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왕굉빈 지음 | 베이직북스
한비자
왕굉빈 지음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 496쪽 / 22,000원
한비와 《한비자》
한비의 운명과 일생한비의 재능과 책략: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웅대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가진 한 나라의 군주가 단 한 명의 인재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 전쟁을 일으킨 군주는 바로 진시황이고, 그가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인물이 한비였다. 한비는 한비자라고 존칭되기도 한다. 《사기(史記), 한비열전(韓非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비는 한(韓)나라의 공자(公子, 왕손이나 왕실 친족의 후손)이다. 그는 형벌과 명분을 통치의 기준으로 하며 법에 의한 지배에 관한 학문을 즐겨 추구하였다."
한비는 전국시대 법가사상을 집대성하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비록 '사람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말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지만 문장이 뛰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을 썼고 저술의 관점이 분명하였다. 그의 글은 거침이 없었고 감정이 풍부했으며 매우 예리하였다.
한비는 한(韓)나라의 공자 중 한 명으로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진나라의 승상이었던 이사와 함께 동문수학한 것으로 보아 대략 기원전 280년쯤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233년에 사망하였다. 이 시기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참혹한 시대로 전쟁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영웅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한 시기였다. 전쟁터의 군사들은 서로 살육하는 과정에서 지략과 용기를 다투었고, 정치인들은 밀실에서 글과 혀로 계략을 짜내었으며, 외교책략가들은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온갖 포섭과 이간질을 일삼았다.
한비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정치를 접할 수 있는 여건이나 상황이 자연스럽게 성숙되었으며, 그는 형명과 법술의 학문연구를 즐거워했으며, 그 학문적 포부가 범상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저명한 유가의 대가 순자(荀子)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이를 계기로 진나라의 승상이었던 이사와 함께 문하생으로 공부하며, 서로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순자의 유가사상의 전통을 계승하지 않고 오히려 법가의 논리를 추종했다. 그는 법가사상의 진수를 계승하여 연구하고, 종합하여 그가 활동했던 시기를 대표하는 법가의 대표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한비의 모든 사상과 이론은 상앙(商 )을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는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법을 받들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국가는 항상 강할 수도, 항상 약할 수도 없다. 법을 받들려는 의지가 강하면 국가는 부강해지고, 법을 중시하지 않으면 국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한비가 청년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진나라는 이미 상당한 강대국으로 부상했던 반면 한나라는 쇠약해져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한나라는 왜 이와 같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한비는 한나라의 실패와 쇠락의 원인이 내정을 가다듬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나라의 정치는 '중인(重人,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고위관리)'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중인'들은 명령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고, 국가의 재산을 빼돌려 자신들의 편의를 도모하며 언제라도 군주를 조종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국가의 대사를 조종하고, 제멋대로 비리를 저질렀지만 군주는 이런 자들을 총애하여 가까이 두고 있었다. 나라의 주도권은 임금의 신임을 받는 간신배들에 의해 좌우되었고, 이들은 끊임없는 감언이설로 임금을 기만하고, 사실을 호도하니 국가의 기운은 날이 갈수록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인들을 겨냥하여 한비자는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임금의 이익을 위해서 능히 군왕은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붕당이 일어나 임금을 둘러싸고 그의 눈을 가리는' 상황을 피하기 어려우며, 이는 곧 부강한 국가라도 파멸에 이르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주장했다. 한비는 매우 적극적이고 대담하게, 그리고 예리하며 지혜에 넘치는 자세로 법치(法治)와 통치술을 중시하는 법술의 학문을 주창하게 된 것이다. "어지러운 상황, 정당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모든 재앙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법에 의한 통치를 확립하고, 원칙을 정해 놓으면 모든 백성이 이익을 얻게 될 것이고, 결국엔 그 도에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임금은 한비가 주장한 '법에 의한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의 올바른 통치를 위한 전략을 품은 한비였지만 한나라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처지였다. 한비는 한나라 임금이 법으로 국가를 통치할 마음이 없으며, 권력으로 대소 신료를 제어할 능력도 없고, 국가를 강대하게 하기 위해 현명한 인물을 기용하기보다 오히려 간신들과 실속 없는 자들을 중용하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한탄했다. 유학자들은 현란한 글로 법을 문란하게 하고, 무사들은 무력으로 금하는 바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에 해를 끼치는 인물들이 오히려 명성을 얻고, 전쟁에서는 목숨을 걸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들이 봉록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반드시 키우고 자라게 해야 할 것이 쓸모가 없게 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육성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이에 그는 <고분>, <오두>, <내외저설>, <세림>, <세난> 등의 글을 통해 그의 울분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인재 쟁탈전의 희생양: 한비의 저술이 진나라에 전해졌다. 진왕 영정(훗날 진시황으로 불림)은 한비의 글을 읽고 난 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소. 만약 이 사람과 교분을 나누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바로 그때 임금 곁에 있던 승상 이사가 임금께 아뢰었다. "이는 한나라의 한비라는 자의 글입니다." 진왕은 즉시 한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전쟁의 유일한 목적은 바로 한비를 얻는 것이었다. 한비는 한나라에서는 하찮게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 따라서 대규모의 병력이 압박해오자 그는 순순히 진나라에 넘겨지게 되었다. 한비를 얻게 된 진왕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간절히 원하던 물건도 일단 손에 들어오면 진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법이다. 진왕은 한비를 기용하지 않았다.
