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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예언 문화사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백승종 지음

푸른역사 / 2006년 12월 / 386쪽 / 16,500원

1장 『정감록』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서




서명과 저자

한국 역사상 등장했던 다양한 정치적 예언서들은 정치·사회 및 문화적인 영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적 예언서란 왕조 또는 국가의 흥망성쇠에 관한 예언을 문자로 표기한 것을 말하는데, 일례로 11~14세기 고려의 집권층은 정치적 예언에 따라 수도를 개성에서 평양 또는 남경(서울)으로 이전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다. 현존하는 사료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정치적 예언서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늦어도 7세기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이전에 예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기록상으로는 『고려비기(高麗秘技)』(여기서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킴)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정치적 예언서다. 그 뒤 통일신라와 고려 및 조선 시대(17세기)까지 최소한 21종의 정치적 예언서가 등장한 것으로 확인된다.



기록에서 확인된 21종의 예언서 가운데 서명이 밝혀져 있는 것은 『고려비기』와 『삼한회토기』 등 12종이며, 나머지는 서명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전자의 경우, 서명의 앞부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인명이나 지명 또는 국명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데, 지명이나 국명보다도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인명이다. 그중에서도 도선(道詵, 827~898)이 5회로 가장 많고, 신지(神誌)와 옥룡(玉龍)이 각 1회씩 등장한다. 도선이 말년에 옥룡사의 주지를 역임하였던 것으로 보아, 위에 언급된 옥룡이란 명칭은 도선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도선의 저서로 간주된 예언서는 모두 6종이나 되는 셈인데, 이들 예언서가 과연 도선의 저술이었을까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사실 이들 예언서가 문헌상 처음으로 언급된 시기는 도선이 사망하고 나서 적어도 200년 또는 300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도선에 관한 전기 또한 그가 사망한 지 252년 뒤에 기술된 최유청의 비문과 각종 설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훈요십조』나 김관의의 『편년통록』 그리고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 뒷날 역사서에는 고려 태조의 가계가 도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도선은 그의 말년에 해당하는 892년부터 898년까지 후백제의 영토 안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아직 고려가 건국되기도 전이었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가계가 도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처럼 기록한 까닭은 도선의 제자 경보(慶甫) 등이 도선의 권위를 빌려 고려의 건국을 신성화하기 위함이었다고 짐작된다.



도선과 관련된 예언서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정치적 예언서들도 후대인들이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신지비사(神誌秘詞)>와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의 저자를 신지라 하였다. 신지는 단군 때의 신선이라고 하는데, 이는 근거가 없다. 따라서 신지는 가공의 인물로 알려진다. 논의를 정리해 보자면 한마디로 신화적 인물인 신지나 명성이 높았던 도선 등을 저자로 가정해 각종 예언서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예언서를 조작하였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인용자들의 신분과 직업을 검토해 본 결과, 그 부류가 다음과 같이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예언서가 등장한 7세기부터 10세기까지는 중국인의 비중이 컸다. 역사상 최초의 예언서인 『고려비기』를 인용한 사람은 당 고종의 명으로 고구려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가언충(賈言忠)이었다. 그런데 『고려비기』에는 고구려의 멸망이 예언되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중국 측이 그것을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왕건의 등극을 예언한『고경참』을 발견한 자도 중국인이다. 왕창근이라는 당나라 상인은 이 예언서를 시장에서 매입하였다며 궁예에게 바쳤다. 왕건의 가문이 중국과 교역이 활발하던 예성강의 호족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예언서의 매득자가 중국 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왕창근이 왕건 또는 그 추종자들과 더불어 『고경참』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크다.

11~14세기에는 천문 또는 음양 술수에 관한 직책을 담당한 관리들이 예언서를 인용하거나 왕에게 진상하였고, 왕들은 이들이 바친 예언서를 인용하여 교제(敎制)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까지는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인물들이 예언서를 인용하였다. 예를 들면 조선 태조의 측근이었던 첨서중추원사 하륜은 1394년 『도선기』를 비롯한 각종 예언서를 끌어다가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고, 태조 이성계의 능력을 널리 선전하는 데 공헌했다. 16세기 후반부터는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 특히 왕조를 전복시키고자 하였던 인사들이 발견자나 인용자로 등장하고 있다. 16세기 말의 정여립이나 17세기 전반의 유효립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예언이 새겨진 옥판 등을 지리산이나 계룡산 등지에서 발견하였다며 자신들이 꾀하려 했던 역모를 정당화했다.



