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1월의 모든 역사 - 한국사

이종하 지음 | 디오네


1월의 모든 역사 - 한국사

이종하 지음

디오네 / 2012년 1월 / 268쪽 / 12,000원



1월 1일




1896년 1월 1일 - 태양력을 처음 사용하다

1895년 11월 17일 수요일,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동안 사용하던 음력을 버리고 이날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하는 태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칙은 새로운 연로(건양)의 사용, 그리고 단발령과 함께 발표된 것으로 백성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는 녹두 장군 전봉준이 처형된 지 불과 8개월,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석 달도 안 되는 때였다. 나라는 아직 국상 중이였고 지방에서는 분노한 젊은이들이 의병을 조직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러시아 등 열강들은 틈만 나면 국정에 개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때에 태양력을 발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필요성 때문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혼란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1월 3일




1923년 1월 3일 - 임시정부, 국민대표 회의 개최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민대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부 갈등으로 혼란에 빠지자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민대표 회의는 당시 분열과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임시정부의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개회일에 참석한 대표는 모두 62명이였다. 그러나 국민대표 회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근본 목표보다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사이에 혹은 사회주의 내부 분과 사이의 주도권 장악에 몰두함으로써 모처럼의 민족 협동 전선을 성립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1월 4일




1951년 1월 4일 - 1·4 후퇴

1951년 1월 4일 해질 무렵, 한파가 몰아치는 한강 하류 여울목에는 막 서울을 떠나려는 마지막 피난 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6·25 전쟁 직후 끊어진 한강 철교를 복구하지 못해 이곳에 임시 목교를 만들고 철로를 깔아 피난민을 수송하고 있었다. 1월 4일 하루에만 벌써 3만 명 이상을 남으로 수송했다. 피난민들은 객차와 화차의 실내나 지붕 위를 가리지 않고 결사적으로 기어오르고 가족들의 손과 팔을 잡아끌어 올렸다. 이 열차도 타지 못한 사람들은 짐을 이고 추위에 떨며 철길을 따라 남으로 떠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전쟁 초기 남한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면서 국가의 존망까지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유엔 연합군의 참전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개시로 전세가 반전되면서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였다. 북한군이 밀리자 10월 19일 중국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로 연합군은 하는 수 없이 두만강, 압록강 전선을 내주었고 12월 5일에는 평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2월 12일에는 중국 인민 지원군이 38선을 돌파하고 남진했으며 중부, 동부 전선까지 무너졌다. 결국 한국군과 미군은 12월 24일 홍남철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6·25 직후 국민을 제때에 피난시키지 못한 실수를 교훈 삼아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24일 서울 시민에게 공식적으로 피난을 명령했다. 유엔군과 국방부는 정부를 다시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12월 30일까지 80여만 명의 서울 시민이 철수했으며 1월 3일에는 나머지 30여만 명도 피난을 갔다. 1월 4일 마지막 피난열차가 서울을 출발하자 피난민 수송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러나 동해안과 중부 산악 지대에서는 북에서 도보로 월남하던 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고 동사하는 등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난리 통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어 피난길 주변의 산과 들에는 시체들이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을 지나 광주와 목포로 가는 길, 부산으로 가는 양쪽 방향에 50여 개의 구호소를 설치하여 피난민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수십 곳에 산재한 전국의 피난민 수가 220여만 명에 달하자 이들을 수용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겨우 유엔과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구호품으로 피난민들의 대량 동사와 아사를 막을 수 있었다.



한편 전선에서는 한국군과 미국의 리지웨이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오산·제천·영월·삼척 전선에서 중국군의 남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였고, 한국군과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3월 중순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정부를 서울로 복귀시켰다. 이에 따라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피난민들은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북한에서 내려온 많은 피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남북 이산가족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1월 5일




1924년 1월 5일 - 김지섭, 일본 왕궁 앞에 폭탄 투척

1924년 1월 5일 의열단원 김지섭이 일본왕궁 정문 앞 이중교에 폭탄을 던졌다. 당시 일본은 관동 대지진을 빌미 삼아 일본 내의 수많은 조선동포들을 무참히 불태워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의열단 간부들은 일제 요인들을 살해하기로 뜻을 모으고 김지섭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김지섭은 폭탄 3개를 준비하고 상하이에서 석탄 운반선 배 밑창에 승선하여 10일 만에 일본으로 밀입국하였다. 김지섭은 일본 의회가 휴회 중이자 일왕을 살해하기로 목표를 변경하고 왕궁의 동정을 살피던 중 발각되었다. 다급해진 김지섭은 먼저 이중교에 폭탄 1개를 던지고 왕궁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폭탄 3개가 모두 불발되어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1925년 도쿄 공소원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단식으로 사망하였다.



