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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에게 길을 묻다

가토 도루 지음 | 수희재
1. 내면과 외면



나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동양고전 작품은 실로 방대하며 다종다양합니다. 그러나 감히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동양고전이란 '나'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와 우주를 거쳐 마지막으로 또다시 '나'로 귀착하는 장대한 문학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행운입니다. 수없이 많은 우연이 겹친 결과, 지금의 당신이 이곳에 있습니다. 얼추 계산해볼 때, 그것은 몇 분의 1의 확률일까요?



『삼국지』의 조조(曹操 155~220)에게는 하후돈(夏候惇)이라는 부하 장수가 있었습니다. 조조가 여포(呂布)를 공격할 때, 하후돈의 왼쪽 눈에 화살이 박혔습니다. 후세에 쓰여진 고전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이야기가 각색되어, 한쪽 눈을 잃은 하후돈이 "아버지의 정(精)이요, 어머니의 혈(血)일진대 결코 버릴 수 없다"(원문: 父精母血, 不可棄也)고 말하며 그 눈을 꿀꺽 삼킨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지만, '부정모혈'은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은 약 60개조의 세포가 모여 이루어져 있는데, '부정모혈'이라는 말 그대로 최초에는 단 하나의 수정란이었습니다. 인간 남성의 정소(精巢)에서 일생동안 만들어지는 정자의 총수는 누계로 1조 개 이상이라고 합니다. 여성의 난소(卵巢)에서 일생동안 배란되는 난자의 수는 약 4백 개. 그러니까 '부정'과 '모혈'의 조합수는 4백조 이상이라는 방대한 수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4백조 이상의 조합 중에 단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는 4백조 분의 1 이하의 우연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나아가 부모가 만나 결혼할 확률, 내 부모와 그 윗대의 선조들이 태어날 확률, 이 우주가 생겨날 확률, 우주에 지구가 생겨날 확률, 지구에 인간이라는 종이 탄생할 확률 등도 계산해 넣어야 합니다. 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하겠지만, 아주 대충 계산해봐도 지금의 '나'는 기적적인 확률로 이 우주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가치는 온 우주와 맞먹습니다. 일본인의 신앙에서 보면 '나'의 존재는 한 번 왔다 사라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개개 인간의 육체는 죽어 없어진다 해도, '나'의 생각과 '예격藝格'은 불멸이어서 타인에게 전수된 채로 계속 살아남는다고 믿어왔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인의 신앙에서 '나'는 철저히 단 한 번뿐인 존재입니다. 다음 당나라 진자앙의 한시는 중국인의 '자기'관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주의 누대에 올라 노래하다(登幽州台歌) : 唐, 진자앙(陳子昻 661-702)

앞을 바라봐도 옛 사람 보이지 않고 / 뒤를 돌아봐도 오는 사람 보이지 않네 / 천지의 아득함을 생각하니 / 나 홀로 슬퍼져 눈물이 흐르네.

원문: 前不見古人, 後不見來者, 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



진자앙의 시에서 '눈물'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슬픔의 눈물일까요, 아니면 기쁨의 눈물일까요? 수학 문제와 달리, 문학에서는 정답이 하나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특히 고전의 독해는 읽는 이가 마음속으로 옛사람과 대화하며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진자앙의 시에서 눈물도 십인십색(十人十色)의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한시의 눈물을 단순히 '슬픔의 눈물'이라 해석해버리면 시가 건조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높은 곳에서 저 멀리 펼쳐진 공간을 내려다봅니다. 광대한 공간에서는 유구한 시간이 연상됩니다. 무한한 시공 속에 놓여진 보잘것없이 작은 나, 그리고 거세게 밀려오는 고독감.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한,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 까닭에 온 우주에 필적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그 엄청난 사실. 그것을 이유 없이 체감한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너무 열심히 살다보니, 어쩌면 인생 전체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인생의 광야에 우뚝 솟아 있는 고고(孤高)한 탑에 올라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면, 자기를 재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말로 나타낼 수 있을까

