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文을 따라 떠나는 중국문학유람
장수열, 심우영, 문관수, 권석환 외 지음 | 차이나하우스
詩文을 따라 떠나는 중국문학유람
장수열, 심우영, 문관수, 권석환 외 지음
차이나하우스 / 2008년 11월 / 331쪽 / 17,800원
황하(黃河), '어머니의 강'을 노래하다중국의 중원을 흐르는 큰 물줄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황하(黃河)이다. 중국인들은 황하를 '어머니 강(母親江)'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황하는 "염황자손(炎黃子孫)의 핏줄기이며, 중화민족의 민족정신과 민족 감정의 상징"이라고 여긴다. 지금이야 '河'라는 용어가 '하류(河流)'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지만, 예전에는'황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등 초기의 역사서에서는 황하를 '大河'라고 불렀다. 예부터 모래 진흙이 많은 하류를 '탁하(濁河)'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황하는 상류에 있는 사막고원에서부터 모래 진흙과 뒤섞여 흐르기 때문이 물빛이 누렇다. 이런 연유로 당나라 중엽부터 '황하(黃河)'라는 고유명사가 생겼지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은 황하를 거저 '河' 혹은 '大河'라고 불렀다.
황하의 물결은 불교문화를 싣고, 감숙성 영정현(永靖縣)에 있는 적석산(積石山) 언덕 옆을 지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불교 미술의 꽃을 피웠다. 병령사(炳靈寺) 바위절벽에 새겨진 불상이 바로 그것이다. 병령사는 실크로드가 농서( 西)지역으로 뻗어난 지선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서진(西晉)시대부터 불교도들이 이곳에 머물러 불경을 번역하는 한편 불상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병령(炳靈)'이란 말은 티베트 말로 '십만불(十萬佛)'이라는 뜻이다. 황하는 정주(鄭州)의 극목각(極目閣) 부근에 이르러 하류와 이어진다.
황하를 건너 청하에 도착하여 시를 짓다(渡河到淸河作) - 왕유(王維)
汎舟大河裏, (배를 타고 황하를 가다보니) 積水窮天涯. (물이 하늘까지 쌓여있다)
天波忽開折, (하늘 빛 물길이 갑자기 열린 틈으로) 郡邑千萬家. (마을의 여러 집이 보인다)行復見城市, (다시 가다 보니 도시가 나타났다) 宛然有桑麻. (뽕나무 삼나무가 또렷하게 보인다)回瞻舊鄕國, (고개 돌려 옛고향 바라보니) 漫連雲霞. (아득한 물줄기 구름노을과 맞닿아있더라)
이 시는 황하의 하류 경치를 묘사한 것이다. 당나라 시인 왕유는 개원(開元) 9년(서기 712년) 제주(濟州) 오늘날 산동성 치평( 平)-로 폄적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말단직인 창고지기를 맡고 있었을 때 이 시를 지었다. 물과 하늘이 한 가지 색이 되어 열려진 틈으로 마을의 여러 집이 보이고, 논밭이 완연하게 나타났다. 그 순간 고개를 돌려 다시 보니, 황하는 그저 하늘에 닿아있을 뿐 고향은 보이지 않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인의 노래는 끝났으나 여운은 가시지 않는다. 시를 따라 황하를 유람하다 보면, 황하는 중국인에게 젖줄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넘실대는 물줄기는 그들 문화의 시원이면서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대한 황하 문명이 그렇게 탄생하여 중국 문화의 원형을 이루었으리라. 시 속의 황하의 물은 모두 하늘까지 넘실넘실하였다. 그러던 요즘 황하가 점점 고갈되고 있다고 한다. '백년하청(百年河淸)' , '천년일청(千年一淸)'의 날은 언제던가! 그날이 오면 다시 황하의 물도 풍성해질 것인가.
