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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웃긴 남자

이경숙 지음 | 자인
딱 보니까 벌써 걱정이 되지? 짧은 문장도 버벅대는 도올이 이렇게 긴 한문을 어찌 읽을 수 있을까? 하지만 도올이 누구냐? 이 시대의 석학, 찍기의 천재. 도올이 해석한 거 들어보고 배꼽 조심하자.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벌써 골이 띵하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천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은 노자가 봐도 아름다워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저 혼자 추하다고 우긴다? 도올은 노자를 망령 난 할방구로 만들고 있다. 사실 이 문장 속에는 『도덕경』의 핵심이 숨어 있다. 그 열쇠는 바로 위라는 한 글자이다. 위의 뜻을 모르고 『도덕경』을 번역하려면 첨부터 끝까지 도올처럼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만 하는 거다. 중학생을 붙잡고 물어봐도 노자는 '무위사상'이다. 무위는 노자의 상징이다. 그런데 무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노자를 강의할 수 있다는 말이냐? 제2장 첫 줄은 바로 위에 대한 설명이지 아름다운 게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가 아니다.



천하개지미지위미에서 개는 '모두 개'니까 천하개지는 온 세상이 다 안다는 뜻이다. 미지는 '아름다운 것을'이다. 문제는 다음에 오는 위미다. 위자는 만들 위, 꾸밀 위다. 그러니 위미는 '꾸며진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온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다'라고 옮길 수 있다. 사악이는 '그것은 나쁜 일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노자는 이 한 줄 만으론 부족해서 햇갈릴까 봐 또 한 줄을 써놨다. 천하개지 선지위선 사불선이(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 善已), 즉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꾸며진 선이니 이것은 불선이다.

『도덕경』 전체를 보고 나면 알겠지만, 노자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의 구별 자체를 싫어한 사람이다. 뒷장에 가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이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이냐?'라는 말이 나온다. 노자는 위선을 멀리했다. 추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위미를 미워했다.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함'이고, 무위는 '있는 그대로'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착한 것은 착한 대로, 악한 것은 악한 대로, 세상 모든 것이 지 생겨먹은 대로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상태'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의 상태이다. 위라는 한 글자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노자가 5천 자 가운데 스물 세 글자나 투자를 했는데, 제일 중요한 위는 갖다 버리고 번역을 하니 노자의 말이 완전히 노망든 노인의 헛소리가 돼버리지. 노자는 잘못 알아듣지 않게 미와 위미, 선과 위선이 들어간 문장을 두 개나 써놨다. 근데 도올이 같은 까막눈들이 나올 거라고는 짐작이나 했겠냐?도올이 그래도 동양학을 전공했다는 학자이고 칠판에 한자를 써가면서 강의하는 사람 아닌가. 물론 한 번씩 한자가 기억이 안 나서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정도는 번역할 수 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어떠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거 같지 않나? 맞다. 제대로 하긴 했다. 그런데 그걸로 다가 아닌 것이 문제지. 이런 소리가 왜 여기에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첫 문장 해석과 지금 이 문장이 서로 연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온갖 잡소리만 실컷 늘어놓고는 이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다음 장으로 도망가버리고 말았지. 내가 TV에서 강의하는 것을 보니까 이런 데서 막혀서 지 혼자 낑낑대고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 우리 도올이, 불쌍한 도올이. 이 문장이야말로 이 대목에서 꼭 필요한 내용이며, 노자가 왜 위미와 위선을 악과 불선으로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대목인 거야. 노자가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을 정리해 줄게.



유가 있어야 무가 성립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는 거 아냐? 그런데 만약에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사람을 속이면 진짜 없음이 나타날 수가 없고 실제로는 짧은 것을 긴 것처럼 꾸며놓고 속이면 진짜로 긴 것이 긴 줄을 모르게 돼. 이것을 미와 선에 소급해서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믿게 만들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드러날 수가 없지. 선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지어내거나 가장하는 짓이 나쁜 거지.

