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좋아 산에 가네
김경호 지음 | 북라인
배례석 - 깨달음으로 가는 자리탑이 우뚝하니 시선은 자꾸 위로만 향한다. 이 때문에 탑을 바라보는 이의 발치에 지면과 거의 같은 높이로 묻혀 있는 돌은 자칫 놓치기 쉬운 돌이 배례석이다. 맨 땅에 엎드려 절하며 옷 버리지 말라고 절하는 위치에 돌을 놓았다. 돌 표면에는 연꽃을 새겼다. 탑에 절하는 이들, 법당에 들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이곳에서 절을 올렸다.
어떤 믿음이 돌 위에 엎드려 절하게 만들었을까? 믿음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말도 없다. 믿음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집단이 공유하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 믿음 또한 결국 개개인이 자각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니다. 믿음은 또한 내면의 문제다. 그래서 믿음은 종종 불합리나 독단과 혼동되거나 동일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논리성을 벗어난 믿음은 그야말로 제멋대로가 아닌가. 인간은 잘못된 믿음 속에서도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불합리한 존재다. 믿음 속에서는 고난조차도 행복이고, 고통 조차도 구원이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
참된 믿음은 관념이 아니다. 절실한 체험이다. 보살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믿음의 단계다. 믿음이란 남이 무엇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내가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여 올바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온갖 선법을 길이 기르며, 의망(疑網)을 끊고 애욕의 흐름에서 벗어나 열반의 무상도를 드러낸다."
도의 근본이고 공덕의 어머니라는 의미는 바로 인과의 이치, 즉 연기의 법칙성을 의미한다. 착한 씨앗을 뿌리면 착한 열매를 얻고, 나와 남은 서로 의지해 존재한다는 연기의 법칙성을 바로 아는 것이 믿음이다. 인과응보나 연기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으로 그렇다고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맹목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전 존재를 던지는 신뢰다. 당연하기 때문에 수긍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신뢰한다. 이것은 다른 어떤 의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순수한 첫마음이다. 이 순수한 첫마음이 바로 깨달음을 이루는 첫걸음이다. 배례석 위에 엎드려 부처님에게 절하는 순수한 그 마음이 깨달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1. 구도의 길
안거 - 90일간의 수양 정진안거는 산스크리트어의 '바르사(varsa)'를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장마비가 내리는 우기를 뜻한다. 인도는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가 3개월 동안 계속되는데, 이 시기에는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출가유행의 생활을 하는 수행자들이 돌아다니며 수행하기가 무척 어려워지는 까닭에 부처님은 비 내리는 여름 90일 동안 안거에 들게 했다. 돌아다니기가 불편하고, 자신도 모르게 자라나는 초목과 벌레들을 밟아 죽일 수도 있어, 가급적 일정한 장소에 머물며 오로지 연구 수양 정진에 힘쓰라는 뜻이었다.
이 90일 동안 비구들은 승원이나 암굴, 작은 방, 통나무 속 같은 곳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이상이 모며 안거를 하는데, 안거하는 동안 비구들은 외출을 엄격하게 삼가야 한다. 1년에 한 번뿐이었던 안거 전통은 추운 지방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겨울 안거가 추가되었다. 여름 안거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겨울 안거는 10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 각각 90일 동안 행해진다. 이 기간에 수행자들은 외출을 엄격하게 삼가며, 일정 장소에 머물러 오로지 수행 정진에 힘쓴다.장좌불와(長坐不臥) - 자지도 눕지도 마라스님을 스님답게 만들고 스님의 멋을 저절로 풍기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선방에서 참선을 많이 하는 것이다. 선방에서는 동안거 기간 중 부처님 성도재일(成道齋日, 석가가 도를 깨우쳤다는 음력 12월 8일을 기념하는 날)을 앞두고 일주일간 철야정진을 하게 된다. 수면을 거부하고 눕지도 않는 장좌불와로 일주일을 용맹정진하는 것은 부처님이 히말라야 산에서 6년간 고행하시던 것을 본받는 것이다. 이때가 동안거의 가장 큰 고비가 된다.
