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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평전

이창호 지음 | 벗나래



안중근 평전



이창호 지음

벗나래 / 2016년 3월 / 327쪽 / 15,000원



북두칠성을 등에 새긴 아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다 / 안중근의 명망 높은 가계: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이 태어났을 때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을 닮은 7개의 점이 있어 아버지인 안태훈은 아이의 이름을 응할 응, 일곱 칠을 써서 응칠(應七)로 지었다. 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이다.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고려 때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으로, 진해 명예헌감을 지냈으며, 가문은 지방 무반 호족으로 대대로 해주에서 세력과 명망을 이어 온 집안이었다. 안태훈은 성균진사를 지냈고, 개화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개화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안중근이 6세 때 안태훈 일가는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아래의 청계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들이 수난을 겪게 되면서 안인수가 안태훈을 보호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횃불 아래 / 신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함께 동학군에 맞서다: 안중근이 청계동으로 이사 온 지 십여 년이 지날 무렵,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참고로 동학군이라고 해서 모두가 옳은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동학군의 수가 많아질수록 옳은 뜻을 펼치려 일어난 농민들 외에도 동학군의 이름을 빙자하여 폭행과 약탈을 일삼는 자들도 함께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황해도에 일어난 동학군들도 마찬가지였다. 황해도까지 동학군이 밀어닥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은 급히 안태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안태훈은 정현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하고 민병대를 조직했다.

갑오의려의 선봉에 선 안중근: 안태훈은 지역의 산포수와 청년들을 모아 ‘갑오의려’를 조직했다. 이것은 갑오년에 조직한 일종의 민병대였다. 갑오의려는 안태훈의 인덕과 재력에 의해 조직되었고 큰 전공을 세웠다. 여기에는 안중근의 역할도 컸다. 안중근은 열여섯의 나이로 전략을 짜고 부대의 선봉에 서서 맹활약을 펼쳤다. 그 수완과 담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국운동의 씨앗을 품다 / 가문에 드리운 검은 기운 / 천주교를 접하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자 안태훈은 의병을 해산하고 다시 농사를 지으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청계동에서 동학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이듬해 여름, 안중근의 집에 사람이 찾아와 “작년 전쟁 때 실어 온 천여 포대의 곡식은 원래 동학당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물건들의 절반은 탁지부 대신 어윤중 대감이 사두었던 것이고, 다른 절반은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 대감이 농장에서 추수해 거둬들인 곡식이지요.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모두 돌려드리시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양곡은 군사들의 식량으로 소비하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안태훈은 “어 대감, 민 대감의 쌀은 내 알 바 아니오. 내 직접 동학당의 진중에 있던 것을 빼앗아 온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일은 후환을 불러왔다. 민영준은 안태훈을 역모로 몰고자 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안태훈은 서양 신부들의 도움으로 천주교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으로 피신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태훈은 천주교 신자가 된다. 아울러 안중근도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7년 1월, 열아홉의 나이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1910년 3월 죽음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신실한 천주교인으로 살았다.

나라 잃은 슬픔을 배우다



계몽운동에 뛰어들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국운이 기울어 가는 국망지추에 안중근은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는데, 그는 신문과 세계 각국의 사정이 담긴 책을 통해 국내외 정세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이 전쟁의 목적이 한국을 가운데 놓고 서로 먹겠다고 벌이는 쟁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당시 일제의 한국 침략 야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04년 6월, 일본은 한국 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했다. 이 무렵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일부 유지들이 보안회를 창립했다. 안중근은 보안회의 취지에 찬동하고 입회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보안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신분을 밝히고, 간부들에게 한국 침략의 선도자인 하야시 곤스케 대리공사와 부일배를 처단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보안회 수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안중근은 혼자서라도 목숨을 걸고 부일배와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한다. 그는 이미 뜻을 함께하는 ‘결사 부하’ 50명도 거느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열투쟁사의 효시다.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의열투쟁의 효시를 1907년 나철 등의 을사오적 처단 시도로 보고 있지만, 이보다 약 2년 앞선 1904년 안중근의 하야시와 부일세력 처단 구상을 의열투쟁사의 효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의거도 바로 이러한 의열투쟁 구상의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국을 위해 망명 계획을 세우다 / 상하이에서의 실망: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한국을 지배할 계획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그 중심에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몰고 들어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도록 협박했는데, 한국 정부의 각료 일곱 명 중 다섯 명이 찬성하여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안중근은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말, 가족이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곳을 찾기 위해 먼저 답사차 중국으로 건너갔다. 먼저 산둥 지역 등지를 답사하고 상하이로 갔다.