『도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가느다란 실 하나로 길게 길게 이어진 문장이어서 중간에 끊기거나 잘라먹으면 이을 수가 없는 거야. 도올이 해놓은 해설은 5천 자 길이의 실을 5천 개의 짧은 토막으로 잘라놓은 것이어서 그냥 실밥 찌꺼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도대체 TV에 낯짝을 비추면서 노자를 강의하겠다고 나서는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르겠어. 다음 구절을 볼까?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此兩者同 出而異名(차양이동 출이이명)도올 번역 왈, 잘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 잠꼬대하고 있다. 위라는 글자는 노자 사상의 중심어다. 그냥 위이불시는 '꾸며대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라는 글자를 '잘되어가도록 한다'는 뜻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노자는 무위 사상이 아니라 유위 사상이 돼버려. 공성이불거도 저딴 식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 명색이 학자란 인간이 말야... 또한 거자를 '살 거'로 읽으면 다음 문장의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여기서는 '쌓을 거'로 봐야 한다. 문맥상 비틀면 차지한다라는 의미가 더 어울릴 수 있다. 즉 '공을 이루어도 쌓아두지 혹은 차지하지 않는다'의 뜻이다. 왜 '쌓을 거'라야 하는지 다음 문장을 보면서 설명하자.틀렸을 것이 뻔한 도올의 해석을 먼저 보자. '대저 오르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앞 문장까지는 주어가 성인이었지만 마지막 문장의 주어는 바로 공이다. '공을 쌓아두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떠나지 아니한다.'라는 글이다. '성인이 공 속에 살지 않아서 영원히 산다.'는 그런 괴상망측한 소리가 노자하고 어울리기나 한가? 여기서 하나 소개할 일이 있다. 나는 도올이 어떻게 생이불유라는 말을 보고 소유하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게 됐을까 궁금했거든. 알고 보니 이걸 러셀이라는 양코배기한테서 커닝한 거라. 러셀이 영역한 노자를 볼까?



생이불유(生而不有) :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소유 없는 생산)위이불시(爲而不恃) : action without self-assertion(자기 주장 없는 행동)장이부재(長而不宰) : 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지배 없는 발전)

황당하기는 진배없다. 다른 거면 몰라도 노자를 양코배기가 어찌 안단 말이야? 소유 없는 생산? 그걸 베껴 먹냐? 꾸밈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기 주장 없는 행동? 나도 러셀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러셀이 뭔 노자를 해설한단 말이야. 우리가 기대할 걸 해야지. 그래, 노자 말씀을 우리가 못 알아듣고 양놈한테서 답을 빌려온단 말이야? 우리 학문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돼? 세종대왕이 통곡하시는 소리가 안 들리냐?제1장노자 할아방의 불후의 명저 『도덕경』 원문을 보면서 도올의 개그 내용을 살펴보자. 도덕경 제1장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도올은 이것을 두고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컥! 목이 메인다. 앞서 말했듯이 제1장은 도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는 천지의 시작이고, (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면 이것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무엇이다.'라는 설명이다. '도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만물의 어머니로서 설명이 가능해지니 고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 하고 작명의 동기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천지지시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철학적 사변의 범주가 아니다. 그러나 만물지모는 언어로 설명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 된다. 이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서술을 불과 스물 네 글자로 해치워버린 표현법은 실로 놀랍다.동위지현 현지우현(同謂之玄 玄之又玄)衆妙之門(중묘지문)爲而不恃 功成而不居(위이불시 공성이불거)제2장사실 1장에서 보여준 도올의 개그는 개그쇼로는 함량미달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진도가 나갈수록 기절초풍, 어안이 벙벙한 개그의 진수를 보여 주니까. 도덕경 제2장의 첫 줄은 다음과 같다.도올의 『노자와 21세기』에 이것이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한번 보자. 우리의 건아 도올 가라사대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네. 시작부터 황당해서 원... 저런 소리를 보고 바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하는 거다. 첫줄부터 삼천포로 빠져버리니 끝에는 어디로 가겠어? 하기사 이게 어디 도올의 죄겠냐? 도올이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왕필이부터 현대 중국과 대만, 일본을 비롯해 조선 핫바지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자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내놓은 해석이다. 따라서 원래 독창성이나 창의성은 별로 봐줄 게 없는 두뇌를 갖고 태어난 도올인지라 뭐 별다른 해석을 할 방법이 없었을 거다. 그저 전부 그렇다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강의했을 뿐이겠지. 이게 평범한 학자의 강의라면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칭 동양의학의 대가요, 노자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뻥을 치는 인간이 이런 것도 바로잡지 못하면 지 자랑이 얼마나 무색한 것이냐 말이다.



