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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프로페셔널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천하 모든 땅을 내 발로 밟으리라 : 여행가 정란



고전을 들추다 보면 시대를 앞서가는 특이한 사람 한둘쯤은 꼭 마주치게 된다. 18세기 후반,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 1725~1791)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창원부사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 손이다. 증조부는 큰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고조부와 조부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니 사대부가의 지체를 이어간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란은 과거를 포기하고 나이 서른부터 명산대천을 떠도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부러움을 사기보다는 비난을 당했다. 조선시대 선비에게 있어서 여행은 현실도피로 여겨졌고, 금기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정란은 자신의 여행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신이 막히면 속이 답답하고, 세상 구경하는 것이 협소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보지도 않고 세상에 대해 추측하지 말고 직접 보아야 안목이 넓어지는 데, 여행이 바로 그것을 이뤄준다." 그러자 정란의 여행이 못마땅했던 친구 신국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란이 유학의 길로 돌아오기를 권유했다. "주자학은 학문의 근본을 정(靜)에 두었다. 그러므로 대자연을 직접 발로 밟지 말고 방 안에 앉아서 침잠하여 성찰해도 그 비밀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천하를 여행하면서 온갖 변화를 목도하고 괴상한 구경거리를 하여 오히려 순수하지 못한 사악한 것에 물들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여행의 동(動)으로 인한 폐단이다."



신국빈은 정란의 여행 목적이 포부를 키우고 경험을 풍부하게 하여 창작에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라 보았다. 또한 그 모범을 사마천에 두었는데, 사마천의 《사기》는 천하를 두루 유람한 여행체험에서 나왔다. 과거의 문인들은 이러한 관념으로 산수 유람을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란은 그저 여행 자체를 목적으로 전국을 누빈 전문여행가였다. 이러한 점은 그가 자신의 산수유기를 담은 여러 화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란은 여행과정에서 많은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여행 체험을 후세에 전하곤 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것이 그가 만든 《불후첩(不朽帖)》이다. 불후첩에는 많은 산행기와 여행과정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 실려 있다.



정란은 금강산을 특히 사랑하여 화가들에게 금강산 여행담을 들려주고 그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행도(山行圖)>인데, 이 화첩에는 정란이 앉거나 선 모습, 길을 걷거나 청노새를 타고 홀로 가는 모습, 외로운 배에 홀로 기대고 있는 모습, 지팡이를 짚고 먼 데를 가리키는 모습, 갓을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있는 모습 등 갖가지 자세가 그려져 있다. 그 화첩을 보고 혜환(惠 ), 이용휴는 '많은 사람이 금강산을 다녀갔지만 그저 다녀만 갔을 뿐, 금강산과 감정을 나누지 못했는데, 정란은 금강산의 진면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1781년 정란은 백두산에 오르고, 금강산을 거쳐 돌아온 뒤 김홍도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김홍도에게 백두산 여행담을 재미있게 늘어놓았다. 이날, 두 사람과 더불어 강희언도 자리했는데, 세 사람은 거문고를 타고 술을 권하면서 여행이야기로 밤을 지샜다. 그로부터 4년 후, 정란은 경상도 안기역의 찰방(察訪, 요즘의 역장)으로 재직하던 김홍도를 또 찾았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봄 한라산을 등반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자 김홍도는 그의 여행 욕에 경탄하며 4년 전 모임을 추억하는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렇게 탄생한 그림이 김홍도의 대표작 <단원도(檀園圖)>이다. <단원도>의 상단에는 정란이 쓴 두 편의 시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은 제사(題辭)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림 속의 풍경은 4년 전의 세 사람을 담고 있다. 단원의 멋들어진 정원의 정자 마루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정란이 좌장의 위치를 점하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강희언은 부채를 부치고 있다.



정란은 여행에 빠지면서 세속적 성공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까지도 거의 버린 듯하다. 그래서 외아들 정기동이 정란을 대신하여 가정을 꾸려나갔는데 그는 18세에 요절하였다. 그때 그는 신혼이었다. 사대부에게 주어진 평범한 길을 가지 않고 전문적인 여행가로 나선 정란의 행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비웃거나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들에게 정란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랑벽에 빠진 자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란의 여행벽에 박수를 보낸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이용휴다. 이용휴는 "대장부가 태어났으면 굳세게 자립하여 품은 뜻을 실천해야 할 뿐, 이 칠척(七尺)의 몸을 과거시험 답안지나 금전출납부 속에 매몰시켜서야 되겠는가!"라며 정란의 삶을 찬양하고, 수백 년 뒤에는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이백 년 전,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다.



승부의 외나무다리를 걸으며 오른 반상의 제왕 : 바둑 기사 정운창



전설이 된 조선의 국수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바둑 애호가와 쟁쟁한 고수가 많다. 이러한 바둑을 향한 열기와 기사(棋士)의 높은 기량은 조선시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조선사회는 바둑을 몹시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저 여가에 즐기는 여기(餘技) 정도로 간주했다. 그렇다 보니 바둑을 비롯한 기예가 지닌 지위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풍속이 바뀌어 조선 후기에는 바둑과 국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상승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나 받을 수 있는 전기(傳記)를 국수의 경우에도 써주는 데서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다. 이서구(李書九)의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속에 실린 <기객소전( 客小傳)>과 이옥(李玉)이 지은 <정운창전(鄭運昌傳)> 두 편의 전기는 한 시대를 횡행했던 정운창이라는 유명 기사의 인생을 전해준다.



