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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위의 한국사

민병덕 지음 | 책이있는마을



밥상 위의 한국사

민병덕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17년 3월 / 352쪽 / 15,800원





김치는 언제부터 담가 먹었나요?

한국 사람들은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우리 민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 중 하나였다. 김치의 건강 요소가 늘어남에 따라 일본은 물론이고 서양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인 사스가 세계적으로 창궐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만 큰일이 일어나지 않자 세계인들은 김치의 매운 맛이 사스를 예방했다고 할 정도였다.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김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던 채소 가공식품이다. 배추나 무 등을 소금에 절여서 고추, 마늘, 파, 생강, 젓갈 등의 양념을 넣어 버무린 뒤 자연 발효를 시켜 먹는다. 오늘날에는 다이어트 식품에다 영양의 보고(寶庫)라 하여 세계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김치는 상고시대부터 먹기 시작했다. 원래 김치는 중국에서 먹던 음식이었다. 2500년 이전에 이미 김치를 먹었다고 《시경》에 기록되어 있다. 김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중국 한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하던 낙랑시대로 추측된다. 한반도의 부족국가나 삼국시대의 문헌에 김치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일본 문헌에 김치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쇼쇼원문서》나 《연희식》에 소금, 술지게미, 장, 초, 느릅나무 껍질로 김치를 절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쌀가루와 소금에다가 채소를 절인 수수보리지란 김치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김치는 500년경에 중국에서 펴낸 농서인 《제민요술》에도 언급되어 있다. 수수보리지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일본 응신왕 때 백제 사람 수수보리가 일본으로 건너가 누룩으로 술을 담그는 방법을 알려주며 전해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수수보리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기온이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일본의 기후 때문에 쌀가루를 쓰는 김치가 쉽게 발효되어 강한 신맛이 나서 먹기가 곤란했으므로 쌀가루 대신에 쌀겨로 바꾸면서 일본의 대표 음식인 단무지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에서 여러 가지 김치를 먹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중국 영향을 받은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김치를 먹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겨울이 길고 추웠던 한반도에서 겨울 동안 채소를 보관하면서 먹을 수 있게 만든 음식이 김치인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무, 오이, 가지, 부추, 죽순, 마늘 따위를 소금으로 절이거나 술, 술지게미, 소금을 함께 넣어 절였는데 오늘날의 김치와는 달리 장아찌류에 가까웠다. 우리 문헌에서 김치를 처음 언급한 기록은 고려 고종 때의 문장가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가포육영>이라는 시다.

