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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

이기담 지음 | 푸른역사
1. 1,400년 살아 있다!



온달을 찾아서, 그 첫걸음




21세기를 사는 우리와 까마득히 먼 과거의 온달 이야기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소설가)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우리가 1,400년 전의 바보 온달 이야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온달의 이미지가 여러 가지 형태로 그려져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온달이라는 인물이 우리 내면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아차산은 단양의 온달산성과 함께 온달의 마지막 싸움터로 진위(眞僞)를 다투는 곳, 아차산에 온달주먹과 평강공주바위가 있다는 말을 이미 들은 터라 사뭇 설레는 마음으로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광나루역에서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천호역에서 서성이다가 임기환 선생(역사학자)를 만났다. 아직은 이른 봄, 늦겨울의 추위가 남아서인지 겨울 외투 차림이었다. 우리는 안내소에서 아차산을 안내해주기로 한 김민수 선생을 만났다. 김 선생은 향토사학자로서 강단사학자에게 물어볼 것이 많은 듯했다. 두 분의 긴 토론이 끝나고 우리는 아차산 답사에 나섰다. 아차산은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흔적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고고학의 보고였다. 성벽의 일부만 남아있는 성 앞에는 아차산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아차산성은 서울 동부의 한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 교통의 요지에 쌓은 삼국 시대 산성이다. 아차산성은 백제 초기의 수도인 한성 시대에는 한강을 사이에 둔 풍납토성과 함께 중요한 방어 역할을 하였다. 이 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단성지(阿旦城址)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로 용맹을 날리던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이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고 하는 온달은 아차산 등허리에 주먹바위로 남아 있었다.



온달의 전설이 얽혀 있는 온달샘과 두 개의 배수로가 배치된 계곡, 그리고 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의 흔적과 남문터를 살펴보았다. 남문터를 돌아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성 위를 걷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 여기가 장댑니다." 앞에서 길을 잡아가던 김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과 열다섯 개의 보루들을 숨기고 있는 유려한 산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 시대에 어찌하여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는지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조선이 이곳을 수도로 삼기 전까진 서울이 한반도의 중심으로 부각된 적이 없었지만,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한반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강과 그 유역에 펼쳐진 넓은 옥토와 광대한 분지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용마산과 망우산, 그리고 아차산은 하나의 산이었다. 보루는 산성과 연결된 능선이나 고지 같은 곳에 소규모 병력이 주둔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초소 혹은 전진기지 같은 시설을 말한다. 김 선생은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보루성들을 모두 고구려가 세웠다고 주장했다.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 장수왕 때, 한강 하류에 있던 백제를 내쫓고 세운 고구려의 성이라는 것이다. "온달은 정말 여기서 죽었을까요?" 나는 풀리지 않은 의문을 재차 던졌다. 두 선생은 온달을 둘러싼 여러 의문 중 하나인 온달의 전사지를 놓고 격론을 계속했다. 1,400년 전의 일을 두고 이렇게 격론을 펼치도록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정말 중요한 것은 온달이 어디서 전사했는가 하는 문제일까? 아니면 온달이 그 긴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속삭이는 '그 어떤 의미'일까?



2. 온달의 캐릭터, 나는 이렇게 보았다



설화 속 인물? 실존 인물?




아차산 답사 뒤 나는 온달의 역사적 실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일차적인 작업은 온달에 대한 연구논저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이기백 선생은 1993년에 펴낸 『연사수록(硏史隨錄)』에서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로 자리매김한 까닭을, 온달이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할 만큼 효자로서 칭송 받고 날랜 용사가 많기로 유명한 고구려에서 최고의 무사로 인정받자 그를 미워한 세도가들이 바보로 만들고야 말았을 것이라며 주장했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와 국문학계는 서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온달을 분석했으므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온달의 참모습을 되살리는 작업은 『삼국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현재 온달에 대한 기록은 유일하게『삼국사기』〈열전〉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이후 『삼국사기』제45권「열전」제5에 실린 온달 기록을 「온달전」이라 칭한다). 온달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온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삼국사기』「온달전」에 온달의 생물연도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온달전」은 온달이 살았던 시기를 유추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온달전」의 첫 부분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라는 기록과 뒷부분 '양강왕이 즉위함에 미쳐, 온달이 아뢰었다'라는 기록대로라면 온달이 활동했던 시기는 평강왕과 양강왕대였다. 그런데 평원왕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불리는 까닭에 「온달전」의 평강왕은 평원왕을 의미한다. 양강왕은 영양왕의 잘못된 표기다. 정리하면 온달이 살았던 시기는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과 영양왕( 陽王, 재위 590~618)대였다. 게다가 온달이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했으니, 평원왕 이전인 양원왕(陽原王, 재위 545~559)대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온달은 약 550년경에 태어나 590년을 전후해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온달에 관한 논저에서는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인 6세기 고구려 사회를 꼼꼼히 분석함으로써 온달의 실존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과 국문학자들의 연구 경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온달이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반면, 국문학자들은 온달이 설화 속 인물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삼아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다.



