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기는 사마의
친타오 지음 | 더봄
결국 이기는 사마의
친타오 지음
더봄 / 2018년 11월 / 575쪽 / 20,000원
잠룡물용(潛龍勿用) - 출사(出仕)를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다
179년, 사마의는 하내군 온현 효경리에서 사마씨 가문의 둘째로 태어났다. 자는 중달이다. 사마씨 가문은 사마균부터 사마방(사마의의 부친)까지 4대에 걸쳐 관질 2천 석인 군수 급 지방관리로 일하며 조정의 녹을 먹었다. 사마의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출사하기가 수월했다. 예를 들면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이 그러했다. 201년, 23살 사마의는 하내군의 상계연(하급관리)으로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한편 관도대전에서 조조는 원소를 격파하고 중원의 패주가 되었는데, 조조는 달아난 원소를 죽이려고 북상하는 동안 몇 가지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참고로 28년 전 사마방은 조조를 낙양 북부위로 발탁했는데, 이제 그 은혜를 갚을 요량으로 사마랑과 사마의를 불러 벼슬을 주고자 했다. 기회가 주어지자 사마랑은 출사 길에 올라 조조 사공부의 속관이 되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거절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마의는 상계연 자리마저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조조의 부름을 거절한 이유도 별났다. 풍비(風痺), 지금으로 말하면 심각한 류머티즘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은 사마의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형과 함께 출사한다면, 형은 명성(신동)과 신분(사마씨 가문의 장남)에 힘입어 나보다 진급 속도가 빠를 것이다. 설혹 나의 능력으로 형을 넘어선다고 해도, 조조 밑의 요직은 이미 초일류 모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또 원소가 패하기는 했지만 재기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원소와 조조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는 아직 모른다. 형이 조조의 수하로 들어갔으니 나는 상황을 지켜보며 누가 더 잠재력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형제가 각자 다른 주군을 모시면 사마씨 가문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사마의는 병상에 누워 은거하며 미래를 준비했다.
사자가 사마랑을 데리고 조조의 관저로 돌아왔다. 조조는 사마의가 오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사자는 사마의가 풍비에 걸려 일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풍비라고?’ 조조가 웃었다. ‘꾀병이라면 내가 원조지! 십대 때 중풍에 걸린 척해서 숙부를 골탕 먹인 나를 사마의 네깟 게 속여 넘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사자가 자리를 떠난 뒤 조조는 자신이 십대 때 써먹은 속임수를 흉내 낸 청년에게 알 수 없는 정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려면 몇 년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걸까?
사마의는 병상에서 7년을 누워 지냈다. 그 7년 사이에 조조는 북방을 평정하고 원소의 자제들을 몰살한 뒤 업성으로 돌아와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한편 형 사마랑은 말단에서 실력을 키워 세 곳에서 현장을 지낸 뒤 승상주부(비서)가 되었다. 업성에 돌아온 조조는 승상으로 영전하라는 한나라 조정의 임명 통지를 받았고, 조조는 사마랑을 주부로 발탁하고, 최염을 승상서조연으로 임명해 인재 선발을 주관하게 했다. 최염은 사마의를 천거했고, 조조의 수석 모사였던 순욱도 사마의를 추천했다.
조조는 당시 일을 맡겼던 사자를 불러 “사마의를 기억하겠지? 가서 그자를 불러오게. 이번에도 안 오려고 하거든 즉시 잡아들이게.”라고 말했다. 사마의의 저택을 찾은 사자가 말했다. “승상께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가겠소!” 사마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출사를 미뤘다가는 천하가 통일되고 말 것이다. 천하가 통일되면 나 사마의는 할 게 아무것도 없어진다.’ 종일건건(終日乾乾) - 종일토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
마침내 사마의는 승상부에 발을 들였고, 그의 첫 관직은 문학연이었는데, 조조는 사마의가 경학으로 조비를 교육해주길 바랐다. 갓 스물을 넘긴 조비는 조조의 둘째아들이었다. 한편 사마의는 중량급 전투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제갈량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전쟁보다 더 빠르고 손쉽게 승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둔 상태였다. 그 방법은 바로 조비였다. 조조는 머지않아 칭왕칭제하고 지존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계승자 누가 되느냐 인데, 현재로선 조비가 계승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만약 조비가 천자가 되면 신하도 전부 바뀔 수밖에 없고, 득세할 사람은 조비가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데 힘쓴 자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마의는 경학으로 조비를 교육하는 한편 그가 조정의 중신들 및 소장파 신인들과 적극적으로 친분을 쌓도록 했다.
