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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禪房日記)

지허 스님 지음 | 불광출판사
선방일기(禪房日記)

지허 스님 지음

불광출판사 / 2010년 11월 / 116쪽 / 9,800원




산사의 겨울 채비



十月五日

원주스님의 지휘로 메주 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중생활이고 보니 언제나 분업은 철저히 시행된다. 콩을 씻어 삶는 것으로부터 방앗간을 거쳐 메주가 되어 천장에 매달릴 때까지의 작업과정에서 대중 전체의 손이 분업형식으로 거치게 마련이다.

입이 많으니 메주의 양도 많지만 손도 많으니 메주도 쉽게 천장에 매달렸다. 스무 말들이 장독에는 수년을 묵었다는 간장이 새까맣다 못해 파랗고 흰빛까지 드러내 보이면서 꽉 차 있지만 어느 때 어떤 종류의 손님이 얼마나 많이 모여 와서 간장을 먹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나 풍부히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원주 스님의 지론이다.

동안거(冬安居)를 작정한 선방에서 겨울을 지내자면 김장과 메주 작업을 거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선객(禪客)들의 불문율로 되어 있는 관습이다. 김장과 메주 울력이 끝난 다음에 온 스님들은 송구스럽다면서 낮 시간에 좌선(坐禪)을 포기하고 땔나무하기에 열중했다.

그러자 전체 대중(스님)이 땔나무를 하기에 힘을 모았다. 상원사는 동짓달부터 눈 속에 파묻히면 다음해 삼월 초까지는 나뭇길이 막혀버린다. 눈 속에서는 나무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땔나무는 많을수록 좋았다.

상원사를 기점으로 반경 2킬로미터 이내의 고목 넘어지는 굉음이 며칠 동안 요란하더니 20여 평의 장작이 13일 날 오후에 나뭇간에 쌓여졌다.

유물과 유심의 논쟁



十一月七日

견성은 육체적인 자학에서만 가능할까. 가끔 생각해보는 문제다.



우리 대중 가운데 특이한 방법으로 정진하는 스님들이 있다. 흔히들 선객을 괴객(怪客)이라고 하는데, 이 괴객들이 다시 괴객이라고 부르는 스님들이 있다.

처음 방부받을 때 논란이 대상이 된 스님은 명등(明燈)스님이다. 이 스님은 생식(生食)을 하기 때문이다. 시비와 논란의 우여곡절 끝에 방부가 결정되어 공양 시간에 뒷방에서 생식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래서 간편한 소임인 명등이 주어졌다.

수두(水頭)스님은 일종식(하루에 한 끼만 먹음)을 하고 원두스님은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다 그리고 간병(看病)스님은 장좌불와(長坐不臥, 눕지 않고 수면도 앉아서 취함)를 한다. 욕두(浴頭)스님은 묵언(默言)을 취한다. 개구성(開口聲)이란 기침뿐이다. 일체의 의사는 종이에 글을 써서 소통한다.

그 초라한 선객의 식생활에서 더욱 절제를 하려는 스님들이나, 하루 열두 시간의 결가부좌로 곤혹을 당하는 다리를 끝내 혹사하려는 스님이나, 스스로 벙어리가 된 스님을 대할 때마다 공부하려는 그 의지가 가상을 지나 측은하기까지 한다. 이유가 있단다. 스스로 남보다 두터운 업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또는 무복중생(無福衆生)이라 하루 세끼의 식사는 과분해서라고.

뒷방에서 색다른 시비가 벌어졌다. "도대체 인간이란 육체가 우위냐? 정신이 우위냐?" 하는 앙케이트를 던진 스님은 지전(持殿)스님이다. 언제나 선방의 괴객들을 백안시하는 이과(理科)출신의 스님이다. 문과(文科)출신인 부목(負木)스님이 면박했다. "단연코 정신이 우위지요. 선객답지 않게 그런 설문을 던지시오. 입이 궁하면 염불이나 할 일이지요."

선객들은 대부분 불교의식(佛敎儀式) 특히 불공시식을 외면한다. 평소에 지전스님이 의식의 권위자처럼 으스대고 중이 탁자밥(佛供食物)은 내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목스님이고 보니 비꼬는 투로 나았다. 드디어 지전스님(理科)과 부목스님(文科)이 시비의 포문을 열었다. 지전스님이 물었다. "정신을 지탱하는 것은 뭐요?" "그거야 육체지요." "뿌리 없는 나무가 잎을 피우지 못하고 구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는 않을 게요. 육체를 무시한 정신이 있을 수 있겠소?" "육체가 있으니 정신이 있는 게 아니겠소. 어찌 상식 이하의 말을 하오.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자고 하면서 말이오."

