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
이준구 지음 | 스타북스
임금이 행색도를 청렴의 표본 삼다 ― 양관(梁灌)임진강 파주 나룻가 주막에 며칠 전부터 행객을 살피고 있는 나그네 하나가 있었다. 행색이 초라한 이 나그네는 장사꾼처럼 꾸미고 있었지만, 성종의 어명을 받고 온 암행어사였다. 그는 '덕천군수 양관(梁灌)의 보따리를 불문곡직하고 검색하라'는 어명을 받고 있었다. 통상적인 법으로 보아서 사또를 길바닥에서 불심검문하는 일은 역적모의를 한 혐의가 아니라면 신하에게 행하는 예의가 아니었다. 암행어사는 어명인지라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장사치로 가장한 역졸 두엇을 미리 덕천까지 보내어 군수 양관이 말을 타고 올라오는 뒤를 살피게 했다.
사흘이나 막혔던 뱃길이 뚫리자 파주 나루는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이런 때는 으레 세력 있는 양반 나리들의 행차가 일반 선객들을 밀치고 먼저 배를 타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저녁때가 되어도 덕천군수 양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퇴임해 오는 길이라지만 덕천군수 양관이 백성들 틈에 끼어 맨 나중에 나룻배를 타고 올 리 없다고 판단한 암행어사는 다음날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그때 "가오! 평안도 갔던 먹장수가 이 배로 가오!"라고 외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암행어사가 미리 보냈던 역졸이 배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어둠 속에 배 한 척이 사람들을 싣고 건너오고 있었다. 암행어사는 곧 역졸과 사령들에게 명령했다. "군수를 비롯하여 그를 따라오는 종놈이나 내행(內行)이 있으면 그 짐짝까지 이 잡듯이 뒤져라!"
그러나 양관의 짐 보따리 속에는 단지 '소학(小學)과 '두시(杜時)' 등 책 몇 권에 가야금과 화살 몇 개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성종은 밝은 임금이었다. 양관이 바른 정사를 펴다가 앞뒤로 적을 사 모함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암행어사를 보내 파주 나루를 건너오는 양관의 짐 보따리를 수색케 한 것인데 과연 양관의 보따리 안에서는 돈 될 것이라고는 여우터럭으로 만든 방석 하나도 안 나왔던 것이다. 양관이 모함을 받게 된 것은 원리원칙대로 사리를 따져서 판결을 냈기 때문이다. 원래 원님은 산소(山訴) 덕분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있었다. 산소란 묏자리를 가지고 백성들 사이에 재판 질이 나는 것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금시발복(今時發福)도 묏자리에서 나오고 왕후재상도 명당 한 자리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시대였으므로, '산'을 둘러싼 묘지권 싸움은 치열하고 또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런데 산소는 항상 세력 강한 쪽이 이겼다. 원님에게 더 묵직한 청탁이나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수 양관은 신분이 귀하고 문벌이 좋은 쪽이 맡아 놓고 이기는 산소 판결을 뒤엎고 번복하였다. 이러니 지방 호족들은 압력을 넣거나 양관이가 아무개의 청탁을 받고 잘못 판결했다며 모략을 했다. 모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양까지 전해져 '청백리의 이름을 도적질하는 양관을 마땅히 엄한 법으로 다스리라'는 탄핵이 사헌부에서까지 올려졌다. 성종은 양관의 짐을 수색케 함으로써 그의 청렴성을 증명케 하고, 파주 나루에서 양관이 짐 수색을 당했던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명했다. 그리고 '청백리 양관의 행리' 그림을 용상 뒤에 걸어두고 새로 지방을 맡아 나가는 신하에게 그 뜻을 되새기게 했다.
