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은 마음의 기호-맹자요의孟子要義
정약용 지음 | -
성품은 마음의 기호 - 맹자요의 孟子要義
장약용 지음
1. 사단과 사덕(인의예지)
다산은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맹자의 한 구절을 주제 삼아, 사단과 인의예지가 같은 것인지 논한다. 왜냐면 송대 이후 성리학자들은 인의예지가 이미 우리 마음속에 갖춰져 있고 사단은 그것이 드러나는 실마리라고 보아, 결국 인의예지가 드러난 것이 사단이고, 사단은 본연지성의 발로이므로 순수하게 선하다는 논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사단의 단(端)이 ‘시작’이라는 뜻의 ‘시초’나 ‘첫머리’라고 주장한다.
단(端)이란 시작이다. 사물의 본말을 두 끝이라고 하듯 반드시 처음에 착수하는 것을 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용에서는 ‘군자의 도는 가까운 부부를 시작으로 하지만, 지극한 데 이르면 천지의 변화까지 살핀다’고 했다. 그러니 단을 ‘시작’이라고 본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맹자요의』,공손추, p.56,[전주대호남학연구소 번역본])
이렇게 단을 시작이라고 보면, 사단과 인의예지의 관계도 주자의 주장과는 반대가 된다.
측은한 마음은 내면에서 나오는데, 이것을 기르면 ‘인’정을 행할 수 있으니, 측은한 마음이 인정의 시초가 아니겠는가. 사양의 마음은 내면에서 나오는데, 이것을 기르면 예법을 행할 수 있으니, 사양의 마음이 ‘예’법의 시초가 아니겠는가....사단의 의의에 대해 맹자는 ‘불이 처음 타고 샘물이 처음 솟는 것 같다’고 주석했으니, 사단은 일의 근본이 되므로 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때 이로부터 공부를 시작하게 했고, 이로부터 기초를 닦아서 확충하도록 했다. 만일 사단의 이면에 ‘인의예지’라는 것이 보이지 않게 잠복돼 있어 마음의 주가 된다면 맹자가 말한 확충의 공부는 근본을 버리고 지엽을 찾는 격이다.(공손추, p,56)
사단,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본심에서 싹터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것들을 사회적 대인관계에 확대할 때 인의예지라는 인륜의 덕이 이뤄지는 것이므로 사단의 단은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자는 단을 실마리로 해석했다. 그래서 감정이 발할 때 성품의 본연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마치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이 안에 있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았다. 곧 주자는 마음이 성품과 감정을 통괄하다는 설에 입각하여, 마음 안에 있는 인의예지의 성품이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감정으로 발현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단의 단을 마음속의 성품이 발현하는 실마리라고 본 것이다.
또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 덕에 대해서도 다산은 글자를 만들 당시의 본래 의도를 파악해서, 덕(悳)은 글자를 해체하면 직(直)과 심(心)의 조합이므로, 덕이란 나의 직심, 곧 본심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곧, 사단의 마음은 실천적 행위에 의해서만 사덕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사단의 마음은 사덕의 원인이고, 사덕은 결과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사단은 마음이지 성품이나 리(理)나 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공손추,p.78). 요컨대, 사단은 마음이고, 그것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마음으로서 사덕을 실현해갈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단은 주자에서처럼 선천적이고 고유한 성품이거나 마음 안에 있는 리이거나 마음이 본래 가진 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덕도 원래부터 갖고 있는 성품이 아니라, 일을 행하고 실천한 뒤에 이뤄지는 것이다.
인의예지의 이름은 반드시 일이 행해진 뒤에 이뤄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측은히 여길 뿐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에 근거를 두고 인이라 할 수 없고, 도시락 밥을 주는데 욕하고 발로 차면서 줄 때 부끄럽게 여기면서 거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에 근거를 두고 의라고 말할 수 없다. 큰 손님이 찾아왔는데, 공경하는 마음만 갖고 맞이해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에 근거를 두고 예라 할 수 없고, 선한 사람이 헐뜯어 말할 때 옳고 그릇됨을 마음으로 짐작할 뿐 이를 분별해 밝히지 않는다면 그 마음에 근거를 두고 지라고 할 수 없다. 사단은 인성이 본래 갖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덕은 사단의 마음을 확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단의 마음을 확충하지 않으면 인의예지의 사덕의 이름은 결국 성립될 수 없다.(고자, p.187)
이런 논리로 보면, 인의예지 사덕은 사람의 마음속에 과일 씨앗처럼 잠복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를 실천한 후에 성립되는 것이다.
