세로 혀만 나불대며 놀고먹는 사람들이 백성들을 우려먹고 농사를 피폐하게 하고 있음을 임금께 고하고 있다.
다산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3재가 어울려 농업을 일군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농사를 천시하고 양반으로만 행세하려 하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이에 다산은 지주제도의 폐해를 혁파하는 토지개혁론을 주창한다. 즉, 농사짓는 자가 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바탕으로 농지의 재분배를 통하여 협동농장형태로 운영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토지제도의 개혁은 혁명적인 주장으로 다산의 개혁성과 사회제도의 개선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다산은 곡산부사 재임 시 임금께 올린 농정에 대한 글에서 보다 구체적 방안으로 3농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편농이다. 편농이란 원래 공업에 비하여 농사짓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 경지정리, 관개수리, 기계화를 통하여 농사를 “편히 지을 수 있는 농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은 하천을 파고 배로 물건을 실어나름을 통해서 물관리를 하였다며, 높고 낮은 지형을 살피고, 개천, 도랑 등을 정비하여 농사일을 수지맞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가 후농이다. 농사란 장사보다 이익이 적으니, 정부가 각종정책을 베풀어 “수지맞는 농사”가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농업이 피폐하게 된 까닭은 나라에서 춘궁기에 백성에게 대여한 환곡의 이자에 폭리를 취하는 데서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은 제도나 법이 문란하여 아무리 환곡이 해마다 증가하고 달마다 증가하더라도 어찌 부족함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였다.
세 번째는 상농이다. 농민의 지위가 선비보다 낮고 사회적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함에 비추어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상농, 즉 과거제도를 없애면 농업은 스스로 높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벼슬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평생에 글 한 자를 읽지 않고서도 양반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넘치기 때문이었다.
거드름 피우며 사람들을 깔보고, 쟁기를 더러운 물건같이 여기며, 힘들여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몸소 하지 않으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서 가만히 앉아 헐벗고 굶주림을 감수고 있는 양반들을 바라보며 다산은 조선의 농업을 살리는 길은 오직 “생산하는 자가 많고 먹는 자가 적으면 재물이 항상 풍족하다”는 논어의 이야기가 울려 퍼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다산은 농업ㆍ농촌문제를 나라와 겨레 발전의 필수기본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민들에 대한 관료와 토착세력들의 수탈을 고발한 “애절양”이나 “기민시”와 같은 사회 고발성 시를 통해 사회정의 확립과 민생의 바른 길을 깨우쳐 진정으로 나라가 바로 서고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사는 나라가 되길 바랐다.
“백성의 근본을 확립시키는 것은 오직 균전이란 두 글자에 달렸다. 밭두둑의 형세를 따르고 기름지고 메마른 토지의 등급을 헤아려, 전지의 많고 적음을 제한하고 빈부격차를 평균하게 하는 것은, 오직 손에 호적과 지도를 쥐고 묵묵히 전략을 짜서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하고 난 다음에라야 인구의 실제 총수를 파악할 수 있고, 병사는 국가를 위하여 죽을 마음이 있게 되며, 천하의 농부들이 모두 즐겁게 들에서 농사짓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는 오직 전하께서 밝게 살펴 힘써 행하기에 달렸습니다.” - 농책/ 다산시문집 제9권
PART 02 : 무너지는 건 한순간
귀족에서 폐족으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다산과 천주교와의 만남은 평생을 좌우하였다. 때는 1784년 4월, 다산 23세 때이다. 다산은 큰형수 제사를 위해서 고향 마재에 갔다. 이때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이 제사에 참여하였다. 다산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벽과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된다. 서울로 오는 배 안에서 이벽은 두 형제에게 천주교 관계서적을 보여주며 그들에게 읽게 한 것이다. 이벽은 1783년 북당(18세기 초 건립된 베이징 최대의 천주교회)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은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유교의 폐해와 더불어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노론 그들만의 안위를 위한 세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다산은 천주교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되었고, 그의 세계관은 변하게 되었다. 초창기 천주교로 알고 받아들였던 천주교가 당시 조선사회의 유교문화와 너무나 동떨어진 문화로 빚어지는 사건사고로 말미암아 천주교가 아닌 천주학으로, 즉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노론은 끈질기게 다산과 천주교를 엮어서 매장시키려고 하였다.마침내 다산은 1791년 외사촌 윤지충이 천주교 신상에 빠져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으로 반대파의 표적이 되기 시작한다. 또, 1795년 5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몰래 입국하다 발각되어 체포명령이 떨어졌으나 주문모는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5월 12일 새벽 주문모를 숨겨준 지황, 윤유일, 최인길 등이 처형되면서 주문모 신부 입국에 이가환 등이 배후라는 모략과 중상에 임금도 괴로워하다가 어쩔 수 없이 공조판서 이가환을 승정원 승지로, 다산을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시키게 된다. 1797년 6월 동부승지에 낙점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한다는 사직소를 올린다. 아울러 그동안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비방과 모함을 받았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하여 임금께 올렸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3천 자가 넘는 장문의 글이다. 그러나 정조는 다산을 1797년 윤 6월 2일 황해도 곡산 부사로 발령을 낸다.
