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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최시선 지음 | 북허브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최시선 지음

북허브 / 2018년 4월 / 320쪽 / 14,000원





내가 만드는 나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의미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집이 시골이라서 방학 때만 되면 도시의 자취집에 있는 책 보따리를 싸서 시골로 옮겨야 했다. 시골 집 한구석에 책을 챙겨놓고 가끔 부모님 일을 도왔다. 공부한답시고 방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다가도 부모님과 형제들의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밭에 나가 일을 돕거나 풀을 베어 오기도 했다.

30도가 넘는 어느 여름 날, 부모님은 밭에 팥을 심으러 가자고 했다. 그것도 그냥 밭이 아니라 담배 밭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고랑에 팥을 심는 일이었다. 한낮이 되자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흐르고, 숨이 차오며, 허벅지가 터지도록 아프고, 마침내는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담배 잎사귀에서 풍겨 나오는 독한 냄새며, 살겠다고 꿈틀거리며 흙 속에서 기어 나오는 굼벵이도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이게 무어란 말인가. 이 시간에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야단들인데 도대체 나는 이 시골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왜 하필이면 나는 이 시골에서 태어났을까? 저 힘겨워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을 보라. 어떤 사람은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데 나는 어째서 이런 부모님을 만났을까? 저 고생하는 시골 아줌마들은 하루 종일 일해서 무엇을 얻는 것인가?’

이런 생각에 빠져서 팥 심는 일을 멈추고 그냥 밭에 나왔다. 도랑가에 가서 얼굴을 씻고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 밑에 누워버렸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눕자마자 그냥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자고 난 후 일어나 보니 하늘이 캄캄하고 비가 올 듯했다. 벌써 저녁이 된 것이다. 그때 자식을 애타게 찾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얼싸안았다. “다시는 일 시키지 않으마. 너는 공부만 해라.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라, 응?” “그래요, 어머니. 저는 공부를 해야 돼요. 공부하고 싶어요. 공부를 해야 이런 시골에서 벗어난단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외치면서 어머니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드리고는 깡마른 당신을 부둥켜안았다.

그때의 일은 항상 기억에 새롭다. 한때의 신세타령이었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물음, 아무런 철학적 배경도 없이 그냥 현실에서 던져진 물음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였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이런 시골에서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나의 부모님은 하필이면 농부란 말인가?’ 하는 매우 본질적인 질문들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물음을 던진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왔는가? 어머님의 뱃속에서 나온 것이 사실인데 그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고 말이다. 서양의 기독교적 사고로 본다면 ‘나’의 생명은 신이 내려준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이다.

붓다는 이에 대하여 어떤 답을 내릴까. 붓다는 그런 고민을 하기 전에 일단 “지금의 자신으로 태어났음에 감사하라.”라는 일침을 놓는다. 삼천대천세계(붓다는 우주의 한량없는 크기를 이렇게 표현하였음)의 온갖 생명 중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붓다는 『사십이장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죽어서 비록 악도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시 태어날 때 사람의 몸을 받기가 어렵고, 사람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 어렵고,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진리의 세계를 만나기는 더 어렵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우주 삼라만상의 생명 있는 것들을 사생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이 그것이다. 태생은 일반적인 포유류로, 사람이 가장 대표적이다. 하지만 태어나는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라. 그 천문학적인 수를 어찌 몇십억도 안 되는 사람의 수로 뭉뚱그릴 수 있겠는가? 사람은 포유류 중에서도 아주 조그마한 부류에 속한다.

난생은 알로 태어나는 조류, 물고기 등을 말한다. 이 같은 생명은 포유류보다 많아서 어떻게 헤아릴 길이 없다. 습생은 습한 데서 자라는 지렁이나 벌레 등을 말하고, 화생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변하여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그 숫자를 센다는 것은 해변의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과 같다.

그 수많은 생명 중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수백 번 자신을 찬탄해야 할 일이다. 부잣집에서 태어났거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거나, 도시에서 태어났거나 시골에서 태어났거나,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사람으로 태어났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전생에 좋은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업(karma)이란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업을 짓는다. 업은 행위이기 때문에 모종의 에너지를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욕을 하면 욕한 파장이 남는다. 이 파장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저장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와 같이 쌓인 것을 ‘업력’이라고 한다. 이 업력에 따라 다음 생명이 결정된다. 지렁이는 지렁이 업을 지었기 때문에 지렁이로 태어난 것이고, 소는 소의 업을 지었기 때문에 소로 태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람의 업을 지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업 짓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붓다는 가르친다.

