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
오긍 지음 | 현암사
태종 이세민은 누구인가?당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은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가 깊고, 무술과 병법에 뛰어났으며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년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남북으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이 흉흉해져 갔다. 이 혼란을 틈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당시 이세민은 태원(太原) 방면의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군웅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 안팎에 불과했다.
이렇게 당나라가 건국되었고(618년),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이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연은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이것이 형제간의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이 되었다. 건성은 이세민의 공적과 덕망이 나날이 융성해지는 것에 강한 질투심을 느껴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그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게 된다. 이세민은 이 사실을 알고 건성과 원길이 조회에 들어가는 것을 지키고 있다가 현무문에서 죽였다. 그 후 626년에 아버지로부터 양위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군주의 도리고대 역사책을 들춰보면, 군주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는 대부분 덕행이 빛나고 큰 공적을 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세력이 곤두박질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까닭은 힘의 논리만 내세우고 뒤에 올 결과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인품을 닦으며 정사를 돌보는 일에 힘쓰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고 향락을 추구하면 망국의 위험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정관(貞觀:당태종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649년) 2년, 태종이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현명한 군주와 어리석은 군주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오?" 그러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위징(魏徵:당나라 초기의 저명한 정치가)이 대답했다. "군주가 영명한 까닭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널리 듣기 때문이고, 군주가 어리석은 까닭은 편협되게 어떤 한 부분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군주된 자는 여러 다른 의견을 듣고 아랫사람들의 합리적인 건의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제아무리 권세가 큰 대신이라도 아랫사람들의 소리를 가리거나 군주를 어리석게 할 수 없으며, 백성들의 실정이 조정에 그대로 반영될 수 있습니다."
정관 10년, 태종이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제왕이 나라를 세우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렵소?" 방현령(房玄齡:당나라 초기의 대신으로 문장에 능함)이 대답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지면 영웅들은 다투어 일어나지만, 싸워 이겨야만 제압할 수 있으니 창업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자 위징이 대답했다. "제왕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뒤의 일입니다. 혼란을 제거하고 나면 천하의 인심이 제왕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일단 천하를 얻은 뒤에는 마음이 교만해져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소홀해지니 민심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미 세운 업적을 지키는 일이 더욱 어렵습니다."
정치의 근본정치의 근본은 군주나 신하 한 개인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력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대다수 신하들은 군주의 위세에 눌려 솔직한 의견을 펼치지 못하고, 잘못된 명령을 그대로 시행하여 수많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안겨 주기도 한다. 이것은 신하들이 올바른 간언을 할 수 없도록 한 군주에게 첫 번째 책임이 있고, 다음으로는 책무를 다하기 보다는 윗사람에게 영합하려고 한 신하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정관 7년, 태종은 신하들과 '고대로부터 나라를 다스린 득실'에 관해 토론을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큰 혼란이 끝난 뒤라 서둘러 나라를 잘 다스릴 수는 없소." 그러자 위징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인간은 위험하고 어려워지면 자기의 생사를 걱정하게 됩니다. 자기의 생사를 걱정하면 천하가 태평스럽게 다스려지기를 바랍니다. 백성이 이런 마음을 가졌을 때 쉽게 교화할 수 있습니다. 영명한 군주는 교화를 베풀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하고, 백성들이 신속하게 호응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서두르지 않아도 빠른 시간 안에 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큰 혼란 이후에 쉽게 교화되는 것은 굶주린 사람이 쉽게 음식에 만족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 서리와 가뭄의 재앙이 있어 곡식 값이 폭등하고, 돌궐이 침략하여 각 지방이 매우 불안정했다. 태종은 오로지 백성들을 걱정하며 온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리고,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며 은덕을 베풀었다. 백성들은 기근으로 인해 동서로 먹을 것을 찾아다녔지만 황제를 조금도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이는 태종이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고, 학문을 논하는 것을 좋아하여 덕망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과거의 악습을 개혁하고 제도를 부흥시켰다. 그는 항상 한 가지 일을 시행하면서 유사한 여러 종류의 일까지 함께 하였다.
