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 사군자
하룻밤에 읽는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사군자 / 2002년 11월 출간 예정
서문
옛날 순(舜)임금은 요(堯)임금의 뒤를 계승하고는 12목(牧)들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목민(牧民)하게 하였으며, 문왕(文王)이 정사를 펼 때에도 사목(司牧)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 전국시대의 제나라의 읍)에 갔을 때에 목민(牧民)하는 것을 가축을 기르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이를 미루어 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것(養民)을 일러 목(牧)이라 한 것은 옛 성현(聖賢)들께서 남기신 뜻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에는 본디 두 가지의 길이 있거니와, 사도(司徒)는 모든 백성들을 가르쳐 각자로 하여금 수신(修身)하게 하였으며, 대학(大學)에서는 국자(國子)들을 가르쳐 그들 각자로 하여금 수신하여 치민(治民)하게 하였으니, 치민이란 곧 목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배워야 할 것은 수신(修身)이 반(半)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현들이 가신지 이미 오래고 그들의 말씀도 자취를 감추어 그 도(道)가 점점 흐려지니, 오늘날의 사목(司牧)하는 자들은 오로지 제 이익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르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파리하게 야위고 궁핍해지고 병들어 줄줄이 구렁을 메우는데도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에 진수 성찬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선친께서는 성조(聖朝)의 지우(知遇)를 받아 두 현의 현감(縣監), 한 군의 군수(郡守), 한 부의 부사(府使), 한 주(州)의 목사(牧使)를 지내셨는데, 어떤 직책에서나 업적을 이루셨다. 그 때마다 불초한 내가 따라다니면서 배우고 다소 들은 바가 있으며, 따라다니면서 보고 다소 깨달은 바가 있었고, 또 물러 나와 그것들을 시도해 보니 다소의 효과가 있었으나 이미 유락(流落)한 몸이 되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멀리 떠나와 귀양살이하기 18년 동안에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붙잡고 되풀이 연구하여 수신의 학문을 익혔으니, 이미 배웠다 하나 반(半)만을 배운 셈이다. 이에 23사(史)와 우리 나라의 모든 역사와 옛 성현들의 모든 저서에서 그 내용을 취하고, 역대의 사목(司牧)들이 목민한 자취에서 추려 상하(上下)로 그 근원을 추적하여 분류해서 차례로 맞추어 편(編)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오로지 음란한 글과 기괴한 구절들만이 세상에 판치니, 내가 쓰는 이 책이 어찌 전수되길 바라겠는가마는,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선인들의 훌륭한 말씀과 귀감이 되는 행적을 많이 익혀 자기의 덕을 쌓는다.”고 하였거니와, 이것은 진실로 나 자신의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인데 어찌 반드시 목민을 하는 일에 국한시키겠는가. 이 책을 『심서(心書)』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면서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명칭을 붙인 것이다. - 순조(純祖) 21년 신사(辛巳)년 늦봄 열수에서
율기 6조(律己六條)
율기 육조란 목민관이 자신을 잘 단속하고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기 위해 지켜야 할 여섯 가지를 말한다.제1조 바른 몸가짐(飭躬)
칙궁이란 자신을 스스로 타일러 경계하고 삼가는 것을 말한다.
일상 생활에 절도가 있고, 옷차림은 단정히 하며, 백성들에게 임할 때에는 장엄하고 정중하게 하는 것이 옛부터 내려오는 도(道)이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촛불을 밝히고 세수하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묵묵히 바르게 앉아서 신기(神氣)를 함양한다. 그리고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하여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놓고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의 차례를 결정한다. 제일 먼저 무슨 문서를 처리하며, 다음에는 무슨 명령을 내릴 것인가를 마음속에 분명히 정해 둔다. 그리고서 제일 먼저 할 일에 대하여 처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며, 다음 할 일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되, 모든 일에 있어서 힘써 사욕을 끊어버리고 한결같이 천리를 따르도록 한다.