뛰어난 수완으로 나랏일 돌보다 ― 이서(李曙)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으나, 두 달을 못 넘기고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맛보았다. 더욱이 바로 그전에 인조가 총애하던 완풍부원군 이서가 남한산성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인조는 이서의 부음을 듣고 통곡을 터뜨렸다. 이서는 본래 효령대군의 10대 손으로 선조 36년에 무과로 급제하여 진도군수 등을 역임했는데, 병자호란이 나기 이미 10년 전에 남한산성을 쌓아 국란에 대비할 것을 주청했다고 한다. 또한 스스로 남한산성 방어사가 되어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1년 동안 역사(役事)를 다 끝마치고 나니 아직 50이 되지 않았는데도 수염과 머리가 모두 허옇게 새어버렸다고 한다. 일국의 권세 있는 장수가 이처럼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나라 방어하는 일에 신명을 바치니 이런 신하를 잃은 임금이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서는 충신이었을 뿐 아니라 소문난 효자에다 지모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이서가 황해도 곡산군수로 나갔을 때였다. 관가 창고 안에 쌓여 있는 병기는 모두 숫자만 채워져 있지 하나도 쓸모가 없이 낡아 있었다. 이서는 곧 육방관속들을 불러 병기를 방치해 둔 채 고치지 않은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관속들은 '병기를 고칠 재정이 없고 그렇다고 지방 유지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을 수도 없으니 별수가 없다'고 아뢰었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이서는 아전을 불러 다음과 같은 방을 붙이게 했다. "날천산(捺川山)아래로 모여 이틀씩 일을 해주는 백성에게는 1년 동안 부역을 면해 주리라" 방이 나붙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군수는 먼저 백성들을 산으로 올려 보내 큰 나무를 잘라 내려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재목들을 황주, 봉산 등지로 내다 팔아 그곳에서 흔한 면포를 구입하여 이를 다른 지역에 팔도록 하였다. 이리하니 목재와 면포에서 많은 이문이 남게 되었다.
이서는 이익금의 일부를 백성들의 품삯으로 보상해 주고 또 남은 돈으로는 목수와 병기 만드는 공인, 대장장이들을 불러 모았다.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만들고, 화살을 만드는 공인은 화살을 만들게 하니 얼마 안 되어 활이 1천 개나 되고 화살촉이 1만 개가 넘었으며 조와 쌀을 사들인 것도 1천 섬이 넘었다. 이만한 지모를 지닌 이서라면 자기 집 살림살이도 크게 영위할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서는 평생을 가난한 살림살이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신하였기에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객사한 그의 시체를 본가에 모셔 들여오도록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당시에 성 밖에 나가서 죽은 사람의 시체는 성 안으로 들여오지 못하는 것이 국법이었다. 훗날 이서의 넋은 인조의 위패와 함께 인조묘정(仁祖廟廷)에 모셔져 죽은 뒤에도 군신의 의(義)를 나누었다.
죽은 조상은 손자의 일을 모른다 ― 김신국(金藎國)김신국은 선조 24년 스물네 살로 생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부터 인조반정,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의 전란에서 공을 세워 인조 24년(1646) 영중추부사에 오르게 되었다. 영중추부사는 실직사무는 없었으나, 정1품의 품계였으므로 영의정과 같은 자리였다. 그런데 김신국의 집안은 그 문지(門地)가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임금께 아뢰어 김신국의 가문에 벼슬을 추증(追贈)해줄 것을 청했다. 옛날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가 죽으면 품계나 관직을 추증하여 영예를 누리게 했으며, 신하가 공신이 되어도 등급에 따라 3대조까지 벼슬을 증직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신국은 조상의 추증을 완강히 거절하며 천하의 명언을 남겼다. "내 선조가 어찌 순치(順治)의 연월(年月)을 알리오." 순치(順治)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쓰게 된 청나라의 연호였으니, 김신국이 살고 있는 당대가 된다. 그러니까 "죽은 조상이 어찌 손자가 한 일을 알겠느냐" 하는 뜻이다. 즉 후손이 잘한 일을 가지고 그 조상의 묘소에까지 벼슬을 내린다면 세력을 쓰는 사람들이 잘못 남용할 것을 염려한 대쪽 같은 말이었다.