당시 태종은 나라의 대사를 결단하는 능력과 제왕으로서의 기품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탐관오리를 매우 엄하게 다스렸고, 법률을 악용하여 재물을 받는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왕공(王公)이나 후비, 공주 등 세력 있는 가문이나 왕족들을 통제하여 그들이 국법을 두려워 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국법이 두려워 감히 백성들을 탄압하지 못했다. 당 태종에게는 방현령, 두여회, 위징, 왕규 등 재능과 인품을 갖춘 신하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황제에게 비난에 가까운 간언도 서슴지 않음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신하들이 있었기에 '정관지치(貞觀之治)'가 가능했다.
간언을 구함태종은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먹줄이 있으면 굽은 나무가 바르게 되고 기술이 정교한 장인이 있으면 보옥을 얻을 수 있듯이, 시세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간언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충성스런 간언을 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군주들은 신임하지 않는 자가 간언하면 비방한다고 생각하고, 신임하는 사람이 간언하지 않으면 봉록만을 탐하는 자라고 불신하게 된다. 이로 인해 유약한 사람은 충정을 품고도 말을 하지 못하고,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신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관중이 제환공의 허리띠를 화살로 쏘아 맞추었어도 의심받지 않은 것처럼 군주가 먼저 신하를 믿고 간언을 구할 준비가 되어야만 한다.
정관 2년, 태종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현명한 군주는 항상 자기에게 단점이 있음을 생각하여 나날이 발전하지만, 어리석은 군주는 자기의 단점을 옹호하여 영원히 어리석어지게 되오. 수양제는 자기의 재능을 과 시하고 단점은 감싸 신하들의 간언을 물리쳤소. 수양제는 충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지적해 주는 말을 듣지 않아 나라 가득 재앙을 초래하고 결국 자신도 죽 게 된 것이오. 만일 군주의 행동이 옳지 못한데, 신하가 간언하지 않고 아첨하고 순종 하며 편안함만을 도모한다면 군주는 어리석어지고 나라가 위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오.
나는 상소를 받으면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들고, 말하는 것도 순서를 잃게 되오. 내가 이러한데 하물며 간언과 논쟁을 하려면 신하들 또한 두려움이 따를 것이오. 그러므로 나는 간언하는 자의 말이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아도 그가 나를 범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으니 신하들은 자기의 생각을 진실 되게 펼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간언의 수용군주가 신하의 간언을 구하는 경우는 적지 않으나 그것을 받아들여 국정에 반영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신하들의 간언이 대부분 군주의 생각과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태종은 신하들의 솔직하고도 거침없는 비판을 수용하려고 애썼으며, 이 때문에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된 간언을 받아들여 통치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성군의 중요한 덕목이다.
정관 초년, 태종은 황문시랑 왕규와 연회석상에서 담소를 나누었는데, 그때 한 미인(美人:후궁의 칭호)이 태종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그녀는 본래 여강왕(廬江王) 이원(李瑗:당태조의 증손)의 애첩이었다. 이원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그의 전 재산과 애첩들을 나라에 몰수당했다. 태종은 미인을 가리키며 왕규에게 말했다. "여강왕 이원은 황음무도한 사람이었소. 그래서 그를 죽이고 이 여인을 차지했소. 이원의 포악함은 극에 이르렀으니, 어찌 멸망하지 않겠소!"
왕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관자』의 기록을 보면, 제환공은 멸망한 곽(郭)나라로 가서 그곳의 백성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곽나라는 무엇 때문에 멸망했소?' 그러자 그 백성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국왕이 선량한 사람을 좋아하고 사악한 사람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제환공은 의아하게 여겨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 말에 의하면 그는 현명한 군주인데, 어떻게 멸망할 수 있겠소?' 그 백성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군주가 선량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들을 등용하지 못했고, 사악한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들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여강왕의 아내를 취한 것은 사악함을 알면서 제거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은 왕규의 말이 옳다고 칭찬하고 미인을 그녀의 친족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정관 3년, 태종이 조서를 내렸다. "관중(關中)은 2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관동(關東)은 1년간 부세와 부역을 면제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서에 이런 규정을 다시 두었다. "이미 징집된 장정은 부역을 보내고, 이미 납부한 조세는 전부 헌납하며, 내년에 다시 합쳐 환산 근거로 삼는다." 위징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황제께서 내리신 첫 번째 조서에 대해 백성들은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조서에는 실망하는 이가 많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막 제위를 계승하셨고, 억만의 백성들은 모두 폐하의 덕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성지(聖旨)를 발표하자마자, 곧이어 그 성지와 위배되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와 같이 하면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 폐하께서 신의를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차남 가운데 정말 왜소하고 허약한 사람이라면 입대시키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신체가 강건하고 장대하면 입대시킬 것이오.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장애가 된다는 말이오?" 위징이 엄숙하게 대답했다. "연못 속의 물을 말린 다음에 물고기를 잡으면 결코 잡지 못하는 일이 없지만 그 이듬해에 다시는 물고기가 없을 것이고, 숲을 불태워 사냥을 하면 짐승을 못 잡는 일은 없지만 그 다음해에는 다시 짐승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차남 이상이 전부 군대를 가면, 세금과 부역은 누구에게서 취하겠습니까? 근년 들어 병사들이 나아가 싸우지 않는 것이 인원수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대우가 사라졌기 때문에 싸울 마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을 자주 징집하면 여전히 잡일에 충당하게 되어 인원수는 많아도 결국에는 쓸 곳이 없어집니다."