장성(長成)은 어찌 저리 긴지?길고 긴 성, 그래서 장성(長成)이라고 했다. 그러면 만리(萬里)를 장벽으로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춘추전국 시대 각 제후국이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 된다고 한다. 진시황(秦始皇)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수많은 병졸을 징발하여 연(燕) 조(趙) 지역의 성을 연결하였다. 이 진나라 장성은 동쪽으로 압록강변 요령성(遼寧省) 단동시(丹東市) 호산(虎山) 남쪽까지 이어졌다. 이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지만, 요령성의 옛 장성은 허물어졌다. 명나라에 이르러, 몽고족의 침입과 여진족(女眞族)의 창궐을 막기 위해 전면적으로 보수하여, 오늘날 서쪽 가욕관(嘉 關)에서 동쪽 산해관(山海關)까지 6,700Km에 달하는 장성의 모양이 완성된 것이다. 험준한 산간 지역을 단시간에 연결하기 위한 진시황의 장성 축조는 수많은 역졸들의 노동에 의한 것이었다. 하여 시인들은 장성의 위대한 건축 공정을 찬양하기보다는, 이름 없는 역졸들의 피와 눈물을 노래하였다.
장성하면, 오랜 전쟁과 변새 지역의 황량함이 느껴진다. 그 정조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으로 왕창령(王昌齡)을 들 수 있다. 그의 시를 우리는 변새시(邊塞詩)라고 부른다. 왕창령의 변새시에는 그의 애국주의 정신과 백성들에 대한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새하곡(塞下曲)>은 그 중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모두 네 수가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제1수를 수록하였다.
새하곡(塞下曲) 제 1수 - 왕창령(王昌齡)蟬鳴空桑林, (공허한 뽕나무 숲 속에서 울어대는 매미) 八月蕭關道. (팔월의 소관 길)
出塞復入塞, (변방을 나갔다 다시 돌아오니) 處處黃蘆草. (도처에 누런 갈대풀만 우거져있네)從來幽幷客,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나그네들) 皆向沙場老. (모두 모래사막에서 늙어갔으니)莫學游俠兒, (협객들이 용맹을 뽐내며) 矜誇紫駿好. (준마를 자랑하던 일을 본받지 마오)
소관(蕭關)은 지금의 영하성(寧夏省) 동남쪽 일대로, 관중(關中)에서 변새지방으로 나아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매미 소리가 들리고 갈대만 우거진 황량한 풍경 속에 여전히 우뚝 서있는 소관. 이는 시인으로 하여금 관문을 지나 변새 지방으로 갔던 젊은 청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넘치는 기개를 품고 출발했지만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늙어갔다. 시인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자신의 용맹을 믿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지 말라고. 전쟁에 동원된 백성들의 슬픈 삶을 동정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시인의 여망이 담겨 있다.
상해(上海) 예원(豫園), 도시 속의 원림상해 한복판, 중국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그곳에 정원이 있다. 이른바 '산림성시(山林城市)'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원림이 예원(豫園)이다. 예원은 상해시 구성구(舊城區) 동북쪽에 있으며, 강남에서 가장 이름난 원림 중의 하나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38년(1559)에 처음으로 지어졌는데, 원림의 주인은 일찍이 사천포정사(四川布政使)를 역임한 사해 사람 반윤단(潘允端)이었다.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이 원림을 지었다고 한다. '예원'이라는 이름은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다(豫養雙親)'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확장되어 약 70묘가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다시 수리하여 상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예원득월루(豫園得月樓) - 도주(陶澍)
樓高但任雲飛過, (누대는 높으나 지나가는 구름이 의지하고)
池小能將月送來. (연못은 작지만 오고가는 달을 거느린다)
도주(陶澍, 1779~1839)는 청대 시인으로 자는 자림(子霖)이고 호는 운정(雲汀)이다. 호남성 안화(安化)사람으로 청나라 가경(嘉慶)과 도광(道光) 연간에 강서총독(江西總督)을 지낸 적이 있다. 대련의 최대 특징은 '시구는 간결한데 의미는 심장하다'는 데 있다. 언뜻 보기에는 조탁의 흔적이 없어 난해하지 않을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但任'과 '能將'을 쉽게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但(단지)'와 '能(능히)'은 서로 반대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任'과 '將' 역시 '맡기다'와 '거느리다'라는 반대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尺有所短, 寸有所長'이라는 철학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 중국 비평가들은 정적인 '樓'와 '池', 동적인 '雲'과 '月'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동정(動靜)이 상생(相生)하는 효과를 극대화하였다고 하며, '但任'과 '能將'은 사물을 활물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得好友來如對月, (좋은 친구를 얻으면 마치 달을 대하듯 반갑고)
有奇書讀勝觀花. (기이한 책을 읽으면 꽃을 보는 것만큼 즐겁다)
송대 이후 사가원림이 본격적으로 생긴 이후, 원림에서는 음주음시(飮酒吟詩)하는 일이 일상사였다. 원림의 소유주로서는 좋은 친구를 초빙하여 함께 즐기는 것이 마치 어두컴컴한 밤에 달을 대하듯 생기가 돋아나는 일이고, 한가할 때면 꽃을 관상하는 것도 좋지만 기이한 책을 구하여 읽으면 더욱 더 운치가 있을 것이다. 일상사 중의 이러한 활동을 평담하고 솔직하게 대련(對聯)으로 표현하였다.
