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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용

자사 지음 | -
중용 中庸

자사 지음



하늘과 사람을 논함 - 성(性), 도(道), 교(敎)

하늘이 명하여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 하며,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道)를 마름질하는 것을 교(敎)라 한다.(『집주』 1장)

하늘이 명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란 사람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연의 바탕을 말하며, 이것을 성(性)이라 한다. 『대학』에서도 볼 수 있지만, 동양 사상 중 특히 유가 사상은 ‘사람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연의 바탕은 선하다’는 확고한 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절대신에의 의지나 복종을 부정하고,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인간에게 돌리려고 하는 인간 본위요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성선을 최초로 체계화한 이는 맹자(孟子)로,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중심으로 성선의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바탕을 타고났기 때문에 이를 발현 확충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주장했다. 따라서 맹자는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일 뿐 자신에게서 찾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구할 수 있다고 누차 강조했다. 또한 모든 것이 다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인간은 결함과 약점을 지닌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가치를 실현할 능력과 책임이 있음을 긍정했다.

사람은 잠시라도 도(道)를 떠날 수 없다. 떠날 수 있다면, 이미 도가 아니다.(『집주』 1장)

성(性)을 따르는 것 즉 인간이 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연의 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므로, 인간은 잠시라도 도를 떠날 수 없다. 도는 바로 인간이 가야 할 길이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도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즉 도를 떠날 수 없다기보다 차라리 떠날래야 떠나지지 않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어두운 곳보다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미세한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가장 조심한다.(『집주』 1장)

도를 떠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도를 떠난 듯하고 도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현상이 많은 것은 왜인가? 이는 도가 인욕(人欲)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이다. 천리(天理) 즉 성선(性善)이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면, 인욕은 인간에게 내재된 동물적 속성 같은 것을 말한다. 어차피 동물인 이상, 인간에게는 누구나 천리와 더불어 인욕이 내재돼 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욕을 버리고 천리가 발현되면 도를 얻고, 인욕이 천리를 억누르면 도를 잃게 된다.

천리가 발현되느냐 인욕이 기승하느냐의 갈림길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은밀한 곳 즉 자기 자신만의 내부 세계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군자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에 신중히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두운 곳은 보이지 않는 자기 내부의 세계를 말하며 미세한 것은 들리지 않는 자기 내부의 상념을 말한다. 이것들은 겉으로 나타나기 이전에는 남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두운 곳이요 미세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볼 때는 이보다 잘 드러나고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즉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상념들이 천리에 의한 것인가 인욕에 의한 것인가 또는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조심해야 하며,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모든 악행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자기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게 되면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그리고 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용』에서의 신독(愼獨)은 『대학』에서의 성의(誠意) 즉 자신의 의지를 성실히 다지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기쁘거나 노하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며, 일어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커다란 근본이요, ‘화’는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도이다. 중과 화를 체현하면, 하늘과 대지가 제 자리를 잡게 되고, 세상의 만물이 길러진다.(『집주』 1장)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는 순수한 본연의 성(性)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중(中)이라고 했다. 중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무(無)나 공(空)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안에 완벽하게 질서지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중은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은 상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것을 말한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어느 한 곳에 집착되거나 구애됨이 없이 지극히 바르고 원만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본연의 성(性)의 상태에서 내부나 외부의 어떤 자극에 접해 반응하는 것이 기쁨, 노함, 슬픔, 즐거움 등의 감정으로, 이를 정(情)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서 인간의 감정을 단지 희노애락의 네 가지로 국한한 것은 아니며,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면 무념, 무상, 무욕, 무정 등에 머문다기보다, 어떤 요인에 자극받아서 갖가지 정(情)이 피어난다.

그런데 본성이 중(中)이기 때문에, 즉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며 모든 이치를 담은 바르고 원만한 상태이기 때문에, 온갖 정(情)이 일어나되 절도에 맞을 수 있다. 이를 화(和)라고 한다. 절도는 행위 주체가 놓여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마주친 대상에 대하여 반응하는 가장 타당한 준칙이요, 법도다. 그 준칙에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딱 들어맞는 것이 바로 화(和)인 것이다. 그 준칙은 나를 비롯한 만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희노애락의 감정이 피어났으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성(性)을 따르는 것이다. 즉 누구나 타고났기 때문에 애초에 내재되어 있는 본연의 성이 외부로 실현된 것이다.

중은 모든 이치가 그 안에 갖추어져 있어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모든 이치가 나오기 때문에 천하의 근본이라고 했다. 화(和)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타당한 준칙이기 때문에 달도(達道) 즉 천하의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도라고 했다.

중(中)은 인성(人性)의 정적(靜的)인 모습이요 화(和)는 인성의 동적(動的)인 모습이다. 다르게는 중은 체(體)요 화는 용(用)이라고 표현된다. 중은 본체 즉 근본이요 화는 운용 즉 발현의 뜻으로, 양자는 둘이 아니라 원래 하나인 것이다. 중화(中和)는 세계를 질서짓는 조화의 기틀인데, 이는 원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발현하고 확충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화는 생성과 양육의 원리와 통한다. 만물이 생성되고 자라나는 것은 조화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작게는 아주 작은 미생물로부터 크게는 드넓은 우주에 이르기까지, 자연 현상과 모든 만물이 조화의 원리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누구는 성(性)과 정(情)이라고 하고, 누구는 이(理)와 기(氣)라고도 하고, 누구는 정(靜)과 동(動)이라고 하고, 누구는 체(體)와 용(用)이라고 하고, 또한 누구는 음(陰)과 양(陽)이라고도 하지만, 모두 하늘의 이치가 만물에 미치어 조화를 이루며 발현되고 확충되는 것을 이름한 것이다.