결국 건안 22년(217년), 조조는 조비를 태자로 책봉했고, 사마의와 사마부는 태자와 항상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속관, 즉 태자중서자에 제수되었다. 한편 큰형 사마랑은 역병으로 군대에서 병사했다. 조비가 승리한 원인을 분석해 보면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조비 참모진(사마의, 진군, 오질 등)의 수준이 조식의 참모진보다 월등히 높았다. 둘째, 조정에서 조비의 지지율이 조식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조정의 중신들 중에 조비에게 포섭되었거나 조비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으로는 순유, 가후, 종요, 모개, 최염, 형옹 등이 있었다. 셋째, 조식 본인의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조식은 비범한 재능을 가졌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수완과 군사적 재능은 확실히 떨어졌다는 게 전통적인 견해였다.
218년 정월, 허도에서 길본의 반란이 있었고, 큰 문제없이 진압되었다. 사마의는 이번 일로 조조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마의는 올해 막 군사마로 영전했다. 승상 조조는 군정대권을 장악해서 각 부문의 조력자를 두었는데, 정무를 주관하는 사람은 장사, 군무를 주관하는 사람은 바로 군사마를 맡은 사마의였다. 사마의가 맡은 군사마는 독립적인 병권은 없었지만 확실히 이례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조조가 사마의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키워보겠다는 의도를 보여준 것이자 사마의에게 안심하고 일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조조는 220년 정월 낙양에서 죽었다.
혹약재연(或躍在淵) - 장차 크게 뛰려 하나 아직은 연못 속에 있다
조비는 보위에 오르자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았다. 먼저 가후를 태위에 봉하고, ‘태자사우’에게 보답했다. 진군은 창무정후와 상서에, 사마의는 하진정후와 승상장사에 봉하고, 오질과 주락에게는 상을 내렸다. 연강 원년(220년)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지난해 조비, 손권, 유비가 양양과 번성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손권이 최대 승리자가 되었다. 조비는 손권의 군대가 눈앞에서 오가는 걸 보며, 남부의 오나라 방어 요충지인 양양과 번성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조정 관원들은 차라리 양양과 번성을 포기하고 완성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축소하고 수비 부담을 줄이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신임 승상장사 사마의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조비는 사마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마의는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리더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하책은 말로써 리더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상책은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게 하는 것이다. 사마의는 상책을 취했다.
연강 원년 6월, 조비는 대규모 열병식과 장장 20일에 걸친 군사 훈련을 거행한 뒤 손권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손권은 형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조비에게 사자를 보내 신하를 자처하며 강화를 청했다. 조비는 사자가 가져온 선물들을 받고 회군했다. 한편 현직 한나라 황제 유협은 올해로 마흔이었다. 유협이 황제의 자리에 앉아 용포를 입고 있는 단역을 맡은 지가 무려 30년째였다. 유협은 오래 전부터 황제 자리를 내려놓고 싶었다. 결국 서기 220년 10월 29일(양력 12월 11일), 조비는 마침내 한나라 황제의 선양을 받고 즉위했다. 그는 국호를 위로 하고, 연호를 황초로 바꾼 뒤, 승상 직을 없애고 삼공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권력을 상서대로 돌렸다. 사마의는 상서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감군 겸 어사중승으로 임명되었는데, 어사중승의 직책은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자 조비는 사마의를 시중, 상서우복야로 또 승진시켰다. 당시 권력은 상서대에 있었는데, 상서대의 수장은 ‘상서령’이고, 그 밑에 있는 차관이 ‘상서복야’였다.