정치적 예언서의 형태와 내용에 대한 분석

동일인물의 저작으로 알고 있는 예언서들을 분석해 보면, 그 형태나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형태를 검토해 보자면, 신지의 저술로 되어 있는 『신지비사』와 『구변진단지도』의 경우, 전자는 운문체로 되어 있는 데에 비해 후자는 산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즉 두 책자가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 『도선기』와 『옥룡기』는 모두 산문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단어나 구문 가운데 서로 중복되는 것이 없으므로, 서로 독립적인 텍스트로 간주된다. 결론적으로 역사상 한 사람의 저작물로 알려진 예언서들이 제3자에 의하여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결론은 각종 예언서의 내용이 비교 분석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검토의 대상이 되는 21종의 예언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대상에 따라서 ㉮ 인류역사 전반, ㉯ 한반도에 영구히 적용되는 것, ㉰ 특정 왕조에 관한 것으로 나뉘어진다. 그 가운데 ㉮와 ㉯에 해당하는 내용은 두세 종류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18종은 ㉰항에 속한다. 이들 예언서를 하나로 일관하는 사상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내용상 풍수설, 음양설, 방위설, 상서설, 운수설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풍수설은 대부분의 예언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중 도선의 저작으로 간주되는 『도선비기』와『옥룡기』는 풍수설에 기반하고 있으나, 그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먼저 1277년에 출현한 『도선비기』는 산을 양, 평지를 음으로 보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들의 복리가 보장된다고 하였다. 한편, 1357년 우필흥이 인용한 『옥룡기』는 '한반도의 운이 동서남북 사방의 위계질서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즉 『도선비기』는 음양의 조화를 위주로 삼고 있는데 비하여, 『옥룡기』는 사방의 위계를 핵심으로 본다. 두 예언서의 논거가 서로 다른 점으로 보아 동일인의 저술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도선의 저작으로 알려진 『도선송악명당기』와 『도선답산가』는 왕조의 운세를 회복시킬 수 있는 예언을 담고 있다. 그런데 『도선송악명당기』는 '서강(예성강)가에 이궁을 창건할 것'을 말하고 있고, 『도선답산가』는 아예 오늘날의 서울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두 예언서 역시 그 내용이 모순되는 점으로 보아 저작자가 동일인이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2장 18세기 후반 『정감록』의 출현과 보급



『정감록』의 출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739년(영조 15년) 9월 11일, 『정감록』에 관한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날의 실록에 의하면 1739년경,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등의 서북 지방에서 『정감록』이 유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멸망을 담고 있는 『정감록』이 하필 서북 지방에서 등장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조선왕조의 개창자인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이며 개국공신들 중에도 함경도와 평안도 등의 서북지방 출신의 무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관료들은 초창기부터 유교를 중시하여 이들 무인을 박대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467년 이시애(李施愛)와 서북 지방의 토착 세력이 왕조에 반기를 든 사건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그 지방 출신에 대한 중앙 정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상무적(尙武的) 기질이 강하였던 서북 지방 사람들은 과거 시험에서도 성적이 부진하여 중앙 정계로부터 소외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과거 합격자 수가 현저하게 늘어났지만 중앙의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16세기 말부터는 당쟁이 치열해져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중앙 정객들이 산간 오지가 많았던 평안도나 함경도로 유배되는 일이 많았다. 권력에서 축출되어 서북 변경으로 쫓겨 온 정객이라면 현실 정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왕조에 반발심을 가졌던 지역에, 불만을 가진 정객들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이라면 『정감록』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키는' 예언서가 서북 지방에서 출현한 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감록』의 정치적 성격과 저자