무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우내 반찬 되네



위의 구절로 보아 고려시대에 장아찌류의 김치 종류에서 더 진화하여 오늘날의 짠지와 같은 물김치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짠지는 무를 소금으로 짜게 절여 만든 김치이다. 이 밖에 고려시대에는 나박김치와 동치미도 개발되었다고 한다. 이때 양념으로 천초(川椒: 산초나무 열매의 껍질), 생강, 귤껍질 따위가 쓰였다.고려시대의 김치는 중국 원나라에도 전해졌다. 고려시대의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갔던 고려 여인들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를 중심으로 퍼진 고려양(高麗樣,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고려 풍습으로 한복, 버선, 신발 등이 원나라의 귀족 문화를 이루었다)으로 말미암아 몽골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원나라 때 김치는 향신료까지 더해져 더욱 맛있는 음식으로 발전했다. 원나라 때 편찬된 가정 요리책인 《거가필용》에는 마늘이나 생강 따위의 향신료를 채소에 넣은 김치가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도 마늘이나 생강을 넣은 김치가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춧가루를 넣어 김치를 담그기 전에는 붉은빛을 내기 위해 맨드라미꽃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후에 일본에서 고추가 전해지면서 김치의 맛은 더욱 좋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고추의 종류는 다양했다. 중국에서도 고추류를 재배하였는데 고추의 한 종류를 초(椒)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오늘날처럼 매운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 들어온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초(椒)에 ‘맵다(’쓰다‘의 뜻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맵다‘라는 뜻으로도 쓰였다)’라는 뜻의 고(苦)가 합쳐져 고초가 되었다가 고추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추의 원산지는 중남미 대륙의 열대 지방이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고추를 서양에 들여왔다가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일본에서 고추가 쓰이는 요리는 시치미라는 양념에 조금 넣는 정도인데, 어떻게 난리 중에 우리나라로 가지고 온 것일까? 아마도 임진왜란 중 일본군들이 고춧가루를,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화학무기로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조선군과 가까이 싸울 때는 칼도 유리했지만 고춧가루를 눈에 뿌리면 따가워서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으므로 일본군은 쉽게 승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잘 먹지 않았던 고추를 조선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매운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하는 까닭은 16세기 말 중국에서 발간된 《본초강목》에 고추에 관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의 《초목육부경종법》에는 1542년 포르투갈 사람이 고추를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지봉유설》에도 고추가 일본에서 전래되어 왜겨자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춧가루를 넣으면서 김치가 쉽게 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더구나 고추의 매운맛은 비린내를 없애주는 작용을 하면서 다양한 어류 양념을 쓸 수 있었다. 궁중에서는 조기젓이나 육젓 등 비교적 비싸고 귀한 것을 넣었고, 일반 백성들은 멸치젓이나 새우젓을 주로 사용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오늘날과 같은 김치를 먹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1715년(숙종 41)에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는 오늘날의 김치와 같은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때의 김치는 소금에 절이거나 식초에 담그는 등 여전히 장아찌 종류였다. 그 후 50년 뒤인 1766년(영조 42)에 유중림이 《산림경제》를 증보하여 엮은 《증보산림경제》에는 오늘날의 김치 종류가 거의 다 소개되어 있다. 배추김치를 비롯하여 오이소박이, 동치미, 겨울가지김치, 전복김치, 굴김치 등이 있다. 김치를 처음 담가 먹을 때는 무를 소금에 절여 먹는 형태였다가 점차 재료를 다양화하여 오이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채소뿐만 아니라 야생풀을 김치로 담가 먹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달충이 지은 한시인 <산촌잡영>에 “여뀌절임 속에 마름도 끼고…….”라는 대목으로 야생풀도 김치의 주요 재료였음을 알 수 있다.

배추를 본격적으로 김치의 재료로 쓰기 시작한 때는 조선 후기였다. 배추의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오래전이었다. 배추를 처음 언급한 문헌은 고려 말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이다. 배추는 쉽게 물러 김치로 만들기에는 부적합했는데 조선 후기에 고춧가루를 넣으면서 젓갈류를 첨가할 수 있게 되어 쓰임새가 다양해졌다. 특히, 겨울에 무와 같은 딱딱한 채소를 소금에 절인 형태에서 다양한 양념과 젓갈류를 이용한 김장을 만들면서 풍족한 겨울 반찬을 만들게 되었다. 김치는 영양의 집합체이며 장내 소화를 돕는 성분까지 들어 있어 현대에 와서 그 진가를 더욱 높이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인도의 렌즈콩, 그리스의 요구르트, 에스파냐의 올리브유, 일본의 낫또(사실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청국장)와 함께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꼽힌다.

