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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순자, 현대인을 꾸짖다

순자 지음 | 베이직북스
상쾌한 순자, 현대인을 꾸짖다

순자 지음

베이직북스 / 2012년 6월 / 235쪽 / 13,000원



1장 순자, 배움을 권하다



배움은 죽을 때까지

배우며 도를 구하는 일은 생이 다하기까지 멈출 수 없다. (學不可以已)

"배우며 도를 구하는 일은 생이 다하기까지 멈출 수 없다. 學不可以已"라는 말은 《순자》의 첫 편인 <권학(勸學)>의 첫머리에 나오는 첫 번째 어구로,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배우며 도를 추구하는 삶은 멈춤이 없다는 뜻이다. 《논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논어의 첫 편인 <학이(學而)>의 첫 구절이 "배우며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悅)乎?"였음을 기억할 것이다. 우연의 일치든지 아니면 특별한 목적이 있었든지 간에, 이 사실은 공자부터 순자까지 유가란 본래 배움을 극진히 중시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둘 사이에 다른 점을 굳이 찾자면 공자는 배움과 즐거움을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켜 생각했고, 순자는 근본적으로 '배움은 즐거움을 가져다주고, 배움이 즐겁기에 배운다'는 생각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즐거움보다 배움에 더 비중을 두었고, 더 엄격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지혜로운 현인들은 모두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며, 그중에 차이점이 있다면 배움의 방식, 방법과 방향 등에서 강조점이 달랐을 뿐이다.

학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자면, "학문을 구하는 사람은 욕망과 허위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도를 구하는 사람은 욕망과 허위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고 주장하며 "갓난아기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라"로 하던 노자 역시 '도를 행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반면 같은 유가라도 맹자는 인성이 선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배움'은 주로 내적 수양에 치중했다. 그래서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으며,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은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 간단하게 말하면 내적인 수양에 힘써,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진실해야 하며, 자신의 어진 마음과 선한 본성이 상처받지 않고 더욱 빛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내가 인을 행하고자 하면 이곳에 인이 달려올 것이다. 我欲仁, 斯仁至矣"라는 사상의 확장이다. 하지만 맹자는 내적인 수양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존심(存心)'과 '구방심(求放心)'을 도덕 수양의 유일한 '배움'으로 여겼다. 여기서 존심은 헛된 욕망에 의해 인의의 본심을 잃지 말고 항상 그 본연의 마음 자세를 지니라는 뜻이고, 구방심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자가 강조한 '예와 의를 배움'이라든가 '새와 동물, 풀과 나무의 이름 하나하나를 알아나가는 배움' 등은 간과해 버리고 말았다.

