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파괴
이거룡 지음 | 거름
인도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예배를 드릴 때, 멀찌감치 떨어져서 합장만 하는 게 아니라 신으로 형상화된 무엇인가를 직접 만진다. 이마에 손을 대든, 턱이나 무릎을 만지든, '신'의 어딘가를 만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신과 자신과의 관계를 100% 신뢰하지 못한다.
이제 www.은 그야말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되었다.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과 사랑도 할 수 있고, 피부 접촉 없는 섹스도 가능하다. 현실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것들도 가능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무제한 때문에 자유로움은 물론 해방감까지도 존재한다. 그러나 가상공간을 통해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피부접촉이다. 접속과 접촉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의 진정성 문제에 대한 결론은 아직 유보되어야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상 현실이 결코 현실 공간의 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어우러져야 가상공간도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접속이 접촉을 대신할 수는 없다.시간 개념이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전통과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점이 있다.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대개 우리의 비판을 비켜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와 너무나 가깝게, 아니 우리가 시간 속에 녹아 있기 때문에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인식의 대상으로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금방 느끼게 되는 것이 시간개념이다.인도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대개 네 단계를 거치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하였다. 그 첫 단계(1-25세)는 금욕과 학습의 기간으로서, 이 기간에는 베가(경전)를 공부하고 카스트의 일원으로서 각자 해야 할 의무를 익히는 데 전념을 한다. 두 번째 단계(26-50세)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단계이고, 그 다음은(51-75세) 앞의 두 단계를 토대로 경제적인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임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76-100세) 숲에서 나와 운수의 길을 떠나는 시기이다.이는 인도 사람 개개인의 특성만은 아니다. 지구촌 전체가 세계화를 앞세워 경제개방을 앞다투어 실시할 때 인도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는 동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늦추고 또 늦추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견디다가 1990년대 중반에야 조금씩 개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시간의 개념상 빠르다는 것과 느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절대적으로 빠르고 느린 것이 있을 수는 없다. 인도 사람들이 우리 눈에 느리게 비치는 것은 단지 우리와 그들의 시간 개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들의 눈에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복잡하고 빠르게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서양의 기독교적 사고방식과는 달리 인도 사람들은 시간을 직선적인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이란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역사는 알파에서 시작하여 오메가로 나아가는 직선적 흐름이 아니라 생성, 유지, 파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관은 그대로 우주관으로 이어져, 우주 역시 유일무이한 것이 아닌 생성, 유지, 파괴가 수없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의 우주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인 것이다.
역사의 흐름이 퇴보라는 유가(yuga)설에 따르면, 우주의 순환은 크리타, 트레타, 느와파라, 칼리라는 네 유가를 한 단위로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첫 단계인 크리타유가 시대가 가장 정의롭고, 순수한 시대이고, 마지막 단계인 칼리유가 시대는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이다.
인도 사람들은 경험적인 시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시간의 흐름을 퇴보라는 측면에서 파악한다. 서양의 진화론과는 정반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칼리유가 시대는 다르마가 외발로 서있는 위태로운 상황으로, 이미 천여 년 전에 인도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갈 시대의 타락상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모두가 맹목적으로 '빨리빨리'를 추구한 치명적인 결과이다. 빨리빨리 지나올수록 우리는 절벽에 더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가변적이고 일회적인 인간관계의 핵심은 '성급함'과 '깊이의 상실'에 있다. 적어도 느린 것이 무조건 무능한 것으로 간주될 필요는 없다."마지막 단계에는 탁발이 모든 생계 수단이 되지요. 모든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주유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명상한 내용들을 현실 속에서 다시 몸으로 확인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있는 유행자(遊行者)를 흔히 산야신이라 부릅니다. 산야신은 스 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포기한 자라 할 수 있지요."힌두교인이라면 누구나 산야신이 되기를 원하다. 그들에게 있어 현실적인 욕망은 삶의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를 원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산야신이 되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부(富)와 몸의 욕망을 삶 속에서 이루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불교와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인데 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종교로서 처음부터 아예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지만, 힌두교는 출가하기 전에 먼저 세속의 삶을 체험하게 한다.
