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모
이징 지음 | 시그마북스
상모
이징 지음
시그마북스 / 2012년 6월 / 424쪽 / 15,000원
희단(姬旦) - 800년 주나라 역사의 진정한 창시자
자신을 감추고 도리를 따르다: 희단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주공'이란 이름은 길거리 행상인이나 잡부들도 알 만큼 유명하다. 주공은 유학의 기반을 다진 창시자이자, 공자가 꿈에서조차 그리워했을 만큼 존경하고 추앙했던 성인이었다. 희단, 그는 주나라 문왕 희창의 아들이자, 무왕인 희발의 아우로 서열을 따지자면 네 번째에 속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열 명의 형제 중, 오직 (희)발과 (희)단만이 좌우에서 문왕을 보필하였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통해 희단 역시 아버지 문왕이 마음에 담고 있었으며, 형인 희발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함부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던 희단은 가슴에 야망 대신 원대한 포부를 품었고, 문왕이 죽은 후에도 권력을 이용해 희발과 정권 다툼을 벌이지 않았다. 이는 희단이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또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어느 쪽이든 다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보좌관'으로서의 인생이었다. 비록 '보좌관'의 자리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으로 주공 희단의 역할과 그 영향력은 주나라 무왕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발휘하라: 밤낮으로 국정에만 매달려 무왕이 병으로 쓰러지자, 주공은 조상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는데, 그의 기도문은 이러했다. "가문의 적손이 중병을 얻었으니 데려가실 거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십시오. 나 역시 충실히 인덕을 쌓고 재예 또한 무왕에 뒤지지 않으니 조상을 받들 자격이 있습니다." 그의 기도문을 보고 요즘 사람들은 아마 코웃음을 치겠지만, 나는 그의 진심과 깊은 충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임종을 앞둔 무왕은 인덕과 재능을 두루 겸비한 아우 주공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주공은 눈물을 흘리며 한사코 거절했다.
무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도 자신이 죽고 나면 아우인 주공이 왕위를 탐낼 것이고, 그렇게 벌어진 싸움에서 누가 패자가 될지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설사 태자가 이긴다고 해도 자신이 이제 겨우 기반을 닦아놓은 주나라에 득이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의논을 해보고, 만일 주공이 진심으로 왕위를 욕심낸다면 그에게 물려줄 심산이었다. 만약 주공이 왕위를 거절한다면, 아우를 생각하는 형의 마음에 주공이 감동해 더욱 전심전력으로 태자를 보필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왕의 결단은 옳았다. 그리고 왕위를 거절한 주공의 선택 역시 현명했다.
그런데 무왕이 죽고 난 후, 주공의 행보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었다. 조정을 장악한 주공이 주나라의 제왕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사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주공이 천조(선왕의 사망이나 양위에 의해 임금의 자리를 이음)하여 성왕을 대신해 섭정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다." 바로 이 '천조'라는 단어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옛 사당의 정침 문 앞에는 두 개의 섬돌이 있었는데, 그중 주인의 자리로 삼는 동쪽 계단을 조계라 했다. 조계는 왕위와 연결되어 있어 천조는 곧 조계를 걸어 '제위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왕위를 준다고 할 때는 거절하더니 왜 무왕이 죽은 후에 스스로 제위에 오른 것일까? 당시에는 주공의 이런 결단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무리도 많았다.
