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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김태완 지음 | 소나무
<책문을 읽기 위해> 책문, 왕과 세상을 향한 목소리

과거로 왕의 정치적 파트너를 뽑다 : 왕정국가에서 왕은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 가장 정점에 있는 주체이다. 신하들은 개인이나 당파의 이해에 관심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왕은 국가 전체의 이해를 생각한다. 국가의 안위가 곧 왕실이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유능하고 정직한 정치적 파트너로서의 관리가 필요했다. 과거는 이런 관리를 뽑기 위한 가장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949~975) 때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958년에 처음 실시되었다.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모든 관리선발의 기초가 되었다. 과거시험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다. 문과는 다시 소과와 대과로 나뉜다. 사서오경을 시험하는 생원과와, 시와 부 등의 문장력을 시험하는 진사과가 있다. 하지만 소과에 급제한 사람이 정식으로 고급관리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과를 보아야 한다. 대과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간지로 자子가 들어가는 해부터 3년마다 정식으로 치르는 식년시式年試, 나라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증광시增廣試, 그리고 임금이 공자와 선현들을 모신 문묘를 참배하고 나서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謁聖試 등의 별시가 있다. 알성시처럼 하루에 치르는 시험을 빼고는, 식년시나 별시의 최종시험에서는, 반드시 책문을 지어서 합격해야 한다.



부, 표, 책문 : 부란 미사여구를 대구 형식으로 현란하게 구사하면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한문학의 한 장르이다. 표는 원래 임금에게 자기 생각을 건의할 때 쓰는 글이다. 시사적인 일을 논하거나 간언할 때, 남을 추천할 때, 특별한 공을 세웠을 때, 탄핵을 할 때도 쓰였다. 대책이라고도 하는 책은 '책략'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험으로 나온 문제에 대해 '대책과 정략'을 진술하는 글이다. 시험문제는 왕이나 왕을 대리한 관리의 명령으로 제출되고, 답안은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형식으로 쓴다. 그래서 책문은 전체적으로 문답체를 띠고 있다. 질문과 대답의 주제는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방면에 두루 걸쳐 있다. 따라서 과거라 하면 책문의 진술이 주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책문은 한 무제 때 지방수령들의 추천으로 뽑힌 인재를 임용하려고, 대책을 물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렇게 추천된 사람들은 진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능력에 맞게 등용했다. 왕 앞에서 치르는 최종시험인 전시殿試 등 10과목 가운데 한 편을 출제하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책이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고 한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 책문은 무엇보다도 정치 현안의 문제를 묻고 대답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고,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인 시무時務를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책문의 형식은 아주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최종시험인 전시의 경우,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王若曰)." 라고 시작한다. 답안은 먼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 라는 말로 시작해, 마지막으로는 다시 한번 "보잘것없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고 두렵지만,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臣謹對)." 하는 말로 끝맺는다. 책문은 정해진 형식 가운데서도 자기 생각과 자기 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자의 개성과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책문에는 과거시험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정치 주체로서의 지식인이 지닌 사회적 책임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대책을 진술하는 선비는 자기를 재상이라고 가정하고, 자기라면 이러저러하게 왕을 보필해 이러저러하게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진술했던 것이다. 책문은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고, 시대의 부조리에 반항하며,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려는 시대의식의 투영이었다.





<책문>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546년, 명종 1년 증광문과옛날부터 모든 군주가 정치를 잘 해서 나라가 편안하기를 바랐지만 언제나 위태로워지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다. 또한 군주의 입장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대책> 진리를 탐구하고, 소인을 가려내야 합니다 - 노진(1518~1578, 중종 13~ 선조 11) :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전하께서는 안락에 빠지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면서,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리고자 힘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을 대궐의 뜰에 나오게 해서, 특별히 치란과 안위의 원인, 그리고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 어려운 점을 책문으로 내셨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복입니다. 저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학문의 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정치의 길은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먼저 진리를 탐구하지 않고서는, 정당하게 사람을 쓰거나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노력을 다하고서, 현명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분별하는 데 실패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이 둘을 마땅히 제일 먼저 해야 합니다. 충실하고 믿음직한 선비를 널리 구해, 전후좌우에 두고 자문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아, 치란과 안위의 원인을 고찰하고, 시비와 득실의 기준을 분별해야 합니다.