『도덕경』의 첫줄은 불과 여섯 자에 불과하지만 전체 5천 글자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노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한번 생각 해봐. 사람이 책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첫줄 첫마디 아니겠어? 노자 할아방도 마찬가지다. 노자가 『도덕경』이라는 위대한 사상서를 쓰면서 그 첫머리를 저따위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시작했겠어?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니?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그럼 도가 아니라고 말해야 도가 되는 거야? 문장 성립이 안 돼. 저런 류의 헛소리는 도올 아저씨가 전공이지 노자 할아방은 절대 저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소리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런 엉터리 같은 말이 적힌 책은 사상서로 대접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야. 그리고, 만약에 저 번역이 맞다고 치면 노자의 작문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야. 저 말을 한문으로 쓴다면 '도왈도 도비도(道曰道 道非道)'가 되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가 될 수 없는 거야. 노자는 문장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지 애매하고 모호하게 말하는 스타일이 아냐. 가(可)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니까 도가도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라는 뜻이지. 그리고 비상도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 즉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소리다.



이 첫 문장은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름을 도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먹고 2천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 거라.

도올은 첫줄부터 못 알아먹고 딴 동네 가서 놀고 자빠졌으니 그 담부터는 볼 것도 없이 죄다 횡설수설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 구절 '명가명 비상명'은 '도가도 비상도'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꼭) 그 이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도라는 이름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을, 도라는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오역해버리면 책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도덕경』이란 심오하고 고매한 철학사상서를 도올이 들어서 오역과 악역으로 회칠을 해놓은 탓에 누군가의 말처럼 초등학생 도덕교과서보다 못한 황당무계한 잡서가 돼버린 거다. 왜 그러냐? 한 줄을 잘못 읽어버리니까 그 다음 구절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도올의 번역을 통해 『도덕경』을 읽으면 이건 완전히 유치원생이 일기 써놓은 책과 같다. 점심 먹은 내용 쓰고 그 다음에 아침에 늦잠 잔 얘기 나오다가, 갑자기 자기 전에 TV 본 거 썼다가 또 오후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써놓은 애들 일기장 같다는 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논리 정연하고 완벽하게 짜여진 서술구조와 흉내낼 수 없는 문장의 정략을 보여준다. 그 전체가 가히 천하의 미문이요, 명문이다. 이런 책을 망쳐놓는 꼬락서니를 보면 정말로 쪼인트를 까주고 싶다. 다음 구절을 보면서 정말로 그런가 확인하자.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되는 사람 있나? 묘함과 가장자리? 저런 내용을 가지고 강의하는 것도 재주는 참 재주다. 노자가 도라는 이름에 대해 말하다가 왜 뜬금없이 전혀 엉뚱해 보이는 이런 소리를 이런 위치에서 불쑥 하고 나오냐는 것이다. 도저히 연결이 안 되잖아? 노자가 전혀 문맥상 상관도 없는 소리를 노망든 할머니 방구 뀌듯이 아무 데나 싸질러 놓은 것일까? 욕이라는 글자의 뜻을 생각해보자. 욕은 '하고 싶어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무욕은 당연히 하고싶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욕의 목적어는?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름이다. 그래서 고상무욕은 '(도의)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하는 뜻이다. 따라서 '도에 이름을 꼭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도의 묘함을 볼 것이고'가 되겠다. 앞에서 노자는 무명이면 천지지시라고 했잖아.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보게 된다는 말이다. 상유욕, 즉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그 요를 볼 것이다.' 두 문장을 연결하면 '굳이 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볼 것이고,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만물지모)의 요를 보게 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묘와 요의 의미이다. 그것은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가장자리를 본다'는 식의 번역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고전을 그렇게 지 멋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故有無相生 難易上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암만 머리가 나쁜 도올이라도 이 정도 쉬운 문장이야 알지 않겠어? 그런데 여기서 이 시대의 천재 도울은 그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정말 번역 죽인다. 기가 막힌다. 소설을 써도 잘 쓰겠다. 그러나 노자의 본뜻과는 거리가 먼 소리들이다.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겨쓰는 기능이 적다. 검인정 교과서의 문법이 없던 시대의 기록인 만큼 노자란 사람의 필법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어순과 글 버릇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역이 나오기 쉽다. 또한 한문은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정확하고 규칙적인 띄움을 사용한다. 만약 8글자 중 앞의 네 골자가 '◎◎ ◎◎'이면, 뒤의 네 글자도 '◎◎ ◎◎'이 되도록 문장을 틀에 맞춘다는 것이다. 노자도 이런 규칙성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위 문장은 노자가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이름을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다. '출이이 명'과 '출이 이명'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의미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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