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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틱낫한 지음 | 명진출판
틱낫한 지음 / 김은희 옮김

명진출판 / 2006년 4월 / 182쪽 / 9,000원



저자의 말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도뿐만 아니라 카톨릭, 또는 기독교 신자를 만났을 때도 '기도하십시오'라고 얘기한다. 물론 그 말은 '당신이 믿는 하나님, 예수님께 기도하십시오'라는 뜻이다. 10여 년 전 어느 날이었다. 나는 플럼빌리지에서 수행하는 비구니 제자 두 사람을 프랑스 다른 지역에 있는 카톨릭 수녀원에 방문하게 했다. 진정한 수행자에게 다른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과 공부는 매우 중요한 수련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다녀온 그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태이, 수녀님들은 모든 일을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모든 것을 의탁했어요. 저희에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그에 비해 우리 불교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니까요. 우리는 참선을 해야 하고, 또 호흡을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 불교도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은 그것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도 어딘가에 모두 의탁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1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말은 아직도 내게 생생하다. 나는 이 책에서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대답을 담으려고 한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느냐', '기도가 효과가 있긴 있느냐'에 대한 해답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도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깨졌으면 한다. 그래서 단지 불교도만을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다. 나는 종교나 종파에 상관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도'라는 행위에 관심을 갖길 바라고 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기도하길 바란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우주 안의 모든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하길 바란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과거나 현재나 종교가 있는 사람은 모두 기도를 해왔다.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기도를 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기도는 침묵 안에서 이뤄지기도 하고

염송이나 찬송가 같은 노래, 혹은 명상수행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무언가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는 점이다.

그 뜻은 어떤 위대한 힘에 연결되려는 열망과

행복에 대한 깊은 소망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힘이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위대한 존재이거나

우리 내면 깊이 존재하는 영적인 힘이다.

우리 밖에 있는 존재라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 전체나 조상,

또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존재라면 기도를 하는 '나'와

분리되지 않은 내면의 신성이 된다.

이 위대한 힘에 우리가 사랑과 자비를 보내는 순간,

그것은 진실한 기도가 된다.



'기도해야 할까?'라는 의문



어떤 신앙인들은 '신이 의도했다면

그것은 이미 이뤄진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 여성은 몇 살에 암으로 죽을 예정이다.

저 청년은 몇 살에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될 예정이다.

그 남성은 몇 살에 사업에 실패하여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신의 결정이라고 치자.

건강에 대해, 혹은 사업이 번창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정해진 운명은 바뀔 수 있을까?

결국, 기도는 시간낭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의지'는

불교의 '인과응보'에 해당한다.

어떤 이가 몇 년 전에 부주의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지금 뼈에 이상이 생겼다면, 이는 '카르마'에 따른 결과다.

카르마는 우리가 과거에 했던 어떤 행위가 가져온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카르마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여기서 불교도에게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카르마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효과가 있을까?

우리의 카르마가 이미 그렇다면,

기도로 그 결과를 바꿀 수 있을까?



선순환의 도구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말한다.

이는 '만물이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 아프던 몸이 내일 나을 수 있다.

어제까지는 실패를 거듭하던 일이

모레부터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거꾸로, 오늘은 행복하지만 내일은 불행해질 수도 있다.

이 예측하기 어려운 모든 현상이

실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즉, 과거의 어떤 행위가 오늘의 이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좋지 못한 행위를 올바르게 잡아 주고

미래에 더욱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은 오늘 우리가 하는 좋은 행위에 있다.

좋은 생각은 좋은 행동을 이끌고, 좋은 변화를 불러온다.

기도는 그 과정에서 좋은 변화를 이끌어주는 선순환의 도구다.



기도로 새로운 에너지를 내면,

그 에너지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 장을 열어 준다.

그래서 과거의 결과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시켜 주고,

미래에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 안의 위대한 힘



우리는 신과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신의 의지가 우리 자신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하고자 한다면

신도 이를 막지 않으실 것이다.

창조주와 창조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창조주는 창조하는 존재이고

창조물은 그 힘에 의해 창조된 대상이다.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를 '주체'와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를 한 주체는 신이며

창조된 대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다.

주체와 대상은 왼쪽과 오른쪽, 밤과 낮,

든든함과 배고픔과도 같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



'반사의 법칙'과 같이

'보는 자'와 '보여진 자' 사이에는 상관성이 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가 변하면

보이는 대상 역시 변화한다.

신의 의지라고 하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의 의지와 이런 연관성이 있다.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변화하면

신의 의지 역시 변화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한 과거 카르마의 결과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기도에 필요한 에너지



전화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화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화선에는 전기가 들어와 있어야 한다.

기도도 같은 원리로 실행된다.

기도를 할 때 믿음과 자비, 사랑의 에너지는 전력 구실을 한다.