순자는 맹자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며 이런 악한 본성은 예와 의, 스승의 법도를 본받음으로써만 교화가 가능하고, 인성도 도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이런 교화 과정은 근본적으로는 외부를 향한 배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자는 폭넓은 교육이 악한 사람을 선하게 변화시켜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야를 넓혀주고 지식을 증대시키며, 개인의 재능을 향상시켜주어 인생에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여겼다. "익히 알고 있으면 행동에 실수가 없어진다. 知明而行無過《순자·권학》"라는 순자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순자가 배움을 중시한 이유는 배우지 않고 본성대로 함부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금수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지식을 부단히 쌓아나가며, 실천에 노력을 기울이고 끝까지 이 일을 계속해 나간다면 사람은 진정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는 말한다. 우리는 왜 순자가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배움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힘써 배움을 구하는 사람은) 배움의 도에 들어가니 배움이란 생명이 다해야 끝나는 것이다. 학문의 과목 종류에는 끝이 있다 해도 배움의 의의로 볼 때 배움은 잠시도 중단될 수 없다. 배우면 사람이 되지만 이를 버리면 금수에 불과한 것이다. 學至乎沒而後止也. 故學數有終, 若其義則不可須臾舍也. 爲之, 人也. 舍之, 禽獸也. - 《순자·권학》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고대의 학자는 덕행을 연마하기 위해 공부했으나 현대의 학자는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공부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옛날'과 '오늘'의 차이는 자연적인 시간의 의미만은 아니며, 이 차이에는 매우 풍부하고도 복잡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오늘날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과거의 가치판단 기준을 평가하곤 하는데 이런 관념을 '시대정신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가치평가의 의미로 볼 때, '시대정신과 함께한다'라는 개념이 언제 어디서나 다 좋은 뜻은 아니다. 마치 '보수'라는 단어가 본래 좋고 나쁨의 개념이 없는 중립적인 언어인 것처럼 우리도 보수적이라고 하기만 하면 전부 '낙오자'인 것처럼 질타할 이유가 없다. 일정수준의 도덕 가치관을 지킨다는 것과 일정한 사회조직 형식과 사회의 정치구조를 지킨다는 것은 매우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고루하고 케케묵은 노인네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옛날'이라는 글자를 대하지 않고, '옛날'을 어떤 형식을 포함한 가치관으로 본다면 이런 '옛날'을 우리는 정말로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하며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보호까지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도덕을 강조하는 현상을 예로 들자면, 대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덕을 중시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도덕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분명한 대답을 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왜 반드시 도덕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이 문제는 현대 도덕철학 중에서도 가장 궁극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왜 선량해야 하며 규칙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일만 해야 하고, 왜 나쁜 사람의 나쁜 짓거리는 해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할 확실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종교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이 문제의 대답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석가, 하나님 혹은 내세의 소망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우리는 도덕적인 일을 할 이유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 질문을 받는 순간 막막함과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사실상,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있어 도덕을 중요시하는 현상은 대부분 외적인 주변의 평가와 개인적인 이익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각 개인의 이익에 더욱 부합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모두 아파트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지켜 도둑질이나 거짓말, 사기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아파트 내의 각 주민은 모두 이를 통해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도덕적인 일을 하고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각자의 개인적인 이익 고려가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만일 사람들이 모두 부도덕한 일을 한다면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강조하는 도덕은 이미 일정 정도 개인적인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로 변모되었다. 도덕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도덕적인 행동이란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다. 도덕을 중시하는 현상이 도덕 자체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목적 때문에 일어났으며, 이 현상이 현대인의 기본적인 특징이라고 한다면, 어찌 되었든 간에 순자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유가 사상 중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상이 순자의 도덕 이론일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순자 역시 도덕을 강조하는 목적이 개인의 이익 증대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순자》는 책 첫머리에서 요지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배움의 목적은 선비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성인이 되는 것을 마침으로 삼는다. (始乎爲士, 終乎爲聖人)" 선비, 군자, 성인이 한 말은 도덕적인 인격을 배양해주며, 이것이 추구하는 핵심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데에 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도덕을 강조한다는 것은 도덕 자체를 즐거워해야 한다는 뜻이고, 도덕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려움과 곤란에 처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의 풍월을 읊을 수 있고 마음속 즐거움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예의는 내 마음을 즐겁게 하길 마치 소, 양, 돼지, 개 등의 육식이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순자의 자연법칙

대자연의 운행은 그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天行有常)

'어떻게 하면 하늘의 것을 하늘에 맡기고, 사람의 것을 사람에게 맡길 수 있을까?' 이것은 순자 철학 사상의 전체적인 중심내용 중에 하나다. 순자가 볼 때, 자연의 운행에는 고유의 법칙이 있었다. 그 법칙에는 아무런 의지도 없을뿐더러, 인간의 세상사에 대해서는 더욱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의 길흉화복, 성패와 순조로움, 거슬림은 모두 인위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하늘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사람은 하늘을 존경하고 사모하느니보다, 하늘을 자연물로 보고 이를 제재하는 것이 더 나으며, 하늘의 뜻에 따르며 이를 찬미하느니보다 하늘이 낳은 사물들을 제재하며 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편이 낫다. 또 하늘이 비와 바람을 맞게 보내주기를 소망하고 풍작을 기다리기보다 때마다 밭을 경작하고 사계절이 인간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 한마디로 순자는 하늘과 인간의 직분은 서로 다르며, 인간은 노력을 다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지 자신의 운명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순자는 예를 들어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걸의 시대와 우의 시대에 하늘과 땅, 사계절은 모두 똑같았다. 그러나 우는 자연을 다스렸고 걸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혼란을 다스리는 역할은 인간이지 하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만일 예의에 부합하는 행위로 기초를 강화하고 절약에 힘쓰거나 사계절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면, 흉했던 일은 길하게 되고 전화위복의 기틀을 마련하며 홍수나 가뭄 같은 재해, 혹한이나 혹서 같은 재난에도 사람들은 먹고 입고 사는 데에 전혀 근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만일 사람들이 도를 거슬려 경거망동한다면 아무리 하늘이 바람과 비로 세심한 배려를 해준다 해도 춥고 배고픈 나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재난방지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어쩌면 순자의 사상 속에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결론이라면, 하늘과 인간관계에 대해 부정확하게 이해했던 관점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연하게 포기했다는 것이다. 즉, 과거 사람들은 하늘과 인간은 동일한 질서에 협조하므로 하늘과 사람 간에는 '마술 같은 화원'이 계속 유지되며 하늘에 대한 신비와 공상을 씻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하늘의 것은 하늘에게 맡긴다'라는 말에서 보듯, 순자에게 있어서 '하늘'이란 결코 연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순자는 인간세계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일편단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2장 순자, 정치를 말하다



