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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1

표영삼 지음 | 통나무
서(序) - 도올 김용옥



오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선 우리는 반드시 동학(東學)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 우리 몸 속의 핏줄기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명이요 힘이다. 동학이 창도된 애초로부터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학을 믿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반드시 "동학을 한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belief)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함"(Doing)일 뿐인 것이다. 동학은 우리 삶의 끊임없는 실천일 뿐이다. 수운(水雲)은 단지 선각자로서, 우리 삶의 실천의 실마리를 제공한 큰 스승님(大先生主)일 뿐이었다. 그는 동학을 하나의 종교 교리로서 체계화한 적이 없으며, 교단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교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접(接)제도라 하는 것도 사회적 실천을 위한 상부상조의 운동조직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삶의 함의 체계는 본시 역사학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어떤 이즘(-ism)의 가치규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개벽"이란 개념적 규정의 틀 속에 맞춰지는 그러한 사유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수운이 "다시 개벽"을 말했다면, 우리의 개념, 우리의 언어 그 자체가 다시 개벽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1장 - 동학의 창도과정



수운의 가정환경

경주 가정리서 탄생
: 동학의 창시자인 대신사 수운 최제우(大神師 水雲 崔濟愚, 이하 수운으로 약칭함)는 1824년(甲申年) 10월 28일(양 12월 18일)에 경주군 현곡면 가정1리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로부터 북서간 약 12km 떨어진 곳이며 경주의 주산 귀미산(龜尾山) 동쪽에 위치해 있다. 15호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로 왼편 안쪽에 지금은 생가 터에 유허비(遺墟碑)만 세워져 있다. 수운의 부친 근암공은 불행하게도 세 번 장가를 들었다. 첫 번째 부인인 정씨는 1797년에, 두 번째 부인 서씨는 1811년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근암공은 여생을 벗들과 노닐면서 학문의 길을 정리하고 후진들을 가르칠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퇴락한 와룡암(臥龍庵)을 수리하는 한편, 그 뒤쪽에는 새 터를 닦고 4칸짜리 용담서사(龍潭書社)를 지었다. 지금은 그 터에 새로 집을 짓고 "용담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근암공은 나이가 더해가자 가끔씩 일점 혈육이 없음을 한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 날 제자들은 스승님을 재혼시키기 위해 의논하게 되었다. 한모(韓某)라는 제자는 자기 고모인 곡산(谷山) 한씨(韓氏)가 스승님을 모실만 하다고 천거하였고, 1824년 2월, 한씨부인과 근암공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당시 한씨부인의 나이는 30세 정도로 추정되며, 근암공은 63세였다. 일부 학자 중에는 수운을 서자로 보는 이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한씨부인은 한번 출가했다가 재혼한 재가녀(再嫁女)이다. 따라서 수운은 서자(庶子)가 아니라 『경국대전』에 명시한 재가녀 자손이 된다. 조선조는 성종 때에, 재가한 여자의 오라비나 그 아들과 손자에게는 문과에 응시할 수 없게 하였다. 경주 최씨 가문에 유명한 인사가 탄생하면 귀미산이 울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수운이 탄생할 때에도 귀미산이 3일이나 울었다는 말은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운의 이름과 자호: 한씨부인은 수운의 아명을 "복슬이"라 지었다. 경주지역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복슬"이라 이름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자로 대개 복술(福述)이라 쓰는데 수운선생 역시 최복술(崔福述)이란 아명을 얻었다. 수운의 본명은 제선(濟宣)이요, 자는 도언(道彦)이요, 호는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1859년 구도의 결심을 다질 때 이름과 자와 호를 다시 지었다.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호는 수운(水雲)으로 고쳤다. 제우란 어리석은 세상을 건진다는 뜻이라고 하며 수운이란 호는, 물과 구름이란 뜻으로 천지생명을 상징한 것이라 한다. 성묵은 도가 극치에 이르면 혼혼묵묵(昏昏默默)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부친과 선조 정무공 : 수운의 아버지 근암공은 당대의 퇴계 영남학파에 속한 학자로서 유학을 실천한 선비였다. 이름은 옥이라 하였고, 자는 자성이오, 호는 근암(謹庵, 近庵)이라 하였다. 원래 공은 벼슬길에 나가기 위한 글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오로지 유학을 밝히는 학문에 전념하였을 뿐이다. 당시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어도, 세도가에 줄을 대어 재물을 바치지 못하면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영조때에 경주 최씨들 중에서 벼슬길에 나가 요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그 이후 점차 밀려나 낙향하게 되자 근암공을 밀어줄 만한 관직을 가진 이도 없었다. 또한 부친상과 모친상을 치르면서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였고, 두 부인마저 병사하자 살림은 일시에 곤궁해 졌다. 근암공은 퇴계 영남학파에 속하여 있었으나 종교행위에 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요절하거나 수를 누리는 것은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요 무속의 힘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을 내세웠다. 수운의 나이 17세 때 근암공은 노환으로 7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었다. 혈육으로는 서씨부인 소생으로 딸이 2명, 그리고 한씨부인의 소생으로 수운과 딸 1명을 두었다.