김치는 2013년 12월 2~7일까지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8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김장을 할 때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나누어 먹는 음식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인정하였고, 특히 나눔의 정신을 실현하고 마을 공동체 의식 속에서 소속감과 연대감, 정체성을 높였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때 일본과 중국이 집요하게 방해했지만 우리나라만의 전통을 유네스코에 호소하여 일본의 기무치를 제치고 독자적인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이른바 ‘김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김치와 관련된 대표적인 역사 이야기는 조선 16대 왕 인조의 아들 봉림대군과 흥덕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로 신하가 황제에게 취하는 예를 보이면서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었고, 인조의 아들인 봉림대군은 형님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은 고국에서 먹던 김치 생각이 간절하였다. 봉림대군의 마음을 알아챈 궁녀 흥덕이 텃밭에 채소를 심어 김치를 만들어 봉림대군에게 바쳤다. 봉림대군은 평생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봉림대군은 형님인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효종이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청나라에서 먹었던 김치의 맛을 잊을 수 없었던 효종은 궁녀 흥덕에게 서울 낙산(성북구와 종로구에 걸쳐있는 산) 중턱의 땅을 하사하였다. 지금도 낙산 중턱에는 ‘흥덕이밭’이 남아 있다.



옛날에도 얼음을 보관했다가 먹었나요?

옛날에 얼음은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럼 옛날에는 얼음을 어떻게 만들어 보관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아무나 먹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는 평양의 대동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특산물로 바친 얼음을 보관하여 일 년 내내 썼다. 평양 사람들은 겨울이 따뜻하면 울었다고 한다. 나라에 얼음을 바쳐야 하는데 얼음이 얼지 않거나 비록 얼음이 얼었다 하더라도 진상하려고 뜨다 보면 녹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겨울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얼음을 저장했다가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얼음을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보관 창고가 필요했다. 지금 서울에 서빙고동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가 있던 장소다. 이곳에는 8개의 얼음 창고가 있었으며 왕실 주방용과 고위 관리들에게 나누어 줄 배급용으로 쓰였다. 이 당시 서빙고의 반대편에도 얼음 창고가 하나 더 있었다. 한강 하류 두모포에 설치한 얼음 창고로 이곳에서는 나라에서 제사에 쓸 얼음을 보관했다.

우리 조상들이 얼음을 사용한 것은 신라시대부터 였고, 얼음을 보관하던 얼음 창고도 있었다. 《삼국유사》1권 <기이>제2 노례왕(신라의 3대 임금 유리이사금)조에 “보습과 얼음 창고와 수레를 만들다.”라든가, 《삼국사기》<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조에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하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경주의 석빙고는 이미 신라시대에도 얼음 창고 노릇을 했으리라 추측된다. 특히 신라는 우리나라 남부에 위치하여 얼음을 저장하는 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라와 함께 고구려와 백제도 얼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잔치에 얼음 덩어리로 만든 조각품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빙고와 같은 얼음 창고가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고려사》<세가>제6 정종 2년(1036) 6월 25일 기사에 “고위 관리들에게 얼음을 하사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여름철에 관리들에게 얼음을 선물로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27권의 기사를 보자.

순천관 건물의 정청은 5칸이며 양쪽 행랑은 각각 2칸인데 창호를 내지는 않은 채 툭 터서 기둥 9개로 만들었다. 방문(榜文)에는 ‘순천지관(順天之館)’이라고 썼으며 동서 양쪽으로는 2개의 계단을 만들었는데 모두 난간을 설치하였다. 그 위에는 수놓은 비단으로 된 장막을 펼쳤는데 그 문양으로는 날아가는 난새와 둥근 꽃송이를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4면에는 꽃을 수놓은 칸막이 판을 펼치고 좌우에는 팔각형 빙호(氷壺)를 두었는데, 빙호는 얼음을 담는 옥그릇을 말한다.

기사를 보면 관청에는 얼음을 보관할 수 있는 ‘이동식 냉장고’라고 할 수 있는 빙호를 두어 필요할 때마다 얼음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얼음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사신이 왔을 때는 귀한 음식으로, 더위로 아픈 사람들에게는 치료 겸 위로의 선물로, 제사 음식으로, 그리고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하였다. 다음은 《세종실록》세종 16년(1434) 6월 11일 기사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동서 활인원(活人院)의 열병 앓는 사람들이 이제 한더위를 당하였사오니, 그들에게 부순 얼음을 주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시대에도 날씨는 몹시 무더웠을 것이다. 당연히 오늘날의 일사병이나 열사병 같은 열병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얼음을 하사했던 모양이다.