당시 대한민국의 대신이자 민 씨 정권의 핵심 인물인 민영익은 러일전쟁 후 상하이로 건너가 살고 있었다. 안중근은 그를 찾아가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만나지도 못했다. 실망한 안중근은 이번에는 서상근이라는 상인을 찾아가 설득했으나 서상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중근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안중근은 천주교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나오다가 우연히 신부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르각(한국 이름은 곽원양) 신부였다. 프랑스인 신부인 그는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안중근과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었다.

신부가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지금의 억울한 조국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하여 공감을 얻으면 기회가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기회를 이용해 의거를 일으킬 작정입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종교인이고 신부라 정치와는 관계가 없네. 하지만 자네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아프군.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보겠는가?” “그 계획이 무엇입니까?” “자네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네. 바로 교육, 사회, 민심, 실력이네. 교육을 발달시키고, 사회를 확장시키며, 민심을 단합하고, 실력을 양성시키면 자네의 2천만 민족의 정신이 튼튼해져 수천수만의 포를 갖고도 깨뜨릴 수 없을 것이네.” “신부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격적인 구국운동: 안중근은 진남포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진남포로 이사한 뒤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안중근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해 2대 교장으로 취임한 뒤, 교사를 증축하고 선생들을 증원했다. 그리고 기존의 교과과정에 교련을 배정해 집총 훈련을 시키는 등 나라를 구할 영재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안중근이 이 모든 교육구국사업을 혼자서만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뜻을 같이하는 가족들과 지인들이 모두 안중근의 교육사업에 동참했다. 어느 날, 학생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중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변해 가는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서양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돈의학교는 규모, 재정, 체계에서 이 모든 것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안중근은 몇 대에 걸쳐 축적한 집안의 재산 대부분을 털어 삼흥학교를 세웠다. 또 교육구국사업 외에도 서우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학교를 운영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느라 안중근의 재산 대부분은 바닥나 버렸다.

의병투쟁을 벌이다



일제에 의한 한국 군대의 해산 / 조국 해방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다 / 머나먼 여정에서 만난 동지 그리고 희망: 안중근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벌이던 교육구국사업과 애국계몽활동의 효과성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의구심을 품던 중에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났고,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어 법령 제정, 관리 임명, 행정 등의 권리를 장악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인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는데, 제1연대 제1대 대장 박승환이 39세의 나이로 군대 해산 소식을 듣고 자결하자, 병사 700여 명이 무장 항쟁으로 일본군과 맞섰다. 한국 군인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탄약도 얼마 없는 구식 총으로 서울 남대문 등지에서 처절하게 싸웠고, 이날의 교전으로 남상덕 등 68명이 살해되고, 100여 명이 부상, 500여 명이 포박되었다.

군대가 해산되고 병사들이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서 쓰러져 가는 것을 목격한 안중근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이제 교육구국사업이나 애국계몽운동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으니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심 끝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는 집과 나라를 떠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한다.

진남포에서 간도로 떠나올 때 안중근은 희망적인 계획을 구상 중이었다. 간도에는 일제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동포들 다수가 옮겨와 척박한 땅을 개간해 이미 삶의 터전을 일군 상태였다. 게다가 천주교가 일찍부터 전래되어, 동포이면서 천주교인인 신자들이 많이 살았다. 하지만 간도에 도착해 목격한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동포들의 삶이었다. 안중근은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이런 안중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들이 모여 살면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한다고 들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연해주 지방의 연추라는 곳에는 간도 감찰사를 지내고 러일전쟁 때부터 항일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이범윤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홍범도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도 활동하고 있었다.