수운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준 조상으로는 7대조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92~1636) 장군을 들 수 있다. 병자 두 난에 신명을 다한 정무공이라 수운은 어릴 때부터 흠모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웠고, 병자호란(1636~1637) 때에는 6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인 수지면 험천(머우내)에서 청나라 기병대를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리고 청백록(淸白錄)에 올라 공직자의 본보기가 되었다. 수운은 정무공으로부터 8대손에 해당된다. 수운은 학구적이고 도덕적인 기풍은 부친 근암공으로부터 물려 받았고, 애국의 패기와 무골(武骨)의 기질은 정무공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수운이 21세에 "활을 거두어 간직해 두고 장사 길로 나섰다"는 기록은 무예공부를 하다가 중단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국 누비기 10년간: 근암공의 가훈(家訓) 11조 중에 자녀교육에 대한 조항이 있다. 즉 "지금 사람들은 자식을 가르침에 입학 후에도 마소를 먹이게 하거나, 들에 물대기를 시키는 등 글공부에 힘쓰지 못하게 하니 이래서야 어찌 훌륭히 되기를 바라겠는가. 머리가 둔하여 잘 될 가망이 없으면 그때 가서(15세) 농사일을 배우게 해도 늦지 않다"고 하였다. 수운은 가통에 따라 17세에 장가를 들어야 했으나 부친이 세상을 뜨시자 상제의 몸이 되었다. 그래서 3년상을 마치고 19세에 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생계가 문제였다. 특히 농업사회에서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수운은 장래가 암담하였다.

수운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장삿길로 나서는 것뿐이었다. 첫째,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고 둘째, 세상 돌아가는 실정을 살펴보자면 장삿길이 제격이었다. 가벼운 백목(白木)이나 약재, 값나가는 물품을 주로 취급하는 떠돌이장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장삿길을 다니던 1844년부터 1854년까지의 10년간은 세상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권세를 틀어쥔 고관들은 지방 수령들과 짜고 온갖 수탈행위를 가리지 않았다. 이 시기는 조선조가 해체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나라 안이 온통 썩어버린 것을 본 수운은 삶의 틀이 해체기를 맞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라 밖 역시 삶의 틀이 무너져 가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서양세력은 새로운 상품시장을 찾아 그리스도교를 앞세워 동양을 침범한다고 믿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아편전쟁이었다.



해체기 맞은 삶의 틀: 영국은 중국과의 통상에서 무역역조가 생기자 국가적으로 아편장사, 즉 마약장사를 시작하였다. 중국은 마약에 병들어갔고 경제적으로 무너져갔다. 그래서 중국은 부득이 자위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 대책의 하나로 아편판매를 금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1838년에는 광동에 있는 영국 공행(公行)을 폐쇄시키고 아편을 몰수하여 소각해 버렸다. 그러자 뻔뻔스러운 영국은 침략의 본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1840년, 막강한 영국 함대는 광동 일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비인도적인 아편전쟁인 것이다. 영국은 간단하게 무력으로 중국을 제압하였고 이어 엄청난 배상까지 요구하였다. 중국은 영국의 요구대로 1842년에 굴욕적인 남경조약을 체결하였다. 남경조약은 배상금 이외에도 홍콩 전도를 영국에 영구히 할양할 것과, 5개항을 개방하여 마음대로 들어와 장사하게 하였다.



수운은 기독교문명은 건전하리라고 믿었으나, 이 소식을 전해듣고는 그들의 문명도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수운은 여기서 온 인류의 삶의 틀이 해체기를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수운은 1853년(30세)부터 이 문제를 갖고 고민하게 되었다. 10년간 다니던 장삿길을 그만두고 용담집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을 해보기로 결심하였다. 모든 창도자(唱道者)들은 그 시대의 문화수준을 반영하여 나름대로 구도적 과제상황을 설정하였다. 수운 역시 해체되어 가는 19세기의 문화상황에서 낡은 삶의 틀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이, 또한 다시 개벽의 길을 찾자는 것이 과제상황이었다.



다시 개벽의 과제

다시 개벽의 참뜻
: 동양에서 개벽이라면 천지가 처음 열린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운은 「용담가」에서 "개벽 후 오만 년"이라 하였다. 개벽된지 5만년 밖에 안됐다면 그 개벽은 천지개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안심가」와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고 하여 개벽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개벽이란 용어는 열 개(開)자와 열 벽(闢)자로 되었다. 수운의 개벽이란 낱말의 용례를 보면 하나는 "개벽 후 5만년"이라 하였고, 하나는 "다시 개벽"이라 하였다. 두 낱말을 연결시켜보면 5만년 전에 개벽했던 그 무엇을 지금 다시 열자는 뜻이 들어있다. 수운이 사용한 개벽은 "삶의 틀"이 열렸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삶의 틀이 이제 해체기를 맞게되어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니,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삶의 틀을 다시 열자는 것이 "다시 개벽"이다.



