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만난 장자
왕방웅 지음 | 성안당
카페에서 만난 장자
왕방웅 지음
성안당 / 2017년 5월 / 255쪽 / 14,000원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나비가 되는 꿈을 꾸다 ? 우언(寓言)에 담긴 철학적 지혜
인간이 직면한 존재와 상황의 딜레마 - ‘재(材)’와 ‘부재(不材)’ 사이에서
‘유용(有用)한가’, ‘무용(無用)한가’라는 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을 초월해라. 그리고 본연의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라. 이것은 우리가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것이다.
숲의 나무가 살아남은 이유는?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장자》 제20편 ‘산목(山木)’편에 나온다.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숲 속을 거닐던 장자는 산꼭대기에서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때마침 그곳에는 벌목공들이 모여 적당한 나무를 물색하면서 그 거대한 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쳐다보기만 할 뿐 그 나무를 자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자는 그 이유를 물었다. 벌목공이 대답했다. “이 나무를 한번 보시지요. 크고 굵지요? 그건 이 나무가 쓸모없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만약 쓸모가 있었다면 진작 베어졌을 테지요.” 이 말을 들은 장자는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도 이 나무를 한번 보아라. 이 나무가 어떻게 해서 베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천수를 누릴 수 있었겠느냐? 바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집 거위가 도살당한 이유는? 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일행은 산에서 내려와 장자의 친구 집을 방문했다. 친구는 사내종에게 거위를 잡아 손님을 대접하라고 시켰다. 사내종이 물었다. “집에 거위가 두 마리입니다. 한 마리는 잘 우는데, 다른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놈을 잡을까요?” 친구가 대답했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다음 날 새벽, 장자 일행은 길을 나섰고, 제자들은 너무 궁금하여 장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어제는 숲의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오늘 친구분 댁의 거위는 울지 못한다는 이유로 도살되었습니다. 스승님은 ‘쓸모없는 것’이 양생(養生)의 길이요,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거위는 왜 울지 못하는데도 죽어야 했을까요? 그러면 스승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까?” 제자들은 곧이어 장자에게 물었다. “만약 스승님이라면 어떻게 처신하시겠습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만약 나였다면 숲의 나무와 거위의 중간에 처할 것이다.”
‘유용함’과 ‘무용함’ 사이의 딜레마: 만약 당신이라면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는가? 《장자》‘산목’편에는 ‘재여부재지간(材黎不材之間)’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재(材, 재목감)’는 유용함을, ‘부재(不材, 재목감이 아님)’는 무용함을 나타낸다. 유용하다면 쓸모가 없을 수 없고, 무용하다면 쓸모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장자는 “나는 ‘유용함’과 ‘무용함’의 중간에 처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언어유희이며, 해학을 즐기는 장자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장자가 한 말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자신이 숲의 나무일 때는 ‘무용함’의 자세를 보이겠다는 뜻이다. 쓸모가 없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주인집 거위일 때는 힘껏 울어대겠다는 뜻이다. 만약 울지 못한다면 도살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만약 그날 새벽, 자고 있던 주인이 시끄러운 거위의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그날 저녁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울 줄 아는 거위라고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바로 딜레마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울 수 있느냐 없느냐’, ‘쓸모가 있나 없나’와 같은 딜레마에 끊임없이 직면한다.
천도(天道) 본래의 덕으로 돌아와 천지(天地)와 함께 노닐다: ‘유용함’과 ‘무용함’ 사이에 처하겠다는 것은 모범답안이나 본질적 답안이 아니며, 장자가 제자들의 질문에 궁여지책으로 불쑥 던진 대답일 뿐이다. 결국 장자는 감추어둔 본심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도덕(道德)을 타고 노닐어야 한다.” 장자의 이 말에서 도덕이란, 도가에서 말하는 바로 그 도덕이다. 즉, ‘도(道)’는 천도를, ‘덕(德)’은 천진(天眞)을 가리킨다. 도는 근원적 관점에서 보면 천도이고, 삶의 관점에서 보면 천진이다.
