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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짓길 인생에 장자를 만나다

왕이자 지음 | 북스넛



먼짓길 인생에 장자를 만나다

왕이자 지음

북스넛 / 2015년 4월 / 406쪽 / 15,000원





넉넉한 인생을 살려면



견문을 넓히는 일: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방법

하늘이 준 재능은 마땅히 쓸 곳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재능이 있는데 운이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또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여건이나 환경을 탓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호소하기도 합니다. 기회와 운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견문과 시야입니다.

「소요유」를 보면 견문과 시야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나라에 손이 트고 갈라지는 것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자자손손 이 약으로 비단의 얼룩을 지우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런 약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사내가 와서는 금 백 냥을 내놓으면서 약 처방을 사겠다고 말합니다. 약 처방의 주인은 집안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합니다. “우리 집안은 자자손손 이 약으로 비단 얼룩을 지우는 세탁업을 해왔지만 여태 많은 돈을 벌지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금 백 냥이라는 큰돈을 벌게 되었으니 처방을 파는 게 좋겠습니다.”

금 백 냥을 주고 약 처방을 손에 넣은 사내는 오나라로 건너가 오왕을 유세합니다. 때마침 오나라는 월나라의 침략을 받고 있던 터라 오왕은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라고 합니다. 오왕의 명을 받은 그는 병사들에게 약을 몸에 바르고 출전하도록 하지요. 때마침 겨울인데 수전을 벌여야 하는 오나라 군사들은 손발이 갈라지지 않고 트지 않으니 월나라 군을 대패시키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결말은 예상하셨겠지만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가 오왕한테 토지를 하사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장자는 이야기 말미에 이런 평어(評語)를 달았습니다.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손을 치료하는 약 처방은 하나지만

어떤 이는 그것으로 큰 상을 받아 영주로 봉해졌으나

어떤 이는 그것을 다만 빨래하는 데 쓰고 말았으니

이는 사용하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사내는 약 처방을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약 처방의 주인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견문의 폭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견문과 시야는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대대로 비단의 얼룩을 지우는 세탁업을 해온 집안의 그 사람은 아마도 평생 자신이 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는 삶의 터전이 된 고향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식견이 적고 시야도 좁을 수밖에요. 그러니 신비의 약 처방을 비단의 얼룩을 지우거나 갈라지고 튼 손을 치료하는 용도로만 써 왔을 뿐, 그 약이 다른 곳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을을 지나던 사내는 약 처방의 값어치를 한눈에 알아봅니다. 천하를 주유하며 견문을 넓힌 그는 병사들의 손발을 보호하는 약으로 쓴다면 전쟁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월나라와 수전을 치르는 오나라가 자신의 기회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약 처방으로 큰 공을 세우고 토지를 소유한 영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다면 반드시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 적절한 방식으로 적절한 사람에게 당신의 재능을 보여야 합니다. 최적의 ‘시(時), 지(地), 인(人), 사(事)’를 분별하는 지혜는 경험에서 얻은 견문과 시야에서 나옵니다.

책은 찌꺼기다: 지혜로운 책 읽기

책 읽기는 다른 이들의 경험을 내 것을 만들고 지식을 쌓고 시야를 넓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입니다. 책은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먼 곳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망원경이며 갈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판이며 인생의 항해에 지친 당신을 다독이고 일으켜 세우는 반려자입니다. 앎의 추구이든 영혼의 성장이든 아니면 재미를 위해서든 책 읽기는 누구나가 긍정하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독자’, ‘지혜로운 책 읽기’에는 다소 관심을 덜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책의 내용과 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지혜롭게 책을 읽는 좋은 독자가 되는 것일까요?

13장 「천도」 편을 보면 제나라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아래서 수레의 바퀴를 다듬고 있던 자가 와서 묻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제환공이 대답합니다. “성현의 가르침이니라.” 하지만 수리공이 이렇게 말합니다.

군주께서 읽으시는 책은 그저 죽은 사람의 시체일 뿐입니다!