노론들이 집단적으로 들끓으니 임금마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1800년(정조 24년) 다산에게는 정조의 사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했다. 정조의 사망과 더불어 등극한 순조 임금 뒤에서 수렴청정하던 정순대비가 오가작통의 법 실시 전교를 내리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한다.
1801년 2월, 다산의 형인 정약종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하인을 시켜 천주교 서적과 일기와 주문모 신부의 서한 등을 농짝에 넣어 옮기던 중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신유교옥 또는 책롱사건이라고 한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정약종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부인과 자녀들까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이때 다산과 둘째 형인 정약전도 체포되어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산과 가까운 인물로서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등이 사학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또 1801년 9월에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한다. 황사영은 다산의 큰형인 정약현의 사위로 다산의 조카사위이다. 황사영은 천주교 북경 주교에게 1801년 신유옥사에서 천주교인들이 받았던 박해의 전말과 향후 조선을 천주교 재건을 위한 방책을 하얀 비단에 적어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고 한 13,484자의 길고 긴 편지이다. 이 사건으로 다산은 장기에서, 정약전은 신지도에서 다시 끌려와 투옥되었다. 신문 결과 황사영 사건과 연관성을 찾지 못하였지만, 천주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산은 강진으로,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를 바꾸어 보내게 된다.
다산의 운명은 그야말로 얽히고설킨 실타래만큼이나 얽혀버렸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천주쟁이로 몰리면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정조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선 그저 한낱 죄인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을 천주쟁이로 낙인찍혀 기나긴 세월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겪어야만 했다.
PART 03 : 자연만이 그를 감싸주네
노래와 시로 자유를 만끽하며
다산이 유배당한 1801년 당시 강진은 가난한 산골과 농촌이었다. 다산은 고기 잡는 어부들과 고기 장사배들 그리고 농사꾼들이 어우러져 사는 인심 좋은 동네 강진의 모습을 여러 글에서 밝히고 있다.
“호남의 풍속이 교활하고 각박한데 탐진(강진)이 더욱 극심하다. 그대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는 질문에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허! 말을 어찌 그리하는가. 탐진 백성들은, 벼 베기가 끝나면 농토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곧바로 그 이웃 사람의 논을 경작하기를 마치 자기 농토처럼 하여 보리를 심는다. 보리가 익으면 주인과 나누지 않고 경작자가 다 갖고 또한 세금을 내지도 않는다.”
유배라는 죄인의 몸으로 온 강진은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행히 주막집 주모의 안쓰러운 동정심과 사랑으로 거처할 곳이라도 있게 되었지만, 고문당한 다산의 몸과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모진 세월이지만 어떻게든 견뎌야 했고 두고 온 처자식들은 물론 이대로 죽는다면 영원한 죄인으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산은 우울한 심경을 새로운 활력의 원동력으로 삼아 불안과 공포의 유배 생활 속에서도 책을 읽고 또 읍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5년 동안 사의재 유배 생활 후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큰아들 학연과 함께 주역을 가르치며 보은산 우두봉에 올라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을 그리며 눈물로 시를 짓기도 한다. 그리고 제자인 이학래의 집에서 2여 년을 머물다 다산초당으로 옮겨 10년을 보낸다. 다산초당은 그야말로 다산학의 산실로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제자들 18명과 함께하면서 공부하고 책을 저술했던 저술 창작소이다.
다산은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울분과 한을 책 속에 묻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언젠가는 볼 거라는 희망으로 자신의 길을 가면서 책으로 엮었다. 그리고 보고, 느끼고 분한 것들은 시로 엮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벗이 되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자신의 분노와 유배의 시련을 시와 글 속에 묻으면서 울분과 우울함을 밝혀 나갔다. “내가 죽은 뒤에 아무리 정결한 희생과 풍성한 안주를 진설해 놓고 제사를 지내준다 하여도, 내가 흠향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 책 한 편을 읽어주고 내 책 한 장을 베껴주는 일보다는 못하게 여길 것이니, 너희들은 그 점을 기억해 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