‘인(仁)’은 유심(有心)하므로 구속당하고, ‘불인(不仁)’은 무심(無心)하므로 자유롭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천지불인(天地不仁)’, ‘성인불인(聖人不仁)’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인(仁)’은 인심(仁心) 또는 애심(愛心)을 뜻하고, ‘불인(不仁)’은 무심(無心)을 가리킨다. 애심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집착이 생기고 자신을 고귀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사랑(愛)은 우리를 오만하게 만든다. 도가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사랑에 집착할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일찍이 간파했고, 불인과 무심만이 우리 마음속의 집착을 끊을 수 있다고 여겼다. ‘도덕을 타고 노닐다.’라고 함은 천지자연과 함께 존재하고 함께 움직이는 경지로, 인간 사회의 세속적이고 이해타산적인 관점으로는 결코 평가하거나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속세의 상대적인 옳고 그름, 상대적인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승리와 패배, 이익과 손해 등을 뛰어넘어야 한다. 장자가 말한 ‘유용함과 무용함의 사이에 처하겠다’란,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유용함과 무용함이라는 세속적인 이분법을 초월하여, 천지와 자연이 하나가 되고 함께 나아가는 경지에 도달하자는 의미다. 그래야만 인간의 존재와 상황과 관련되어 만나는 여러 딜레마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다.
삶의 교차와 성장 ?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다(莊周夢蝶)
우리는 살아가면서 심지(마음의 지각작용)의 집착과 인위적인 조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삶 그 자체로 되돌아와 삶의 노하우를 연마해야 한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온전히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장자는 장자가 아니고 나비는 나비의 ‘꿈’이 아니다: 나비가 되는 꿈 이야기는 ‘제물론’편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어느 날 밤, 장자는 꿈속에서 ‘훨훨 나는 나비’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즐겁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여유롭고도 자유로운 한 마리의 나비였다. 그러면서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신이 장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얼마 후 잠에서 깼는데 자신은 ‘분명히 누워 있는 장주였다.’ 바로 그 순간, 마음속에 매우 커다란 의문점이 생겼다. 방금 전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 나비가 꿈을 꾸고 있으며, 자신이 그 꿈속의 장주인 것일까? 우리의 삶에서 어디가 꿈이고, 또 어디가 깨어 있는 시간일까? 이는 생명의 주체인 자아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마음은 형체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고,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형체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 몸은 나비일 수도 있고, 장주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훨훨 날고 있는 나비’와 ‘분명히 누워 있는 장주’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고가는 존재일 수도 있다. 이처럼 형체는 꿈속에서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다. 인간은 꿈속에서 형체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물아(物我)는 서로를 모두 잊을 수 있고, 풍경도 서로 융합될 수 있다. 중국의 수천 년 문화전통에서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라는 이 우언은 미학(美學)과 예술의 소재로 끊임없이 활용되었다.장주는 여전히 장주이고 나비는 여전히 나비라는 구분(分)이 존재한다: 문제는 신분이 서로 바뀌면 처한 상황도 그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다. 형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면 마음은 자유를 얻는다.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다면 정말로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삶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설령 나비로 바뀌었어도 우리의 몸은 점점 늙거나 병들어가고 삶 또한 유한하다. 단지 찰나의 황홀한 느낌을 줄 뿐, 우리 삶에 정말로 필요한 원기왕성함과 번뜩이는 지혜는 주지 못한다. 따라서 장자가 꿈속에 나비가 된 경험은 매우 아름답지만, ‘덧없는 한때의 즐거움’에 불과하다. 도덕적, 지식적, 실용적인 면 이외에 인간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어떤 특별한 의미는 담겨 있지 않다. 따라서 대철학자인 장자는 한가롭게 아름다운 한때의 느낌에 머무르는 대신, 인간의 실존과 생명의 가치와 근원을 탐구하려고 애썼다. 그는 말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분명히 구분이 있을 것이다.”
