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삼국유사
일연 지음 | 사군자
하룻밤에 읽는 삼국유사
일연 지음
사군자 / 2010년 03월 / 336쪽 / 14,000원
1 기이편 상<기이편 상>은 고조선을 시작으로 여러 부족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문무왕 이전까지) 등의 신화와 신이(神異)한 사적 36편이 실려 있다.
고조선 古朝鮮
《위서》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셔 아사달-경에는 무섭산이라 했고, 또한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 땅에 있다. 혹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일컬었는데, 바로 요와 같은 시기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계를 다스리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환인-제석을 이른다-의 서자 환웅이 계셔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려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지금의 묘향산이다-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라 불렀다. 이분을 환웅천황이라 한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나 되는 일들을 주관하여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곰이 웅녀로 태어나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면서, 신웅에게 늘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이에 신웅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가 이것을 먹으며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금기를 지킨 지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 갖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우다: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므로 아마 이것은 잘못인 듯하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어떤 곳에는 궁을 방자로도 되어 있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그는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아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다 산신이 되었다. 그때 나이가 1908세였다.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
제27대 덕만 - 혹은 만(曼)을 만(萬)으로도 쓴다 - 의 시호는 선덕왕이고, 성은 김씨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에 왕위에 올라 16년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
향기 없는 모란꽃을 알다: 첫째는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 세 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림의 꽃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결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 씨를 뜰에 심게 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때까지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숨은 적을 알아내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서 겨울철 수많은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이나 울고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괴이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 등을 시켜 정예의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속히 가서 서쪽 교외 여근곡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인 덮쳐서 죽이라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물었다. 과연 부산 아래에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의 장군 우소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 병력 1300명이 왔지만 모두 쳐서 죽여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
자기 죽을 날을 알다: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이 없을 때인데,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라.”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물었다. “어느 곳입니까?”, “낭산의 남쪽이다.” 과연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왕을 장사지냈다. 그 후 10여 년 뒤에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 아래에 지었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에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선덕여왕이 선견지명을 풀이하다: 왕이 살아 있던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다.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왕제가 배우자가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고, 옥문이란 여자의 생식기로 여자는 음이고 그 색깔이 백색인데, 백색은 서쪽을 나타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자의 생식기는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안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그 성스러운 지혜에 감탄했다. 세 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 신라에 세 여왕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한 것인가? 세 여왕은 선덕 ․ 진덕 ․ 진성을 말함이니, 당나라 황제의 놀라운 선경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에 자세히 적혀 있다. 별기에 이런 말이 있다.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
2 기이편 하<기이편 하>는 신라 문무왕부터 통일신라시대 마지막 왕 경순왕까지의 신라 왕조와 후백제, 가락국까지의 신화와 신이한 사적 23편이 실려 있다.
만파식적
신문왕이 용을 만나 옥대를 얻다: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다. 개요 원년 신사(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를 지었다-《사중기》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 2년(682년)에 역사를 마쳤다. 금당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바로 용이 절에 들어와 서리도록 마련한 것이라 한다. 대개 유지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은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은 감은사라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형상을 본 곳을 이견대라 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 하루-어떤 책에는 천수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에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떠 내려와 파도를 따라왔다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혹은 춘일이라고 한다-에게 점을 치게 하니, 아뢰었다. “돌아가신 성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을 지키시며, 또 김유신 공이 33천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덕을 같이 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내려주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와 닮았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혹은 산 역시 대나무처럼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쳐졌다고 한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가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하나로 합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어두컴컴해지더니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 산에 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가져다 바쳤다. 왕이 용을 맞이하여 함께 앉으며,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쳐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인가?” 용이 말했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한 마음이 되어 값을 매길 수 없는 이 같은 큰 보물을 보내 저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답례하고는,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바다로 나오지, 산과 용이 문득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 - 곧 효소대왕이다 - 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는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알들은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보십시오.” 이에 왼쪽 두 번째 알을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땅은 못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 못을 용연이라 불렀다.
신비스러운 피리를 만들다: 왕은 수레를 타고 궁궐로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693년)에 부례랑이 살아 돌아왔던 기이한 일 때문에 다시 만만차차식적이라 이름했다.