김신국은 대쪽 같은 성품이었지만 지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호조판서가 되었을 때였다. 그때는 정묘호란을 치르고 난 직후라 나라의 재정이 극히 어려운데도 일부 권신들은 사치를 하고 아전들은 세력을 쓰는 자의 뒷줄에 기대고 있었으니 나라의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한 번은 청나라에 보낼 은을 창고 안에서 꺼내 봉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호조 안에 있던 산원(算員) 하나가 어떤 대신에게 등을 기대고 번번이 은을 훔쳐내곤 했다. 그러자 호조판서 김신국은 직접 봉은(封銀)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그런데도 산원은 몰래 은덩이 하나를 훔쳐냈다. 김신국은 정황을 알고 있었지만 소란을 피우지 않고 그 산원에게 당부했다. "봉고하다가 남은 은을 모두 방 안에 넣고, 오늘 밤 네가 이 은덩이를 지켜라." 이튿날 다시 은을 헤아렸을 때는 은덩이가 모두 채워져 있었다. 김신국은 이처럼 지략이 있고 배짱도 있었지만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열매가 아니면 취하지 않아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얼룩진 비단치마에 포도그림으로 갚다 ― 홍수주(洪受疇)숙종 27년 봄. 도승지 홍수주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아침부터 손님들이 모여들고, 왕궁에서는 특별히 기생과 악공까지 보내었다. 그런데 악공들이 깽깽이를 타느라 두 줄 사이에 활을 넣고, 기생들이 '여민락'을 벌이는데 서로 엉덩이가 부딪칠 지경이었다. 홍수주의 집은 마루가 좁아 음식상을 늘어놓을 데가 없고, 이웃집과의 울타리를 임시로 트고 내왕하게 했지만 멍석 두 장을 까니 기생들이 궁둥이를 돌리고 춤을 출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집이 대대로 청백리라더니 정말 그러한가 보네'라며 손님들이 소곤거리는 사이 눈에 띄게 아름다운 도승지의 막내딸이 비단치마를 입고 나와 아버지한테 절을 올리는데 하객들이 그 우아한 자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홍수주가 부인에게 고마움을 치하했다. "가난한 살림에 이처럼 흡족한 잔치자리를 마련하여 주어서 정말 고맙소. 음식과 안주가 넉넉했고 비록 산채와 풋나물 접시지만 손님마다 다 달게 자셨소. 거기다가 딸아이가 오늘은 비단치마를 입고…, 그 아이한테 비단치마를 해주느라고 얼마나 애썼소?" 막내딸은 홍수주가 쉰이 다되어 본 딸이었다. 그런 막내딸에게 한 나라의 도승지이며 충청도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던 홍수주는 비단치마 한 감을 못 끊어 주었던 것이다. 부인은 도승지의 환갑잔치 마당에서만은 막내딸에게 비단치마를 한 번 입혀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웃집 규수의 비단치마 한 벌을 잠깐 빌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호사다마였다. 그만 막내딸의 실수로 비단치마에 간장 방울이 튕겨 심하게 얼룩이 지고 말았다.
며칠 동안 부인이 애를 끓이자 홍수주 영감도 눈치를 채게 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으로는 방도가 없었다. 당시 비단은 중국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치마 한 감에 쌀이 몇 섬씩 갈 정도로 비쌌다. 홍수주는 조부 때부터 내리 3대가 승지벼슬에 관찰사를 역임했는데 모두 청빈하게 가풍을 세우니 재산이 축적될 리 없었다. 부인의 심기가 우울한 것을 눈치 챈 홍수주는 붓을 들고 매화를 치기 시작했다. 홍수주는 당대 알아주는 명필이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그는 숙종 조에 폐비 민씨의 언로를 바로 열려다가 10년 동안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산속에 묻혀 글씨를 쓰고 문인화를 그렸던 솜씨가 늘었던 것이다.