항주(杭州),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국 동쪽 해변에 위치한 절강성은 연해에 200개 이상의 섬이 흩어져 있어서 섬이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날씨는 아열대에 속해 따뜻하고 사계절 또한 분명하다. 아울러 산도 많고 그 중앙에는 전당강(錢塘江)이 흐르고 있어 그 주위로 볼거리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다.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항주는 소주(蘇州)와 함께 중국의 유명한 관광도시이며, 서호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 7대 고도(古都)의 하나로 자원이 풍부하고 경치가 수려하여 13세기 무렵 이탈리아의 유명한 여행가 마르코폴로는 항주에 왔다가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항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항주와 북경을 잇는 경항운하(京杭運河)가 건설되면서 도시는 점차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9세기부터 200여 년 동안 14명의 황제가 항주를 수도로 정했다. 따뜻한 기후와 많은 강수량 덕택에 녹차의 최고급품으로 알려진 용정차(龍井茶)를 비롯한 녹차의 재배지로도 유명하고 전통적인 직물공업을 바탕으로 근대적 설비에 의한 견(絹), 면직포, 염색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항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서호를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서호 주변의 영은사(靈隱寺), 육화탑(六和塔), 악비묘(岳飛墓) 등 유명한 관광지가 많다. 서호를 가장 많이 노래한 사람은 아마도 소동파(蘇東坡)일 것이다.
6월 27일, 망호루에서 취해 쓰다(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 五絶) - 소식(蘇軾)
黑雲 墨未遮山, (먹물을 뒤엎은 듯한 검은 구름 산허리에 걸치더니)
白雨跳珠亂入船. (흰 구슬처럼 튀는 빗발 어지러이 배 안으로 들이친다)
卷地風來忽吹散, (땅을 휘감는 바람이 문득 비구름 불어 흩트리자)
望湖樓下水如天. (망호루 아래의 물이 금시 하늘빛처럼 맑게 변했다)
放生魚鱉逐人來, (방생한 물고기와 자라가 사람을 따라오고)
無主荷花到處開. (임자 없는 연꽃은 도처에 피어 있다)
水枕能令山俯仰, (배 위에 누우니 물결 따라 산이 오르락내리락)
風船解與月裴回. (바람 따라 흘러가는 배는 달과 함께 배회한다)
이 시는 소동파가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재직할 때인 희녕(熙寧) 5년(1072년, 37세)에 지은 것이다. 첫째 수에서 날씨가 '먹구름 비 회오리바람 쾌청' 등으로 변화함에 따라 동태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적 자연경관을 선명하게 묘사하였다. 작자의 위치도 배 안에서 망호루로 이동하였다. 배 안에서 본 먹구름, 빗발, 회오리바람과 망호루에서 조망한 하늘처럼 맑고 고요한 물빛 등이 청신하고 생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분위기가 동적인 데서 정적으로 급변하면서 이 양자의 대비 하에 뒷부분의 정적인 경치가 부각되고 있다. 둘째 수에서 작자는 배 위에 누워서 물결 따라 산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 바람 따라 흘러가는 배 위에 비친 달빛의 분위기가 훨씬 정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 시는 순수하게 경관중심을 묘사하고 있다. 자연에 동화된 경지이다.