황초 6년(225년), 조비는 갑자기 마흔일곱의 사마의를 무군대장군과 가절에 임명하고 군사 5천을 이끌게 했다. 고작 병사 5천 명을 이끄는 병권에 불과했지만 사마의는 영광스럽게도 고위 군직을 받으니 물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이 5천 명을 시작으로 나이 오십에 가까워진 사마의는 드디어 자기 인생의 황금기를 열기 시작했다. 사마의가 군권을 손에 넣게 된 것은 하후상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칭제한 지 6년째 되던 해에 조비는 다시 손권을 치러 남정 길에 올랐다. 이는 그가 즉위 후 네 번째로 떠난 남정이자 마지막 남정이었다. 조비는 늘 하던 대로 사마의에게 무군대장군의 신분으로 허창을 지키게 했다. 조비가 즉위한 뒤로 사마의는 쭉 후방 지원 업무를 맡았는데, 묵묵히 힘든 일을 해냈다. 조비는 당시의 태자당 일인자인 진군을 진군대장군으로 승진시킨 뒤 그와 함께 남정에 나섰다. 하지만 조비군은 장강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조비가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황초 7년(226년) 정월이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조비의 병세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다. 5개월째가 되자 병세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졌고, 아들 조예를 태자로 세웠다. 그 뒤 조비는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가망이 없음을 알고 조진, 진군, 사마의를 긴급 호출해 후사를 부탁했다. 황초 7년(226년) 5월, 위문제 조비는 향년 40세를 일기로 낙양에서 붕어하고 20대 초반인 조예가 황제로 즉위했다. 사마의는 서열이 마지막인 고명대신으로 새 황제를 보좌했다.
신룡파미(神龍擺尾) - 성스러운 용이 꼬리를 내보이다
조비는 임종 전에 조진, 진군, 사마의 세 사람을 보정대신으로 세웠다. 하지만 조예는 황제에 즉위한 이후 세 사람에게 중임을 맡기지 않았다. 한편 조비가 5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손권은 8월에 대군을 이끌고 강하를 겹겹이 포위했다. 그런데 조예는 손권이 공격해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순우를 파견했었고, 손권은 오랜 공격에도 성과가 없는 데다 원군이 도착했다고 착각해 서둘러 군대를 철수했다. 하지만 손권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계략을 꾸몄다. 제갈근과 장패를 양양에 침입시킨 것이다.
조예는 사마의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는 사마의의 군사 생애 첫 전투였다. 군대를 이끌고 양양에 도착한 사마의는 제갈근이 군사를 부리는 것이 굼뜨고 기책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마의는 즉시 강공을 퍼부었다. 제갈근은 패주하고 장패는 참수당했다. 그해 연말 조예는 공을 세운 신하들의 관직을 올려주었다. 덕분에 조휴는 대사마, 조진은 대장군, 진군은 사공, 사마의는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했다. 표기대장군 위로는 대사마와 대장군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마의는 군부에서 서열 3위가 되었다. 그 뒤 조휴가 오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조휴는 화병으로 죽었다. 조휴가 죽자 위나라의 관례에 따라 조진이 대사마로, 사마의가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촉한 건흥 6년(228년) 연말, 제갈량은 위나라가 주력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서쪽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대군을 일으켰고, 전군에 공격을 명했다. 제갈량은 운제(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높은 사다리), 층차(적진이나 성을 공격할 때 쓰던 수레) 등을 이용해 입체적 공격을 했고, 학소는 화전(불화살)과 종심방어(방어선을 여러 겹으로 만들어 적의 공격력을 떨어뜨려 전선을 유지하는 전술) 전술 등을 활용하여 총력적으로 방어했다. 한편 후방을 지키던 조진은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사안이 중하다고 여긴 조예는 대촉전쟁에 경험이 풍부한 명장 장합을 파견했다. 제갈량은 척후병으로부터 조진 진영에서 지원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제갈량은 길게 탄식했다. ‘나 제갈량이 학소라는 이 듣도 보도 못한 자에게 길이 막힐 줄이야. 이번 북벌도 물거품이 되었구나!’
그 뒤 조진이 신임 대사마로서 의욕을 가지고 낙양에 자신의 전략 계획을 제출했다. 조예는 이 계획을 군신들에게 하달해 논의하게 하고 진군의 반대 의견을 서면으로 정리해 조서 뒷면에 덧붙여 조진에게 보냈다. 조진은 조예가 하달한 조서를 근거로 삼아 과감하게 출병을 결정했다. 사마의도 이미 조예의 조서를 받았다. 상용의 서성에서 출발해 남정에서 조진과 합류하라는 주문이었다. 사마의는 이번 전투 결과를 부정적으로 예상했다. 가을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그 예상에 더 무게가 실렸다.