온달이 설화에 갇힌 이유



『삼국사기』는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기전체 형식에 따라「본기(本紀)」,「연표(年表)」,「지(志)」,「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열전」은 총 10권으로 행적이 특이한 51명의 충성심과 학식, 효행 등을 전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이처럼 나라에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모아놓은 「열전」5권에 「온달전」이 분명히 수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의 사실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있었다. 고구려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최고급 귀족도 아니었던 온달이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 여자인 평강공주가 그 결혼에 적극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온달의 시신이 담긴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 따위가 「온달전」을 설화로 보게 만든 요인이다. 그밖에도 이제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층 더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바보온달이 '바보'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뛰어난 무공을 세워 대형이란 벼슬을 받은 점과 『삼국사기』「열전」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오직 온달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 그리고 온달이 북조 무제와의 전쟁에 출전해 승리한 점과 신라와 벌였던 아단성 싸움이『삼국사기』「본기」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도「온달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 장애요인이 됐다.



좀 더 조사를 해보았더니 열전에 실린 51명 중 온달만이 『삼국사기』「본기」에 누락돼 있었다. 온달의 실존에 의구심을 갖는 이들은 그 점을 문제로 삼는데, 이는 지나친 사료 우선주의적 발상이 아닐까. 문자로 기록된 것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면, 전쟁이나 화재 등으로 소실된 역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치부해야 하는가? 이런 태도는 연구자체를 원론적인 질문 속에 꼼짝없이 가두어버리고 말 위험이 있다. 또 한 가지, 「열전」도 『삼국사기』의 기록임이 분명한데, 단지 「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 기록의 신빙성을 문제삼는 것이 타당한가. 온달이 사료가 극히 부족한 삼국 시대의 인물인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온달 기록에 담겨 있는 설화적 요인은 어떻게 설명되어야할까? 설화가 생기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하나의 설화에도 여러 요소들이 엉켜 있다는 이기백 선생의 지적은 그에 대한 적절한 답이 아닐까 한다. 이는「온달전」을 '설화'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사실성이 엉켜 있음을 지적하는 중요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작업은 온달 기록 안에서 사실성과 설화성을 가려내는 동시에 양자를 모두 수용하는 일이다.



「온달전」은 사실의 바탕 위에 설화라는 양념이 군데군데 뿌려져 있다.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서 설화적 향취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평민 온달과 평강공주와의 결혼에 관한 대목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바보는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 뇌수(腦髓)의 병을 앓는 과정에서 또는 앓고 난 뒤에 생기는 지능 저하 등, 세 가지로 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온달이 훗날 용감한 무사로 활약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지능이 낮고 멍청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온달이 바보로 일컬어진 까닭은, 그가 공주와 결혼할 수 없는 낮은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분 제도가 엄격했던 삼국 시대에는 동일 신분내에서만 결혼이 가능하였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온달전」에 첨가된 또 하나의 설화적 요인은 마지막 대목에서 발견된다. 당시 고구려의 최대 숙원은 신라에게 빼앗긴 옛 고구려 땅, 즉 계립현과 죽령 서쪽 땅을 되찾는 것이었고, 온달은 그 꿈을 실현시킬 인물로 떠올랐을 법하다. 하지만 온달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전장에서 쓰러진다. 온달의 행적은 일종의 비극적 영웅담으로 윤색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엔가 문자로 정착돼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을 수 있다. 빼앗긴 땅을 다시 찾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는 우국충정, 죽어서조차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깊은 원한, 사랑하는 이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서야 마침내 미련을 버리고 떠나는 사자(死者)의 발길. 이러한 온달의 영웅적 최후가 평강공주와의 사랑 이야기와 어우러지면서 그를 영원히 설화의 주인공으로 남게 한 것이다.

'온달'이 아니라 '고승'이다!