그러한 전력 없이 기도를 한다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전화기에 대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한 힘



우리가 몸과 마음을 위해 좌선수행을 하면

사랑의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가슴을 열고

가족, 연인, 배우자, 선후배, 직장 동료에게로 전달된다.

그들에게서 그들의 친구에게로,

전달된 에너지는 재생성을 거듭하며 무한대로 확산된다.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로 기도할 때

기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달된다.

그 거리가 프랑스의 플럼빌리지와 베트남의 하노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때의 기도는 시공을 초월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종종 우리는 자신의 온마음을 다해 기도했다고,

온몸의 세포가 진동하도록 기도했다고,

몸 안의 피 한 방울까지 짜내 기도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일까?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녀가 숨을 거두려 한다면,

이는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일까?



나는 그녀를 진실로 사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바라보면,

때로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한 것이

사실은 그들을 위한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을까봐,

그래서 홀로 남겨질까봐 두려운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었다.

두려움과 외로움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홀로 남겨지기가 두려워서

우리 곁의 사랑하는 이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단, 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챙김과 집중, 통찰의 에너지



우리는 기도드리는 대상을 떠올려 전화선을 연결한다.

이제 그 전선에 전류를 보내야만 한다.

기도에서 전류는 마음챙김과 집중, 통찰의 힘이다.

마음챙김은 의식을 현재에 집중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과거를 생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몸은 현재에 있어도 마음은 현재에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이 고요해져서

온전히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기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이러한 마음챙김이 부족하면

믿음이 아무리 커도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으면,

누가 이 자리에서 기도를 하겠는가?



마음챙김을 하면 집중력이 생기고,

이는 우리를 '프라즈나 prajna'의 상태로 이끈다.

우리가 두 손바닥을 마주한 채

마음 안에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계송의 단어들에 대해

명상하면 강한 집중력이 생긴다.

이때 우리와 신성 사이를 이어 주는

프라즈나가 형성된다.

산스크리트어인 프라즈나는 반야,

즉 '통찰과 초월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이는 마음이 고요하고 맑아 자신을 포함한 만물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상태를 말한다.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이러한 통찰로부터

기도가 나올 때, 그 기도에는 자비와 연민이 실리게 된다.

자기 몸의 안위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도 진정으로 필요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프라즈나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기도는 지혜와 자비를 담고 있지 않아,

단지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바라는 미신적인 신앙이 되기 쉽다.



사랑의 에너지 보내기



어느 날 밤, 나는 좌선 수행을 하며 한 자매를 떠올렸다.

그녀는 베트남 하노이에 있고, 몸이 많이 아팠다.

나는 그녀에게 자비의 에너지를 보냈다.

온 정성을 다해, 집중하여,

이렇게 에너지를 보내는 것도 기도의 한 방법이다.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을 위해 명상하고 수행하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기쁨을

이 세계에 창조할 수 있다.



다른 이에게 사랑과 자비를 보낼 때

그들이 그 사실을 아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슴에 사랑이 존재하며,

그것을 세상으로 내보낸다는 사실이다.

사랑을 외부로 내보낼 때 우리 내면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 자매가 플럼빌리지에 왔을 때,

이곳 스님들은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보살폈다.

그때 쏟아부은 사랑의 에너지가

아직도 그녀와 우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는 원할 때 언제라도 자기 안으로 돌아와

그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더 많은 에너지가 샘솟을 것이다.



한 차원 더 깊게



수행자의 기도는 일상적인 기도보다 깊은 차원에서 이뤄진다.

깊은 차원에서 기도하다 보면 궁극의 차원인

니르바나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신을 만나는 것과 같다.

이때 우리는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우리는 이미 평화와 기쁨의 땅에 도달했기에

더 이상 고통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여기서 5년을 더 살든, 10년을 더 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완전히 변화한다.



영적인 수행자의 기도는 매우 심오하다.

그들에게는 건강, 성공,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수행자에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이 물질세계의 환영을 어떻게 벗어나는가'다.

궁극적인 차원을 대면하여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의 현상들 사이의 연기성을 통찰하기 위해서 말이다.



신은 지금 여기 있다



어느 겨울날, 조용히 집중하며 걷던 성 프란체스코는

아몬드 나무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다오, 아몬드 나무여."

그러자 살을 에는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차원, 일상적인 진실 안에서는

나무가 꽃을 피울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아몬드 나무는 피고 짐 없이,

수만 년을 꽃피워 왔다.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붓다는 이미 태어나고 죽었으며,

우리는 그와 다른 존재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이미 붓다이다.

또한, 하나의 아몬드 나무와 깊이 만나는 것은

신을 만나는 또 다른 길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 자신의 피조물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무, 하나의 꽃, 하나의 돌멩이와 한순간 깊이 감응하면

그 안에서 우리는 놀라운 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신을 꼭 추상적인 개념으로 찾을 필요는 없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을 만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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