사물을 다스림과 사람을 다스림

사람을 다스리는 데 정통한 도를 가진 사람으로 각 사물을 다스리는 기능인들을 겸하여 다스리게 한다. (精於道者兼物物)농사꾼, 상인, 수공업자는 모두 자신의 업종에 정통한 전문 인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아무리 일가견이 있는 전문 인력이라 하더라도 타 분야에서까지 인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유가는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만 쓰이는 그릇 같은 존재가 아니다. 君子不器"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유가는 윤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도덕 교육 역시 덕성의 배양을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교육의 최종 목적 역시 전문 직종의 인재 배양이 아니라, 덕성의 완성 혹은 '도에 정통한' 인재의 배양을 핵심으로 했다. 그러므로 순자는 "군자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현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순자·권학》"라고 말했다. 이는 전형적인 덕성의 윤리다.

농사에 정통하고, 판매에 정통하거나 제작에 정통하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직업이 추구하는 목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순자의 기준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순자가 볼 때 구체적인 직종에서 이룰 수 있는 업적이란 아무리 뛰어나 봐야 그저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능이 전문가의 수준으로 정통하게 되면 습득한 지식이야 수레에 싣고도 넘치겠지만, 만물의 변화무쌍함과 날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새롭고 신선한 일에 대한 적절한 대응력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정통한 지식이란 단지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직종, 한 가지 사물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만 알 뿐 전체적인 변화를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는 위대한 고대 성왕의 도를 이해하고 깨우친 사람을 육성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성왕의 도의 핵심은 모든 조치를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하게 실시한다는 데에 있다. 사물의 돌발적인 출현에도 자유롭게 대응할 수 있으며 상황의 급작스런 변화에도 그 본질을 추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국가의 혼란 정도나 행동이 사리에 부합하는지 여부도 모두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어쩌면 한 가지 직종, 한 가지 직업의 전문가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행동해야 할 때를 알고 적절히 행동할 수 있으며 사물의 변화에 따라 임기응변을 하고, 변화의 조짐을 분별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왕의 도를 알면 세상을 경영할 수 있고, 만사를 관리하고 만민을 다스릴 수 있다. 순자는 순(舜)을 예로 들어 그 도리를 설명한다.순의 일 처리 방식을 보면, 성왕의 도를 잘 알고 있어 적절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사물을 다스리는 도를 알려주지 않아도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순은 우(禹)에게 홍수를 다스리도록 명령을 하기는 했지만 우에게 구체적인 방식과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산은 사람의 뜻을 깨닫고 흐르는 물도 사람에게 복종하여 백성들은 큰 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자연스레 맹자가 말한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힘쓰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린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는 예부터 지금까지 예외를 찾기 어려운 금과옥조이다.

정부의 책임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먼저 다스림과 혼란의 한계를 확실히 표시하여 백성들이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治民者表亂, 使人無失)

순자는 예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예의는 준칙과 규범이요, 법의 커다란 분류이자, 기강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이런 준칙과 규범을 잃어버린다면 길을 잃게 된다. 마치 강을 건너는 사람이 물의 깊이를 몰랐다가는 익사하고 말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정부의 관리면에서 그에 상응하는 정책, 법규를 제정해 백성들이 '미쳐' 죽어나는 대신 안심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순자는 강한 국방력과 군대,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 등은 모두 사회질서를 충족시켜주는 조건이 아니며, 엄한 명령과 많은 형벌, 경찰과 교수대 역시 통치의 위엄을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오직 예의에 따라 예의를 준수할 때 사회가 조화롭고, 국민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익사하지 않게 된다고 여겼다.

최근 주식시장에서 발생한 많은 문제들은, 누차 방지하려고 했지만 근절되지 않는 광산 사고와 마찬가지로 주된 책임은 국민과 민중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응당 정부의 관리 소홀을 탓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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