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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 모멘토
제1부

사쿠라꽃과 삶과 환생의 미학

쌀의 상응물로서의 사쿠라꽃―
생산력의 미적 가치 : 쌀알에는 신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해서 쌀은 일본의 전 역사를 통해서 가장 신성한 식물이었고, 농경사회의 생산적 에너지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쌀과 사쿠라꽃의 상징적인 동일시는 사쿠라꽃이 어떻게 생명 유지의 에너지를 의미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2대 문서『고사기(古事記)』(712년)와『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에 쌀은 가장 중요한 그리고 신성한 식물로서 등장한다. 이 두 문서에서는 중국인과는 다른 일본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한 텐무(天武)천황(재위 673~686)의 정력적인 노력의 자취를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중국의 '위대한 문명'이 일본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밀려들어온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조정은 아시아대륙에서 전래된 쌀을 일본이 원산지라며 일본인의 정체성 확립에 애썼다. 이로써 원래 외래적 요소인 쌀이 일본 아이덴터티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확실히 쌀만큼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이들 문서에도 사쿠라꽃은 등장한다. 사쿠라꽃과 후년에 결합한 주요한 상징적 의미의 대부분은 이 두 저작물의 역사·신화 가운데 이미 나타나고 있다.



민간의 우주관에서의 사쿠라꽃과 쌀의 상징적 결합은 두 가지가 서로 관계되는 사상체계, 즉 산악(山岳)신앙과 역사·신화의 기초가 된 농경우주관에 깊이 새겨져 있다. 산악신앙의 중심이 되는 생각은 산의 신이 사는 산들은 일본인의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는 것이다. 고대에는 사쿠라꽃이 산벚꽃에 한정되어 있었고, 이것이 산의 신과의 상징적 결합의 기본이 되었다. 이른봄에 내리는 눈과 꽃 중에서도 산에 피는 산벚꽃은 가을에 벼가 얼마나 풍작을 이룰 것인지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꽃이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되도록 기원하는 수단으로서 꽃축제(하나마츠리)가 시작된 것이다. 꽃축제의 중심인물은 '야마비토(山人)'로, 산의 성스러움을 그 신앙체계의 초점으로 하는 슈겐도오(修驗道, 중세에 확립된 일본불교의 일파)의 수행을 위해 산중에 기거하는 승려의 원형이었다. 사쿠라꽃은 본래 산의 꽃이었기 때문에 사쿠라나무는 슈겐도오에서는 신목(神木)이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꽃놀이는 신성한 산에 올라가 사쿠라나무 밑에서 개최한 종교적 의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사쿠라꽃과 쌀의 관련은 봄에 치러지는 다양한 의례에 체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의례는 시대와 함께 변해가지만 사쿠라꽃과 쌀의 관련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농경우주관 안에서 사쿠라꽃과 쌀이 모두 생산력을 표상하는 의미로 상징적으로 동일시되어왔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쌀과 사쿠라꽃의 상징에는 생산력뿐만이 아니라 미적 가치라는 공통점도 있다.



여성으로서의 사쿠라꽃―생식력의 미적 가치 : 사쿠라꽃과 쌀의 미적 가치는 사쿠라꽃이 여성 등의 '아름다운' 사람이나 사물의 은유가 되는 기반이다. 왜냐하면 쌀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생산력과 생식력을 표상하는 존재이고, 양자 모두 우주적 관점에서 말하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쿠라꽃이 사랑에 빠진 남성에게 여성을 의미한다면, 꽃이 사랑 그 자체, 남녀의 친밀한 관계를 표상하는 상징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를 통해 사쿠라꽃은 사랑의 상징으로서 꽃놀이에 확실히 표현되고 있다. 사회계층의 측면에서 보면 꽃놀이는 복잡한 사회현상이다. 귀족·상류 계층의 무사가 개최한 꽃놀이는 평등한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계급성을 강조하고 권력과 화려함을 과시하는 기회였다. 각각의 사회계급은 계급 나름의 꽃놀이 전통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서민들의 꽃놀이는 에도시대(1603~1868)에 그 절정에 달했다. 꽃놀이는 에도 상인의 중요한 연중행사가 되어 독자적인 의상·연회·시가(詩歌)의 풍습을 갖게 되었다. 에도시대에 황금기를 맞은 카부키(歌舞伎)는 현란한 색채와 극적인 무용(희)곡을 특징으로 하는 무대예술이다. 카부키는 도시에 사는 상인·직인(職人) 계급이 육성하여 산간의 마을 사람들도 공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연애장면은 줄곧 활짝 핀 사쿠라꽃 아래서 연기되었다. 꽃놀이가 카부키에서 "배우가 연기력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인 경우는 많다. 꽃놀이의 장면에서 사쿠라꽃은 인생을 무조건적으로 구가하는 것이다.