관숙선과 채숙도 등은 선왕의 시체가 아직 채 식지도 않았는데, 주공이 부당하게 권력을 탈취하여 어린 태자를 위협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강태공과 소공은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 없어 주공에게 달려가 그의 의도를 물었다. 그러자 주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왕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성왕은 아직 어립니다. 내가 비난을 감수하고 집권하는 것은 간사한 제후들의 배신을 염려해서입니다. 이 나라 사직이 무너진다면 피땀 흘려 이 땅을 가꾼 선왕들의 낯을 어찌 보겠습니까?" 집권의 이유가 진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면 주공의 결단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강태공과 소공은 믿었다. 그들이 믿은 이유는 주공이 권력에 미혹된 야심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전부터 입증해 보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강태공과 소공 역시 주공만큼이나 주나라의 정세 변화를 예리하게 읽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나라는 건국 초기에 강력한 지도자인 무왕을 잃고 어린 태자만이 남았다. 그러자 주나라에 정권을 빼앗긴 은나라 귀족들과 각지에 흩어진 제후들은 물론이고, 몇 번이나 중원을 습격해온 유목민족과 심지어 주 왕조 내부의 숨은 세력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혼란을 틈타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를 책임질 이는 주공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집권 이후 주공은 신하와 백성의 믿음과 제후들의 복종에 힘입어 외족의 침범을 막아내며 무왕의 죽음이 남긴 빈자리를 매우 빠르게 채워 나갔다. 하지만 나라의 정세와 상관없이 그를 위협하는 세력과 권력을 노리는 야심가는 항상 존재했다. 희단의 형이자 희씨 집안의 셋째인 관숙선도 그중 하나였다.
포부와 야심의 차이: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관숙선은 주공이 왕이 되자 채숙도를 끌어들여 반대파를 결성했다. 그리고 주공의 '찬탈행위'를 대대적으로 알린 후,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려 자신이 권력을 차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은 예상대로 풀리지 않았다. 왕실의 귀족은 물론이고 백성 중 누구도 그에게 동조해주는 이가 없었다. 심히 불안해진 그들은 결국 막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다. 과거의 적수였던 은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한 것이다. 이에 주공은 어린 성왕의 이름을 걸고 반란군 토벌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에 나서고자 했다. 하지만 주공의 주장에 조정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고 반대하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들이 반대하는 주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민심이 동요하고 혼란이 커져 무력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란 세력에 주 왕실 내부 사람도 끼어 있으니 그들까지 토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주공은 그들과 다른 각도에서 무력 진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이 걱정하는 '불가능'에 대해서는, 무왕이 끝내지 못한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며, 그러려면 자신의 안위만 챙겨서는 안 된다고 주공은 강력히 주장했다. 주공의 위인다운 면모는 이렇듯 사람들이 주저하고 움츠릴 때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다. 결국 반란은 곧 진압되어 관숙선과 무경은 처형당하고, 채숙도는 나라 밖으로 추방당했다.
권력과 모든 짐을 내려놓다: 스스로 왕에 오른 지 7년 만에 주공은 모든 권력을 성인이 된 조카 희송에게 물려주고 다시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기』에 따르면 주공은 왕이 되던 당시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는 천자의 자리에 앉아 제후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리를 물려준 후, 주공은 북쪽을 바라보는 신하의 자리에서 공손한 자세로 보위에 앉은 성왕을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한 번 권력을 쥔 사람은 다시 권력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내려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속 오만과 허세까지 내려놓는 이는 많지 않다. 이런 점에서 주공은 현명했다. 군주의 자리에서는 군주로, 신하의 자리에서는 신하로만 살았듯,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주공이 세상을 떠난 뒤, 성왕과 제후들은 아픈 무왕 대신 죽기를 바랐던 주공의 진심이 담긴 금등지사(억울하거나 비밀스런 일을 후세에 전해 진실을 알게 하기 위해 쓴 글)를 발견했다. 이에 놀란 강태공과 소공, 성왕은 금등지사에 연루된 이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주공이 그 일이 밝혀지길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숨겨진 주공의 진심에 감동한 성왕은 문왕의 능이 있는 필(畢)에 주공을 함께 장사 지내도록 했다. 주공을 감히 신하로서 대하기가 송구스러워 문왕과 같은 선군(先君)으로 대접해준 것이다. 또한 성왕은 주공의 후손인 노나라에 천자와 똑같은 예로써 문왕의 제사를 받들 수 있는 파격적인 특권을 주었다. 이것은 천자로서의 마지막 예우이자 주공의 공덕을 기리고자 한 성왕의 마음이었다.