이 말은 책을 대하는 장자의 기본적인 생각을 얼마간 보여줍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젓겠습니다만, 책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책 읽기를 경멸하는 뜻은 아닙니다. 진정한 성현의 도란 수레의 바퀴를 만들고 다듬는 장인의 솜씨를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이치처럼 책을 읽는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책을 ‘죽은 사람의 시체’라 한 것도 저자를 모욕하는 태도가 아니라 실은 저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인이 귀히 여겨 칭하는 것은 책이다.

책은 말에 불과할 뿐이니 실은 말이 귀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 귀한 것을 그 뜻에 있고

뜻에는 그 지향하는 바가 있다.

뜻이 지향하는 바는 말로 전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세인은 말을 전달하는 책을 귀중히 여겨왔던 것이다.

세인이 비록 책을 귀중히 여기지만

나는 귀히 여길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선종의 유명한 경전 『지월록』이 있습니다. 경전의 이름이 달을 가리키는 ‘지월(指月)’인 이유는 경전이 전하려는 참된 의미는 ‘달’이고 책은 다만 그 대상을 ‘가리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을 보는 어리석음처럼, 책이 전하는 말만 탐닉하고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는다면 책 읽기의 진정한 가치와 효용을 잃고 말 것입니다.

선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한 토막 하겠습니다. 한 스님이 찾아와 종암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물었습니다. “대장경에는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지요?” 종암 선사가 말합니다. “대장경 안의 검은색은 먹물이며 노란색은 종이라오.” 선사의 답이 참으로 절묘합니다. 그 속뜻인즉 ‘경문에 집착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책에 끌려다니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장자가 책 읽기를 싫어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장자는 학문이 넓어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그의 말은 거센 물결처럼 거침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자는 책의 문자적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저자의 ‘말 저 너머에 있는’ 언외지의를 상상하고 사색했던, 즉 ‘달’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책 안의 것들을 소화하고 흡수해서 정신의 자양분이 되도록, 하여 마침내는 자신만의 언론과 관점을 생산하는 책 읽기야말로 책의 가치를 올바르게 발현하는 독서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독자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독서 방법입니다. 책을 찌꺼기로 만드는 답습적, 폐쇄적 독서자가 아닌 끊임없는 회의와 자유로운 사색과 거침없는 상상력을 동원한 책 읽기로 스스로 변화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창조적, 개방적 독서자가 되길 바랍니다.

광대무변한 앎의 세계: 겸손한 의심

아는 것이 힘이다, 너무도 유명한 근대 경험론의 창시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한 말이지요. 현대 사회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여 년을 각종 지식을 습득하는 데 씁니다. 학문과 연구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며 보냅니다.

지식은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이며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매개체입니다. 진취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다양한 분야와 영역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의 매력과 힘에 더욱 붙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무엇에 사로잡혀 붙들리면 끌려다니게 됩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주체의 주관적 의지와 능동성이 점점 힘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장자의 우려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지혜는 무한하다.

유한한 생명으로 무한한 지혜를 좇는다면 지치고 고달플 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혜를 좇느라 급급하다면

더욱 지치고 고달플 것이다.



위의 글을 보면 장자는 앎의 추구를 그다지 격려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11장 「재유」 편에서는 성인과 지혜가 사람을 구속하는 형틀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며 ‘군왕을 없애고 그들의 지혜를 버려야만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고 다소 과격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장자를, 지식을 거부하고 혼돈 무지의 순수한 상고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철학자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윗글의 진정한 함의는 이런 것입니다. 우주만큼 광대무변한 앎의 세계에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지식)은 터럭만큼 작고 유한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박학다식하더라도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대부분을 알고 배우는 일에 쓰는 것은 몹시 지칠뿐더러 큰 의미도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생명에 허락된 시간은 유한하니까요. 그러면 장자의 말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천하가 갈수록 어지러워지는데

이는 지식을 좋아한 죄과이다.

천하 사람들 모두가 모르는 바를 구할 줄만 알지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탐구할 줄은 모르기 때문이며,

천하 사람들 모두가 선하지 않은 것을 비난할 줄만 알지

이미 선하다고 인정된 것을 비판할 줄은 모르기 때문으로,

결국 바로 이 때문에 크게 어지러워진 것이다.