우선 연추에 도착한 안중근은 그곳 한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그는 1860년대에 러시아에 귀화하여 상선을 타기 시작한 이후부터 무역업을 통해 큰 재산을 축적한 사람이었다. 부를 축적한 최재형은 러시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위해 재정적으로 돕는 것은 물론, 학교를 설립해 교육 활동도 펼쳐 나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연해주 지역에서 펼치는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최재형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안중근의 가슴속에 ‘이 사람은 큰 인물이다. 앞으로 함께 뜻을 이어갈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윽고 최재형이 말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길은 분명 하나가 아닐 거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이곳에서 동포들을 위해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 배움과 지식은 무력으로 깨뜨릴 수 없는 강한 힘이오. 그러나 모든 것은 때를 잘 만나야 하오. 지금은 단지 교육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가 없소. 저들의 칼과 총이 학교도 겨누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교육과 앎이 정답이 아닌 것은 아니요.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이 조화를 이룰 때 더욱 강해지는 법이지. 단, 지금은 외적인 힘이 약하기 때문에 거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소. 당신은 그것을 위해 왔고, 그렇죠?”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동지라면 충분히 해내리라 생각하오. 우리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씁시다.”

대한제국 의병 창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애국지사들을 찾아다니며, 의병을 조직하여 일으킬 것을 설득하고 다녔고, 그곳에서 의협심이 강한 두 사람을 만났다. 바로 엄인섭과 김기룡이다. 세 사람은 의병을 조직해 의거를 일으켜야 한다는 계획 아래, 많은 일들을 모의했다. 우선 의병부대 창설을 위한 ‘동의회’를 조직해 최재형을 회장으로 추대한 뒤, 각 지방을 돌면서 사람들을 만나 열정적으로 연설했고, 이 연설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합류했다. 어떤 이들은 자원해서 출전 의사를 밝혔고, 또 어떤 이들은 병기를 내놓거나 의금을 내어 돕기도 했다.

그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결단을 못하던 이범윤을 여러 번 만나 설득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각 지역의 의병장들을 만나 함께하겠다는 뜻을 모았다. 그 결과 마침내 각 지역의 의병들이 합심하여 ‘결의록’과 ‘동맹록’을 작성한 뒤, 연합부대를 창설했다. 총독은 김두성, 대장은 이범윤이었다. 안중근은 의군참모준장에 선임되었다. 의군이 조직될 수 있었던 데는 러시아의 신임을 받았던 최재형의 공이 컸다. 그가 러시아 장교들을 설득해 무기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재력도 한몫했다. 안중근은 우선 의군들의 마음을 다잡으며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열중했다.

의병활동과 단지동맹



국내 진입 작전: 안중근이 처음으로 참여한 의병전투는 국내 진입 작전이었다. 그는 1908년 7월 국내 진입 작전에 최재형 부대의 우영장으로 참여하였다. 안중근의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삼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했다. 일본군 여러 병을 사살하고 수비대 진지를 점령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지만, 부대 전체로는 참담한 패배였다. 연합의병부대가 한 개 사단이 넘은 일본군의 국경수비망을 뚫고 진격해 어느 정도의 전과를 올린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한편 이때 안중근 부대는 일본 군인과 상인 몇 명을 포로로 붙잡았는데, 신용하의 『안중근 유고집』에 따르면, 안중근은 포로로 잡은 일본 군인과 상인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너희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이다. 그런데 왜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또한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선전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해놓고 오늘날 이렇게 조선과 싸우고 침략하니 이것을 어찌 평화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안중근에게서 훈계를 받은 일본 군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본심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천황의 성지를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 일본과 한국의 귀한 생명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우리들도 분한 마음이 치솟고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타이르며 훈계했다. “내가 너희들을 살려 보내줄 것이니, 돌아가거든 그런 난신적자들을 쓸어버리도록 하라. 그렇게만 하면 그런 자가 열 명이 되기 전에 동양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만국공법 정신의 수호와 의병들의 반발: 결국 안중근은 만국공법 정신에 따라 포로들을 타이르고 이들을 석방했다. 포로들이 무기를 가져가지 않으면 처벌받는다고 애원해 그들이 지참했던 무기도 돌려주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병전쟁을 하면서도 인명을 존중하는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만국공법은 포로의 사살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은 적병을 살려서 돌려보낸 안중근에 대해 의병들의 질타가 쏟아졌고, 심각한 파장을 몰고 왔다. 일부 의병부대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안중근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무튼 안중근은 한 달 반이 지난 7월 말에 우덕순, 갈화춘 등과 12일 동안 하루 두 끼만 요기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연추 본거지로 귀환했다. 하지만 정작 안중근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동포들의 냉대였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해서 의병부대가 기습 공격을 받게 되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이후 하바로프스크 방면으로 가서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동포들을 만나 다시 의병 조직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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