장좌불와 기간 동안에는 졸음과 싸우면서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를 잠깐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잠을 쫓기 위해 얼음장 같은 개울물로 세수도 해보고, 찬 겨울 공기를 마시면서 경쟁을 해보기도 한다. 선방 스님들이라고 해도 이 일주일을 무사히 넘기기는 힘들다. 이렇게 일주일을 정진한 후에는 산행을 한다. 눈 덮인 겨울 산을 지친 몸을 이끌고 등산한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몹시 앓는다. 술꾼들이 해장국을 마시듯, 한계에 이른 몸의 긴장을 산행으로 풀어야 한다. 음력 정월 보름의 동안거 해제는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친 스님들이 공부를 끝내는 날이다. 그 중에서 조사(한 종파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펼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의 법을 잇는 선지식들이 나온다.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분명히 열반은 있고, 또 열반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그것을 가르치는 나도 있건만 사람들 가운데는 바로 열반에 이르는 이도 있고 못 이르는 이도 있다. 그것은 나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는 다만 그 길을 가르칠 뿐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길을 부지런히 따라간다는 것이다. 오직 수행을 통해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다.울력 - 노동을 통한 수행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에는 손 하나가 아쉽다. 절도 마찬가지다. 선종 사찰의 전통에 따라서 직접 농사 짓는 절이 아직도 많다. 농사일이 바쁠 때에는 각 방에서 공부하거나 참선하던 스님들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면 모두 손을 놓고 한데 모인다. 이렇게 대중이 함께 모여 하는 일을 울력이라고 한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밀짚모자 눌러 쓰고 땀 흘려 일하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수행이면서 작물을 길러내는 땅의 은혜, 보시해주는 불자들의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다. 농사일뿐만 아니라 봄부터 가을까지 큰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겨울에 들어서서 하는 김장도 온 절의 대중이 모두 모여 함께 일해야 한다.
수행자는 일하지 말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그 무렵의 일은 대부분 농사를 의미했다. 농사를 짓다 보면 불가피하게 흙 속에 사는 벌레들을 줄일 수밖에 없다. 살생 죄를 짓는 것이다. 또 일을 하게 되면 수행에 전념할 수 없는 탓에 수행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삼가야 했다. 남방 불교는 이런 전통을 충실히 따라서 지금도 수행자들에게 어떤 일도 못하게 한다. 일뿐만 아니라 돈도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계율은 북방으로 전래되면서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남방 사람들처럼 수행자들에게 아침에 먹을 것을 주는 법이 없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초기에는 왕실과 부유층이 사원 경제를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뒤늦게 출발한 선종은 이런 관습을 거부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백장회해 선사는 선종 사찰의 생활 윤리인 청규를 지어 공동 노동을 의무화했다. 그는 사찰 토지 경작에 솔선수범했고, 그가 정한 노동의 원칙은 지금 북방 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울력이라는 공동 노동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 절의 공동 노동도 선불교의 전래와 역사를 같이 한다. 탁발로 먹을 것을 해결하던 남방의 불교가 추운 북쪽 지역으로 전래되면서 경작을 통한 자급자족의 노동 윤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여러 차례의 법난을 거치며 지나치게 호화로운 불교에 대한 반감과 공격이 있을 때 선불교는 검박한 생활 태도와 노동 윤리를 통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것이 선불교가 중심이 되어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아닐까?염불 - 열 가지 공덕을 부르는 소리절에서는 특별히 부처님을 생각하고 소리내는 염불 수행을 자주 한다. 염불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보적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날마다 여래의 이름과 공덕을 일컫는다면 이런 중생은 능히 어둠을 떠나 점차로 온갖 번뇌를 불살라 버릴 수 있으리라." 인간의 의식은 저 밑바닥의 잠재의식까지도 항상 움직이며, 외부의 사물과 자극에 대응한다. 번뇌가 싹트게 마련인 산란한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서 오히려 일정한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자극에 대한 반응을 차단한다. 이것이 소리를 통한 명상법이다. 염불도 이런 수행법의 한 가지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적이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이름과 공덕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름은 그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일체 중생을 건지겠다는 서원을 표현한 것이며, 부처님의 공덕은 중생의 고난을 구제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염불은 부처님의 맹세를 본받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다짐과 중생은 반드시 구제된다는 확신을 내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2. 공간에 담긴 정신
도량석(道場釋) - 새벽을 여는 심연의 소리절의 하루는 도량석으로 시작된다. 모두 깊이 잠든 새벽 3시에서 4시가 도량석 시간이다. 도량석을 통해 삿된 기운은 물러가고 주변은 깨끗이 정화된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기운이 이곳 도량에 찾아들어 부처님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세상을 열고 하루를 여는 거룩한 의식을 통해 절은 청정한 불국정토로 완성된다.