술을 금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가무를 물리치고 공손하고 엄숙하게 하기를 큰 제사를 지내듯이 하며, 유흥에 빠져 정사를 어지럽히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정선은 이렇게 말하였다. “총명에는 한도가 있고 일의 기틀은 한이 없는데, 한 사람의 정신을 다하여 뭇 사람의 농간을 막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술에 녹아 떨어지고 여색에 빠지며, 시 짓고 바둑을 두느라 마침내 옥송(獄訟)이 해를 넘기고 시비는 뒤바뀌어 소송거리는 더욱 많아지고 일의 기틀도 더욱 번잡해질 것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 닭이 울면 일어나 정사를 처리하고 집안 일은 아예 물리쳐버리며, 주색 때문에 스스로 피곤하거나 행락(行樂)으로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어느 일은 처결해야 하고 어느 공문은 보고해야 하며 어느 부세는 가려내야 하고 어느 죄수는 풀어주어야 하는가 등을 때때로 살펴서 서둘러 처리해야 할 것이요, 내일을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고 처리되지 않는 일이 없고 자기 마음도 편안해질 것이다.”
시나 읊조리고 바둑이나 두면서 정사를 아래 관리들에게만 맡겨둔다면 매우 옳지 못하다.
광해군 때의 부사(府事) 남창(南?) 김현성(金玄成)이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렸는데 깨끗하게 직무에 봉사하여 청렴한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담백하여 사무 처리에 익숙하지 못하고 죄인 다스리는 것을 일삼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관아에 앉아 종일토록 시만 읊조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그를 두고 말하기를, “남창은 백성 아끼기를 자신같이 하는데도 온 경내(境內)에 원망이 가득하고, 털끝만큼도 범하는 일이 없는데도 창고가 바닥이 났다.”하여 한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제2조 청렴한 마음(淸心)
청렴은 목민관의 본무로 모든 선(善)의 근원이요 모든 덕(德)의 뿌리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관 노릇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상산록(象山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청렴에는 세 등급이 있다. 최상의 등급은 나라에서 주는 봉급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설령 먹고 남는 것이 있어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을 타고 아무 것도 지닌 것 없이 숙연히 떠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옛날의 ‘염리(廉吏 : 청백리)’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는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 남은 것을 집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중고시대의 ‘염리’라는 것이다. 최하로는 무릇 이미 규례(規例)가 된 것은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되 아직 규례가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먼저 전례를 만들지 않으며, 향임(鄕任)의 자리를 팔지 않고, 재감(災減)을 훔쳐먹거나 곡식을 농간하지도 않고, 송사와 옥사를 팔아먹지 않으며, 세를 더 부과하여 남는 것을 중간에서 착복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오늘날의 ‘염리’라는 것이다.
모든 나쁜 짓을 갖추고 있는 것은 오늘날 모두가 그러하다. 최상이 되는 것은 본디 좋지만,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다음이라도 좋다. 이른바 최하의 것은 옛날에는 반드시 팽형(烹刑 : 한나라 때 자주 행해지던 사람을 삶아 죽이는 형벌)을 당했을 것이니, 무릇 선을 즐기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목민관이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도적으로 손가락질하고 마을을 지날 때 추하다고 욕하는 소리가 드높을 것이니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선물로 보내온 물건은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은정(恩情)이 맺어졌으니 이미 사사로움이 행해진 것이다.
송나라 사도(査道)가 한 번은 관내를 순찰할 때 길가에 먹음직한 대추가 있었다. 수행원이 그 대추를 따서 사도에게 바쳤더니 그는 그 값을 계산하여 돈을 나무 위에 걸어놓고 떠났다. 송나라 두연(杜衍)이 이렇게 말하였다. “벼슬살이의 첫째 요건은 청렴이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라. 진실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 동료 중에 근신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참소하고, 윗사람이 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화를 당하기에 알맞을 뿐이다. 오직 묵묵히 실행하고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 좋다.”
제3조 집안을 다스림(齋家)
몸을 닦은 뒤에 집을 다스리고, 집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림은 천하의 공통된 원리이다. 고을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제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제 집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떻게 한 고을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의복의 사치는 뭇사람이 꺼리는 바이고, 귀신이 질투하는 바이니 복을 더는 길이다.
