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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설천하 노자

도설천하 국학서원계열 편집위원회 지음 | 시그마북스
도설천하 국학서원계열 편집위원회 엮음

시그마북스 / 2010년 05월 / 472쪽 / 20,000원1부 도경



<중衆 묘妙 지之 문門 > 만물이 들고나는 오묘한 문


<해석> 도가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이 언어로 이름 지을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가 혼돈하여 아직 열리지 않은 시원始原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유'는 우주 만물이 생겨난 본원을 말한다.

그러므로 항시 '무'에서 도의 오묘함을 살피고자 하며

'유'에서 '도'의 단서를 보고자 한다.

'무'와 '유'는 같은 근원에서 나왔지만 명칭이 다르며

모두 현묘하고 심원하다고 할 수 있다.

현묘하고 심원하니 천지 만물이 들고나는 오묘한 문이다.



<해설> '도'라는 철학 개념은 노자가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노자』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도의 개념은 자못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띠며 우주 천지간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거대한 원동력으로 드러난다. 때로는 하늘과 땅이 뒤섞인 혼돈의 상태, 즉 아득하게 멀고 황량한 상태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천지가 처음 나뉘어 만물이 소생하여 자라기 시작하는 왕성한 생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노자』에 나오는 여러 가지 도에 대한 구상 속에서 우리는 노자가 도에 대해 얼마나 경건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살필 수 있다. 노자의 도에 대한 추앙은 자연과 자연 규율에 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는 당시 '천天'이나 '상제上帝'를 절대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보는 사상 관념과 구별된다. 노자에게 도는 이러한 종교적 통치와 전혀 무관하게 제기된 새로운 개념으로 '상제'보다 훨씬 권위를 지닌다. 동시에 노자의 도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독특한 깨달음과 심각한 체험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자연에 대한 세밀한 관찰, 특히 초楚나라의 지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신비한 직각直覺의 깨달음에 근원을 둔다. 자연과 자연 규율에 대한 관심과 체득은 노자 철학 사상의 토대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노자의 도는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정신적 또는 물질적인 면에서 원초적인 의뢰성依賴性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갓난아이와 엄마의 관계와 유사하다. 옛 사람들이 말하길, "사람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人窮則反本." 인용문의 '본本' 은 광의로 해석할 때 '자연', 즉 인류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칙』에서 문명이 인류에게 물질적 이익을 주는 동시에 정신적 심한 압력을 가한다고 하면서, 이는 문명의 유감스러운 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인류가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쾌락의 원칙' 역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 위에 세워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생활상의 필요나 문화사상면에서 '자연으로의 회귀'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 역시 좀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볼 때 고대 학자들이 우주 자연에 대해 전심전력으로 탐색했던 원인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우리들 역시 노자 철학에 나오는 자연 숭배, 지식 포기, '소국과민小國寡民'(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 즉 문명의 발달 없는 무위(無爲)와 무욕(無慾)의 이상사회를 이르는 말)을 추구하는 정치 생활 및 '도'의 순박한 본성과 신비로운 원시적 동력이 극히 과장된 역사적 원인의 소재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致 허虛 수守 정靜> 허무에 이르고 고요함을 지키다

<해석> 허무에 이르기를 다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독실하라.

만물은 함께 생장하고

나는 되돌아감의 도리를 본다.

만물은 왕성하게 자라지만

각자 그 본래의 뿌리로 되돌아간다.

본래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정(靜: 고요함)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명을 회복하는 것을 일러 상(常: 불변의 규칙)이라고 하는데

상을 아는 것을 명(明: 밝게 앎)이라고 한다.

상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흉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상을 알면 일체를 포용할 수 있게 되고

포용하면 공정할 수 있으며

공정하면 두루 퍼질 수 있고

두루 퍼지면 자연에 부합할 수 있으며

자연에 부합하면 도를 얻게 된다.