숫자나 말로 나타낼 수 있는 지(知)의 작용을 현대의 용어로 '형식지(形式知)', 숫자나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지의 작용을 '암묵지(暗默知)'라고 합니다. 북극해에 떠 있는 빙산을 상상해보기 바랍니다. 수면 위에 나와 있는 '빙산의 일각'은 빙산 전체의 7분의 1에 불과합니다. 7분의 6은 수면 아래에 숨겨져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만지거나 하는 것은 모두 빙산과 같은 것입니다. 말이나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 나머지는 말이나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지의 수면 아래에 깊이 잠겨 있습니다. 자신의 암묵지를 형식지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하는 어려움, 이는 인간의 심각한 한계 중 하나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기술을 타인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우리도 흔히 경험하는 바입니다. 이를 한문에서는 '고인(古人)의 조백(槽魄)'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장자』 천도편(天道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나라 환공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대청 아래 바닥에서는 '수레바퀴 깍기 일을 하는 편(扁, 윤편)이라는 직공이 나무를 깍아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망치와 톱을 놓아두고 위로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황송하옵니다만 지금 읽고 계신 것은 무엇이옵니까?" "성인의 말씀이니라." "그 성인은 살아 계시옵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러시면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라는 말씀이군요."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 수레바퀴 직공 주제에 함부로 참견하고 드는가? 무슨 그럴싸한 설명이 있으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노라."

원문: 桓公讀書於堂上. 輪扁 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爲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槽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그러자 편은 말했다. "소인은 소인의 경험에서 그리 생각한 것이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조금이라도 헐렁하면 바퀴살이 빠지기 쉽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빡빡하면 정확히 삽입되지 않습니다. 헐렁하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순전히 손으로 알고 마음으로 응하는 것이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바로 그 부분에 있는 법입니다. 소인은 그 비결을 소인의 자식에게 말로 전수하지 못하고, 소인의 자식도 소인에게서 그것을 말로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인은 칠십이 된 이 날까지도 늙도록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그것을 전하지 못한 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임금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원문: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輪, 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者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 輪. 古之人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槽魄已夫.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지만, 전문가의 경험이나 직감은 '암묵지'인 까닭에 말이나 수식(數式)으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의학이나 생리학 등, 이공계 분야도 그렇습니다. 옛날 일본 도장(刀匠, 칼 만드는 장인)의 세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기술을 훔치는 것이라 여겨왔습니다. 개개의 전문지식은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배울 수 있다 해도, 발상법이나 직감과 같은 전문가의 암묵지는 스승과 함께 일하며 훔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인생이나 역사의 체험 또한, 핵심 부분은 '암묵지'적입니다. 예컨대,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의 비참함도 사망자 수라든가 방사능 잔존량 등의 '형식지'만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숯덩이로 변한 가족의 냄새, 전후 수십 년이 지나서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올해도 백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남모르게 기원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 히로시마는 그런 무수한 체험이 쌓이고 쌓인 것입니다. 그것을, 전쟁을 모르는 세대나 핵보유국 국민들에게 직접 전달할 방법이 없어 안타까움을 느끼는 피폭자(被爆者)가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문학작품을 정독하면, 옛사람들의 암묵지적 체험도 생생하게 추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한문에서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합니다. 다음은 『논어』의 위정(爲政)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는 말했다.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면, 그 알아낸 바를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 원문: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역사는 보트와 닮아 있습니다. 사람은 보트를 저을 때, 가는 방향으로 등을 돌린 채 뒤를 향해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뒤를 확실히 바라보면서 노를 젓지 않으면, 보트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맙니다. 인간은 과거를 주시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향해 노를 저어갈 수 없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고인의 조백'을 익히는 것. 즉 책의 행간을 읽고 그것을 쓴 사람의 '생각'을 파고 들어가 과거와 대화하는 것. 21세기를 헤쳐나아가기 위해서도 '고전'을 읽는 힘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2. 저승과 이승



사후 세계는 있는가

사후 세계는 과연 있을까요? 공자와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사후 세계의 유무에 대해 나눈 다음의 문답은 유명합니다. 다음은 『논어』 선진(先進)에 나오는 말입니다.



계로(季路,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했다. "사람이 섬기는 것도 잘하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 "그렇다면 죽음은 어떻습니까?"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원문: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공자는 또 자로를 향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논어』 위정(爲政)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유(由, 자로의 이름)야, 너에게 안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니라."