인의예지라는 이름은 일을 한 다음에 이뤄지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 후에 인이라 한다.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는 인이라는 이름이 성립될 수 없다. 손님과 주인이 맞은 후에 예라는 이름이 성립되고, 사물을 명백히 분별한 후에 지(智)라는 이름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의예지라는 4개의 알맹이가 복숭아씨나 살구씨처럼 사람 마음에 잠복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공손추, p.54)
그러면 이제 인의예지를 다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인이나 인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할까? 공자의 인은 맹자에게서 인과 의로 분화했다. 다산은 인을 남을 사랑하는 것, 의는 나를 선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양혜왕, p.13) 다시 말해, 인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두 사람의 인륜적 직분을 극진히 실천하는 것, 의는 나의 주체적 결단에 의해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자는 인을 사랑의 이치, 마음의 덕이라 하고, 의를 마음이 판단해 조절하는 것,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주석했다.
다산의 인은 사덕의 설명에서도 본 바와 같이 마음에 내재하는 이치가 아니라 효제(孝悌)와 같은 인륜을 힘써 실천하는 행위의 결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을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렇게 역설한다.
유자(有子)는 효제란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 했고, 공자는 ‘인을 행함’은 자신에 달려 있다고 했으며, 증자는 “당당하구나, 자장이여, 함께 ‘인을 행하기’ 어렵도다” 라 했다. 인이 만일 마음속에 있는 이치라면 어떻게 ‘인을 행한다’고 하겠는가. 인을 행한다고 하는 위인(爲仁)의 위(爲)는 작위와 같은 뜻이다. 힘써 행하는 것을 위라 하고 착수해서 결과를 도모하는 것을 위라 한다. 그것이 마음에 있는 이치라면 어떻게 착수해서 해낼 수 있겠는가?(공손추, p.55)
그리고 또한 인은 두 사람 사이의 구체적인 인간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인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길 때 효도로 함이 인이니, 아들과 아버지 두 사람이요, 임금을 섬길 때 충성으로 함이 인이니, 신화와 임금 두 사람이요, 백성을 다스릴 때 자비로 함이 인이니, 관리와 백성 두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그 분수를 다하는 것이 인이다... 마음의 본체는 텅 비어 밝은데 어떻게 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래 덕이 없었는데, 인이 있겠는가?(고자, p.199)
이렇게 다산은 사단을 안으로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인의예지를 찾아 들어가는 실마리로 보는 주자의 해석에 반해, 애초에 갖고 태어나는 사단의 마음을 시초로 보았다. 그래서 그 시초를 바탕으로 밖으로 실천해나가 완성시킨 것이 인의예지라고 주장했다. 이런 결론은 내향적이고 관념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외향적이고 실천윤리적 관점에서 도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성품은 기호다
그러면 다산에게 성품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다산은 성기호설(性嗜好設)의 입장에서 인성론을 펼쳐, 성이란 마음이 기호하는 바(등문공, p.78 ; 고자, p.185)라는 전혀 새로운 주장을 전개한다. 성이란 좋다 또는 싫다는 마음의 기호를 의미하는 것이고, 맹자가 성선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 선을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다시 말해서 ‘성선’이란 우리 인간이 선을 좋아하는 마음의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성품이란 기호를 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안석은 성품이 음악을 좋아한다거나, 위정공은 성품이 검소를 좋아한다거나, 성품이 산수를 좋아한다, 또는 성품이 서화를 좋아한다고 한 것들은 모두 기호로 성품을 말한 것이다. 성품의 글자 뜻이 본래 이러므로 맹자는 성품에 대해 논할 때는 반드시 기호로 말했다. 곧 “입이란 맛에 대해서 즐기는 바가 같고, 귀란 소리에 대해서 좋아하는 바가 같고, 눈은 빛에 대해서 좋아하는 바가 같다(고자 상)”고 한 것은 성품이란 선에 대해서 좋아하는 바가 같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니 성품의 본래 의미가 기호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등문공, p.76)
다산은 이런 성기호설에 입각해 주요 성설을 비판했다. 다산은 특히 송대 유학자들이 본연지성이니 기질지성이니 해, 형이상학적 존재인 리를 위주로 한 것에 반대하고, 인간의 성품(그것은 마음의 기호니까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이나 마음을 도의와 기질의 합성물로 이해해, 경험적 기호의 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논했다. 다산은 주자가 육경에도 없는 본연지성이니 기질지성이니 하면서 만물이 태극의 리를 받아 태어나므로 인간의 성품이나 다른 동물들의 성품이나 본연지성에서는 같다고 하는데, 실제로 동물끼리도 본성이 다른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명이 다른 인간과 동물이 성품이 같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성에 대해 말할 때는 반드시 기호를 주로 하여 말해야 그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만일 허령 무형의 물로서, 그 체가 지극히 선하여 조금도 악이 없다고 한다면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울 줄만 알고 젖을 찾고 안아주기를 구할 뿐인데, 어떻게 순수하게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주의 권능으로 말하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양웅은 이를 성으로 여겨 선악이 섞여 있다고 했다. 만일 그 형기의 사욕으로 말한다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선하기는 어렵고 악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선을 한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것은 무너지는 것처럼 쉽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순경은 이를 성이라고 여겨 성악이라고 했다.(등문공, p.77)
그러므로 인간의 성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선을 좋아하는 기호를 주로 해 말해야 한다. 양웅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측면을 인간의 성품으로 봤기 때문에 성선악혼설을 주장하게 됐고, 순자는 악을 범하기 쉬운 형기(形氣)의 사욕(私慾)만을 인간의 성품으로 봤기 때문에 성악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견해들은 인간의 성품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마음의 기호로서 성선을 말한 맹자의 설과도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기호설을 천명하고, 맹자가 성인인 요순을 예로 들어 성품이 선함을 논증한 것과는 반대로 악인들을 예로 들어 성품이 선함을 논증해본다.