지식이 문제 해결의 도구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아는 지식을 정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주장한다면, 그 지식은 오히려 분쟁을 일으키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화근이 될 뿐입니다. 누구도 지적인 호기심과 학구열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새로워지는 정보들의 범람 속에서 진위를 알 수 없는 신지식을 마구잡이로 맹목적으로 흡수하는 대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에 대한 차분한 검증 작업이 더욱 유의미하고 유익한 지적 추구라고 장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지식을 ‘하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으로 나눠 말합니다. ‘하늘의 지식’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면 반대로 ‘사람의 지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를 뜻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인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이니 모두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지요.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안다면 그것은 앎의 극치에 달한 것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것은

천리(天理)로 살아가는 것이며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것은

그 지혜로써 아는 것이니

그 지혜가 알지 못하는 바를 취하면

천수를 다하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데

이것이 지혜의 왕성(旺盛)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아직 근심은 남는다.

무릇 사람의 지식이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당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인데

그 대상이 계속 변하고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하늘에 속한 것이

사람에 속한 것이 아님을 어찌 알며

내가 말하는 사람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모든 ‘사람의 지식’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대상 자체가 변하거나 인류의 인식 수준이 발전하면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고 변화하는 과정 안에 있는 지식이라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의 판단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객관이고 무엇이 주관인지, 무엇이 절대적이고 무엇이 상대적인지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리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진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선인들의 말(기존의 지식)이 틀렸거나 부족한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문과 연구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는 마땅히 ‘겸손’과 ‘의심’이어야 합니다. 틀릴 수 있음을, 완전하지 않음을 알고 겸손히 인정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만이 당신을 오늘보다 더 진보한 내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몸을 떠나고 지식을 버려라: 지식의 한계성 뛰어넘기

지식은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물이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는 것처럼, 때로는 지식이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상상력을 가두고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에 장자는 지식에 숭고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지식을 의심하고 버리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소경과는 그림의 아름다움을 함께 볼 수 없고

귀머거리와는 종과 북의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없다.

어찌 오직 육체에만 소경과 귀머거리가 있겠는가?

무릇 마음의 지혜에도 소경과 귀머거리가 있는 것이다.



지식이 마음 지혜의 산물인 까닭에, 윗말의 속뜻을 모르고 보면 장자가 마치 지식 없음을 ‘마음의 소경’, ‘마음의 귀머거리’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있어도 마음이 소경이거나 귀머거리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식은 일면적이고 부분적이며 사물에 대한 이해도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실외 승강기 탄생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한 호텔은 영업이 잘되면서 협소하고 노후한 실내 승강기를 교체해야 했습니다. 호텔 사장은 일류 건축가와 엔지니어를 초빙해 승강기 교체 문제를 의논합니다. 반나절이 넘는 긴 논의 끝에 건축가와 엔지니어가 사장에게 제안을 합니다. 실내 승강기 수를 늘리고 지하에 승강기 모터를 설치하려면 제법 큰 공사를 해야 하므로 호텔이 반년은 휴업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민하는 사장에게 옆에서 호텔 바닥을 닦고 있던 청소부가 한마디 합니다. “승강기를 실외에 설치하면 안 되나요?”

세계 최초의 실외 승강기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왜 일류 건축가와 엔지니어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승강기는 실내에만 있는 것이라는 고정 관념과 관련 지식들로 가득 차서 마음 지혜를 소경으로 만들고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청소부는 기존 지식에 붙들려 있지 않았기에 전복적인 사고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자유로움이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지요. 장자는 필요하다면 과감히 지식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육신을 잊고 자신의 총명을 버리며,

본체를 떠나고 지식을 버리고,

큰 도와 통하여 대동(大同)하는 것을 ‘좌망(坐忘)’이라 한다.



호박벌은 독특한 비행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행을 하는 모든 동물들은 몸체가 가볍고 날개가 큽니다만, 호박벌은 몸 크기에 비해 날개가 작아 생물학적으로 날아오르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유체역학적으로 봐도 비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호박벌은 그 모든 학문을 비웃듯 하늘을 잘 날아다닙니다. 한 철학자는 호박벌의 비행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박벌은 생물학도 물리학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가능’을 모르기 때문에 날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지식을 경멸하며 학문 따위는 좇을 게 못 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앎을 추구하되 자유로운 사유를 가로막고 한계를 규정하는 틀을 버릴 때 비로소 지식이 제 소임을 다할 수 있노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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