"논리적인 상식에 충실하시오. 우리는 지금 논리를 떠난 화두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고 논리에 입각해서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는 시비를 가리고 있는 거요. 결국은 유물(唯物)이냐 유심(唯心)이냐라는 문제가 되겠소만." "유심의 종가격인 선방에서 유물론을 들춘다는 것이 상식 이하란 말이오. 육체는 시한성(時限性)이고 정신은 여원성이란 것은 유물론자들이 아닌 한 상식으로 되어 있는 사실이오. 시간이 소멸됨에 따라 육체의 덧없음에 비해 정신의 승화를 생각해보시오."

"본래적인 것과 결말적인 것은 차지해두고 실제적인 것에 충실하여 논리를 비약시켜 보도록 합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생리학적인 상식을 바탕으로 보면 육체가 단연 우위일 뿐이오. 병든 육체에서 신선한 정신을 바란다는 것은 고목에서 잎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뿐이오."

"육체적인 외면이 많을수록 정신적인 승화가 가능했다는 진리는 동서고금의 사실들을 들어 예증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실증되고 있소. 나는 근기가 약해 감히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일종식이다, 오후불식이다, 생식이다, 장좌불와다, 묵언이다 하면서 육체가 추구하는 안일을 버리고 정신이 추구하는 건 성을 위해 애쓰는 스님들을 잘 살펴보시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육체에 대한 사랑스러운 정신의 도전이며 승화인가를."

"그것은 작위(作爲)며 위선이오. 내가 구도자임을 표방하는 수단일 뿐이오. 참된 구도자일수록 성명(性命)을 온전히 해야 할 것이요. 양행(養生) 이후에 양지(良知)가 있고, 양지 이후에 경성이 가능할 뿐이오."

"노장학파(老莊學派)의 무위(無爲)에 현혹되지 마시오. 그들은 다만 세상을 기피하면서 육체를 오롯이 하는 일에만 급급했지 끝내 그들이 내세운 지인(至人)이 되지 못했기에 제세안민(濟世安民)을 하려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소.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소멸될 숙명에 놓여 있는 육체를 무시하면서 구경목적(究竟目的)인 경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오. 견성을 곧 중생제도를 위해서니까요."

"육체가 제 기능을 상실했을 때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 승화될 수 있겠소? 업고(業苦) 속에서 윤회(輪廻)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중생이 말이오?" "가능하지요. 그 가능성 때문에 여기 이 산속에 있지 않소. 거의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말이오."

"중생에게 절망을 주는 말은 삼가시오. 스스로 병신이 되어야 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인데 우리 불가에서는 육체적인 불구자는 중이 되지 못하도록 규정짓고 있소. 이것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진리를 웅변으로 대변해 주고 있소. 고장을 모르고 조화된 육체야말로 우리 선객에게는 필요불가결의 요소지요. 견성, 열반, 피안, 적멸이 있기까지엔 말이오." "끝내 스님은 그 간사한 육체의 포로가 되어 등신불(等身佛)처럼 안온한 양지쪽에 서서 업보 중생을 바라보려고만 하는군요."

"나는 등신불이 되지 않기 위해 육체를 건전히 하며 업보중생을 느끼기 위해 극악한 업보중생의 표본 같은 이 선방생활을 하고 있소. 결론에 도달해봅시다. 나는 그 간사한 육체가 좋아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육체가 너무 싫어서 육체를 다스리고 있소. 육체는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기 때문이오. 마치 우리가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세상을 올바로 느끼지도 바라보지도 못할까봐 세상을 멀리하면서도 세상을 온전히 하기 위해 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을 뿐이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멀리 했다 하더라도, 세상이 불완전하더라도, 최소한 현재 상태라도 유지하고 있어야지 근본적으로 와해돼 버린다면 우리가 견성을 해도 어쩔 수 없을 뿐이오. 이해가 되는지요? 그만합시다. 입선 시간입니다."

시비는 가려지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중생이 사는 세상에서 시비란 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바로 시(是)와 비(非)로 구성된 양면적인 존재니까.

본능(本能)과 선객(禪客)



十一月十五日

상원사의 동짓달은 매섭게 차갑다. 앞산과 뒷산 때문에 무척이나 길다. 불을 밝히고 먹는 희멀건 아침죽이 꿀맛이다.