홍세위에서 조우한 전쟁은 촉 정벌에서 조진이 참가한 유일한 전투였다. 촉나라로 들어가는 길고 좁은 산길 때문에 위군의 수적 우세는 사라지고 공세는 중지되었다. 조진은 여전히 자오곡에서 뭇 장병들과 함께 미끄러운 산길을 걷고 있었다. 억수 같은 폭우가 밤낮없이 쏟아졌다. 한 달 넘게 쉬지 않고 내리는 장맛비를 낙양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촉벌을 반대하던 진군은 이때다 싶어 철군 명령을 내리라고 조예에게 간언했다. 조예는 방법이 없었다. “회군하라고 하시오.” 귀국 후 조진은 감당하기 힘든 수치와 오랜 여정으로 병이 들고 말았다. 이듬해 3월, 조진은 병사했다.
용전어야(龍戰於野) - 용이 나타나 들판에서 싸우다
제갈량은 2년 동안 전쟁 준비를 했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긴 그는 그동안 수확해서 쌓아둔 군량과 마초를 사곡구로 운반하게 했다. 또 동오에 사자를 보내 이듬해 같이 출병해서 동서로 조위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했고 손권은 이에 동의했다. 234년 2월, 제갈량은 10만 명을 이끌고 사곡을 나갔고, 4월 미성에 도착했다. 오나라도 10만 군을 세 갈래로 나눠 조위를 침략했다. 조예는 전체적인 국면을 살피기는 했지만 서부 전선을 더 주목했다. 그는 진랑에게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사마의를 지원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사마의의 관중 부대도 약 12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촉군을 이끌고 위수 근처에 도착한 제갈량은 위군이 벌써 이곳에 견고하게 진을 친 것을 발견했다. 생각을 정리한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서쪽 오장원으로 향했고, 이는 사마의에게도 보고되었다. 그런데 곽회가 제갈량은 틀림없이 북원을 차지할 것이니 먼저 그곳을 선점하자고 건의했다. 사마의는 곽회에게 촉군보다 먼저 북원을 차지해 방어시설을 구축하라고 지시했고, 곽회는 그렇게 했다. 북원을 차지하러 간 촉군이 실패하고 돌아오자 제갈량은 형세가 좋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사마의와 같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는 틀림없이 수비만 하고 쉽게 응전하지 않을 것임을 제갈량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상대할 때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공격해야 했다. 마음을 정한 제갈량은 일부 장수들을 오장원에 남겨 두고 자신이 직접 주력군을 인솔해 적군의 서쪽을 기습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마의는 서쪽으로 지원군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곽회의 생각은 달랐다. 곽회는 제갈량이 둘도 없는 모략가인 데다 성동격서 계책을 잘 쓴다고 보았다. 곽회가 사마의에게 건의했다. “촉군의 목표는 서쪽이 아닌 동쪽의 양수 같습니다. 오히려 양수의 수비를 강화해야 합니다.” 사마의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곽회와 호준을 양수로 보내 촉군을 막게 했다.
한편 양수까지 한 구간 정도가 남았을 때 전방의 적석원에서 갑자기 대규모의 위군이 나타나 제갈량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계책이 간파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양군이 거의 만날 즈음 제갈량은 대군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돌아와 굳게 지키며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마의에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연일 폭우가 쏟아졌다. 그래서 무공수가 범람해 양안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촉의 맹염의 호보군은 오장원 진영과 연락이 끊겨 고립되고 말았다. 사마의는 즉시 1만 정예 기병을 일으켜 무공수 동쪽 연안에 있는 호보군을 향해 돌진했다. 제갈량도 소식을 접하고 공병에게 대나무 다리를 만들게 하는 한편, 강가에서 제갈연노를 이용해 화력으로 엄호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도저히 빈틈을 찾을 수 없었던 사마의는 철수했다. 별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 견디기 힘든 대치 상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