사람은 주로 세 가지 업을 짓는다. 몸으로 짓는 업, 입으로 짓는 업, 생각으로 짓는 업이 그것이다. 업은 그 질에 있어서 좋은 업, 나쁜 업,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는 업이 있다고 하였다. 붓다는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몸으로 좋은 일을 행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해야 하며, 생각으로는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몸으로 폭력과 살생 등 나쁜 행동을 하고, 입으로 거짓말, 폭언, 아첨 등 나쁜 말을 하고, 생각으로 증오, 시기, 질투 등 나쁜 마음을 품는가 말이다. 어쩌면 좋은 업을 짓는 사람보다는 나쁜 업을 짓는 사람들이 더 많기에 다른 생물에 비해 사람의 수가 훨씬 적은 건 아닐까?

윤회의 가르침

붓다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윤회한다고 가르쳤다. 윤회(輪廻)란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윤회하는 이유는 업을 짓기 때문이다. 생사가 되풀이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업인 것이다. 따라서 업을 짓지 않으면 태어날 이유도 없고 죽을 이유도 없다. 업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가 바로 해탈이다. 그래서 붓다는 모두에게 해탈하도록 노력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윤회하는 삶은 생유ㆍ본유ㆍ사유ㆍ중유의 4개 사이클로 나뉜다. 먼저 생유는 어머니의 태에 잉태되는 순간을 말한다. 어머니의 태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이미 생명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본유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있다가 세상으로 나와서 일정한 세월을 사는 시간을 가리킨다. 사유는 일정 시간을 살다가 생을 마치는 순간, 즉 죽는 찰나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중유는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영혼은 미세한 마음의 덩어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이 중유의 기간은 10일에서 49일이다. 그래서 죽는 자에게 49재를 지내는 것이다.

다음 생은 어떻게 받을까? 붓다는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바로 여섯 갈래의 길인데, 이를 육도 윤회라고 부른다. 즉, 사람은 자신의 업에 따라 여섯 갈래의 길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첫째는 지옥도이다. 지옥도는 온갖 고통이 심한 세계이다.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져 고통 받는 곳이 화탕지옥이고, 쇠꼬챙이나 면도칼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몸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아픔이 끊이지 않는 곳이 아비지옥이다. 지옥도는 온갖 나쁜 업을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둘째는 아귀도이다. 아귀도는 배고픔의 세계이다. 아귀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귀의 배는 엄청나게 큰데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배가 고프고 또 어쩌다 밥알 하나라도 그냥 넘기면 좁은 목구멍에 걸려서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이 아귀의 세계는 남에게 베풀 줄 모르고 인색하기가 그지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셋째는 축생도이다. 축생도는 어리석음의 세계다. 축생은 개나 소, 돼지 등 짐승들을 말한다. 짐승이 사람과 다른 점은 사리 분별을 못한다는 것이다. 사리를 모르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을 개나 소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축생은 이렇게 사리분별을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넷째는 수라도이다. 수라는 아수라라고도 하는데 싸움이 끊이지 않는 세계이다. 질서가 없고 싸움이 끊이지 않아 소란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곳이 아수라장 세계이다. 교만하고 늘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축생의 세계보다 지혜는 있으나 ‘나’라는 고집이 강하기에 고통이 심한 곳이다.

다섯째는 인간도이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지혜를 가지고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마음만 먹으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간 좋은 업을 짓지 않고는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 또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단순히 좋아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든 진리를 깨치도록 노력하라고 붓다는 가르친다.