도를 체득해야 오래갈 수 있으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해설> "허무에 이르기를 다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독실하게 하라. 만물이 함께 자라지만 나는 되돌아감의 도리를 볼 수 있다. 만물은 왕성하게 자라지만, 각자 그 본래의 뿌리로 되돌아간다. 본래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정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명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도가에서 도를 닦는 원칙이나 방법이다. 도를 닦는 이라면 마땅히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철저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고요함을 지키기를 독실하게 하라." 이는 일종의 공부이자 작용이다. 중국 선종禪宗 황룡黃龍 선사는 청초당淸草堂 선사가 처음 참선을 배울 때 선禪에 들어가는 바를 얻지 못하자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대는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네 발은 땅에 붙이고 머리와 꼬리를 곧추세우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으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적중할 것만 생각한다." 이 말을 듣고 청초당 선사는 입선入禪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참선하는 이라면 정신을 집중하여 오로지 화두에 전념해야만 한다는 뜻이니, 도를 닦을 때도 이와 같아야 한다.



"만물은 함께 생장하고 나는 되돌아감의 도리를 본다."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변화 발전 속에서 우주는 거대한 동태動態의 세계이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초목들도 끊임없이 생장한다. 이것이 바로 도의 작용이다. 모든 생명체가 생겨나 성장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또한 마지막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사망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만물병작萬物幷作'은 이렇듯 사물이 생겨나고 변화 발전하다가 마침내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만물은 모두 죽어 사라지지만 생명의 역량은 무궁무진하다. 이를 불가에서는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영원불멸의 생명력은 아무리 써도 다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되돌아감의 도리를 본다"고 하였으니, 생명의 최초 근원, 그 영원불멸의 생명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처로 향하는 것, 이를 선종은 "자아의 본래 면목을 되찾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본래 면목을 발견하고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살펴 생명이 지닌 비할 바 없는 방대한 역량과 만나는 것이다.



"만물은 왕성하게 자라지만, 각자 그 본래의 뿌리로 되돌아간다. 본래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정(靜: 고요함)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천지간에 생장이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풀이 아닌가 싶다. "들불도 다 태우지 못해 봄바람 불면 또다시 돋아나네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당대 시인 백거이는 [송행시送行時 -고원의 들풀을 보며 송별을 읊다]에서 이렇게 읊었는데, 들불이 아니라 싹을 모두 잘라내도 봄바람 불 때면 어느새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것이 들풀이다. 중국인의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목木은 생기를 대표한다. 동양에서는 나무를 생생불식의 현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풀이나 나무는 초목이라 하여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데, 주로 성대한 모양을 뜻하는 '운운芸芸'은 초목이 무성한 것에서 나온 말로 우주 만물이 생생불식함을 형용한다. 말라죽어도 또다시 생겨나고 생겨날수록 더욱 많아지니 이를 일러 '운운'이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도가의 '운운'과 불가의 '중생을 합쳐 '운운중생'이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후에 '임임총총林林總總'이란 말이 나와 초목 등이 무수하게 많은 것을 형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귀근歸根', 즉 뿌리로 돌아가는가? 유일한 방법은 고요함을 얻는 것이다. "본래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정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명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요함의 극점에 이르러야 비로소 생명의 본원을 찾고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뿌리란 무엇인가? 텅 빔, 즉 허공이다. 불가에서는 이를 단도직입적으로 '공空'이라 하였다. '공'은 단지 형용하는 말일뿐이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공'은 노자가 말한 '청허淸虛'와 같다. 고요함이 극점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인가? 불가에서는 "허공분쇄, 대지평침虛空紛碎, 大地平 ", 즉 허공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대지가 묻혀버린다는 말로 그 경계를 표현하고 있다. '공'조차 타파해야 진정한 고요함이란 뜻이다.