죽음의 환생으로서의 사쿠라꽃 : 지금까지 사쿠라꽃의 중요한 의미에 대해 쌀, 산, 여성과의 상징적 결합에 의해 표현되는 삶과 환생을 부여하는 생명력이라는 관점에서 논해왔다. 그러나 사쿠라꽃과 산의 결합을 생각하는 데에는 산은 사자(死者)가 쉬는 곳이라는 신앙이 일본의 민간우주관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어 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하면, '산의 신'과 '논의 신'과 '선조'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으로, 3자 모두 인간 생명에 관한 초자연적 힘을 표상하는 것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결국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서 산과 사쿠라꽃은 상징적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사쿠라꽃은 죽음에 근거한 환생의 상징이었다. 실제 사쿠라꽃은 이 세상과 환생 후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쿠라나무는 죽음과 환생에 관련된 장소, 즉 절이나 묘지에 심을 수 있는 것이다. 특공대원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정부가 유신정변 때에 천황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전몰무사를 기려 건립한 것이다. 사쿠라꽃으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부터 사쿠라나무를 심었다. 군국주의시대에는 전몰한 병사가 다시 태어난 것으로 사쿠라꽃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민속문화에서 꽃을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 즉 환생의 통로를 상징하는 것이고,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꽃을 살아 있는 사람끼리 선물로 주고받게 된 습관은 서양에서 들어와 뿌리내린 최근의 일이다.



이미 8세기 초의 역사·신화에는, 후세에 개념적으로 사쿠라꽃과 결합되는 주제의 대부분이 나타나 있다. 사쿠라꽃은 '인생의 과정'과 '인간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서 과정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삶, 죽음 그리고 환생이라는 라이프 사이클을,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과 생식력을 가리킨다. 또한 사쿠라꽃은 인간관계를, 즉 애인 사이라든지 사회집단의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구체적으로 사쿠라꽃은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삶, 죽음, 환생이라는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매체이고 그것이 은유로서 사쿠라꽃의 환기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은유로서의 사쿠라꽃은 단지 '사물'이 아니고 아름다운 생명의 '과정'이고 '인간관계'이다. 즉, 꽃의 미적 가치가 꽃이 상징하는 과정·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꽃의 감각적인 미적 가치는 삶·환생이라는 개념이나 여성 등 인간의 미적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이 미적 가치의 이전과정은 '자연화'되기 때문에 이전된 것은 잊혀지고 만다. 이 '자연화'는 역사 변용과정의 중요한 장치의 하나다. 즉, 어떤 특정한 카테고리의 인물이나 특정한 개념이 '당연히'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화적으로 구축되어 장기간에 걸쳐 '사쿠라꽃의 아름다움'이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내셔널리즘과 사쿠라꽃의 미적 가치