이와 같이 힌두교 전통에서는 욕망이란 무조건 억누르고 부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억누를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애욕이고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욕망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돈이 뭔지도 모르면서 돈에 대한 욕망을 버린다는 것은 모순이다."인도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네 단계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포기 의 철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삶을 통하여 애써 쌓아올리지만, 그것은 결국 버리기 위 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만이 버릴 수 있고 버리지 않는 한 가진 것은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각자의 고통이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라 는 것은 결국 버리지 못하는 자들의 고통이며, 또한 포기하지 못하는 사회의 병통이라 할 것입니다."분단의 비극을 겪은 후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통일은 절대절명의 꿈이요, 희망이 되었다. 물론 원래 하나였던 조국이 둘로 갈라졌으니 다시 하나로 뭉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이라는 말을 '획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자칫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파괴한다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인도라는 나라가 수천 년의 긴 시간 동안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나'와 다른 존재들에 대한 유연성 때문이다. 조화란 '유일한 하나'의 존재로는 생각할 수 없는 단어이다. 하나밖에 없는데 무엇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인가? 너와 나의 하나됨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너와 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변화 속에 아름다움이 있듯이,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증거이다.여러분이 인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똥을 생각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요가를, 어떤 사람은 불교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인도와 정신세계를 관련짓는다. 뭐니뭐니 해도 인도는 역시 정신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저자가 막상 인도에 가보니 그곳에는 명상과 초월은 없고 오로지 체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현재 인도의 인구가 10억 가량 되는데 이 중에서 30퍼센트, 그러니까 약 3억 정도가 집 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태어나 길거리에서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는 사람 들입니다. 대개 구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어떤 거지는 돈을 줘도 고맙다고 안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적선할 기회를 주었으니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저자가 인도의 바라나시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은 갠지스 강으로 유명한 곳인데 인도에서도 가장 인도다운 곳으로 인도의 온갖 다양한 측면과 무질서를 금방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수많은 인도인들과 외국 관광객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는 곳인데도 이곳의 차도에는 차선은 물론이고 중앙선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곳의 택시기사는 오히려 신호등이 생긴 이후로 훨씬 불편하고 차도 많이 막힌다고 불평을 했다. 차라리 신호등이 없을 때는 사람이든 차든 적당히 알아서 잘 다닐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그만큼 인도인들은 무질서에 익숙하다는 증거이다."자칫하면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질서가 사람을 지키는 꼴이 되거든요. 질서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도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겁니다. 틀에 짜인 질서 속에서 자유를 느낄 수도 있지만, 혼잡한 무질서 속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무질서와 질 서, 다양성과 통일성이 적당히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어요."3장 체념과 초월의 경계4장 업과 윤회 그리고 운명5장 깨달음에 이르는 길, 요가6장 여자, 위험한 도구7장 몸, 거룩함에 이르는 사다리8장 접촉과 접속인도인들은 모든 일과가 종교적인 스케줄로 가득 차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 보더라도 평생 300여 차례의 성례(聖禮)를 치러야 할 정도이다. 가령 출생과 결혼 혹은 장례는 물론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식을 먹거나, 처음으로 머리를 깎을 때, 처음으로 문지방을 넘어 바깥으로 나갈 때조차 치러야 할 성례가 있다. 또한 무용이나 음악 같은 예술 분야의 테마 역시 언제나 종교와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도에서의 신들은 쉽게 다가서지 못할 높은 곳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입장이라기보다 인간의 삶 속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처럼 인도 사람들의 삶은 지극히 종교적인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은 전혀 자신들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의 종교가 무엇인지 묻는 법도 없으며,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인도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 종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 인도 철학자인 라다크리슈난은 힌두교를 '인도인의 삶의 방식(Hindu way of life)'이라고 정의했다. 힌두교가 종교이면서 또한 삶의 방식이 된 이유는 힌두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특별한 창시자가 없고, 시원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공유하도록 강요되는 경전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 자체는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종교는 구원과 천국, 지옥 등의 피안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종교 자체가 목적으로 오해될 때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포교 혹은 전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힌두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신앙의 믿음을 강요하는 여타 종교들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점이다.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은 개종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데, 이는 힌두교 인들의 독특한 사유방식과 관련이 깊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결코 어떤 종교 하나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가 자신의 진리만이 유일하다는 독선에 빠질 때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종교와 종교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갈등은 심화되고 공존은 불가능해진다.업과 윤회는 인도 사상의 두 기둥으로서 이들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업과 윤회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도 인도종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업'은 업보라고도 하는데 이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뉘앙스를 풍긴다. 인도의 고대 경전 언어인 범어로 업은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카르마'는 '행위'라는 뜻이지만, 윤회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는 대개 '행위의 잠재력'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우리가 신체와 말과 생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잠재력 혹은 여력을 남기게 되는데, 이 힘을 우리는 업 혹은 업력(業力)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사실 업과 윤회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업이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책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업의 초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중적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업을 쌓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을 멸해가고 있다. 삶이 업의 결과라고 한다면 숙명론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이 현재와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업은 인간의 자기책임론을 강력하게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어느 운명을 선택할 것인지는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이다.성욕과 식욕은 분명히 다른 차원이다. 욕구를 채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둘은 분명히 다른 차원에 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나의 욕구를 위해서 객관적인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섹스란 나 이외의 다른 인격체와의 합일을 의미한다. 이러한 합일은 적어도 누적된 상호 교감 끝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봐야 한다."성교라는 게 뭡니까? 말 그대로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데, 이를 통하여 뭘 하 자는 겁니까? 아이 낳자는 거예요? 동물도 그건 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차원이 달라요. 단순히 쾌락을 얻자는 겁니까? 그건 굳이 인도까지 갈 것도 없이 미아리 텍사스에서도 얼 마든지 가능합니다."인도미학에서는 미적 감각의 절정을 흔히 '아난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존재인 동시에 인식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기쁨과 쾌락은 결국 아난다의 다른 차원인 셈이다. 탄트라에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이 성교를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본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는 탄트라에서 남녀의 성교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흔히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인 것으로 대표되었다. 때문에 감성은 이성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자는 남자의 지배하에 있어야 안전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자가 단지 위험한 도구로 전락하는 배경에도 이런 생각이 딸려 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라는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단지 남성적인 측면이 강한 인간과 여성적인 측면이 강한 인간이 있을 뿐이며, 남자이고 여자이기 전에 똑같은 인격체일 뿐이다.
어떤 시대 혹은 어떤 사회든 몸에 대한 시각은 여성에 대한 시각과 일치한다. 몸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면 여성에 대한 생각도 부정적이고, 몸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이면 여성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이다. 우리는 지금 몸에 대한 풍성한 담론 속에서 살고 있으며, 예전처럼 몸을 무조건 옥죄고 억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편이다. 단지 문제의 초점이 예전에 억눌렸던 측면에 대한 반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발은 반발을 초래하기 때문이며, 남녀문제는 조화와 균형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요즘 들어 '몸'이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우리 사회가 소와 레저 중심의 사회로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놀고 즐기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주도적이기 때문에 몸을 옥죄고 구속하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의 확산도 몸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