소하(蕭何) - 한나라를 창건한 제일의 공신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비범한 재목: 어느 날, 패현의 유계라는 부랑자가 관아에서 열리는 시험에 합격하여 사수정을 지키는 정장이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우체국 국장 겸 파출소 소장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직속상관은 소하라는 인물로 오늘날로 치면 현 관청의 주리(主吏)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해 유계의 나이 서른넷, 소하는 서른다섯이었다. 소씨 가문은 패현 풍읍에서 알아주는 명문대가였다. 반면에 유계는 집안 대대로 농업에 종사해온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다. 유계가 어렸을 때는 공부에 자질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문맹으로 살게 할 수는 없어 그를 공부시켰다. 이는 당시의 농촌 가정으로서는 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계는 공부도 농사도 모두 뒷전인 채로 살았다.
그는 학업을 그만두고 백수건달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며, 당시 이름을 날렸던 장이, 왕릉과 같은 '협객'들과 어울려 지냈다. 여기서 말하는 '협객'이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사회체제와 동떨어져 툭하면 무력과 폭력을 일삼는 사람을 뜻한다. 비록 협객들과 어울렸지만 유계에게는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진의 통치하에서 눈앞의 사회정세를 보다 분명히 파악할 필요를 느꼈고, 그들의 제도에 대항할 수 없다면 그 제도 속으로 융화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문자 정도는 읽을 수 있고, 협객들과 다니면서 어설프게나마 어깨너머로 주먹 쓰는 법도 배웠으며, 인간관계도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직속상관인 소하였다.
유계가 관청에서 시험 볼 당시 성적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소하의 도움이 있었기에 순조롭게 정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관리 생활에서는 두 사람이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소하는 숙달된 업무능력으로 매사에 성실했고, 시험만 쳤다 하면 항상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상관인 감군어사의 총애를 받았다. 반면에 유계는 옛 친구들을 만나고 여전히 술을 즐겼지만 예전만큼 방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비록 수준 미달의 관리직이긴 하나 그래도 관공서의 한 일원으로서 지역에서 돈과 권세 좀 있다 하는 부류와 가깝게 지냈다. 아울러 의리 있고 호방한 성격이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계는 훗날 유방으로 개명하여 400년 한나라 역사의 창시자가 되었고, 마치 흑과 백처럼 선명히 대조되는 전혀 다른 부류의 그의 무리들은 모두 한나라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이렇듯 다른 성격이지만 유방과 소하의 관계는 매우 특별했다. 소하는 유방의 뒤치다꺼리를 도맡고 때때로 힘든 일도 대신해주는 자상한 상관이었다. 반면 유방은 여전히 주색을 즐기고 고집스러우며 언행이 무례한 걸로 모자라 소하의 면전에서 대놓고 그를 비방했지만, 그때마다 소하는 대인배다운 면모로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유방이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닐 때도 소하는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방이 함양으로 부역을 나갈 때, 관청의 규율상 모두 얼마씩 자금을 보태야 했는데 예의상 200~300전을 내는 사람들과 달리 소하는 한 번에 500전을 내놓았다.
보통 상관이 부하직원을 아끼는 데는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상대의 직위를 막론하고 인간적인 관심과 흥미가 생겨서이고, 다른 하나는 부하직원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했을 때다. 특히 그 재능이 훗날 부하직원이 자신을 초월하여 크게 될 인물임을 감지하게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하의 경우는 바로 후자였다. 소하의 눈에 비친 유방은 비록 일처리에 두서는 없지만 다부진 면이 있었고, 여럿이 어울린 자리에서도 구속받기 싫어하고 산만했지만, 변별력이 뛰어나고 도량이 컸다.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다가도 누군가의 뼈 있는 충고와 정곡을 찌르는 말 앞에서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묵묵부답이다가 곧 딴 사람이 된 것처럼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유방은 필시 소하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소하는 자신의 운명을 그에게 걸어 함께 나아가고자 했다.