매화를 치던 홍수주가 붓을 놓고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우스갯소리 한 번 해보겠소. 경흥에서 귀양살이 할 때였소. 이웃집에 농부 내외간이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내 시중을 들고 있었소. 하루는 눈이 와서 몹시 추운 날인데, 그 늙은 종이 한나절이 되도록 얼굴도 안 비치는 거요. 그래서 아무개야, 아직 안 일어났느냐? 하고 불렀지. 그랬더니 방 안에서 '네, 네' 하고 대답은 하는데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소. 그래 나중에는 큰 소리로 부르며 야단을 치니 그 종이 방문을 열고 기어 나오는데, 옷을 몽땅 벗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소. 나는 양반 앞에서 이게 무슨 망측한 꼴이냐며 어서 옷을 입고 나오라고 호통을 쳤소. 그런데도 그 종이 그냥 서 있는 것이오. 나중에 알고 보니 입고 있던 옷을 빨아 부뚜막에다 말리는 중이었던 거요. 그때 나는 옷이 한 벌뿐인 백성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심히 부끄러웠소. 그러니 딸아이에게 바단 치마 한 감을 못 끊어 주었다고 해서 부인은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홍수주는 부인을 다독거리고 나서 아직 되돌려 주지 못한 비단치마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부인이 치마를 가져오자 홍수주는 방바닥 위에 비단치마를 펼쳐 놓고 먹을 진하게 갈았다. 그리고 먹물에 아교를 푼 뒤, 붓에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큼지막한 포도 넝쿨 하나를 치마에 그려 넣었다. 얼룩방울 위에는 주렁주렁 포도송이를, 넓적하게 간장이 엎질러진 자국에는 손바닥만 한 잎사귀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중국으로 가는 사신행차에 그 치마를 딸려 보냈다. 역관에게 치마를 중국에 가져가서 팔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호족들은 그림을 아주 귀하게 여겼으며, 치마에다 그린 초충도는 더욱 부녀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수개월 후, 중국에서 돌아온 역관이 홍수주를 찾았다. 포도그림 치마를 5백 금을 받고 팔았으며, 그 돈으로 비단치마 열 벌을 사가지고 귀국했다는 것이었다. 심부름한 역관 두 사람에게 두벌을 주고, 빌린 치마 대신 한 벌을 갚고 나니 7벌이 남았다. 그림솜씨 하나로 난처한 일을 해결하고도 막내딸에게 비단치마가 여러 벌 생긴 것이다. 그러자 막내딸은 치마에다 그림을 그려 또 팔면 우리 집도 부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응석을 부렸다. 그러나 홍수주는 더 이상 치마에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홍수주가 파란만장한 당쟁시대에서 자신과 집안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욕심을 자제하고 삼가는 청백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신전 반환하고 백성에게 돌려주다 ― 이해(李瀣)선조에게는 애초 의인왕후 박씨가 왕비로 책봉되어 있었지만 소생을 두지 못하고 눈을 감자 인목왕후 김씨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인목왕후(뒷날의 인목대비)가 다음해 왕비로 책봉되니 법통상으로 영창대군이 선조의 적통을 이을 유일한 왕자였다. 그렇지만 선조에게는 다른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낳은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가 이미 장성해 있었다. 큰아들 임해군은 성정이 난폭하여 세자책봉을 못 받고 둘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뒷날 광해를 폐하고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고 생각했다. 이를 몇몇 중신들과 은밀히 상의했는데 눈치 빠른 대북파가 상소전을 전개하였다. 선조는 이에 무근한 소리라며 정인홍 등을 귀양 보내도록 하였지만 선조 임금의 병세가 심해지자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차일피일 귀양길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과 그의 외척들도 죽였다. 그리고 인목대비조차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던 서궁에다 유폐시켜 버렸다. 이 과정에 많은 조정 대신들이 참수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이조참판이었던 이효원도 거제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효원은 인조반정까지 곡 13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큰아들까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이해 혼자서 살림을 해나가자니 집 한 칸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해는 벼슬살이의 등용문인 과거도 포기해야 했다. 아무리 과거에 응시한다고 해도 대북파들이 용납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점점 난폭해지고 인목대비까지 서궁에 유폐시키자 이항복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서인들이 항거에 나섰다. 그리고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을 주도했던 이귀, 김유들이 정사공신이 되고 13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아버지 이효원도 귀양이 풀려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해는 반정에 처음부터 참여하면서 2등 공신이 되었는데, 이듬해 개성부 유수로 나가게 되었으며 공신전(功臣田)을 받게 되었다. 당시 1등 공신이 되면 전지 2백 결이 내려졌고, 2등 공신에게는 1백 50결이 하사되었는데, 1결(結)이 1만1천5평이니까, 1백50결이면 1백65만 9천7백50평이므로 8천2백99마지기가 되었다. 그동안 이해를 돌봐왔던 늙은 종들은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렸으나 이해는 '공신전에는 적몰재산이 많다'라며 공신전을 전부 사양했다. 말하자면 정인홍, 이이첨 등이 인조반정과 함께 참형을 당했으니, 그들이 가졌던 재산과 노비가 국가에 적몰된 것인데, 그런 부정축재 환수 속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