3 흥법편<흥법편>은 불교의 흥기에 관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불교의 전래와 고승들의 전기와 기이한 행적 6편이 실려 있다. 특히 일연은 글 말미마다 ‘기린다’는 시를 지었는데, 흥법편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 글에 시를 지어 기리고 있다.
순도가 처음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고구려 본기>에 이렇게 말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년)은 동진 함안 2년이니, 효무제가 즉위한 해다. 전진 왕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해왔다.-이때 부견은 관중, 즉 장안을 도읍으로 삼았다. 또 4년 갑술(374년)에는 아도가 진나라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375년) 2월 초문사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했다.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다.”
《승전》에 순도와 아도가 위나라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전진에서 왔다. 또 초문사가 지금의 흥국사고, 이불란사가 지금의 흥복사라 한 것도 잘못이다. 살펴보면, 고구려 때의 도읍 안시성, 즉 안정홀은 요수의 북쪽에 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부른다. 어찌 송경 흥국하의 이름이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는가. 기린다.
압록강 봄이 깊어 물풀이 선명한데 / 백사장 갈매기들 한가히 조는구나
문득 저 멀리 노 젓는 소리에 놀라니 / 어느 곳 고깃배인지 길손이 안개 속에 왔구나.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제29대 법왕의 이름은 선인데, 효순이라고도 한다. 개황 10년 기미년(599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던 매 같은 새들을 놓아주게 하고, 고기 잡는 기구와 사냥하는 도구를 불태워 모두 금지시켰다.
이듬해 경신년(600년)에는 서른 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그때의 도읍인 사비성-지금의 부여다-에 왕흥사를 짓게 했는데, 겨우 기틀만을 세우고는 세상을 떠났다.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선왕의 사업을 이어 받아 역사한 지 수십 년에 걸쳐서 완성하였고, 그 절 이름 역시 미륵사라 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곳이며, 꽃과 나무가 수려하여,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왕은 언제나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절에 들어가 그 장엄하고 수려한 경치를 감상했다.-《고기》에 실린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가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는데,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고, 즉위한 후에 시호를 무왕이라 했다. 이 절은 처음 왕비와 함께 창건한 것이다. 기린다.
짐승에게도 관대히 베푸니 그 은혜 천구에 미치고
돼지와 물고기까지 은택이 흡족하니 그 어짐이 사해에 넘치었네
성군 법왕이 덧없이 세상을 떠났음을 말하지 말라
상계 도솔천에는 바야흐로 봄이 한창이라.
4 탑상편<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것으로 탑과 불상을 만든 이야기나 얽힌 인연 그리고 신묘한 일들에 관한 감동적인 글 31편이 실려 있다.
황룡사의 9층탑
자장법사가 문수보살을 만나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636년)에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오대산에서 감응이 있어 문수보살에게 불법을 전수받았다. 문수보살이 말했다. “너희 국왕은 천축 찰리종의 왕으로 이미 불기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어, 동이 공공의 종족과는 다르다. 산천이 험준한 까닭으로 사람들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사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 간혹 천신이 화를 내리기도 하나, 다문비구가 나라 안에 있어 임금과 신하가 편안하고 모든 백성들이 화평한 것이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보살의 변화임을 알고 슬피 울다 물러갔다. 법사가 중국의 태화자가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 이곳까지 왔는가?” 자장법사가 말했다. “보리를 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신인은 그에게 절하고서 또 물었다. “너희 나라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국과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입이 횡행하니, 이것이 백성들의 근심입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니,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려 하는 것이다. 마땅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자장법사가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 장차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습니까?” 신인이 말했다. “황룡사 법룡은 내 맏아들인데, 범왕의 명령을 받고 가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다. 본국에 돌아가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이 찾아와 조공을 바치며, 나라가 길이 편할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또 나를 위해 서울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짓고 함께 내 복을 빌어주면 나도 또한 은덕을 갚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옥을 바치더니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시중기》에는 종남산 원향선사의 처소에 탑을 세워야 할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아비지가 9층 목탑을 세우다: 정관 17년 계묘(643년)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여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신하들이 말했다, “공장을 백제에 청한 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백제에 청했다. 아비지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돌을 다듬고, 이간 용춘-혹은 용수라 한다-이 소장 2백 명을 거느리고 그 일을 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