소하는 인재를 알아보고 시대를 꿰뚫은 자였다. 이런 그를 알아본 감군어사는 조정에 보고하여 소하를 함양으로 입성시키려고 했지만, 소하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왜 거절했을까? 아마도 그가 성공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기보다, 당시 진나라의 통치 기반이 겉보기와 달리 견고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진나라가 육국을 멸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사상의 정복일 뿐, 정치적ㆍ사상적으로는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었다.
사냥꾼과 사냥개의 차이: 마침내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천하를 평정하여 왕조를 세웠다. 그다음 순서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해오던 일, 바로 논공행상이었다. 논공행상의 첫 번째 순서는 서로 간의 공적을 평가하는 일이다. 공적이 있는 자는 공적을 드러내고, 공적이 없는 자는 그간의 노고를 밝히며, 노고가 없는 자도 나름의 고충을 내세우는 곳이 바로 논공행상의 자리였다. 낙양의 남궁에서 열린 유방의 연회석상에서 공적을 따지는 사람들의 논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방이 직접 공을 치하한 세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도 함부로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들이 바로 '한초삼걸'이라 불리는 장량, 소하, 한신이었다. 유방은 자신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장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일에는 내가 장량만 못하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독이며 식량을 공급하고 운송로를 확보하는 일은 소하를 따르지 못하오. 100만의 군사로도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일에서는 한신을 이길 수 없소. 이들은 모두 인걸이오. 나는 이들을 능히 임용할 수 있었기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소. 하지만 항우에게는 오직 한 명의 범증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쓰지 못했죠. 이것이 그가 나에게 패한 까닭이오."
하지만 논공행상에서 공동 1위는 있을 수 없다. 어찌 됐든 이들 세 사람 중에서도 1, 2, 3등은 가려야 어느 줄에 설지 정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공적을 다투는 신하들의 논쟁은 무려 1년이 넘도록 지속되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유방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소하의 공적을 으뜸으로 쳐 그를 찬후에 봉하고 식읍 8천 호를 하사했다. 예전 사수장에서 정장으로 있던 시절, 부역을 떠난 그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200~300전 낼 때 소하만 500전을 내놓지 않았던가. 유방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식읍 2천 호를 더 얹어 만호후에 봉했다.
그러자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장수들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신들은 갑옷을 입고 창칼을 들어 많게는 100여 차례 전투를 치렀습니다. 소하는 무공도 없이 앉아서 작전만 짰을 뿐인데 어찌 신들보다 더 공로가 크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유방이 모두를 향해 물었다. "그대들은 사냥이 무엇인지 아는가?"
"압니다."
"그럼, 사냥개가 뭘 하는지도 아는가?"
"네, 압니다."
"그대들은 내게 충실한 사냥개와 같소. 맹렬히 돌진해 나에게 먹잇감을 잡아온 공이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소." 신하들은 내심 기뻤다. 황제 자신도 먹잇감을 잡아온 공이 크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하지만 사냥도 사냥꾼이 지휘해야 가능한 일이오. 사냥꾼이 사냥터를 찾고 줄을 놓고 사냥감의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지 사냥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소. 그대들의 공은 사냥감을 물어온 사냥개의 공과 같으나, 소하의 공은 직접 줄을 놓아 사냥감을 발견하게 한 사냥꾼의 공과 같소. 과연 누구의 공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소? 이는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일이오. 하지만 혁명 당시 그대들은 혼자이거나 많아야 두세 명이 따랐으나, 소하의 가문은 온 가족이 함께 나를 따랐으니 결코 그 공이 작다고 할 수 없소. 그래서 그의 공을 으뜸으로 친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