구화산(九華山), 유람길에 등신불을 만나다안휘성(安徽省)의 구화산은 지장보살과 관련된 불교의 성지로, 관음(觀音)의 절강성(浙江省) 보타산(普陀山), 문수(文殊)의 산서성(山西省) 오대산(五臺山), 보현(普賢)의 사천성(四川省) 아미산(峨嵋山)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으로 손꼽힌다. 특히 지장보살의 화신이라 여겨지는 김교각(金喬覺, 696~794)이 신라의 왕족이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이 한국인의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구화산은 안휘성 지주시(池州市) 청양현(靑陽縣)에 위치하여 그 북쪽에는 중국 남방문화의 젖줄인 장강(長江)이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황제(黃帝)가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황산(黃山)이 있다. 최고봉인 해발 1,342m의 '십왕봉(十王峰)'과 제2봉인 해발 1,320m의 '천대봉(天臺峰)'을 비롯하여 해발 1,000m이상의 산봉우리가 30여 개에 달한다. 또 산의 토질이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오랜 풍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기암괴석이나 동굴, 폭포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으며, 독특한 형상의 수목과 희귀한 동식물이 가득하다.
이러한 신비로운 모습 때문에 예로부터 이백(李白), 왕안석(王安石), 탕현조(湯顯祖)와 같은 유명 문인들이 다녀가 그 경관을 칭송하며 시문을 지었을뿐더러, 역대로 수많은 도사와 승려들이 찾아와 수행하던 명산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713~742)에 신라의 김교각이 출가하여 중국에 건너와서는 70여 년간 수행한 도량으로 가장 유명하다. 또 남쪽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수준 높은 목조 예술의 집산지로 알려진 흡현( 縣)이 근접해 있어, 사원의 건축물마다 사자, 용, 화조도와 역사 및 불경 이야기를 제재로 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안휘파(安徽派) 목조각이 볼거리도 제공한다.
구화산에는 80여 개의 사원이 있는데 특히 '육신보전(肉身寶殿)'에는 지장보살 김교각의 육신탑(肉身塔)이 모셔져 있다. 이 육신보전은 청나라 때에 개축된 바 있으나 본래는 당나라 때에 처음 지어진 것이다. 고행의 참선 끝에 앉은 자세로 원적(圓寂)한 그 모습 그대로 독 안에 입관하여 안장되었는데 그의 육신이 3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생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시 스님들이 김교각을 지장보살의 화신이라 여기고 육신탑을 세워 공양하면서 그 위와 아래에 전각을 지어 이어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오늘날 육신보전의 7층 목탑 안에 김교각의 육신이 안치되어 있고, 목탑 각 층의 사면팔방에는 총 56개의 지장보살상이 놓여 있다.
하산하는 동자를 전송하며 (送童子下山) - 김교각(金喬覺)
空門寂寞汝思家, (공문의 적막함에 넌 집이 그리워)
禮別雲房下九華. (운방에 작별을 고하고 구화산을 내려간다)
愛向竹欄騎竹馬, (대나무 난간에서 죽마 타기 즐기고)
懶於金地聚金沙, (마당의 황금빛 모래 쓸어내는 일은 게을리 했었지)
添甁澗底休招月, (정병에 물 긷는 개울 아래서 달님 타령 말지며)
烹茗 中罷弄花. (찻잎 끓이는 사발 안에 꽃님 놀리지 말라 했었지)
好去不須頻下淚, (잘 가는 길에 빈번히 눈물 보여서는 아니 될지니)
老僧相伴有煙霞. (노스님은 안개와 노을이 있어 함께하리라)
이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화신이라 여겨진 김교각이다. 이 시에서 보이는 '공문'이란 불교를 비유하는 뜻으로 쓰이는데, 세상의 온갖 것이 다 부질없는 헛된 것이라 여긴 불교의 교리와 관련해 생겨난 말이다. 또 '운방'이란 승려가 머무는 방을 말한다. 이어서 노스님은 동자가 '정병'에 깨끗한 물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