1월 6일




1950년 1월 6일 - 제1회 고등고시 실시

1950년 1월 6일 제1회 고등고시가 실시되었다. 1949년 제정된 '고등고시령'에 의거하여 행정과와 사법과로 나누어 실시되었는데 첫 회에는 행정과에 531명, 사법과에 634명이 응시하였다. 이후 고등고시는 매년 1회씩 실시되었다. 1981년 4월부터는 '5급 공개경쟁 시험'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행정·외무·기술 고등고시로 구분하여 시행하였다.



1월 7일




1948년 1월 7일 - 초등학교 의무 교육제 실시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의무 교육은 1950년 6월부터 시행되었으나 헌법에 명시된 것은 1948년 1월 7일이다. 의무 교육은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주는 교육 제도를 취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 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여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교육을 받을 권리의 주체는 원래 취학연령에 있는 미성년자이지만 이들은 독립하여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교육의 의무는 보호자에게 부과하고 있다.



1월 8일




1974년 1월 8일 - 유신정권, 긴급 조치 1호 선포

1974년 1월 8일 유신 헌법 반대 운동을 처벌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 조치 1호가 선포되었다. 이 법으로 '유신 헌법의 민주적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던 장준하, 백기완 등이 구속되었다. 이후 대량의 인신구속과 불법 고문 수사 등의 갖은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



1월 9일




1396년 1월 9일 - 조선, 한양에 도성을 축조하다

태조 5년 병자에 도성을 쌓았다. 서북면 안주 이남의 백성 11만 9천 명을 징발해 정월부터 일을 시작하여 2월 그믐에 해산하였다. 다시 가을에 강릉, 경상, 전라 3도의 백성 7만 9천명이 징발되어 8월에 일을 시작해 9월에 마쳤다. 평양백 조준 등이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도성의 둘레는 모두 9천 9백 7십 5보였다.- 『연려실기술』 권1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자 곧 새 도읍지를 물색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개성은 이미 땅의 기운이 쇠하였고 민심도 새롭게 바꾸고 싶어서였다. 처음에는 계룡산 지역이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바닥은 좁았지만 주위가 산악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외적을 막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태조는 이곳에 궁궐터를 닦는 등 10개월 동안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궁궐터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당시의 내로라하는 풍수가들이 무학, 정도전, 하륜, 둥운, 저마다 다른 장소를 지목하였다.



이 중 하륜이 주장한 무악은 일찌감치 후보에서 탈락하였고. 무학과 정도전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무학이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자고 하자 정도전은 제왕은 남쪽을 향하는 게 원clr이라며 북악산 아래를 궁궐터로 강력히 추천하였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채택되어 경복궁이 이곳에 건설되었다. 아울러 불을 잡아먹는다는 해태의 석상을 세워 강 건너 관악산의 회기를 누르게 하였다. 종묘와 사직 등 기본적인 시설들이 완성되자 태조는 도성 건설을 위해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고 판사 등 담당 관리를 임명하였다. 또한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적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성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정도전에게는 도성의 터를 알아보는 역할이 주어졌는데 성터를 결정하는 일이 큰 고민이었던지 그와 관련한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태조에게 도성의 터를 알아보라는 명을 받은 정도전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마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혼자 애만 태웠다. 그러던 어느날 밤새 눈이 내렸다. 다음 날 경도전이 산에 올라보니 다른 곳은 눈이 모두 녹았다는데 한곳만 유독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이에 정도전은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이내 눈이 쌓인 선을 따라서 성터를 결정했다. 이 때문에 도성을 설성이라고도 했다. 축성 공사는 태조 5년(1396) 1월 9일에 그 첫 삽을 떴다. 전국의 장정 11만 8천 명이 동원되어 2월 28일까지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600척을 한 단위로 하여 97구간으로 나누고 인부를 투입시켰다. 이렇게 되면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꼭대기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 지대가 그 부분에 해당한다.