한비의 죽음: 이사와 한비는 동문수학을 한 사이다. 이사는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한비에게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나라에서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나라 임금이 총애하던 신하였던 요고(姚賈) 역시 한비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한비는 요고가 연나라, 조나라, 오나라, 초나라에서 뇌물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 그리고 국가의 재물을 낭비하고 있다고 직언한 바 있었고, 한비가 여러 차례 요고의 비천한 출신을 조롱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사와 요고는 결탁하여 임금을 배알한 자리에서 그를 모함했다.
"한비가 한나라의 공자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제후국들을 복속시키려 하고 있으나 한비는 고국인 한나라를 보존하고자 할 것이며, 진심으로 진나라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이옵니다. 대왕께서는 한비를 기용하지 마시고, 진나라에 오랫동안 머무르도록 조치하신 후 한나라를 완전히 복구시킨 이후에 돌려보내도록 하시옵소서. 이는 우리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붙잡아 두자는 것이지, 그를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옵니다."
진왕은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곧 사람을 보내 한비를 수감했다. 이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밀리에 독약과 함께 사람을 보내 그를 자살하도록 압박했다. 한비는 진나라 왕을 만나 오해를 풀고자 하였고, 자신의 무고함을 알리는 글을 올렸으나 이사와 요고가 중간에 이를 가로채 왕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얼마 후 진왕은 한비에 대한 자신의 처결에 대해 후회하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한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비의 운명은 상앙이나 오기와 같은 법가의 사상가들처럼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으나 자신들이 그 법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한비의 생애: 한나라의 공자로 태어난 한비는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비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권력을 잡았던 적도 없고, 찬란한 정치적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오히려 굴욕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10여만 자에 달하는 국가 통치 이론과 사상, 통치를 위한 전략을 후세에 남겼다. 이 이론과 사상 그리고 통치술은 사람들에게 번쩍이는 섬광이었고, 땅을 울리는 굉음이었다. 또한 그의 사상과 전략이 응축돼 있는 《한비자》는 제왕들의 필독서로 받들어지고 있다. 특히 《한비자》는 진나라 임금에 의해 읽히고,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였다. 진왕은 한비의 이론을 철저하게 적용하려 했다. 한비가 주장했던 '법술세(法術勢)'의 사상은 진왕에게 스며들어 결국 통일된 진왕조의 수립을 가능케 하였고,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건설이라는 불후의 패업을 완성하도록 하였다.
한비는 저술을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의 저서 《한비자》를 통하여 춘추시대 이래의 법가사상은 매우 정교하게 통합되고 창조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한비자》는 한 시대의 사상 흐름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업적물이다. 그의 저작 속에서 한비는 천재적인 사상의 날개를 펼쳤으며, 제왕의 책무에 대하여 경계하며, 제왕이 꼭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제왕의 모든 언행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의 성공적인 통치와 변방의 공략 그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크게는 천자에서 작게는 제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목적은 스스로 군왕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고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혼란을 막고, 자신의 생명과 국가의 재난을 막음으로써 불후의 패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한비의 법가사상과 이전의 법가사상한비사상의 학술적 기원: 한비사상의 주체는 법술사상이다. 사람들은 그가 상앙의 '법(法)', 신불해의 '술(術)', 신도의 '세(勢)' 이론을 흡수하였고, 이를 집대성하여 하나로 녹여서 법가의 정치이론 체계를 완성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법(法)은 관청에서 공표한 성문법을 말하며, 서적으로 편집된 법규를 말한다. 술(術)은 군주가 은밀히 심중에 감추고 있는 권력과 통치술을 말한다. 이는 곧 신하와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세(勢)는 군주가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권력과 지위를 말한다. 이를 통해 신하들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한비는 일찍이 신불해는 "술을 추구하나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신불해가 한나라 무후를 보좌할 때, 비록 최고 통치자들에게 술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관리들을 대함에 있어 법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는 패권국이 될 수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또한 상앙이 "법을 따랐으나 술을 활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상앙이 진나라 효공을 섬기고 있을 때, 법치를 통해 진나라는 부국강병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권술(權術)을 잘 활용하지 못하여 임금은 이익을 얻을 수 없었고, 대권을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제왕의 통치를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법과 술을 동시에 잘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신도의 권세를 통한 통치의 학설을 채택하였다. 그는 권력과 세력의 중요성을 중시하여 "법을 장악하고, 권세를 활용한 통치를 해야 한다. 법을 배제하고, 세력을 잃게 되면 그것은 곧 혼란을 야기한다."고 강조하였다. 한비는 바로 이러한 법(法), 술(術), 세(勢), 세 학설을 종합하여 체계화된 법가의 정치학설을 완성하였다.