원문: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공자가 한 위의 말을 통설에서는 "자로가 이따금 아는 체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쳐주려 한 말"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해석인지는 모르지만, 이를 사후 세계의 유무에 관심을 갖는 자로가 초자연 현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공자가 주의를 준 것으로 해석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에게 이 세계(우주)는 3중의 동심원(同心圓)입니다. 중심 원은 지금 여기서 생활하고 있는 기지(旣知, 이미 알고 있는)의 세계, 그 바깥쪽에는 미지(未知)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미지의 세계는 더 나아가 가지(可知, 언젠가 알게 되는)와 불가지(不可知, 영원히 알 수 없는)의 두 세계로 나뉩니다. 공자는 "지적인 태도란 기지와 미지, 가지와 불가지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 것"이라며 주의를 준 것이 아닐까요?



불가지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의학에서 예를 들면, 어떤 환자가 의사를 향해 "왜 내가 이런 중병에 걸렸나요?" 하고 묻습니다. 의사는 '내'가 병에 걸린 원인 'how'를 설명해줍니다. "지나친 흡연",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열화 우라늄의 영향" 등등. 그러나 환자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Why me?", 즉 "왜 내가?"라는 이유 'why'에 대해서는, 과학자로서의 의사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욥기를 읽어보십시오" 하는 등의 이유를 붙여줄 수 있는 사람은 의사가 아닌 다른 직업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도 'how'에 관하여는 상당부분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최고(最高)의 연구 주제이기도 한 죽음의 'why'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가지의 영역에 속하겠지요.



태어남의 신비, 죽어감의 의미

나 자신도, 인간이라는 종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떨쳐버리고 떠나가야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지구라는 아파트를 대자연이라는 집주인으로부터 빌려 살고 있을 뿐, 영원히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의 인간, 즉 '당신'이나 '나'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 소유할 수 없습니다. 만약 몸이나 마음이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라면,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나이 들어 죽거나 하는 바보 같은 일들은 결코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고, 되고 싶지 않아도 어른이 되며, 어영부영하는 사이 늙어 죽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대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려온 데 불과하다'는 생각을 동양고전에서는 "여신비여유야汝身非汝有也"라고 합니다. 다음은 『장자』 지북유편(知北遊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순(舜) 임금이 승(丞)에게 물었다. "도란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승이 말했다. "당신의 몸도 당신의 것이 아닌데, 어찌 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순 임금이 말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입니까?" 승이 말했다. "몸이란 자연에서 빌려온 형체입니다."(하략)

원문: 舜問乎丞曰, 道可得而有乎. 曰, 汝身非汝有也. 汝何得有不道. 舜曰, 吾身非吾有也, 孰有之哉. 曰, 是天 地之委形也.(하략)



빌린 것은 언젠가는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도 그렇고 탄소도 그렇고, 우리의 몸과 생명을 만드는 물질은 행성 위에서 순환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로마 제국의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자는 우주 밖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곳에 머무를진대, 나아가 이곳에서 변화하고 분해되어 그 고유의 원소로 돌아간다. 그것은 우주의 원소요, 또한 당신의 원소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것들 또한 변화하거니와, 투덜투덜 불평하지는 않는다."(『명상록』8장 18절)



당신이 죽어 화장(火葬)된 후의 일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당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10의 27승 개(100억의 100억 배의 1천만 배) 이상의 원자는 그 즉시 대기 중에 흩어져 3년에서 4년만 지나도 전 세계로 거의 균등하게 퍼지게 됩니다. 지구 대기의 총량은 10의 21승 리터 남짓이기 때문에, 1리터당 공기에는 당신의 원자가 백만 개나 포함된다는 계산이 성립됩니다.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던 원자는 아프리카의 꽃이 되거나, 아일랜드의 감자가 되거나, 바닷물에 흡수되어 태평양의 물고기가 되기도 하지만, 나머지 원자는 바람에 실려 공중을 계속 떠다니게 됩니다. 만약 당신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화장된 지 4년이 지났다면, 당신이 지구상의 어디에 있더라도 공기를 한 번 마실 때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몸을 이루고 있던 원자를 수십 개에서 수백 개씩 흡입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 푸르른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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