오래 전부터 저는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언젠가는 한번 대궐 섬돌에 나아가 어리석으나마 충성을 바치겠노라 생각해왔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기 위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겠다고 다짐하시니 임금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을 근거로 거칠게나마 조심스럽게 생각한 다음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오직 시초를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처럼, 처음부터 바르게 키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은 소공이 성왕을 훈계한 말입니다.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처음에 시작부터 잘 해야 합니다. 반드시 전하께서는 학문을 강론해 사리가 밝아지고, 진리를 탐구해 본성을 모두 발휘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신하들의 간사함과 정직함을 분별하고, 안위의 근원을 살피셔야 합니다. 또한 날마다 늘 처음 마음먹었을 때처럼 신중하게 하셔서, 털끝만큼도 하자나 얽매임이 없이, 밝고 순수하게 다스리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국가는 크게 융성해질 것이고, 백성은 크게 행복해질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책문 속으로> 사화의 흔적들, 군자를 찾아서 : 이 책문은 노진이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서 제출한 대책으로 보인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에 태어나서 1578년(선조 11)에 죽었다.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시호는 문효文孝, 본관은 풍천 川이다. 1537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부모를 봉양하려고 지방관을 자청했는가 하면, 청백리로도 이름이 났다. 책제는 한 구절만 남아 있어서 전문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책을 통해 질문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치란과 안위의 원인은 무엇이며, 군자와 소인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그리고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희생된 뒤,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오라비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로 사림은 다시 한번 크게 좌절을 겪었다. 중종에서 명종 초에 이르는 시기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공신과 척신간의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이 권력다툼이 사화로 발전하면서 국가의 정기를 뒤흔들어 놓았던 시기였다.



<책문>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 1515년, 중종 10년 알성시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만일 누가 나에게 나라를 맡아 다스리게 한다면, 1년이면 그런 대로 실적을 낼 것이고, 3년이면 정치적 이상을 성취할 것이다."하셨다. 아마도 공자께서는 정치를 하기 전에 반드시 정치의 규모와 시행하는 방법을 미리 정해놓으셨을 것이다. 나는 덕이 부족한데도 조상들의 큰 기업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잘 다스리기를 원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기강이 아직 서지 않고 법도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공자의 가르침을 배운 그대들은 모두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려는 뜻을 품고 있을 테니, 뜻이 단지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는 데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 이상적인 정치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이에 대한 대책을 남김없이 논해보라.