고대 귀족계급에서의 문화적 내셔널리즘의 대두 :
9세기에 사쿠라가 '국화(國花)'로서 외국인에 대한 일본인 전체를 표상하기 시작하였지만, 그 역사적 전개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사쿠라꽃은 문화적 내셔널리즘, 나아가서는 19세기 말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걸친 정치적 내셔널리즘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고 당시 정부에 의해 대규모의 파괴를 위한 하나의 무기가 되어갔기 때문이다. 한·당나라 문명에 외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은 한자에서부터 야금(冶金), 도시계획을 비롯해 수많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이 전면적인 도입 가운데에는 매화꽃의 미적 가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쿠라꽃이 작자 미상이나 지방사람들의 노래에서 나온다는 것은, 지적 유행에 관계없는 사람들이 사쿠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의 귀족계급은 중국에서 전래된 매화꽃의 미적 가치를 답습하고 있었지만,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서 점차 사쿠라꽃을 사랑하는 민간의 미적 가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비로소 사쿠라꽃이 일본인의 가장 중요한 은유가 되었다.



에도(江戶)시대 '사쿠라의 국토'로서의 일본 : 고대 일본에는 산벚나무밖에 없었지만, 그 후 사쿠라는 정원·강변·신사불각·교정·유곽 등 문자 그대로 일본 전국에 심어지게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많은 쇼오군(將軍)이 에도의 도처에 사쿠라꽃을 심도록 명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에도는 '꽃의 도시'로 바뀌고, 그것이 이번에는 '꽃의 일본', 즉 '사쿠라의 국토로서의 일본'의 구축을 추진했다. 당시의 일본인은 일본의 독자성을 확립하고 표상하려 하고 있었고, 이 과정을 잘 이야기해주는 것은 유학자이자 식물학자인 카이바라 에키켄의 일화다. 그는 1698년에 중국에 사쿠라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 "사쿠라는 일본밖에 없는"것이 되어버렸는데, 실은 중국에도 또한 세계 다른 곳에도 사쿠라는 존재한다. 에도의 118개 명소 가운데 21개소가 사쿠라꽃의 아름다움으로 명소로서 선택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바꿔 말하면, 신사불각이나 그 밖의 장소가 명소가 되기 위해서는 사쿠라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은 실제로서도 자기 표상으로서도 '사쿠라꽃의 국토'가 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명과 근대화의 위협이 자신들에게 다가왔을 때 자신들의 문화에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했고, 그 중에서 사쿠라는 중요한 상징의 하나였다. 이러한 상징은 독자적이고 원천적인 일본의 공간과 일본의 시간을 의미한다. 공간(국토) 시간(역사)은 많은 사회집단에게 문화적 내셔널리즘의 주요한 특성을 형성한다. 에도시대의 이러한 전개가 그 후 모든 일본인이 사쿠라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제2부

천황의 두 신체 - 주권, 신정(神政), 군국주의화


근대화/서양화 : 일본의 근대는 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식민지 확대로 촉발되었는데, 그 시작인 왕정 '복고'의 기본적인 슬로건은 '막부를 타도하고, 외국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攘夷)'이었다. 양이, 즉 서구 열강의 위협을 배제하는 데 막부가 무력했던 만큼, 왕정 '복고'는 사실상 막부를 쓰러뜨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이 목적을 달성한 후에 근대 민족국가 일본 건설을 위해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교류를 추진하는 방침을 채택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슬로건에 나타나듯이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산업화와 군국주의화에 동시에 나섰다. 그러나 본래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 전체주의적 군국주의로 전개되어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나라를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괴멸의 길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이 군국주의화의 과정에서 '왕/천황, 즉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슬로건을 '국민'의 마음속에 불어넣기 위해서 "아름다운 사쿠라꽃처럼 져라"를 연상시키는 상징으로서 사쿠라꽃이 이용되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요소는 사쿠라꽃이 일본인을 은유한다는 것과, 복잡하고 이따금 모순되는 의미를 가진다는 두 가지 점이다.



