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고전: 동양사상편
반덕진 지음 | 가람기획
세상의 모든 고전: 동양사상편
반덕진 지음
가람기획 / 2013년 4월 / 376쪽 / 17,000원
의산문답 - 조선의 유학자, 서양과학을 만나다
서양에서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면 1766년에 조선의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은 ‘무한우주론’을 주장했다. 담헌은 충청도 천안에서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정치를 할 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순수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이미 10살 때부터 ‘고학(古學)’에 뜻을 두어 과거 시험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과거 시험과 같은 반복되는 암기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대의 학자인 김원행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들어가서 35살까지 23년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엄격한 학풍을 익혀 철저한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의 집에서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자명시계인 후종(候鍾)을 보면서 이 기구들의 원리와 제작법을 배웠다. 그가 오랜 관찰과 실험 끝에 얻어낸 결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이었다.
1765년 그의 나이 35살에 작은아버지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자 그는 수행원 자격으로 청에 갈 수 있었다. 평생의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60여 일 동안 연경(베이징)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는데, 하나는 청에 머무는 동안 항주의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와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중국학자들과의 교유와 서양 선교사들과 만남을 통해 홍대용의 세계관은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청의 과학자들에게 ‘지구자전설’을 설명하자 그들은 감탄했다. 청에 머물렀던 몇 달 동안 그는 청의 학자들과 어울려 밤새워 학문을 논했고, 이들 사이에는 국경을 넘는 우정이 싹텄다. 담헌이 청을 떠날 때 이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후에 박지원이 연경에 갈 적에 담헌은 박지원을 이들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었고, 엄성이 먼저 죽자 반정균은 조선의 담헌에게 부고했다. 담헌이 죽자 박지원은 반정균에게 부고했다.
담헌은 그들과 교환한 의견들을 『연기(燕記)』와 『회우록(會友錄)』으로 묶었고 박지원은 서문을 써서 이들의 우정을 기렸다. 담헌은 북경의 과학 기술을 탑골의 박지원 사랑채에 모인 젊은 엘리트들에게 전파했다. 즉 그는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에게 과학 기술을 통해 조선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담헌은 청주로 내려가 기하학의 원리를 담은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완성했고, 현실 개혁 방안을 담은 『임하경륜(林下經綸)』을 지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워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벼슬을 10년 정도 한 후, 다시 저술 작업에 착수했고 그 후 1년 만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부음을 들은 박지원은 한걸음에 달려와 빈소에서 붓을 달려 묘지명을 썼다.
아, 슬프다. 덕보(홍대용의 자)는 민첩하고, 겸손하고, 식견이 원대하여,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였다.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의 학설이 오묘하였다. …… 홍대용은 넓은 땅에서 제대로 된 선비를 만나고 싶은 소망이 있던 차에 북경 유리창에서 육비, 엄성, 반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을 만났다. 이들 또한 평소 제대로 된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학식에 놀라고 반기며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다. ‘한 번 이별하면 다시는 못 만날 것이니, 황천에서 다시 만날 때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생전에 더욱 학문에 정진하자’ 하며 약속하고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상대주의적 세계관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담헌은 일찍이 서양과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적극 도입하여 전통사상 속에 용해시키려 했다. 지구의 둘레는 9만 리, 하루는 12시간, 하루 동안 지구가 1번 돈다는 그의 지전설은 단편적인 발상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의 구조에 대한 나름의 체계적 분석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평가도 지전설 주창자만이 아니라 과학사상가로 이루어진다. 서양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이미 1543년에 지동설을 내놓았고, 이어서 갈릴레이가 1632년에 지동설을 주장하여 담헌보다 크게 앞섰다. 그러나 서양과학을 동양에 전파했던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조차 당시에 금기이던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 가운데도 지구의 자전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담헌은 ‘잘못됐다’는 논평과 함께 소개된 서양 천문학책의 지동설을 읽고 오히려 지동설이 옳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는 우주 저편의 모든 별들이 지구를 하루에 한 번씩 도는 것보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다. 그의 지전설의 근저에는 우주가 무한하고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우주관이 깔려 있다. 『의산문답』에서 그는 우주 공간에는 끝이 없고 별들도 무수히 많다고 말한다. 이 무한한 우주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세계 말고도 얼마든지 많은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화성의 생물은 불 속에 살면서도 뜨거움을 모르고 달에 사는 생물은 얼음과 함께 살면서도 차가움을 모른다며 외계 생물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의 이런 우주관에 일관되게 흐르는 사고는 철저한 상대주의다. 그는 심지어 생명체를 구성하는 인간, 초목, 금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혀 생태주의적 사상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인간이나 지구 중심주의를 벗어난 그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중화사상이나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넘는 평등주의적 사회사상으로 이어졌다.