오후 다섯 시에 먹은 저녁을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소화가 되어 위의 기능이 정지 상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상원사 김치가 짜냐? 주안 염전의 소금이 짜냐?"라고 물을 정도로 상원사 김치는 짜기로 유명하다. 그런 김치를 식욕이 왕성한 젊은 스님들은 나물 먹듯이 먹는다. 식욕을 달래기 위해서다. 하기야 상원사 골짜기의 물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으니까 염도(鹽度)를 용해시킬 물은 걱정 없지만, 선객에게 화두 다음으로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식사(食思, 먹는 생각)다.

출가인은 욕망의 단절상태에 있지 않고 외면 내지는 유보상태(留保狀態)에 있을 뿐이라고 이 식욕은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 바로 식본능(食本能)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공포가 바로 기아에서 오는 공포라고 결론 지어준다.

화두(話頭)에 충실하면 견성이 가능한 것처럼 식사(食思)에 충실하다 보니 먹는 공사가 벌어진다. 대중공사에 의해 어려운 상원사 살림이지만 초하루 보름에는 별식을 해 먹자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별식이란 찰밥과 만둣국이다. 절에서 행해지는 대중공사의 위력이란 비상계엄령보다 더한 것이어서 일단 통과된 사항이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소를 잡아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소를 잡아먹어야 하고, 절을 팔아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절을 팔아먹어야 한다. 대중공사의 책임은 대중 전체가 지는 것이며 또 토의는 극히 민주적이고 여러 가지 여건에 충분히 부합되어야만 결의되기 때문에 극히 온당하지만 약간의 무리도 있을 수 있다.

상원사 김치를 먹어보면 원주스님의 짭짤한 살림솜씨를 알 수 있지만 대중공사에서 통과된 사항이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원주실에 비장해 둔 찹쌀과 팥과 김이 나왔다.

부엌에서 팥이 삶아져 가자 큰방에서 좌선하고 있는 스님들의 코끝이 벌름거리더니 이내 조용히 입맛을 다시고 군침을 넘기는 소리가 어간에서나 말석에서나 똑같이 들려왔다. 사냥개 뺨칠 정도로 후각이 예민한 스님들이고, 더구나 거듭되는 식사(食思)로 인해 상상력은 기막힌 분들이라 화두를 잠깐 밀쳐놓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찰밥을 기름이 번지르르한 김에 싸서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면 뱃속이 뭉클하면서 등골에 붙었던 뱃가죽이 불쑥 튀어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게 되면 약간 구부러졌던 허리가 반듯해지면서 밀쳐놓았던 화두를 꼭 붙잡게 되고 용기백배해진다. 이 얼마나 가난한 풍경이냐. 이 얼마나 천진한 풍경이냐. 찰밥 한 그릇이야말로 기막히게 청신한 활력소이다.

인간의 복수심과 승리욕은 자기 밖에서보다 자기 안에서 더욱 가증스럽고 잔혹하다. 별식은 넉넉히 장만하여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 식량(食量)대로 받는다. 주림에 무척이나 고달픔을 겪은 선객들이라 위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발우(鉢盂) 가득히 받아 이제까지의 주림에 대한 복수를 시원스럽게 한다.

찰밥이고 보니 격에 맞춰 상원사 특유의 산나물인 곰취와 고비나물까지 곁들여 상을 빛나게 해 준다. 발우 가득한 찰밥과 나물을 비우고서는 포식과 만복이 주는 승리감에 젖어 배를 내밀고 거들먹거리면서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합창한다. 생식하는 스님에게 죄송하다고 하니 자기도 찹쌀을 먹었으니 뱃속에서야 마찬가지라고 대꾸한다.

불경은 가르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다.



애증(愛憎)을 떠나 단무심(但無心)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이 경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선객들이지만 주림에 시다림을 받다보니 스르르 경구를 어기고 포식을 했으니 그 과보(果褓)가 나타났다. 오후 입선시간에 결석자가 십여 명이 넘었다. 좌선에 든 스님 중에서도 신트림을 하고 생목이 올라 침을 처리하지 못해 중간 퇴장을 하는 스님들이 너덧 명 되었다. 결가부좌 자세를 갖춘 스님 중의 몇 분은 식곤증이 유발하는 졸음을 쫓지 못하여 끄덕거리는 고갯짓을 되풀이한다.