이처럼 옛날에도 얼음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오늘날처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므로 겨울에 얼음을 구해 보관하였다가 여름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옛날에는 열을 막아줄 단열재가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온도 변화가 적으면서도 저장과 반출이 쉽도록 반지하 구조로 만들었다. 조선 초기까지 땅을 일정 깊이로 파고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얹고 나서 서까래를 걸친 목조 구조였다. 그러나 목조로 만든 빙고는 매년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석조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석빙고가 남아 있는 지역은 경주, 안동, 창녕, 청도, 현풍, 영산, 북한의 해주 등인데 주로 영조 때 만들었거나 시설을 보수한 것들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과학적 지혜를 동원하여 여름에 얼음을 저장하는 방법을 일찍부터 깨우쳤던 것이다.



고추나 후추 같은 향신료는 언제 들어왔나요?

▲ 고추: 조선시대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남만초(南蠻椒)는 대독(大毒)하다. 처음 왜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세속에서 왜개자(倭芥子)라고 한다. 요즘은 자주 심는데 술집에서 몹시 매운 것을 이용한다(술안주로 고추를 먹는다). 혹 고추를 소주에 타서 팔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신 사람이 많이 죽었다.

1760년(영조 36) 이익이 지은 글을 조카들이 모아 엮은 백과사전 《성호사설》, 60권의 방대한 백과사전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등에도 번초(蕃椒)가 일본에서 도입되었고, 그 시기가 임진왜란 이후라고 하였다. 지금은 도리어 고추를 전해준 일본에서는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없을 정도로 기본양념 구실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고추장을 최초로 담가 먹기 시작한 것은 조선에 고추가 전래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로 추정된다. 숙종부터 경종 때까지 어의를 지낸 이시필이 쓴 조리서인 《소문사설》<식치방>에 ‘순창고추장’ 제조법이 나와 있다. 이때 만들어진 고추장은 메주를 이용하지 않고 그 속에 전복, 대하 따위의 어패류를 넣어 삭혀 먹었다. 마치 지금의 장조림 또는 장아찌 같은 음식이었다.

순창고추장을 그 이전에도 먹었다는 설도 있다. 이성계가 무학 대사와 함께 순창에 왔다가 한 농가에 들러 장을 맛보았는데, 임금으로 등극한 후에 그 맛을 잊지 못해 장을 진상하게 한 것이 오늘날 고추장의 기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는 고추가 전해지기 전이다. 고추장은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초장’으로 산초로 만든 장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곳에는 무학 대사가 이성계가 임금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10,000일 동안 기도했다고 하여 백제 무왕 때 세운 절을 증수하여 만일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절에서 고추장을 개발하여 고추장의 기원지가 되었다고 한다. 높이 172cm에 이르는 만일사비는 효종 때 만든 것으로 비문을 읽기는 어려우나 ‘태조 이성계’와 ‘무학 대사’라는 글자는 판독이 가능하여 고추장과 관련된 비석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조선의 임금 중 영조가 제일 고추장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고추장 없이는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했다. 궁궐의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의 고추장보다도 사헌부지평인 조종부의 집에서 만든 고추장을 좋아했다. 조종부의 본관은 옥천, 오늘날 순창이다. 그러나 조종부는 영의정 이천보의 행실을 비판했다가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어긋난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아마도 자신의 고추장을 좋아하는 영조를 등에 업고 과신하다가 큰 코를 다친 것이 아닐까 한다. 1809년(순조 9) 빙허각 이씨가 엮은 부녀자의 생활 지침서인 《규합총서》에도 순창의 고추장을 특산물로 꼽고 있으니, 순창은 오래전부터 고추장이 유명한 모양이다. 김치에 젓갈을 넣기 시작한 것도 고추가 들어온 이후인데, 그것은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이 음식물의 산패를 막아 비린내가 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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