도둑이 물건을 훔쳐서 몹시 좋아했다 하더라도 이웃의 청렴한 선비의 행실을 보고 부끄러운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품이 선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이하, 등문공, p.76-77). 마찬가지로, 불효자나 탐관오리라도 멋모르고 또는 아첨하려는 의도에서 효자라거나 청렴하다고 칭찬해주면 기뻐하는데, 그들이 효도나 청렴을 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와 다른 줄 알면서도 기뻐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못된 불효자나 탐관오리일지라도 애초에 우리가 선을 좋아하는 마음을 타고났다는 것을 느끼면 하루아침에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악은 어떻게 생기는가? 송대 유학자들이 불선의 원인을 타고난 기질에서 구했던 데 반해 다산은 기질의 욕망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욕망에 빠지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개인적 욕구 때문에, 풍속이 오염되서거나 외부에 있는 사물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욕망에 빠지는 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니까 구제할 수 있다. 그러나 기질 탓이라 한다면, 기질이란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하느냐 악을 하느냐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성품은 선을 좋아하는 우리 마음의 기호이다. 그러니까 선을 좋아하는 기호, 곧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선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마음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
3. 마음의 자주권
그러면 우리 마음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다산은 우선 선악을 선택할 권리가 마음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하늘이 생명을 부여할 때, 이 본성을 내려줘 그것을 따르고 실천하여 도에 이르도록 했다. 만일 이 성품이 없다면 사람은 조그만 선이라도 죽을 때까지 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 이 성품을 내려줬기에 시시각각 각성하고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악을 지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욕구하고 한편으로 저지하니 이때 저지하는 것은 분명 본성이 받은 천명이다... 만일 하늘이 처음 인간을 낼 때 이른바 인성에 선악이 섞여 있었다면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불이 위로 타오르도록 결정돼 있듯 자신의 주체적 책임이 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하늘은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어 그 선을 바라면 선을 하고 악을 바라면 악을 하도록 해,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런 선택권이 내게 있어 금수와는 다르니, 선을 하면 내 공이 되고 악을 하면 내 죄가 되니 이것이 마음의 결정권이다. 이것은 소위 성품이 아니다.(등문공, p.80)
그런데, 우리 마음에는 선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신체적 욕구나 마음 안의 불순한 충동들이 힘께 있다. 그래서 다산은 마음이 인심과 도심의 싸움터라고 표현한다.
인간에게는 항상 상반된 두 의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의 관문이고, 선과 악의 갈림길이며, 인심과 도심이 교전장이고, 의가 이기느냐 욕이 이기느냐 판가름나는 곳이다. 이 자리에서 맹성(猛省)하여 힘써 극복하면 도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욕심 내지 않아야 할 것을 욕심 내지 않는 것은 도심에서 발한 것으로 천리이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고 욕심 내지 않아야 할 것을 욕심 내는 것은 인심에서 생겨난 것으로 사욕이다. 하지 않고 욕심 내지 않는 것, 이는 인심을 극복하고 제압해 도심의 명령을 따른 것이니, 이른바 극기복례가 이것이다... 도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진심, p.228)
다산은 인심과 도심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심성론에 근거해 해석하기를,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도의와 기질의 합으로 이뤄져 있고(고자, p.179), 그래서 도의에 기초한 것은 도심이고, 기질에 기초한 것은 인심이라고 한다. 다산의 이런 인심 도심 개념은 인심은 감각적 지각이고 도심은 하늘로부터 받은 올바른 본성과 천명에 근거한다는 주자식의 형이상학적인 인심도심이 아니라, 인심이든 도심이든 현실적인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는 도의를 따르는 도심이 기질을 따르는 인심을 주재해야 한다.
도심을 평생 보존하는 수양법
그래서 다산은 맹자가 도심의 보존을 평생 역설했다고 보고(진심, p.253), 도심을 간직하는 수양법을 문제로 삼는다.
맹자가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은 잃으려는 것을 보존하는 것이고, 후세 사람들이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은 떠나려는 것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크다. 맹자가 말하는 마음보존이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천명을 따르며 악을 버리고 선을 따라서 거의 잃어버릴 뻔한 한 점의 도심을 간직하는 것이므로 이런 것이 이른바 마음보존이다.
후세에 말하는 마음보존이란 고요히 앉아 눈을 감고 경(敬)에 몰두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여러 생각을 잠재워 조급하고 동요하며 불안정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머무르게 하는 것[住存]이다. 맹자는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진심,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