태종이 말했다. "나는 그대가 끝까지 고집하는 것을 보고,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줄로 의심했었소. 나라가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민간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그대의 말이 옳소. 내가 진지하게 사고하지 못해 잘못이 매우 컸다고 생각하오." 태종은 차남의 입대를 그만두도록 명하고, 위징에게 금 항아리를 하사했다.
군주와 신하의 계율사람은 몸통과 사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듯이, 군주는 반드시 신하의 보좌를 받아야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 군주와 신하는 한배를 타고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일에 함께 해야만 장기간 나라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다. 군주는 창업 초기의 마음이 일관되게 지속되어야 하며 백성과 신하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기초를 공고히 해아 한다. 나랏일을 처리할 때는 그 역량에 따라 적재적소에 관리를 배치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하는 군주의 뜻에 영합하여 아첨하는 것을 피하고 충언을 해야 한다.
정관 14년, 위징이 태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군주는 사람의 두뇌이고, 신하는 사지(四肢)라고 들었습니다. 양자는 협조하여 완벽 한 신체를 형성합니다. 군주가 아무리 명철하더라도 반드시 신하의 보좌를 받아야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목적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기』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 람의 단점을 알아야만 하고, 자기가 증오하는 사람의 장점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 니다. 또한 순자는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 을 수도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물고기는 물을 떠나면 죽지만, 물은 물 고기가 떠나도 여전히 물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재 폐하께서는 어떤 때는 대신들에게 중임을 맡기고, 어떤 때는 대신들에게 작은 일을 처리하도록 합니다. 자격이 안 되는 자가 자리에 앉고, 마땅히 일을 처리해야 할 자가 직분을 잃으니, 대신들은 때때로 작은 잘못을 저질러 죄를 짓고, 소인들은 큰 일로 인해 처벌을 받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엿보면서 법률 을 농락하며, 힘이 약한 자에게 사실을 왜곡하여 죄명을 구성합니다. 이처럼 거짓 기 풍이 형성되면 나라는 제대로 다스려질 수 없습니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면 이는 물고기와 물과 같을 것입니다."
관리 선발한 나라의 관리는 군주와 백성들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군주에게 있어 관리는 천하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눈과 귀와 같은 존재이며, 백성들에게 있어 관리는 그들의 권리와 의견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관리를 선발하는 일은 나라를 통치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관 3년, 태종이 이부상서 두여회(杜如晦:당 초기의 대신으로 결단력이 뛰어남)에게 말했다. "근래 내가 이부(吏部)에서 선발한 인재를 보니, 단지 그들의 언사가 적당한지 아닌지, 문장이 엄한지 아닌지 만을 보고 취했을 뿐, 그들의 품행이 고상한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소. 만약 몇 년이 지난 후, 사악한 행적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들을 징벌하고 심지어 참수까지 할지라도 백성들은 이미 그 해악을 입은 후일 것이오."
두여회가 대답했다. "한나라 때의 인재 선발 과정은 모두 마을에서 덕행이 뛰어난 사람으로 주나 군의 추천을 받은 연후에 선발하여 임용했기 때문에 그 당시 인재들이 훌륭하다고 일컬어진 것입니다. 현재 해마다 선발하는 관리가 수천 명이나 되며, 이들의 겉모습이 중후하고 언어가 화려하여 그들을 완전히 살필 수는 없습니다. 인재를 선발하는 관청에서는 단지 그들에게 일정한 지위와 등급을 나눠 줄 뿐입니다. 인재를 평가하여 선발하는 이치가 사실상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인재를 얻을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