실록에 보면 『정감록』은 이른바 '정감의 참위(讖緯)한 글'이라고 써 있다. 즉 '정감이란 사람이 왕조의 정치적 운명에 관계되는 예언을 적은 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감은 누구였을까? 1739년의 실록에 보면 두 명의 정감이 거론되어 있다. 한 사람은 광해군 때 중앙의 관료로, 1616년(광해 8년) 5월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탄핵 사유는 부정부패였다. 또 다른 정감 역시 17세기 초반에 존재한 사람으로, 형조정랑을 지냈다는 것 외에 별 기록이 없다. 요컨대 두 사람 모두 금지된 예언서로 인해 비난받거나 처벌받은 일이 없는 점으로 보아, 『정감록』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1739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예언서의 제목이 『정감록』이라고 되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15세기까지 한국 사회에 출현하였던 예언서의 제목들은 대체로 <-비기(秘記)>, <-비사(秘詞)> 또는 <-유훈(遺訓)> 등이었다. 알려진 대로 '기'와 '사'는 각기 한문학의 한 분야이므로, 이러한 제목은 은연중에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훈'은 글자 그대로 도덕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이에 비하여 『정감록』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뜻의 '록'자로 마무리되고 있다. 요컨대, 『정감록』은 15세기까지의 전통적인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내용의 사실성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감록이 신빙성을 지닌 예언서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저자가 고도의 상징성을 가져야만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숙고의 결과가 저자의 이름을 거울을 뜻하는 '감(鑑)' 자로 귀결시킨 동인'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로부터 거울은 한국에서 과거, 현재 및 미래를 환히 비추는 마술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와 현대의 무당이 명도(明圖)라는 거울을 이용하여 집을 나간 사람이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을 찾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도 거울은 인간의 운명을 예측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예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예언하는 <고경참>은 거울 위에 새겨져 있었던 예언이었다. 요컨대 거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허구의 인물을 『정감록』의 저자로 내세운 이면에는, 거울이 가진 주술성을 빌어서 그 책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였던 숨은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정감이라는 이름의 상징성을 검토함에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 의문이 또 제기된다. 성이 정(鄭)이라고 되어 있는 점이다. 이백 오십 개가량이나 되는 한국의 성씨 가운데서 굳이 '정'씨를 가공의 예언자에게 준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반왕조적인 인물로 등장하였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던 정몽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대립에 관여하여 희생된 정도전, 당쟁에 휘말려 반역자로 일생을 마감한 16세기 후반의 정여립, 18세기 초의 수수께끼 인물 정희량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정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할 사람으로는 정씨 성이 가장 적합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감록』의 유포

실록에 보면, 1739년 조정에서는 『정감록』의 유행을 막기 위하여 '책을 모두 거두어 태워 없애자든가, 그 출처를 끝까지 조사하자'는 논의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강경한 대처 방안이 논의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감록』에는 조선왕조의 수명이 다되었다는 것과 같은 용납하기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정작 국왕 영조(재위 1724~1776)는 미봉적인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그는 『정감록』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내리는 대신, 함경도 경성이라는 먼 시골에 묻혀 지내던 유학자 이재형 부자를 관직에 등용시켰다.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를 등용시킴으로써 유학을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왕조에 대한 백성의 원망과 불만을 무마시키고자 한 생각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소외된 한두 명의 선비를 등용시킨다고 민심을 다독거릴 수는 없을 터였다. 즉위 초부터 허다한 정치적 변동을 겪었던 영조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영조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우선 민간에 퍼져 있는 책들을 모두 다 거두어들이기가 불가능하며, 책을 지어서 유통시킨 장본인을 잡아내기 위해 소란을 피우게 되면 긁어 부스럼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역시 유교적 이념의 철저한 실행, 즉 교화와 풍속의 안정을 통하여 인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조선의 통치자들은 유교적 이념이 한국 사회에 철저히 뿌리내리기만 한다면 그 따위 예언서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통치자들의 소망과는 달리 『정감록』에 관련된 각종 역모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교화를 통하여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일단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를 소지한 사람이 붙들리기만 하면 투옥 또는 귀양의 형벌을 내리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집권층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으로 인한 사건은 계속되었으며, 그 중심에 평민 지식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경제적 기반이 없이 글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들, 또는 혀를 놀려서 먹고사는 사람들로 천문과 점술에 능하였다.



조선후기에 평민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은 당시의 사회상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8~19세기에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초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당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에 따라서 양반에 의한 지식의 독점적 성격이 점차 무너지고, 중하급 지식인이 대거 배출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신분제도의 틀에 얽매여 있었기에 관료 체제 속에 흡수되지 못한 채 유랑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당연히 유랑 지식인들은 자력으로는 그들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 예컨대 정치 및 사회적 불만은 물론이고 생활고마저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평민 지식인들이 허구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예언에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았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3장 18~19세기 정치적 예언서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당대인들의 해석



『남사고비결』

1733년(영조 9년), 남원의 읍성에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괘서가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곧 이와 관련된 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취조 과정에 『남사고비결』이라는 예언서가 거론되었다. 당시 사건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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