절 마당을 천천히 돌며 목탁 소리에 맞춰 경전을 낭송한다. 또 모든 중생의 구원을 위해 불전사물을 힘차게 울린다. 혹시 깊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 방이 있다면 목탁채로 문살을 긁으며 지나간다. 절의 대중은 도량석 소리를 듣고 모두 잠자리에서 일어나 새벽 예불을 준비한다. 도량석이 끝남과 동시에 대웅전 법당에서는 아침 종송(종을 치며 게송을 부르는 일)이 시작된다. 도량석과 종송이 진행되는 동안 스님과 신도들은 세면을 한 후에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에게 삼배 드리고 자리에 앉아 조용히 예불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많은 사람들의 체험에 의하면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새벽 시간은 하루 중 명상하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한다. 경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새벽 숲길을 명상하면서 거닐었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그래서 절에서는 어둠이 가장 짙은 새벽에 일어나 도량석을 올리고 새벽 예불을 드린다. 예불 자체가 자신을 소중히 돌보는 수행이기도 하지만, 예불 후 아침 공양을 할 때까지의 새벽 시간은 수행자로서 자신을 성찰하고 정진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도량을 청정하게 하는 소리와 부처님에 대한 예경 의식을 통해 절은 이 세상의 번뇌와 고통이 소멸한 청정한 불국정토가 된다. 이 공간 속에 들어오는 이들은 평안을 얻고, 여기에서 정진하는 이들은 깨달음을 얻는다.풍경 - 자연을 닮은 소리한낮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상쾌한 바람이 분다. 땡그렁 풍경 소리가 울린다. 풍경은 건물 처마 네 귀퉁이에 달아 놓은 작은 종을 말한다. 풍경은 울리는 사람이 따로 없다. 구리 조각을 물고기 모양으로 잘라 풍경에 매달아 놓으면 그 물고기가 헤엄치며 노닐다 바람을 만나 크게 흔들린다. 그러면 물고기를 매단 줄 위에 달린 작은 추가 풍경을 두드린다. 작지만 맑은 소리가 울린다.
왜 하필 물고기일까? 물고기는 눈꺼풀이 없어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언제나 눈을 뜬 물고기처럼 수행자는 수행에 집중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풍경이 언제 울릴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깨달음의 순간도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정진해야 한다. 물고기가 매달린 풍경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불교 문화 유산이다.