전통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대화록
『의산문답』은 담헌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허자와 실옹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30년간의 독서를 통하여 당시의 유학적 학문 세계를 모두 체득한 조선의 학자 허자는 “작은 지혜를 가진 자들과는 큰 것을 말할 수 없고 비속한 자들과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60일간 연경에서 중국학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자 낙심하고 탄식한다.
주공(周公)이 쇠한 것인가, 철인(哲人)이 시들어버린 것인가? 나의 도리가 그른 것인가?
귀국길에 오른 허자는 남만주의 명산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은둔하고 있는 서양과학의 대변자인 실옹을 만나 학문을 토로한다. 이 책의 앞부분에 그 유명한 ‘인물균(人物均)’사상이 나온다.사람의 눈으로 물(物)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물은 천하며, 물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은 천한 것이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사람과 물은 평등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천지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은 천하지만, 만물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에서 보면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자연물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의 이런 자연철학의 원리는 우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주에는 무한한 별들의 세계가 있고 별들은 무한히 운동하며 결국 위와 아래도 없고 안과 밖도 없다는 ‘무한우주론’이 여기서 제시된다.
온 하늘의 별들은 모두 나름대로 세계가 아닌 것이 없다. 별들의 세계에서 보면 지구 또한 하나의 별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우주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이 지구가 공교롭게도 중심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 지구가 모든 별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
이것은 중심의 개념을 해체한 것이다. 담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선 곳이 중심이며,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화이론(華夷論)을 전면 부정한다. 그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 지도를 그린다.
무릇 지구는 우주 전체에서 작은 티끌에 불과하며 중국은 지구에서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무수한 별의 세계가 우주에 산재하고 있다는 담헌의 우주관은 세계가 화(중국)와 이(오랑캐)로 구분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담헌은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중화사상을 비판한다.
『춘추』는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니 내외를 엄격히 구분한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공자가 정말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 오랑캐 땅에 살게 되었다면, 중국의 것으로 오랑캐를 변화시켜 주나라의 도를 바깥에서 흥성시키려 했을 것이니, 내외의 구분이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도에 따라 마땅히 역외(域外)의 『춘추』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춘추』가 중국의 역사라면 각 민족은 각 민족의 역사가 있다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제기했다. 즉 만약 공자가 중국 밖에서 살았더라면 그곳을 중심으로 『춘추』를 썼을 것이라면서, 중국인들과 그들이 오랑캐라고 부르는 민족들과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어찌 안팎의 구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각자 백성들을 친히 여기고 자기 임금을 숭상하며, 각기 제 나라를 지키고 각자 제 풍속을 편안히 따르는 것은 화이(華夷)가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음양오행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주기론을 바탕으로 서양의 4원소설을 거론하기도 한다. 담헌은 기(氣), 화(火), 수(水), 토(土)의 네 가지를 만물 생성의 원형으로 보았다. 이 4원소를 바탕으로 오행과 음양을 대신 설명하고, 특히 오행이 잘못 적용되어 철학, 천문, 지리, 의학, 종교, 정치, 도덕, 심지어 생활 감정까지도 오염시켰다고 보았다.