형공악(衡公岳)이 경양(慶陽)을 맡아 다스릴 때 동료의 부인들이 함께 모여 노는데, 그 자리에 모였던 부인들은 모두 금붙이와 비단으로 치장하여 화려하였지만, 공의 부인만은 나무 비녀에 베옷 차림일 뿐이었다. 모임이 끝난 후에 부인이 언짢아 하자, 공이 “그대는 어디에 앉았었소?” 하니 부인은 “윗자리에 앉았습니다.”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미 윗자리에 앉았으면서 또 좋은 의복에 화려한 치장을 바라니, 부귀를 함께 겸할 수가 있겠소.”하였다. 이 일화는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온다.
제4조 손을 물리침(屛客)
친척이나 친구가 관내(管內)에 많이 살면 단단히 약속하여 의심하거나 헐뜯는 일이 없게 하고 서로간의 좋은 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친척이나 옛 친구가 혹 그 고장이나 이웃 고을에 살고 있으면 한 번 초청하고 한 번 가서 만나되 때에 따라 선물을 보내면서 이렇게 약속해야 한다. “비록 날마다 만나고 싶지만 예(禮에)는 한계가 있으니 초청하기 전에는 절대로 보러 오지 말기 바란다. 편지 왕래도 의심과 비방을 살 염려가 있으므로 만일 질병이나 우환이 있어서 서로 알려야만 할 경우에는 몇 자의 편지를 쓰되 풀로 봉하지도 말고 직접 예리(禮吏)에게 주어서 정식으로 접수하게 해 공공연히 받아들이게 해주기 바란다.” 매양 보면, 친척들 중에 기회를 보아 청탁을 하다가 인심을 몹시 잃어서, 수령이 떠난 뒤에는 마치 강물은 흘러가고 돌(아전과 이속)은 남는 격이 되어서 뭇사람의 노여움이 빗발치듯하여 보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호대초는 이렇게 말하였다. “손과 친구들이 와서 놀기도 하고 알현하기도 하면 백성들이 서로 말하기를 ‘누구는 왕래가 매우 잦고 정담이 오래가는 것을 보면 정분이 두터운가보다’하고 이에 그 사람의 문전으로 몰려가서 청탁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심한 자는 이미 갑(甲)의 돈을 받고 또 을(乙)의 돈도 약속하고서 바삐 현재(縣齋)로 나아가 수령을 뵙고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훌쩍 물러와서 갑과 을에게 ‘이미 낱낱이 다 이야기했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뒷날에 수령이 그 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한편이 이기게 될 것이므로 그는 약속대로 돈을 받으면서 ‘이 돈은 동헌에 바칠 것이다’ 한다. 수령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누명을 쓰겠는가.”
제5조 절약(節用)
목민관 노릇을 잘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애로워야 하고, 자애로우려면 반드시 청렴해야 하며, 청렴하려면 반드시 절약해야 한다. 절약은 목민관이 맨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자는 한 고을을 얻기만 하면 방자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서 절제하는 바가 없다. 닥치는 대로 함부로 쓰니 빚이 많아지고 따라서 반드시 탐욕하기 마련이다. 탐욕하면 아전들과 공모하고 아전들과 공모하면 그 이익을 나누어 먹으며 그 이익을 나누어 먹으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짠다. 그러므로 절약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맨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순암(順菴) 안정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재물을 낭비하는 길은 항상 가족을 데리고 오고 가는 일과 손의 영접과 전송, 권세층과 교제를 하는 것, 기구를 만들고 진기한 보물을 수집하는 데에 있다.”
송나라 유안세(劉安世)가 마영경(馬永卿)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봉록이 박하니 수입을 따져서 지출해야 한다.” 동사의(董士毅)는 촉주 태수(蜀州太守)로 있은 지 십여 년 동안 겨우 베 도포 한 벌에 가죽신 한 켤레로 지냈다. 명나라 첨사(僉事) 왕기(王寄)는 벼슬에 있을 때 청백해서 옷이 헤어지면 종이로 기워 입었다.