각 구간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천자문의 글자 순서를 따랐다. 즉 북악을 기점으로 동쪽부터 '천天'으로 시작하여 서쪽에 이르러는 '조弔'로 공사 구역을 마감했던 것이다. 실제로 崑字六百尺이라는 글자가 성벽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책임지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바깥에는 감독자의 관직명과 군명을 새겨 넣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된 공사는 49일 만에 끝이 났다. 높고 험한 곳에는 돌로 성을 쌓았고 낮고 평평한 곳에는 토성을 쌓았는데 토성이 석성보다 두 배는 길었다. 공사는 끝났지만 워낙 서두르다 보니 부실한 곳이 많았다. 그해 여름 장마로 곳곳이 허물어진 것은 예정된 결과였다. 아직 성문도 미완성 상태였기 때문에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자연스럽게 2차 공사가 이루어졌다. 모두 79,400명이 공사에 차출되어 무너진 토성 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다시 쌓았다. 성에는 4대문과 4소문 등 8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 먼저 동서남북으로 큰 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태조 대에 축성된 도성은 그 뒤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하였고 특히 세종과 숙종 대에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세종 대에는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숙종 대에는 왜란과 호란으로 파괴된 많은 부분을 복구하고 성가퀴(성첩)를 대대적으로 쌓았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서울의 성곽은 도시 계획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둘 헐려 나갔다.



1월 11일




1994년 1월 11일 - 한국탐험대, 남극점 정복

1994년 1월 11일 오전 6시 39분경 한국 남극점 탐험대가 남위 90도 남극점 정복에 성공했다. 허영호를 대장으로 한 이 탐험대는 1993년 11월 29일 오전 2시쯤 패트리어트 힐을 출발하여 대장정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1,400km 정도를 걸어서 출발한 지 44일 만에 남극점 정복에 성공했으며, 이는 한국 탐험대의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1월 13일




1962년 1월 13일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062년 1월 13일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기본 계획인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1961년 국가 재건 최고회의는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하였다. 경제 개발 계획은 주로 제2공화국에서 마련되었던 것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초 자료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체계적인 계획 모형도 없이 총량적 예측치를 사용하여 수립되었다. 따라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객관적 근거의 빈약, 체계적 연계성이 결여된 자원 계획 또는 포괄 계획의 성격으로 인하여 계획과 경제 현실 간의 괴리가 문제로 지적됐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사회적, 경제적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 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부문별 추진 방향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 전력·석탄 등의 에너지원 확보, 기간 산업의 확충과 사회 간접 자본의 충족, 유휴 자원의 활용(특히 고용 증대와 국토의 보존 및 개발), 수출 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 수지 개선, 기술의 진흥 등이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우리나라 경제 현실과 괴리는 있었지만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연평균 성장률 7.8%로 목표인 7.1%를 초과 달성하였다. 수출은 2억 5,580만 달러로 공산품 수출 비중이 현저히 증가하였으며, 수입은 6억 8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소득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1월 17일




1864년 1월 17일 - 흥선 대원군 이하응 섭정시작

철종이 사망하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12세로 고종 임금이 되었다. 이에 흥선군 이하응이 1864년 1월 17일 섭정하면서 천하를 손에 쥐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영조 임금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로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나 한직을 전전하였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의 세도가 판치는 동안 핍박을 피해 몸을 낮추고 있었다.



당시 안동 김씨들은 왕실의 후예로서 쓸 만한 사람들은 남김없이 죄를 뒤집어 씌워 죽였다. 이에 흥선군은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구걸을 하는 등 파락호 행세를 하며 화를 피하였다. 그러나 그는 난세의 뛰어난 정략가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한편으로는 왕실의 어른 조대비를 찾아가 병약한 철종의 후사를 의논하였다. 두 사람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성군에 봉하고 대통을 이어 왕으로 삼았다. 이에 아버지인 흥선군도 대원군으로 격상되고 조대비의 권한을 대리하여 섭정하게 된 것이었다.



흥선 대원군은 섭정하자마자 제일 먼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타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등 과감한 혁신 정책을 펼쳤다. 당시 당파 정치의 온상으로 불리는 서원을 철폐하고 47개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왕권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감히 손대지 못했던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역사에 착수하였다. 경복궁 중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과 당백전을 강제 징수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금과 노역을 부담시켰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