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파괴
이거룡 지음 | 거름
1장 종교 없는 종교, 힌두교버스에서나 학교 교실에 자신의 자리를 정해주지 않아도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자신만의 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다른 자리에 앉게 된다면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어색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든 물건이든 처음 대하는 것에는 무언의 거부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쟁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생각이 들게 된다. 투쟁은 조화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했다. 조화가 있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말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좋다는 말이고, 좋다는 것은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가는 곳에 또 가고 싶어지는 것이 아닐까?
"인도는 종교의 나라라고 할 만큼 온갖 형태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에게 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모든 일과가 신과 관련되 어 있다고 할 만큼 하루 종일 종교적인 스케줄로 빡빡합니다."
인도인들은 모든 일과가 종교적인 스케줄로 가득 차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 보더라도 평생 300여 차례의 성례(聖禮)를 치러야 할 정도이다. 가령 출생과 결혼 혹은 장례는 물론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식을 먹거나, 처음으로 머리를 깎을 때, 처음으로 문지방을 넘어 바깥으로 나갈 때조차 치러야 할 성례가 있다. 또한 무용이나 음악 같은 예술 분야의 테마 역시 언제나 종교와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도에서의 신들은 쉽게 다가서지 못할 높은 곳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입장이라기보다 인간의 삶 속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처럼 인도 사람들의 삶은 지극히 종교적인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은 전혀 자신들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의 종교가 무엇인지 묻는 법도 없으며,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인도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 종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 인도 철학자인 라다크리슈난은 힌두교를 '인도인의 삶의 방식(Hindu way of life)'이라고 정의했다. 힌두교가 종교이면서 또한 삶의 방식이 된 이유는 힌두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특별한 창시자가 없고, 시원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공유하도록 강요되는 경전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 자체는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종교는 구원과 천국, 지옥 등의 피안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종교 자체가 목적으로 오해될 때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포교 혹은 전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힌두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신앙의 믿음을 강요하는 여타 종교들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점이다.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은 개종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데, 이는 힌두교 인들의 독특한 사유방식과 관련이 깊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결코 어떤 종교 하나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가 자신의 진리만이 유일하다는 독선에 빠질 때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종교와 종교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갈등은 심화되고 공존은 불가능해진다.
2장 다양성의 속의 통일저자가 인도의 바라나시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은 갠지스 강으로 유명한 곳인데 인도에서도 가장 인도다운 곳으로 인도의 온갖 다양한 측면과 무질서를 금방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수많은 인도인들과 외국 관광객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는 곳인데도 이곳의 차도에는 차선은 물론이고 중앙선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곳의 택시기사는 오히려 신호등이 생긴 이후로 훨씬 불편하고 차도 많이 막힌다고 불평을 했다. 차라리 신호등이 없을 때는 사람이든 차든 적당히 알아서 잘 다닐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그만큼 인도인들은 무질서에 익숙하다는 증거이다.
"자칫하면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질서가 사람을 지키는 꼴이 되거든요. 질서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도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겁니다. 틀에 짜인 질서 속에서 자유를 느낄 수도 있지만, 혼잡한 무질서 속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무질서와 질 서, 다양성과 통일성이 적당히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어요."
분단의 비극을 겪은 후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통일은 절대절명의 꿈이요, 희망이 되었다. 물론 원래 하나였던 조국이 둘로 갈라졌으니 다시 하나로 뭉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이라는 말을 '획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자칫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파괴한다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인도라는 나라가 수천 년의 긴 시간 동안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나'와 다른 존재들에 대한 유연성 때문이다. 조화란 '유일한 하나'의 존재로는 생각할 수 없는 단어이다. 하나밖에 없는데 무엇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인가? 너와 나의 하나됨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너와 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변화 속에 아름다움이 있듯이,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증거이다.