사용(私用)의 절약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지만 공고(公庫)를 절약하는 이는 드물다. 공물을 내 것처럼 아껴야 어진 목민관인 것이다.
고을마다 반드시 공용의 재산이 있어 제고(諸庫)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이름을 공용이라 하여 설립하지만 그것이 차차 오래가게 되면 사용으로 지출되어 그릇된 관례가 겹겹이 생기고 절제 없이 낭비하게 된다. 그것이 본래 공용의 창고이기 때문에 수령이 살피지 않고 감독하는 아전과 창고를 맡은 종들이 온갖 방법으로 속여서 도둑질에만 뜻을 둔다. 재정이 바닥나면 또 거듭 거두어들이니 이는 각 도(道)의 공통된 폐단이다.제6조 기꺼이 베풂(樂施)
절약만 하고 쓰지 않으면 친척이 멀어지니, 베풀기를 즐겨하는 것이 바로 덕을 심는 근본이다.
절약하는 자는 베풀 수 있지만 절약하지 못하는 자는 베풀지 못한다. 기생을 가까이하고 광대를 부르며, 가야금을 타고 피리를 불게 하며, 비단옷을 걸치고 값비싼 말에 사치스런 안장을 얹고, 게다가 상관에게 아첨하고 권세 있는 귀족(權貴 : 권귀)들에게 뇌물을 쓴다면 그 비용이 날마다 수만 전이 넘을 것이며, 한 해 동안 계산하면 천억 전이나 될 터이니 어떻게 친척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 수 있겠는가. 절약은 베풀기를 즐겨하는 근본이다.
권문 세가를 후히 섬겨서는 안 된다.
권문 세가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서는 안 된다. 내가 은혜를 입었거나 혹은 의뢰하여 서로 좋게 지내는 사이에는 때때로 선물을 보내주되 먹는 것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아야 하며 그 밖에 초피(貂皮)?인삼?비단 같은 값진 물건들을 바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청렴하고 맑고 식견이 있는 재상은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를 비루하고 간사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며 혹 임금께 아뢰어 죄주기를 청하기도 할 것이다. 이는 재물도 손해를 보고 자신도 망치는 위험한 짓이다. 만일 그 재상이 뇌물을 받기 좋아하여 이로 말미암아 끌어올려 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요, 공론도 자신을 가리켜 그 사람의 사인(私人)이라고 하여 크게는 연루자가 되고 작게는 앞길이 막히게 될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해만 있고 이익이 없는 일을 무엇 때문에 굳이 하겠는가.
숙종(肅宗) 병자년(丙子年, 1669) 겨울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서 그의 처자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종일토록 하는 이야기가 한 마디도 나라의 계책이나 백성들의 걱정은 없고 오직 여러 고을에서 바치는 선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을 논하면서 어느 원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많다 한다. 이름 있는 관리들의 품평이 이와 같으니 외방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반드시 더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봉공 6조(奉公六條)
제1조 덕화를 폄(宣化)
목민관은 본래 은택을 입히고 덕화를 펴는 것이다.
동중서(董仲舒)는 「대책(對策)」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즈음 군수나 현령은 백성의 스승이요 지도자이니 그들로 하여금 은택(恩澤)을 입혀 덕화를 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령이 현명하지 못하면 임금의 덕을 선양하지 못하고 은택을 입히지 못합니다. 오늘날 관리들은 아랫사람을 교훈함이 없고, 혹은 주상의 법을 이어받아 쓰지 않고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하여 간악한 아전들과 부화뇌동하여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외롭고 약한 백성들은 생업을 잃게 되고 원통하고 괴로워하니 심히 폐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음양이 순조롭지 못하고 나쁜 기운이 충만하여 뭇 생령(生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백성들이 제대로 구제되지 못하니, 이는 모든 수령이 현명하지 못해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송나라 태종(太宗)이 각 지방에 계비(戒碑)를 세웠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네 녹봉은 백성들의 피와 땀(膏脂)이다. 아래로 백성을 학대하기는 쉽지만, 위로 하늘을 속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