담헌의 사상: 인물균 사상, 무한우주론, 역외춘추론
담헌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고 홀로 자연과학을 탐구하다가 35살에 북경에 가서 서양의 선진 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조선의 상황을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의산문답』을 통해 무엇보다 성리학에 물들어 있는 양반층의 의식 개혁 없이는 조선의 상황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의산문답』에 담긴 담헌의 메시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30년 동안 성리학 공부를 한 허자가 세상에 나와 실옹에게 심한 꾸중을 듣게 되는데, 여기서 허자는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양반 기득권 세력을 상징한다. 둘째, 당시 성리학에서는 우주 만물에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존재이고 사람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담헌은 사람과 천지 만물은 평등한 존재라는 ‘인물균(人物均)’ 사상을 주장하고 신분제도를 비판했다. 셋째, 지구는 둥글고 운동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월식을 보고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모른다면 거울을 보고도 얼굴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넷째, 담헌은 ‘무한우주론’을 주장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무한한 우주에 하나의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다면서 그런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부질없는 욕심에 빠져 사는 것을 비판했다. 이는 당시 양반 기득권층의 끝없는 욕심을 비판하는 것이다. 다섯째, 중국 한족의 문화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화이관을 부정하였다. 이는 당시 기득권층들이 만주족이 세운 청의 문화를 부정하면서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중국의 전통유학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빠져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여섯째,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이 없다는 ‘역외춘추론’을 주장하며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주체적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다양한 문물은 받아들여야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는 그의 기대를 담고 있다.
주역 - 점과 철학의 두 얼굴
『주역』은 6경(六經)의 첫머리로 모든 경점의 으뜸이며 동양사상의 영원한 원천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주역』을 읽었다고 한다. 『논어』, 『맹자』 등은 주로 사회적인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심성에서 그 해결 방안을 모색했으나, 『주역』의 기본 구성 요소인 8괘가 하늘, 땅, 물, 불 등 자연을 상징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주역』은 자연의 본질적 존재 양상과 그 관계성을 밝히고 그것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시작하여 뉴턴이 완성한 서양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을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 서양의 자연관과는 달리 『주역』에서는 인간을 자연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본다. 이에는 인간이 주변 요소들과 분리할 수 없는 한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인간관이 담겨 있다. 음양론에 기초한 유기체적 세계관은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주역』은 선진(先秦) 시대 유가의 경전 중의 하나이자 중국 고대 문화의 토양에서 형성된 경전으로 동양적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문화와 사상의 바탕이 되는 『주역』은 자연의 운행 원리를 인간의 삶과 사회의 존재 양식, 그리고 역사 발전 법칙에 적용한 내용들을 고도의 상징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어 그 내용이 심오하면서도 난해하다.
‘주역(周易)’에서 ‘주(周)’는 주나라를 의미하고 ‘역(易)’은 도마뱀과 같은 파충류의 모양을 그린 상형문자이다. 몸의 색깔이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하므로 ‘역’은 ‘변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또는 ‘역(易)’을 해(日)와 달(月)의 회의(會意)문자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변화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해와 달이라는 생각에서인 것 같다. 이를 통해 ‘역(易)’의 핵심이 ‘변화’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역』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 『변화의 책(The Book of Change)』이라고 한다. 자연계와 인간계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간다는 주역의 근본 전제를 ‘역’이라는 한 글자가 웅변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주나라 때 만들어진 점술서, 『역경』
『주역』의 앞부분은 『역경(易經)』이고 뒷부분은 『역전(易傳)』이다. 『역경』에서 『역전』에 이르는 길고 긴 과정은 중국인의 사유 수준과 인식 능력이 향상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역경』은 주나라 때 만들어진 점술서이다. 점이란 미래의 발생 사태를 예측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 양식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도 불온한 사상서가 아니라 ‘유용한 점서’라는 점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역경』은 64괘(卦)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괘는 괘획(卦劃), 표제(標題), 괘사(卦辭), 효사(爻辭)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삼라만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을 64괘와 384효로 간단하고 평이하게 설명하여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문자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책들과 달리 『주역』은 문자보다 ‘괘’라고 하는 상징 체계가 많이 나온다. 그러면 왜 주역의 저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문자보다 괘상(卦象)을 택했을까? 그 이유는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나와 있다. 즉 “글로써는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는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인의 뜻은 볼 수 없는 것일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성인이 상징 체계를 만들어서 뜻을 완전하게 표현하셨다’.”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인 말과 글은 생각의 일부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것이며, 그중에서도 글은 말에 비해 더욱 불완전한 표현 수단이다. 이런 언어와 문자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은 『주역』뿐만 아니라 중국 철학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노자가 지은 『도덕경(道德經)』 첫 줄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참된 도가 아니며,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도의 참된 이름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언어와 문자라는 매우 불완전한 매개로 표현된 것을 진리로 알면 도리어 진리의 본질을 못 볼 수가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