3장 체념과 초월의 경계여러분이 인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똥을 생각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요가를, 어떤 사람은 불교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인도와 정신세계를 관련짓는다. 뭐니뭐니 해도 인도는 역시 정신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저자가 막상 인도에 가보니 그곳에는 명상과 초월은 없고 오로지 체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현재 인도의 인구가 10억 가량 되는데 이 중에서 30퍼센트, 그러니까 약 3억 정도가 집 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태어나 길거리에서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는 사람 들입니다. 대개 구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어떤 거지는 돈을 줘도 고맙다고 안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적선할 기회를 주었으니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저자는 체념한 어느 거지에게서 초월의 모습을 보았다. 체념이 초월 같고 초월이 체념 같았던 것이다. 체념의 순간 사람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체념이 분명 바라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념하고 나면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체념이 편안함을 동반할 때 우리는 이것을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체념이 다 의미 있는 초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초월이 의미가 있으려면 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발적인 체념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은 단순히 사실의 인정에 그치지만, 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은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물리학에서의 에너지 불변의 법칙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선 버리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가난한 인도인들의 체념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에 더 가깝다. 인도사람들만큼 물질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고 하겠지만, 오늘날의 인도 사람들처럼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현재 외국인들이 인도의 문화와 전통에 대해 인도인들 자신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물질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한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4장 업과 윤회 그리고 운명업과 윤회는 인도 사상의 두 기둥으로서 이들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업과 윤회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도 인도종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업'은 업보라고도 하는데 이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뉘앙스를 풍긴다. 인도의 고대 경전 언어인 범어로 업은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카르마'는 '행위'라는 뜻이지만, 윤회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는 대개 '행위의 잠재력'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우리가 신체와 말과 생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잠재력 혹은 여력을 남기게 되는데, 이 힘을 우리는 업 혹은 업력(業力)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사실 업과 윤회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업이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책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업의 초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중적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업을 쌓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을 멸해가고 있다. 삶이 업의 결과라고 한다면 숙명론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이 현재와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업은 인간의 자기책임론을 강력하게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어느 운명을 선택할 것인지는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5장 깨달음에 이르는 길, 요가인도어로 '요가'는 넓은 의미에서 길(道)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해탈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해탈은 업을 끊고 윤회를 벗어나는 것인데,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요가인 셈이다. 요가는 원래 '결합하다', '멍에를 메다'라는 의미의 범어 동사 '유즈(yuj)'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몸과 마음을 결합하여 하나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몸과 마음이 하나된 개체가 궁극적 실재와 하나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요가는 결합을 의미하며, 결합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투쟁의 과정을 거친 평화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약속한다. 투쟁의 과정 없이 존재하는 평화 속에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경계심만 있을 뿐이다. 심심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요가는 바로 자유를 위한 투쟁인 셈이다.
요가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심지어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 문명에서 출토되는 테라코타에서도 요가자세를 취한 수행자가 발견되곤 한다. 요가를 가장 정통적이고 기본적으로 설명한 『요가 수트라』라는 책에서는 요가 수행의 여덟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우선 가장 먼저 윤리적인 준비단계를 거쳐 내외의 청정, 신을 향한 헌신 등을 권장하는 순서를 밟게 된다. 세 번째로는 어떤 요가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익히는 좌법의 단계이고, 네 번째는 호흡조절의 단계이며, 요가의 다섯 번째 단계는 수행자가 자신이 감관을 제어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준비과정이 끝나면, 다음 단계부터는 수행의 중점이 정신적인 영역으로 옮겨가는데 여섯 번째인 집지는 한정된 심적 영역에 마음을 한정시키는 것이다. 일곱 번째 단계는 정려(精慮)로서 이는 우리의 마음이 선택된 한 대상을 향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흐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요가의 마지막 단계는 삼매(三昧)이다. 『요가 수트라』에서는 이 단계를 '다만 명상의 대상에만 의식이 있고 마음 자체에는 없는 상태'라고 했다. 이 단계는 아마도 수행자가 명상의 대상이 지니는 깊고 오묘한 의미를 파악하여, 세계의 본질을 알게 되는 단계일 것이다.