문화란 역사적 과정에서 이루어진 생활양식이며, 우리말로 바꾸면 "삶의 틀"이 된다. 수운은 다시 개벽의 시점을 자신이 살고 있는 오늘이라고 생각했다. 수운은 「권학가」에서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 하였던가"라고 하였다. 역사의 주체는 바로 꿈을 가진 인간이며, 현숙한 모든 군자가 동귀일체가 되어 만들어 가는 것이 역사라고 하였다. 수운의 형이상학적 역사관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창조적 순환관이라 할 수 있다. 수운이 지향하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틀을 우리의 힘으로 다시 개벽하자는 데 있다.



신에 대한 수운의 관념

종교개념과 도학의 개념
: 다시 개벽의 길을 얻고자 수행에 들어갔던 수운은 드디어 1860년(37세)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다. 수운의 종교체험 중에서 중요한 대목은 세계를 보는 시점(視點)이 전도되어 새로운 의미의 세계가 열렸다는 점이다. 즉 가치전도(價値顚倒)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수운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무극대도(無極大道) 또는 천도(天道)라고 하였다. 도(道)는 종교개념과 다르다. 19세기 초까지 우리나라에는 종교라는 낱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신념체계들을 유도, 불도, 선도(仙道)라 하였고 서양종교인 그리스도교까지도 서도(西道)라고 불렀다. 도는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길을 말하고 있다. 그러자면 세계관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결국 동양에서 말하는 도란 모든 신념의 틀인 신념체계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수운은 도와 아울러 학(學)이라는 개념을 겸용하였다. 그러면 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학이란 객관적 사실을 가치 중립적인 입장에서 통일적으로 규명하려는 학문을 말한다. 그러나 수운이 말하는 학은 "차제도법"(次第道法), "교즉성교"(敎則聖敎)라 하여, 학, 법, 교 등 세가지를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동학, 성교, 불법 등 이 세 가지 외에도, 술(術)자를 넣어 유술(儒術) 또는 선술(仙術)이라고도 하였다. 즉 학, 교, 법, 술 이 네 가지가 글자는 달라도 동일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도를 신념체계라고 본다면 학, 법, 교, 술은 수행체제를 이르는 말이다. 수운에 의하면 천도 또는 무극대도를 바로 이해하고 닦고 행하는 수행체계를 학이라고 하였다.

수운의 한울님 관념: 한울님 관념은 동학의 신념체계의 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운은 신(神) 호칭을 세 가지로 표현하였다. 첫째는 상제(上帝)라 하였고, 둘째는 한울님이라 하였고, 셋째는 천주(天主)라 하였다. 그런데 상제라는 神 관념은 수운 자신이 이른 神 호칭이 아니다. 연대순으로 보면 1860년 「용담가」에서 한울님이라고 먼저 사용하였고, 1861년 천주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러나 수운이 표기한 천주는 천주교의 천주가 아니었다. 수운의 진짜 神 호칭은 전래하여 오는 우리민족의 神 호칭인 한울님이었다. 수운의 천주는 한울님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천주교의 천주와 수운의 천주는 신관념(神觀念)에서도 크게 다르다. 수운이 생각하는 한울님은 ①인격적인 분, ②유일하신 분, ③되어져 가는 분, ④몸에 모셔져 있는 분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인격성, 유일성, 시간성, 내재성을 지닌 한울님으로 생각하였다.



수운의 신관념 중 시간성과 내재성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을 새롭게 전도시킨 관념임에 틀림이 없다. 시간적인 신관념은 예정설이나 결정론을 배제하게 된다. 이 세계는 신에 의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변화를 통한 창조과정에 있을 뿐, 사람이 할 도리를 제대로 수행하면 그 결과는 스스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이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도전할 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시천주(侍天主)의 신관념은 한울님이 각 생명체의 개체마다 내재해 있다고 믿는 신관념이다. 이 내재적 신관념은 실천적인 면에서 가치기준을 만들게 된다. 모든 사람은 몸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도출한다. 수운이 한울님 관념을 새로운 생각하는 틀이라고 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덕과 관의 탄압

포덕
: 수운은 1861년 포덕(布德, 傳道)하기 시작하였다. 용담정으로 찾아온 분들 중에는 동학초기 지도자로 활동한 여러 명이 들어 있었다. 최경상을 비롯하여 최자원, 이내겸, 강원보, 백사길, 박대여, 이무중, 박하선, 이정화, 이민순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수운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본뜻을 밝히기 위해 여러 편의 글을 지었다. 1861년에 지은 「포덕문」의 전체 구성은 수운의 형이상적 역사관을 설명하는 글로 이루어졌다. 수운은 지금이야말로 일대 전환기라는 것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자리잡아 왔던 우리의 문화체제가 이제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 전체가 모순과 갈등에 휩싸여 윤리, 경제,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의 삶은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창조적 순환사관"으로 볼 때 의식을 가진 소수적 창조자가 나타난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기 위해 도전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포덕문」은 바로 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 지향할 이상인 보국안민의 길을 개척하자고 호소하는 것으로 꾸며졌다.



「논학문」에서 동학호칭: 수운은「동학론(東學論)」(論學文)에서 "동에서 태어나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천도라 하나 학은 동학(東學)이다."라고 하여, 학(學)의 이름을 동학이라 호칭했다. 일부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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