통계에 의하면, 선객의 9할이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위장병 환자라 한다. 식본능(食本能)에 무참히 패배당한 적나라한 실상이다. 노년에 이르도록 견성하지 못한 선객은 만신창이가 된 위장을 어루만지면서 젊은 선객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뒷방 신세를 지다가 마침내는 골방으로 쫓겨가서 유야무야(有耶無耶) 사라져 간다. 그래서 선객은 2중으로 도박을 한다. 세간에 대한 도박, 출세간에 대한 도박.

언제나 모자라는 저녁 공양이 남아돌아갔다. 위가 소화불량을 알리느라 신트림을 연발하는 스님들은 공양시간에 참석하지 않았고 끼니를 거르기가 아쉬워 참석한 스님들은 물에 말아 죽처럼 훌훌 둘러 마신다. 그렇게도 죽 먹기를 싫어하는 스님들인데도, 저녁 시간의 큰방은 결석자가 많아 휑뎅그렁하여 파리 몇 마리가 홰를 치면서 제 세상을 만난 듯 자유롭다.

대신 뒷방은 만원사례다. 뒷방 조실의 코믹한 면상에 희색이 역연하다.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에 누운 지객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학부 출신에다 이력(大敎科)를 마친 분이지만 과묵해서 시비에 끼어들지 않는 스님이다. "인간의 본능 억제란 미덕일까요? 부덕일까요?" "정신적인 기능을 개발하기 위해선 약간의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육체적인 조화를 위해선 부덕이겠지요.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겐 악덕이겠고 노인들에겐 무덕이겠지요."

한참 후 다시 물어봤다. "선객은 반드시 본능 억제를 행해야만 견성이 가능할까요?" "본능을 억제한다고 해서 반드시 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객에겐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지요. 본능 억제는 필요조건에 해당되고 견성은 충분조건에 해당되겠지요. 필요조건은 수단 같은 것이어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본능 억제가 하나의 수단이라면 그 역(逆)인 본능 개발도 또한 수단이 되겠지요. 필요조건인 본능 억제가 없더라도 충분조건인 자성(自性)이 투철하면 견성의 요건은 충족되겠지요."

"함수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변수가 본능 억제라면 다른 하나의 정수는 자성에 해당되겠지요. 그런데 함수관계에서 변수가 없어도 함수관계가 성립될까요?" "수리학적인 공리를 선리와 대조 내지는 결부시킬 수는 없잖을까요? 전자는 형이하학적인 것이고, 후자는 형이상학적인 것인데."

"선객의 필요조건인 본능 억제와 충족조건인 자성에서, 필요조건은 없어도 충분조건만 있다면 견성이 가능하다는 견론인가요?" "그렇지요.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형이하학적인 한계성과 가능성은 배제되고 필연성만이 문제되는 거지요. 이렇게 지껄이는 내 자신이 가능성의 존재인지 불가능성의 존재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기에 가능성 쪽에 매달려 정진하고 있을 뿐이지요. 주사위는 이미 던져져 있으니까요."

"무서운 도박이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무서운 운명이지요." "퍽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명제(命題)군요." "명제가 아니라 문제지요. 해답은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 얻어지겠지요. 어서 잡시다. 다사(多思)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을 육체를 죽인답니다."

밖에서는 설한풍(雪寒風)이 굉음을 울리면서 지각을 두들겼다.

식욕(食慾)의 배리(背理)



十一月二十三日

겨울철에 구워먹는 상원사의 감자 맛은 일미(逸味)다. 선객의 위 사정이 가난한 탓도 있겠지만 장안 갑부라도 싫어할 리 없는 맛이 있다. 요 며칠 전부터의 일이다. 군불을 지핀 아궁이에 꽃불이 죽고 알불만 남으면 고방에서 감자를 몇 됫박 훔쳐다가 아궁이에 놓고 재로 덮어 버린다. 저녁에 방선(放禪)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 감자구이 담당스님이 아궁이로 감자를 꺼내러 간다. 뒷방에서는 공모자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기다린다. 감자는 아궁이에서 몇 시간 동안 잿불에 뜨뜻하게 잘 구워졌다 새까만 껍질을 벗기면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맛은 틀림없이 삶은 밤 맛이다. 서너 개 먹으면 허기가 쫓겨 간다. 잘 벗겨 먹지만 그래도 입언저리가 새까맣다. 서로를 보며 웃는다. 스릴도 있고 위의 사정도 좋아지니 여유가 생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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