정운창은 전라도 보성 출신으로, 구체적인 신분을 알 수는 없지만 양반은 아니었다. 그는 사촌 형으로부터 바둑을 배웠는데, 5, 6년 동안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10년 동안 실력을 연마하다 보니 시골에선 더 이상 상대할 자가 없었다. 그래서 국수의 명성을 누리는 자들과 대국할 것을 결심하고 한양으로 갔다. 당시 한양에서는 김종귀, 양익분, 변응평 등의 전문적인 기사들이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전문기사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훈련대장 이장오와 현령 정박 등의 사대부 기사도 있었다. 정운창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라 해도 처음부터 이런 고수들과 상대할 순 없었다.

고수들과 겨루어 볼 기회만 찾고 있던 정운창은, 정박이 남산에서 바둑 두기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무리 속에서 구경하던 운창은 정박이 실수를 하자 훈수를 두었다. 그러자 정박이 운창을 바라보며 '바둑을 잘 두느냐'고 물었다. 운창은 '일찍부터 바둑 둘 줄 알아 밥을 먹는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정박은 운창의 용모가 몹시 촌스러운 것을 보고 가장 하등의 기사를 나오라 하여 대국하게 했다. 십여 착(着)을 두자 정박은 "네 적수가 아니다" 하고, 그 다음으로 센 사람에게 두게 했다. 겨우 반국(半局)을 두자 또 '네 적수가 아니다' 하면서 그 다음으로 잘 두는 사람을 두게 했다. 하지만 마지막 상대도 '적수가 아니다' 하면서 정박은 분연히 바둑판을 당겨서 자기가 직접 두었다. 그는 세 판을 두어 내리 세 판을 졌다. 이리하여 운창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서울 장안에 퍼졌다.



정운창이 서울 기단을 평정한 기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실상부한 최고라고 하기엔 아직 일렀다. 당시에는 김종귀란 국수가 최고로 공인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운창은 그와 대국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김종귀는 그때 평양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귀는 평양감사로 부임한 어떤 고관의 휘하에 있었다. 그 시대의 권력자들은 각 분야의 고수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의 후원자가 되고자 하였다. 정운창은 그런 김종귀와 반드시 자웅을 겨루려고 별렀다. 소문을 들은 김종귀는 서울로 돌아올 날짜를 일부러 늦추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제왕의 자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대결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정운창은 걸어서 평양까지 갔다. 그리고 감영의 포정문(布政門)에 나가 김종귀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을 넣었다. 그러나 감영의 아전은 이 시골뜨기를 문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때 사연을 듣게 된 감사가 정운창을 불러들여 재미있는 일을 꾸몄다.

감사는 운창에게 "김종귀가 지금 여기에 없으나, 그와 상하를 다툴 자가 있으니 한판 두어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정운창이 이를 받아들이자 감사는 김종귀를 그 자리로 불러, "이자가 김종귀와 더불어 기예를 다투고 싶어 하지만 지금 그가 없으니 자네가 그를 대신 하게나" 하면서 대국하게 했다. 물론 이 대결에서 정운창이 이겼다. 그러자 조선 최고의 국수를 두었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감사는 분통이 나서 성을 냈다. 하지만 곧 정운창에게 백금 20냥을 상금으로 내리고, 함께 바둑을 둔 기사가 김종귀란 사실을 밝혔다.



바둑의 길, 프로의 길

김종귀를 물리치고 난 뒤로 정운창은 김종귀와 더불어 평양감사의 식객으로 머물렀다. 그러다가 시일이 흘러 평양감사가 해임되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여러 기사들과 어울렸다. 바둑이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이기고 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다른 국수들이 정운창을 이기긴 힘들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정운창은 바둑을 둘 때 실력을 그대로 발휘하기를 꺼려했다. 동료 기사들과 어울려 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한 사람의 독주는 다른 프로의 무덤이었다. 이러한 당시 바둑계의 상황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일화가 이옥이 쓴 <정운창전>에 나온다.



「바둑을 몹시 좋아한 정승 아무개가 있었다. 그는 운창을 불러 김종귀, 양익빈 등의 전문 바둑기사들과 날마다 바둑 내기를 하게 했다. 그런데 운창이 그다지 높은 수준의 바둑을 두지 않자, 이를 의심한 정승은 남원산 상화지(霜華紙) 200번(番)을 상금으로 걸고, "힘을 기울여 열 번을 이기면 이것을 주고, 패한 운창의 상대인 종귀는 회초리를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운창이 만전을 기하자, 종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해내지를 못했다. 세 판에 이르렀을 때 종귀는 측간에 간다면서 눈을 꿈적여 운창을 불러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들어와 다시 바둑을 두었는데 운창이 때때로 실수를 하였으니 종귀의 애걸 때문이었다.」