이와 같이 한비의 정치학설과 초기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주장은 차이가 있다. 한비의 정치사상 체계는 법치, 술치, 세치 이론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상호작용을 통하여 각각의 이론을 서로 보완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군주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활용하고, 술수를 통하여 신하들을 통제하고, 동시에 신하들의 보좌를 통하여 백성들이 공포된 성문법규를 엄격히 준수하도록 하면, 천하를 능히 통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전형적인 제왕의 통치술이며 또한 한비가 법가사상을 집대성했다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기 법가사상에 대해서 한비는 비판하기도 하고,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유가, 묵가, 도가, 법가 학설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고, 배제하거나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비는 초기 법가의 사상만을 취합한 것이 아니라 유가, 묵가, 도가 등 여러 학설들의 부분적인 내용들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그는 선진시대 여러 사상을 가장 폭넓게 수용한 사상가이며, 동시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후의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한비는 순자로부터 유학을 학습하게 되었고, 이후 스승과 결별하면서 법가의 이론을 완전하게 수용하였다. 그는 유학의 핵심사상을 매우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사회에서 인의(仁義)를 근간으로 하는 도덕체계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유학의 관념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선진시대의 유가 중에서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주자라고 한다면,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비의 성악설을 근거로 한 사상의 발전은 명백히 순자의 영향이라는 것을 능히 알 수 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이(利)를 좋아하고, 욕심이 많은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무엇인가를 먹으려 하고, 추우면 자신의 몸을 덥게 해줄 무엇인가를 입으려 하고, 피곤하면 어떻게 하든 쉬려고 한다. 이익을 탐하는 것은 해악이지만, 이는 모든 인간들이 태생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물론 명군이며, 성군이었던 하나라의 우(禹)왕이나 천하의 폭군이라 할 수 있는 하나라의 걸(桀)왕도 모두 이익을 탐하는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욕망을 추구하며,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한비는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사회의 현실적인 관계들에서 출발하여 인성은 모두 '이익을 탐하는 악한 성품이 잠재하며' 모두가 명예와 실리를 추구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사실상 모든 것이 이해관계의 연속 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은 물론 왕족과 귀족들도 모두가 이익을 탐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이익을 추구하고, 사람들은 오로지 이익을 도모한다. 순자가 주장한 바와 같이 한비는 인과 의, 은혜와 사랑만으로는 혼란을 막을 수 없고 교화의 역량만으로도 이를 방지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로지 엄격한 형벌과 법의 적용을 통해서만 폭력을 막을 수 있고, 악한 본성이 발현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신하와 백성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채찍만이 필요하고, 그 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순자는 소박한 유물주의적 사상가라 할 수 있고, 한비 역시 순수한 유물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국가의 대사를 점술로 결정하는 것을 반대했고 모든 사물은 반드시 비교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모두 순자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법가는 법률을 중시하고 유가의 예(禮)를 반대했다. 특히 주(周)나라 말기는 봉건제도가 와해되던 시기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법가는 때에 맞춰 법을 집행하고 사안에 맞게 예를 제정하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법가의 인물과 사상에는 차이가 있다.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에는 관중, 이회, 오기, 상앙, 신불해, 신도, 한비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법가사상을 경전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진 책으로는 《관자(管子)》, 《상군서(商君書)》, 《한비자》 등이 있다. 《관자》는 사회분업을 제창하고 소비를 권장했으며, 《상군서》는 농업을 중시한 반면에 상업을 억제했으며, 《한비자》는 전제 군주제를 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