<대책>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 조광조(1482~1519, 성종 13~ 중종 14) :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임금과 백성은 근본이 같으므로, 임금의 다스리는 도가 백성에게 적용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는 마음이 아니면 깃들어 있을 곳이 없고, 마음은 성실이 아니면 작용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처럼 부지런하고 땅처럼 순응하는 덕을 지니고, 끊임없이 힘쓰고 계십니다. 다스리는 마음이 이미 정성스럽고, 다스림을 행하는 방법도 이미 바로 섰습니다. 그런데도 성균관에 오셔서 성인을 참배하는 예를 드리는 길에, 저희들에게 대책을 묻는 시험을 내셨습니다. 감히 보잘것없는 생각이나마 마음을 다해 귀하신 물음에 만 분의 일이라도 성의껏 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공자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천만 사람을 상대하자면 상대해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고, 한 가지 일로 천만 가지 일을 처리하자면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번잡합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에 보편적인 도를 가지고 나와 하나인 천만 사람을 이끌고, 온 세상에 공통된 마음을 가지고 나와 하나인 천만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야 합니다. 도와 마음이 성실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나뉘는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본래 가지고 있는 도로써 사람을 이끌었기 때문에 효과를 쉽게 얻을 수 있었고,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써 감화시켰기 때문에 효험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짊(仁), 의로움(義), 예의바름(禮), 지혜로움(智)의 도가 온 세상에 바로서면, 정치의 규모와 시행하는 방법을 정하는 데 더 이상 덧붙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성한 때도 있고 쇠퇴한 때도 있지만, 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법도와 기강을 세우는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정치원리를 잘 아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에 근본에 속하는 일과 말단에 속하는 일을 구별해서, 먼저 근본을 바로잡습니다. 근본이 바르면, 말단을 다스리는 문제는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근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도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고, 마음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성실하게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법도와 기강의 큰 줄기를 세웠다면, 이제는 대신에게 정권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군주가 홀로 정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군주가 혼자 정치의 책임을 떠맡고 대신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정치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셋째, 오늘날의 급선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 거칠고 무식한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공자가 나라를 다스릴 방법은 '도를 밝히는 것(明道)'이고, 학문으로 삼은 것은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謹獨)'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둡고 은밀한 곳은 신하들이 보지 못해도 자신은 볼 수 있으며, 미세한 일은 신하들이 듣지 못해도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제왕들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고 두려워했으며, 늘 도를 밝혀 어둡지 않게 했습니다. 이처럼 남이 모르는 은밀한 가운데서 더욱 조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낌새가 드러나려고 하면 털끝만큼이라도 거짓과 속임수가 싹트지 못하게 하고, 온전히 의리가 드러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 또한 완전히 선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기강을 세우고 법도를 정하는 근거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밝히는 것'과 '혼자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을 마음 다스리는 요체로 삼고, 그 도를 조정에도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설 것이며, 법도도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공자가 3달 만에 실적을 냈고, "3년이면 성취할 수 있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임금님의 위엄을 무릅쓰고 감격을 이기지 못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책문 속으로> 조광조, 좌절된 개혁의 안타까운 기억 : 이 책문은 조광조가 1515년(중종 10) 알성시에서 제출한 것이다. 조광조는 1482년(성종 13)에 태어나서 1519년(중종 14)에 죽었다.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는 정암靜菴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본관은 한양이다. 1510년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1515년 알성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도학정치를 표방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다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당했다. 이 사화로 조광조를 필두로 정계에 진출하여 참신한 정치를 펼치려던 사림마저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는 이후 조선의 이상적인 정치이념이 되었다. 책제는 공자의 업적을 평가하고, 오늘날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대책을 진술하라는 것이다. 사실 중종은 반정세력에 떠밀려 억지로 추대된 왕이었던 만큼, 전혀 준비되지 않은 군주였다. 따라서 중종으로서는 반정세력이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지만 동시에 부담이기도 했던 것이다. 반정 후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기강이 서지 않고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토로에는, 명목상 국정운영의 책임자이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중종의 고충이 잘 드러나 있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고 도를 실천해서 기강과 법도를 세울 것, 기강과 법도가 확립되면 대신을 믿고 정치를 맡길 것, 늘 마음을 수양하여 도를 따를 것을 주장한다. 조광조의 대답은 비록 원론적이긴 하지만, 군주의 일관된 개혁의지와 확고한 정치이념이 국정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칙 없는 개혁, 원칙을 자꾸만 수정하는 개혁은 오히려 시도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책문>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위기를 구제하려면 - 1609년, 광해군 1년 증광문과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보잘것없고 어두운 사람인데 조상의 나라를 계승해, 깊은 못에 가까이 간 듯 살얼음을 밟는 듯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온 지 30여 년이나 되었다. 임진년에 겪은 난리는 차마 입에 담기에도 처참하다. 그러나 아직도 바닷가 변방에는 흉악한 무리들이 늘 출몰하면서 위협하고 있으며, 7년간의 전쟁으로 8도가 텅 비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전란의 뒷처리를 잘하기 위한 계책이 꼭 필요한 때이다. 그대들은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할 높은 식견과 탁월한 견해를 갖고 있을 테니, 대책에서 모두 펼쳐보라.



<대책> 겉만 번지르르한 10가지 시책들을 개혁해야 - 조위한(1567~1649, 명종 22~ 인조 27) :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것은 비록 기운의 변화에 달려있지만, 부흥하거나 쇠퇴하는 것은 정치의 득실에서 비롯됩니다. 이미 망한 나라를 되돌아보면서 앞날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까닭은, 모두 낡은 제도와 인습적인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대상황에 맞게 바꿀 것은 바꾸고 계승할 것은 계승하며, 사회변화의 추세를 살펴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운명을 새롭게(維新) 개척하는 것입니다. 궁벽한 바닷가 한쪽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에서 삼국시대까지, 나라가 분열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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