마지막은 천도이다. 이곳은 하늘의 세계로 그야말로 좋은 업을 지은 사람들만이 가는 곳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세계보다는 괴로움이 적고 평화롭고 즐거움이 많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천도에도 28천, 혹은 33천이라 하여 여러 가지 하늘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광음천이란 곳은 하고 싶은 일을 생각만 해도 모두 해결된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 행위를 해야 하는데, 그곳은 생각만 하여도 해결된다니 얼마나 좋은 곳인가? 그러나 이 세계도 영원한 것이 아니니, 여기서도 업을 소멸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오히려 짓게 되면 그 업대로 다른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윤회, 이것은 붓다가 기존의 인도 사상을 받아들여 체계화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 속에서 귀중한 교훈이 깃들어 있다. 우선 업을 짓되 좋은 업을 지으라는 것이다. 붓기는 근기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이다.”라는 가르침을 폈다. 즉, 좋은 업을 지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요,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과응보란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즉, 원인과 결과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얼마나 고민이 많은가. 그러기에 자칫 잘못하면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학교폭력, 따돌림, 흡연 같은 것들이 모두 나쁜 업을 짓는 일이다. 이것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적어도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말이다.

위대한 존재의 씨앗, 불성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인간은 본래부터 어떤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애초부터 선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동물과 똑같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서 인간으로 교육되고 훈련되는 것일까? 인간 본래의 성품을 규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본디 선하다고 주장하는 ‘성선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동양의 맹자와 서양의 루소가 대표적이다. 본디 악하다고 주장하는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동양의 순자와 서양의 홉스가 있고, 중립적 입장의 ‘성무선악설’은 동양의 고자와 서양의 로크가 대표적이다.

그러면 붓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어떤 가르침을 폈을까? 『열반경』에서 붓다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했다. 이는 일체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는 잠재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다. 따라서 붓다의 인간 본성에 대한 가르침은 ‘불성설(佛性設)’이다. 붓다는 불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는 이제 모든 중생들이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이 여러 번뇌들에 의해 덮여 버린 바 되어,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노라. 이것은 마치 가난한 사람이 진짜 보배를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능히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음이다.”

붓다는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붓다 자신이 오랜 수행 끝에 직접 체험하여 선언한 것이라서, 이론적으로 무언가를 연구한 끝에 결론을 내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불성이라는 개념은 불교 사상이 발전하면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부처님의 품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 하여 ‘여래장’이라고도 하고, 한결같은 마음이라 하여 ‘일심’이라고도 하고, 스스로 갖고 있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라 하여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하였다. “누구나 노력만 하면 최고의 경지인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 이 이상으로 매력적인 말이 있을까? 언뜻 보기에는 맹자의 성선설에 가까운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맹자는 전국시대에 다투는 양상을 보고 그 싸움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 인간은 본래 선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는 논지를 폄으로써, 그 선한 마음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붓다는 직접 깨달음을 이룬 분으로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불성’이라고 보고, 불성이 완전히 발현된 상태를 ‘부처’라고 보았다.

이것은 마치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땅의 기운과 잘 결합하여 싹이 트고 완전히 열매를 맺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붓다는 “중생이 곧 부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모든 것에는 이미 불성이 내재되어 있어 언젠가는 ‘깨달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성은 깨달음의 씨앗이다. 깨달음이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은 자유로운 경지, 태어남과 죽음이 둘이 아닌 경지, 즉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욕심도 성냄도 사라지고 더 이상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는 가장 안락한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경지이다.



좋은 마음, 좋은 인연



미래는 현재의 자화상

나는 고등학교에서 교양 과목으로 교육학을 가르친 적이 있다. 이 과목은 말 그대로 고등학생에게 폭넓은 교양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된 과목이었다. 과목 성격상 평가는 하되 내신에는 성적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과목에 비해 좀 더 자유롭게 주제를 정하여 수업했던 편이었다. 이 과목 수업에서 꼭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10년 후의 자화상’을 글로 써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양한 글이 나왔다. 자신의 미래 자화상을 마치 소설처럼 줄줄 꾸며 나간 학생이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여 이것저것 가능성 있는 것을 나열한 학생도 있었다. 한껏 꿈에 부풀어서 자신의 미래를 조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마음의 작용이 있기에 10년 후, 5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교육적이고 소중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 성공의 씨앗이 심어지고,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교육학에서는 ‘자성 예언’이라고 한다. 주위 사람이나 자신이 미래에 성공한 모습을 그리며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예언하고 상상하면 이뤄진다는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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