온달이 하급 귀족 출신이라는 주장 외에도 그의 출신에 관해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중에서도 온달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승'장군이라는 독특한 견해가 눈에 띈다. 고승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고구려젼」제8권 영양왕 조에 나온다. '영양왕 14년(603)에 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게 했는데, 신라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왔고 성 안에서는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서로 응했다. 고승은 신라는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두려워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온달전」에는 신라에 빼앗긴 계립현과 죽령을 되찾기 위해 온달이 출정한 시기가 "양강왕이 즉위함에 미쳐"라고 기록돼 있다. 대개 역사학자들은 영양왕 1년쯤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영양왕 14년에 신라 정벌에 나선 고승을 온달로 보는 주장은 파격적이다. 하지만 「온달전」의 연대 표기가 정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온달이 고승이라는 주장은 온달이 출전한 사냥대회는 평원왕 19년 이전의 어느 해라고 추측한다. 이는 온달이 공을 세운 전쟁 상대국인 북주가 평원왕 19년에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온달이 북주와의 전쟁에 출전한 시기는 당연히 그 이후에 해당한다. 또한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출전한 사실과 관련해 『삼국사기』「본기」에 고구려와 신라가 벌인 이 전투에 대해 아무 기록도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구려본기」에 실린 내용으로 보아 온달이 전사한 싸움은 영양왕 14년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에 덧붙여 온달이 대형이라는 벼슬을 받은 뒤 신분이 고귀하게 되었으므로 고씨(高氏) 성을 하사 받았고, 전쟁에 승리한 무공의 대가로 이름을 승(勝)으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내놓았다.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임금이 성을 하사하는 사성(賜姓)의 관습은 삼국 시대에 자주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전혀 억측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고승이 온달이라는 주장은 아차산 답사 때 안내를 맡은 김민수 선생의 견해이기도 하다.



온달이 고승장군이라는 견해는 온달이 신라에게서 되찾으려 했던 지역이 어디였는가, 또는 온달이 전사한 곳이 어디였나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김 선생은 아차산이 온달의 전사지라는 근거로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온달은 신라 정벌을 영양왕에게 주청하였으므로 그는 평양(당시의 長安城)에 머물렀던 게 틀림없다. 둘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와 고석정비(孤石亭碑)가 시사하듯, 신라의 북쪽 경계는 경비 태세가 확고해서 고구려가 한강 하류에 있던 신라의 중심부를 정벌하기 위해선 기습 작전을 감행하여 단기간에 승패를 결정지어야 했다. 그래서 온달은 광개토왕이 한성 백제를 공략한 방법대로 수군 작전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나중에 평강공주가 평양에서 아차성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한걸음에 당도했다는 기록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급박한 전쟁터에 평강공주가 와서 온달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온달이 남한강 상류의 단양에서 전사했다는 추정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 선생은 평강공주가 죽은 온달에게 달려온 부분을 설화적 요소로 여기는 듯했다. 관점의 차이는 이렇게 선명했다. 토기나 기왓장에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이 논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이다.



3. 스무 가지 온달, 서른 가지 온달



춘설 속에 갇힌 온달산성에서




온달산성은 아차산성과 더불어 온달의 최후 격전지 여부를 놓고 다투는 곳이라 기대가 컸다. 더구나 온달 전승지(傳承地)가 곳곳에 널려 있다고 하니, 잘만 하면 온달 이야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설화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담아온 자료를 되새겨보았다. '온달산성 : 충북 단양군 영춘면(永春面) 하리(下里)에 있는 삼국 시대의 석축산성. 사적 제264호. 1979년 지정.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옛 석성(石城)이다.' 춘삼월 온달산성은 눈 속에 갇혀 있었다. 지형을 따라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남한강 줄기와 영춘―단양 간 도로, 아득히 펼쳐지는 소백산 산줄기. 누구든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 처음에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말을 잃고, 그 다음에는 1,000년 넘은 역사의 저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할말을 잃는다는 어떤 이의 말이 떠올랐다. 아차산성이 생각났다. 얼마 전까지 연구자들은 『삼국사기』기록을 토대로 아차산성을 백제성으로 단정해왔다. 그러나 2003년 3월 서울시 문화국은 '아차산에서 고구려 유적인 것은 아차산 1~4보루, 용마산 1~2보루, 홍련봉 1~2보루, 망우동 1~2보루뿐이고 결국 아차산성은 신라성'이라 발표했다. 단양의 온달산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에 대한 논쟁도 아직 진행 중이다. 다만 온달산성의 모양으로 보아 남쪽의 영주(榮州) 방면을 방어하기 위한 성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온달산성은 신라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점이 증명된 셈이다. 문제는 이런 요소가 고구려성임을 완전하게 입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삼국 시대에 축성된 성이라는 데만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만약 온달의 출정을 확인해줄 명문 자료나 유물이 발굴되면, 온달의 전사지를 비롯하여 온달의 사실성을 둘러싼 길고 긴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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