형체는 사라지거나 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장자가 장자이고, 나비가 나비이게 만드는 각각의 ‘본덕’과 ‘천진’은 변하지 않는다. 마치 맹자가 모든 사람에게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성심이 있다고 보고, “하늘의 명이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본성이 들어 있다(命也, 有性焉).”라고 말한 점과 같다. ‘하늘의 명이다(命也)’라고 함은 장자는 여전히 원래의 장자 자신이 되고, 나비는 여전히 원래의 나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이 들어 있다(有性焉)’고 함은 장자는 장자로서의 자기 삶을 영위해야 하고 나비는 나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삶은 본덕과 천진의 ‘구분(分)’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장자와 나비는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각자의 명(命)을 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장자는 “이것을 ‘물화’라 한다(此之謂物化).”라고 끝맺고 있다. ‘물화’는 만물의 조화를 뜻하며,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화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말은 앞에 나온 “이제 나는 나를 잊었다(今者, 吾喪我).”의 ‘상아(喪我)’와 호응하고 있다. ‘상아’는 ‘물화’와 동일하다. ‘상(喪)’과 ‘화(化)’는 모두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수양을 통한 변화 가능성’이 담겨 있다. ‘상아’는 형체를 해체하는 데 중점을 두고, ‘물아’는 상호간의 융합에 방점이 찍혀 있다. 형체가 사라지면 너와 나, 사람과 사물 사이의 장벽도 사라진다. 그러면 장자는 나비에게 융합할 수도 있고 나비가 장자에게 융합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결국 장자는 장자 자신이고, 나비는 나비 자신이라는 ‘구분’이 존재한다.
‘산을 보면 그냥 산이었고 물을 보면 그냥 물이었다’라는 큰 깨달음을 얻다: 이 우언은 중국 당대의 청원유신 선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하는 과정에 다시 등장한다. 첫 번째는 “내가 30년 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두 번째는 “나중에 스승을 만나 지식과 지혜를 얻고 나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 세 번째는 “훗날 깨달음을 얻고 나서 보니 이전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장자의 나비 꿈과 청원유신 선사의 참선을 서로 비교하면 매우 유사하다. 먼저 참선을 시작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이는 마치 꿈꾸기 전에 장자는 여전히 장자였고 나비는 여전히 나비였던 점과 같다. 이때의 산과 물, 장자와 나비는 모두 실존하는 형체의 구속을 받는다. 다음, 지식과 지혜를 얻고 나서 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마치 꿈속에서 나비가 된 뒤의 장자는 장자가 아니고, 꿈속에 장자가 된 뒤의 나비는 나비가 아닌 것과 같다. 도(道)를 깨달은 뒤는 꿈속에 들어간 상태와 같고, 지식을 얻는 것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과 같다. 꿈속에 나비가 된 상황은 물화(物化)이자 융합이다. 산과 물, 장자와 나비는 이미 형체의 구속에서 벗어났으므로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니며, 장자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다. 마음은 이미 자유로운 공간을 얻었다. 다음,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나서 바라보니 산은 여전히 산이고 물은 여전히 물이었다. 마치 맹자의 ‘본분이 정해져 있다’라는 말과 비슷하며, 이는 장자와 나비가 여전히 처음으로 되돌아와 보여주어야 할 본분이다. 선문에서 말하는 ‘기시(祇是)’는 산과 물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음을 가리킨다. 마지막 단계에서 산과 물이 여전히 원래의 산과 물이었다는 점은, 장자와 나비가 결국 각각 구분된다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단계의 수양을 통해 입증된 생명의 경지와 일맥상통한다.
장자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꿈속에 들어갔고, 다시 꿈에서 깬 뒤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비록 장자는 여전히 장자였고 나비는 여전히 나비였지만, 그 과정에서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고 나비는 꿈속에서 장자가 되는 변환 과정을 겪었다. 자신을 없애버리고 서로 융합하는 과정을 통해 장자와 나비는 ‘기시’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층 더 높은 차원의 ‘대시(大是)’를 실현했다. 여기서 ‘대(大)’는 도가 이미 나에게 실현된 상태를 뜻한다. 단순히 꿈과 상대적 개념인 깨어 있는 상태를 뛰어넘어 도를 깨달은 ‘대각(大覺)’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가리킨다.