절에 있는 건물이나 불상, 탱화와 같은 조형물에는 모두 신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풍경에는 별다른 신앙적 의미가 없다. 그저 장식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없으면 허전하다. 절의 처마 끝에는 응당 풍경이 달려 있어야 한다. 요란하지 않은 풍경 소리는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처럼, 계곡을 흐르는 물 소리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머문다. 사람이 만든 작은 종에서 나는 소리지만 자연의 소리로 녹아들었다.3. 생활 속의 하심
삭발 - 마음밭의 잡초 베기머리털을 무명초(無明草)라고 부른다. 무명은 중생의 번뇌이며, 이는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자라는 잡초와도 같다. 이 때문에 출가하면 머리를 깎는다. 세상과 인연을 끊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이제 더 이상 속세의 욕망에 허덕이면서 번뇌에 시달리며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옛날 중국에 단하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 단하 스님이 처음 석두 스님의 문하에 출가하여 2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스승 석두 스님이 "내일 아침 죽 공양을 마치면 법당 앞의 한 무더기 우거진 풀을 깎아 버려라."라고 했다. 이튿날 새벽에 다른 행자들은 제각기 낫과 괭이를 들고 나왔는데, 단하 스님만 삭도(머리를 삭발하는 칼)와 물을 가지고 와서 석두 스님 앞에 꿇어앉았다. 이에 석두 스님이 웃으면서 머리를 깎아주었다고 한다. 석두 스님의 본뜻이 제초 작업이었는지, 아니면 단하 스님의 해석 대로 삭발을 시키려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은 번뇌이며, 청정한 마음 밭을 어지럽히는 잡초라고 여긴다.
하지만 머리털을 깎아버리는 불교의 풍습은 인도에서도 부처님 교단만의 특이한 제도였다. 그런데 왜 머리를 깎을까? 삭발한다는 것은 세속을 부정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속을 부정한 것조차 다시 부정한다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다시 출세간의 고행을 짊어지는 이중의 의미와 같다.
그러나 세속을 부정하는 것이 곧 깨달음일까? 부처님을 일컫는 열 가지 이름 중 여래(如來)라는 호칭을 보면 그 의미가 생생해진다. 이 호칭은 부처님 스스로 자신을 일컫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아 1인칭 대명사인 듯하다. 제자들은 이 호칭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세존이나 스승이라고 불렀다. 세속의 번뇌를 떠난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래가 아니라 여거(如去)라고 해야 맞다. 떠나기 때문에 갈 거(去) 자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 돌아와야 할까? 떠난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중단이나 타락은 아닐까?
하지만 세속의 불완전과 고통이 깨달음이 아니듯, 세속을 부정하고 떠나는 것도 깨달음이 아니다. 서로 배척하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주장하지만, 결국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한쪽 면을 보는 동안에는 다른 면은 보이지 않지만, 그 다른 면이 없다면 보이는 면 또한 없다. 가꾸는 것도, 방치하는 것도 아니라 근심과 고통의 근원을 뿌리채 없애버리는 적극적인 태도가 삭발의 진정한 의미다.발우 공양 - 부처님의 식사법발우 공양은 부처님의 식사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발우 공양은 아주 단순한 식사법이다. 크고 작은 네 개의 그릇에 밥, 국, 반찬, 물을 자기가 먹을 만큼만 받아서 먹는다. 또 먹은 후에는 그 자리에서 씻어 버린다. 따로 음식 찌꺼기가 나오지 않으니 환경 문제도 없고, 바로 씻어 깨끗하게 하니 위생 문제도 걱정 없다.
그런데 초심자들에게는 이 발우 공양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자기 먹을 만큼만 덜어 먹으라고 하는데, 그 대목에서부터 막힌다. 자기 양을 모르기 때문이다. 두어 번 실패한 후에야 겨우 자기 양을 찾아먹는데, 이번에는 발우에 놓인 반찬 양이 밥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것 같아 고민이다. 그래서 절반 정도를 거의 맨밥으로 먹다시피 하다 반찬이 남게 되면 나중에는 짠 반찬만 실컷 먹게 된다.
그래서 불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발우 공양을 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음식에 욕심을 내다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넘치게 받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음식만 받는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몇 번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는데, 자기 생각보다 약간 부족한 듯 받는 게 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려운 교리를 백날 가르치는 것보다도 발우 공양 한 번을 통해 배우는 것이 더 많다. 고춧가루 하나라도 남기면 설거지물을 다 마셔야 하니 욕심을 부릴 수가 없다.4. 불화로 본 부처님의 일생
십우도(十牛圖) - 진리의 소를 찾아서절 구경을 다니다 보면 건물 외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동자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