6장 여자, 위험한 도구성욕과 식욕은 분명히 다른 차원이다. 욕구를 채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둘은 분명히 다른 차원에 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나의 욕구를 위해서 객관적인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섹스란 나 이외의 다른 인격체와의 합일을 의미한다. 이러한 합일은 적어도 누적된 상호 교감 끝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성교라는 게 뭡니까? 말 그대로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데, 이를 통하여 뭘 하 자는 겁니까? 아이 낳자는 거예요? 동물도 그건 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차원이 달라요. 단순히 쾌락을 얻자는 겁니까? 그건 굳이 인도까지 갈 것도 없이 미아리 텍사스에서도 얼 마든지 가능합니다."
인도미학에서는 미적 감각의 절정을 흔히 '아난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존재인 동시에 인식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기쁨과 쾌락은 결국 아난다의 다른 차원인 셈이다. 탄트라에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이 성교를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본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는 탄트라에서 남녀의 성교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흔히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인 것으로 대표되었다. 때문에 감성은 이성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자는 남자의 지배하에 있어야 안전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자가 단지 위험한 도구로 전락하는 배경에도 이런 생각이 딸려 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라는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단지 남성적인 측면이 강한 인간과 여성적인 측면이 강한 인간이 있을 뿐이며, 남자이고 여자이기 전에 똑같은 인격체일 뿐이다.
어떤 시대 혹은 어떤 사회든 몸에 대한 시각은 여성에 대한 시각과 일치한다. 몸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면 여성에 대한 생각도 부정적이고, 몸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이면 여성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이다. 우리는 지금 몸에 대한 풍성한 담론 속에서 살고 있으며, 예전처럼 몸을 무조건 옥죄고 억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편이다. 단지 문제의 초점이 예전에 억눌렸던 측면에 대한 반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발은 반발을 초래하기 때문이며, 남녀문제는 조화와 균형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7장 몸, 거룩함에 이르는 사다리이처럼 요즘 들어 '몸'이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우리 사회가 소와 레저 중심의 사회로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놀고 즐기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주도적이기 때문에 몸을 옥죄고 구속하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의 확산도 몸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 일조했으며, 과학 기술의 발달도 어느 정도 원인이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양 중심적인 사고로는 "몸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 몸과 마음, 감성과 이성이라는 이분법이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몸은 분명히 일반적인 사물과는 다른 차원이며, 그렇다고 나 자신도 아닌 것이다.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인간을 다섯 겹(kosa)의 동심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일 바깥에는 '음식으로 된 나'가 있어요. 이것은 물질적인 몸이라 할 수 있는데, 외부세계의 물질적인 대상들을 경험하고 향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안쪽에 생기는 '생기로 된 나' 가 있습니다. ... 다시 그 안쪽에는 의근(意根)으로 된 나'가 있고 이보다 내밀한 곳에 ' 식(識)으로 된 나'가 있습니다. 이 두 겹은 우리가 흔히 의식이라고 부르는 정식작용입니 다. 그리고 그 가장 안쪽에 '환희로 된 나'가 있어요."
이처럼 인도의 사상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몸은 서양의 심신 이분론과 완전히 다르다. 몸에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마음과 별개가 아니라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때문에 인도사상에서 몸은 비로소 그 본래의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거룩함에 이르는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인도나 힌두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편견이 허물어진다. 우리는 힌두교 하면 요가와 명상, 초월과 신비주의를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힌두교만큼 현실을 중요시하는 종교도 없다. 인도에서의 해탈은 반드시 죽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가지고 있는 현세에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세속의 삶을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탈로 이르는 사다리로 이해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사고 방식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소통이라는 자연스러운 진리가 지금에 와서야 화두로 떠오른 것은 어찌 보면 아직도 우리의 몸이 본래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