원래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우주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그것이 곧 고요함의 극점에 이른 것이자 '명'을 회복하는 것이며, 청허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가식으로 말하자면 "본래 사물이 없었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생겨나겠는가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또한 어떤 사물에 얽매여 손을 놓지 못하고 쩔쩔 맬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은 집착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써 비교하거나 소유하려고 애쓰지말라. 우주만물이 본래 그대의 것이거늘! 이것이 바로 '지상知常'이다. 우리의 생명은 본래 불생불멸이다. 이러한 불생불멸의 본원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하고 인식해야 한다. '상常'은 만물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불변의 규칙으로 상을 알지 못하면 취생몽사로 맹목적인 인생을 사는 것과 같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부지상, 망작흉 不知常, 妄作凶'은 바로 이런 뜻이다. '상'을 알아 도의 본원을 파악해야만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알 수 있다. '상'을 알면 '용容', 즉 마음으로 만상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흉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혜의 영역이 무한대로 확장된다. 그래서 '용내공容乃公', 즉 포용하면 공정해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다음은 '공내전公乃全'인데, 공정하면 두루 퍼진다는 뜻이다. 일부 판본에 '전全' 대신 '왕王'이라고 쓴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임금이라는 뜻이 아니라 왕성, 멀리 향함, 도움 등의 뜻이니, 모든 만물이 활발해지고 서로 돕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사람들이 서로 구분하지 않고 서로 돕는다는 의미이다. 다음은 '전내천全乃天'인데, 모든 것이 자연계의 규율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으니 일월이 빛을 내려 만물의 성장을 돕는다. 여기에는 차별이나 구분이 없으며 서로 견주거나 주고받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내도天乃道', 즉 자연에 부합하여 도를 얻게 된다.

천지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어야만 도의 원칙에 부합된다. 그래야만 "오래갈 수 있으니" 심원하고 유장하여 장생불로하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무아'는 곧 '대공大公', 즉 천도이다. 천도를 알아야만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歿身不殆." '몰신歿身'이란 말 그대로 마지막으로 숨을 내쉬며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육신은 뼈만 남고 모두 썩어버리며, 끝내는 뼈마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생명의 정신은 오히려 영원히 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생불로의 핵심은 사라질 육신에 대한 집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허극, 수정동 致虛極, 守靜篤' 여섯 자에 있는 것이다.

<물物 장壯 즉則 노老> 사물은 장대해지면 노쇠한다

<해석> 도道로 군주를 보좌하는 이는

병력으로 천하에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무력을 쓰게 되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는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들기 마련이다.

용병을 잘하는 이는 위급함을 구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면 그뿐이니

무력으로 강력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고도 자만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도 뽐내지 않으며

목적을 이루고도 교만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도 부득이한 것이라 하고

목적을 이루고도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물은 장대해지면 노쇠하기 마련이니

이는 도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진다.



<해설> 본 장은 '도'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전쟁이 인류에게 주는 엄청난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노자 자신의 반전사상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도로 군주를 보좌하는 이는 병력으로 천하에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무력을 쓰게 되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를 행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또한 최소한의 원칙, 즉 도를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를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 여기서 '위도爲道'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도'의 '위爲'는 추구하다 또는 수련하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것, 즉 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도를 추구할 것인가? 도는 앞서 말한 바대로 '도로道路'의 뜻이다. 도를 추구하거나 찾는 일은 어쩌면 원래의 뜻인 '도로'를 찾는 일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뿌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 모든 이는 각기 자신의 길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가는 길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도 같은 강물을 두 번 건널 수는 없다는 말처럼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 속에 사람 또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이 변화하지만 사람들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강을 건넜다고 같은 강을 건넌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똑같은 강을 건넜다고 주장한다. 아무 데도 항상恒常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무상無常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영원히 불변하는 사물은 없다. 도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도를 찾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만약 우리가 정도正道, 즉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한다면 한쪽은 도덕, 다른 한쪽은 법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걸어가면 된다. 그 안에서 당신이 어떻게 걸어가든 크게 불합리한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때로 당신이 가는 길에 가로지르는 길이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생이 거쳐야 할 여러 가지 단계처럼 당신 앞에 불현듯이 나타난다. 모든 단계에는 마지노선, 즉 최소한의 한계선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지극히 곤란하고 어려운 단계라면 굳이 나서지 말고 안빈낙도를 택하면 될 것이고, 득의(得意, 뜻이 이루어져 기뻐하는 단계)하는 단계라면 괜히 오만과 불손으로 잘난 척하지 말 일이다. 번뇌에 휩싸이는 단계라면 불안과 고통에 힘들어하지 말고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선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자신의 한계선을 끊임없이 파악할 수 있기에 발걸음이 더욱 안정적이며, 어설프게 샛길로 빠지거나 지나치게 빨라 다른 이와 충돌하는 일이 없게 된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다시피, '위도', 즉 도를 추구하고 수련하는 일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준칙을 지켜가면서 자신의 걸음으로 제대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柔 약弱 승勝 강剛 강强>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해석> 장차 거두고자 하면 반드시 펼쳐야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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