정운창의 전기는 이미 18세기 기단(基壇)부터 프로기사의 초기적 형태가 존재했고, 그들의 활동이 상상외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시사한다. 18, 19세기에 중인이나 평민 계층에서 국수가 다수 출현한 것은 국수의 출신이 변화하는, 이른바 바둑을 두어 먹고사는 전문기사 집단의 출현을 의미한다. 18세기 중·후반 이후 경쟁을 통하여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패트런(patron)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으며 살아가는 전문기사들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바둑의 명인이 있으면 권세가들은 그를 초빙해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자랑을 했는데, 이는 오늘날 대중적 스타를 소개하는 분위기다. 여하튼 조선 후기의 기사들은 백제로부터 조선시대로,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장구한 국수의 계보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프로들이었다. 또한 오늘날 바둑 고수들을 있게 한 선배들이었다.



내 붓끝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태어난다 : 화가 최북



술주정뱅이, 환쟁이, 미친놈

조선 후기에 인간의 개성과 자의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화단이다. 그림 자체가 전문적 수련과 집중이 필요한 예술일뿐더러, 화가들이 특히 민감한 감각과 자유정신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를 손꼽는다. 모두가 독특한 개성을 지닌 화가들이다. 이중 최북은 흥미로운 인생을 살았던 화가로도 유명하다. 최북(崔北, 1712~1786)은 경주 최씨로, 호조(戶曹)에 근무하는 계사(計士)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양반 사대부가 아닌 중인(中人)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그의 파격적인 기행(奇行)은 그의 그림실력보다도 더 인구에 회자되었는데, 그의 기이한 인생은 호칭부터 드러났다.

18세기 이후 자의식 강한 지식인들은 자호(字號)를 아주 독특하게 만들어 쓰는 행태를 보였는데, 최북의 호칭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최북의 초명(初名)은 본래 '최식(崔植)'이었으나 이름을 '북(北)'이라 개명하고, 자호를 칠칠(七七)과 호생관(毫生館)이라 하였다. 북(北)의 좌우 획을 나누면 칠칠(七七)이 된다. 이른바 파자(破字)하여 자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칠칠이란 자(字)는 '칠칠맞다'는 뜻을 바로 연상시킨다. 이는 당시도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꺼렸다는 사실을 남공철의 <최칠칠전>에서 엿볼 수 있다. 현대 학자들은 '칠칠'의 명명이 미천한 신분의 못난 놈임을 반항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리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칠칠이란 호는 단순한 파자는 결코 아니었다.



칠칠(七七)은 당나라 시대에 구전되던 은천상(殷天祥)이라는 신선(神仙)의 호다. 은천상에 대한 일화를 보면 그는 스스로를 칠칠(七七)이라 하고 다녔는데, 날마다 술에 취해 "경각 사이에 술을 빚고, 제철 아닌 꽃을 피우지"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가을에도 진달래꽃을 피웠다고 한다. 최북은 은칠칠의 호를 빌려 중의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칠칠이란 이름에서 현실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꽃을 피우는 신비한 능력을 연상했던 것이다.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간이라는 암시로 읽을 수 있는 명명이다. 이러한 최북의 생각은 그의 그림이 현실의 충실한 모사보다 사의(寫意)에 기울고, 주제 또한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연에 접근하는 것과 연결된다.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도 최북의 의중을 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호생관은 명대의 저명한 화가인 정운붕의 호(號)다. 정운붕은 인물화, 불화, 화훼를 잘 그렸는데, 그는 작은 붓의 터치에도 미목(眉目)의 의태(意態)가 모두 드러날 정도로 가벼운 필치의 그림을 잘 그렸다. 정운붕이 그린 불화를 보고 찬탄한 동기창은 '보살이 붓끝에서 태어난다' 하여 호생관(毫生館)이란 도장을 새겨 선물하였는데, 정운붕은 이 도장을 득의작에만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최북이 '화가의 붓끝에서 위대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호생(毫生)이란 호를 사용한 건 자긍심의 소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호생관을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겼으니, 최북은 자긍심과 오만심을 굳게 가지고서도 겉으로는 비하하는 기교를 부렸던 것이다.



광기와 기행

상식을 벗어난 작명처럼 최북은 용모와 성품부터 평범함과 상식을 초월했다. 그는 키가 작고 한 눈이 멀어 늘 외알 안경을 쓰고 다녔는데, 놀랍게도 스스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조희룡이 지은 전기에 보면 어떤 귀인 하나가 최북에게 그림 한 점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최북을 협박하려 했다. 그러자 최북은 화가 나서 "내 눈이 나를 저버린 게야!" 하더니 바로 제 눈을 송곳으로 찔러버렸다. 제 손으로 눈을 찌른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최북의 성미는 칼날 같고 불꽃같았다. 한 번은 서평군(西平君)과 더불어 내기바둑을 두었는데 칠칠이 승기를 잡은 순간 서평군이 한 수만 물리자고 청했다. 그러자 칠칠은 갑자기 바둑돌을 흩어버리고는, "바둑이란 근본이 오락인데 무르기만 한다면 한 해 내내 두어도 마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다시는 서평군과 바둑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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