신성한 왕/왕권―종교/상징적 측면 : 천황의 주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표현은 '신성(divine)'과 '불가침(inviolable)' 두 가지다. 서양국가의 헌법에도 "왕은 불가침의 존재이다"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이것은 '불가침'이라는 말에 왕의 정치적 책임을 모두 면제한다는 절대적인 정치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사안으로, 왕(천황)을 '신성하다'고 규정함으로써 천황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천지신명에게 고하는「고문(告文)」, 제1조, 제3조는 천황에게 절대적인 신으로서의 신성을 부여해 결과적으로 일본 천황의 권력은 메이지헌법의 모델이 된 유럽의 왕을 능가하는 것이 되었다. 나아가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간토로비치(E. H. Kantorowicz)가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라고 명명하여 유명하게 된 문제도 해결했다. 즉, 제1조에 의해 개개의 천황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천황과 천황제의 쌍방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실현됐다. 하지만 신으로서의 천황은 정치적 단위인 일본을 범주로 한 것으로, 국경을 초월하는 유럽의 기독교 신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신정(神政)의 제도화는 민간신도를 국가종교로 격상시킴으로써 확립됐다. 새롭게 제도화된 이 '국가종교'(이 책에서는 이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는 전후 점령군에 의해 '국가신도(State Shintoism)'로 불렸는데,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내몰았던 요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1945년 12월 25일 일본정부에 이를 폐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정부에 의해 새롭게 제도화된 국가종교는 이세(伊勢) 신궁과 야스쿠니신사를 정점으로 한 17만 사 남짓 되는 신사를 황실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 두었다. 또한 1908년에 황실제사령을 발표하여 다양한 황실제사를 제도화했다. 고대의 황실제사는 풍작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지만 공개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메이지가 되어 제도화된 제사는 새로운 천황제라는 신정(神政)의 창작을 위한 것이고, 또한 일본인을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었다.



절대주권자와 군 통수자로서의 천황 :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일본을 강력한 근대 주권국가로 확립시키려고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보나파르트주의나 영국의 의회제를 완고하게 거부하고, 프로이센헌법을 모델로 선택한 것이다.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천황이 직접 군을 통수하는 절대군주제적 주권을 확립했다.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법문서, 즉「대일본제국헌법」「고문」「군인칙유(軍人勅諭)」에 따라 천황과 천황제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신생 헌법이 천황의 종교·군사적 권력을 규정하는 데 성공했다면, 헌법 이전에 발포된「군인칙유」는 '희생'의 관념을 확립하는 데 똑같은 효과를 거두었다.「교육칙어(敎育勅語)」는 국체를 다스리는 아버지이며 국부인 천황에 대한 충성은 부모에 대한 효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정책을 전개해 가는 데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헌법 초안 작성에 직접 관여한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천황에게 종교·행정·군사에 관한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 새로운 천황이 어디까지나 당시 일본의 내우외환에 대처하기 위한 궁극의 수단이었다. 즉, 그들이 목적으로 한 것은 천황을 재정의 함으로써 손안에 든 구슬처럼 천황을 자기들 뜻대로 주무르고 이를 통해 내우외환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황의 역할을 헌법에 열거함으로써 각각의 국가기관에 독립된 정당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기관들이 천황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 결과 193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천황에게는 '주권'으로서 무한한 권력이 부여되었고, 동시에 다른 국가기관에 구속되지 않는 특정의 국가기관이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도 생겨났다. 특히 군부는 "헌법의 규정에 의해 정부의 비군사적 기관으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지위를 보증받고 있었다."



군국주의 발전으로의 전기 : 국가는 도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통일된 '국체'를 구축하려고 했지만, 이에 대해 국민은 오랜 기간을 주저하면서 때로는 강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그 전기(轉機)가 된 것이 청일·러일 전쟁의 승리다. 오랜 세월 계속된 중국문명에 대한 동경에서 깨어나면서 국가 선전기구의 지휘 아래에 많은 일본인들이 중국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고 오만이나 경멸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1905년 러시아와의 싸움에서도 일본은 승리했다. 이것은 서양 국가(러시아는 일본인에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서양 국가였다)에 대해 아시아 국가가 처음으로 쟁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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