생명의 주체인 ‘마음’이 존재를 결정한다: 장자의 나비 꿈과 청원유신 선사의 깨달음을 ‘포정해우’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생명의 주체인 ‘마음’은 형체 속에 존재하면서 천지만물을 마주 대하는데, 육안으로 관찰하고(目視) 마음의 지각작용(心知)과 마음으로 만나는(神遇) 등의 다양한 과정을 거친다. 또 한순간에 다양한 모습으로 급변하기도 하고 다양한 차원의 모습으로 우리 인간의 눈앞에 나타난다. 육안으로는 사물의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형상만 볼 수 있고, 심지(心知)로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실용적 가치만 파악할 수 있다. 신우(神遇)야말로 생명이 이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심지의 집착과 인위적인 조작의 구속에서 탈피하여, 생명 본연으로 되돌아와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 앞으로 어떤 삶을 영위하게 될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노자는 ‘도법자연(道法自然)’, 즉 ‘도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도는 영원히 변함없는 생성의 원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自然)’은 흔히 생각하는 과학 연구의 대상인 가시적인 자연(nature)이 아니라, ‘연(然)이 자기 자신으로부터(自) 나온 것’을 뜻한다. ‘자연’은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오직 ‘자연’에 의해서만 만물은 존재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육안의 관찰(目視)’, ‘마음의 지각작용(心知)’, ‘마음으로 만나기(神遇)’의 과정을 겪는데, 이는 온전히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고통으로 가득하며, 인간은 질곡으로 가득한 일생을 보낸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순간에 화려하고 멋진 인생을 보낼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의 진정한 주체인 ‘마음’이 모든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이 관건이다. 그래야만 천하를 내려놓을 수 있다. 원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와 타인 모두는 함께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너무 빡빡하게 대하지 않고 관용과 여유를 베푸는 ‘무후(無厚)’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중국이 무후해야만 대만도 무후하고, 여당이 무후해야만 야당도 무후해진다. 나아가 중국과 대만 관계에도 여유가 생기고 여야 사이에도 여유가 생긴다. 우리는 무하유지향에 머물 수 있고 나비의 꿈을 꿀 수 있다. 천지는 무한히 넓어지고 서로에게 여유를 갖고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소의 몸 구조가 아무리 복잡해도 두께가 거의 없는 얇은 칼로 자유롭게 해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아의 구속에서 탈피하고 모든 것에 분별이 없는 이상적인 경지에 녹아들어 갈 수 있다.
인간 세상에서 한가로이 노닐다 - 《장자》를 읽으며 인생을 말하다
바쁘고(忙), 막막하고(茫), 불투명한(盲)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다
물욕(物慾)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너무 바쁘다. 정(情)에 사로잡혀 너무 정신없고 막막하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 마음속이 불투명하고 모호하다. 몸(身), 마음(心), 정신(靈)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몸과 마음, 정신의 고통: 《장자》는 훌륭한 우언으로 가득하다. 각 편과 그 안의 세부 내용도 훌륭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지금부터 필자는 바쁘고, 막막하고, 불투명한 현대인의 삶에서 출발하여 몸과 마음, 정신의 세 가지 차원에서 삶의 고통을 상세히 논해보려고 한다. 현대인의 삶을 ‘몸’, ‘마음’, ‘정신’의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하기로 한 만큼, 이를 먼저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해 보자. 첫째, 인간은 하나의 자연물로서 매우 바쁘게 살아간다. 둘째, 인간은 사회인으로서 속세의 교차로에 서서 막막함을 느끼고 있다. 셋째, 인문적 마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은 몰입과 탐닉에 빠져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채 불투명해진다. 현대인이 맞닥뜨리는 삶의 고통은 이와 같이 ‘바쁨(忙)’, ‘막막함(茫)’, ‘불투명함(盲)’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