천지 만물을 조화의 원리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性)을 자각하고 확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늘이 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경우로 미루어 보자면, 인간이 낳고 죽는 것이 조화의 산물이며,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조화의 산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세계는 가정이며, 나라이며, 천하다.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각 개체 즉 가족, 국민, 인류가 각자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세계가 이루어지고 유지 발전된다. 이것이 세상 만물이 길러지는 한 단면이다.

중용(中庸)의 도(道) - 군자는 중용을 실천한다

선생님께서는 “군자는 중용을 몸소 실천하며, 소인은 중용을 어긴다”고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몸소 실천한다’는 것은 늘 때에 맞추어 중(中)에 처한다는 것이요, ‘소인은 중용을 어긴다’는 것은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집주』 2장)

주희(朱憙)의 정의를 빌면, 중용은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평상의 이치다. 혹자는 용(庸)을 바뀌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중용은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바뀌지 않는 이치이다. 모두 맞는 말이다. 사실 중용의 핵심은 중(中)에 있으며, 용(庸)은 중의 평상성 또는 항상성을 말한 것이다. 즉 중이 갖는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윤리적 사상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중용 사상이다. 중국에서 중용 사상이 성립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이며, 사실 시대와 학파를 막론하고 그 근저를 흐르는 사상이 중용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용은 의미보다 실천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군자가 몸소 실천하는 중용을 시중(時中)이라고 했다. 주희는 시중을 수시처중(隨時處中) 즉 ‘때에 맞추어 중(中)에 처한다’로 풀었다. 여기서 중은 ‘지당(至當)한 것, 지극히 타당한 것’ 또는 ‘지선(至善)의 것, 지극히 최선의 것’을 말한다. 이는 또한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서의 지선(至善)과 연관되어 있다. 양자는 모두 만사 만물의 이치에서 타당함의 극치를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중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최선의 가장 타당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中)은 일정하지 않다는 것에 시중(時中)의 어려움이 있다. 어느 한 경우에 가장 타당했던 것이 다른 경우에도 가장 타당하리라고 볼 수 없으며, 어느 한 시간 또는 장소에서 가장 타당했던 것이 다른 시간 또는 장소에서도 가장 타당하리라고 볼 수 없다. 중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또한 마주치는 사물에 따라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 도시의 중심이 시청이라고 할 때 그 시청이 나라의 중심은 아니며, 한 나라의 중심이 수도라고 할 때 그 수도가 세계의 중심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단지 물리적 현상을 예로 든 것일 뿐 나아가 사람의 사회 활동을 놓고 보면 시중의 중요성과 복잡성을 알 수 있다.

보통의 경우 남자가 모르는 여자의 손을 함부로 잡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우물가를 지나가는데 어느 여자가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르는 여자의 손을 잡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여 그냥 지나쳐 가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즉시 손을 뻗어 여자를 구해내야 하는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즉시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잡고 구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따라서 중용에서는 권(權)과 변(變)을 중시한다.

권(權)은 상(常)의 상대요, 변(變)은 통(通)의 상대로, 매사를 처리함에 있어 가장 당연하고 정당하고 합당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권과 변은 고집(固執)하지 않는 것이다. 고집이란 이치의 어느 일단을 알게 되자 그것이 전부이자 최고인 양 굳게 지키느라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앞의 예로 보면, 모르는 여자의 손을 잡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이 절대불변의 원칙이라고 믿고 우물에 빠진 여자를 구해주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고집으로, 권과 변을 모르고 시중(時中)을 못하는 것이다. 군자는 바로 중(中)이 근본임을 알고 권과 변을 알아 시중(時中)할 줄 아는 사람이다.

소인은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소인은 오로지 권과 변을 능사로 삼을 뿐, 중이 근본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적절한 최선의 방향을 찾는 것이 시중(時中)임을 앞에서 말했거니와, 소인은 이와 달리 자기의 욕망과 이익에 따라 시시각각 제멋대로 변한다는 것이다. 변화와 융통이 필요하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의 바탕 위에, 즉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바탕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소인의 변화와 융통은 자신의 이익에 치우친 것이며 자신의 욕망이 지나친 것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시중(時中)인 것 같지만 사실은 중용에 역행하는 것이다.

지나침과 못미침의 폐단 -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못미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까닭을 내가 알겠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며,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혀지지 않는 까닭을 내가 알겠다. 현명한 자는 지나치며, 모자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누구나 먹고 마시긴 하지만,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집주』 4장)

중용의 ‘용(庸)’에 이미 평상(平常)의 뜻이 있듯, 중용은 고매하고 원대한 곳에 있는 무슨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가까운 곳 어디에나 있다. 즉 우리가 늘 마주치고 처리하는 일상의 만사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롭다는 자는 너무 지혜를 믿고 추구하는 까닭에, 그저 고매하고 원대한 곳에서 중용을 찾으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은 너무 쉽고 단조로운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냥 이론적으로만 중용을 따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고와 이론에 치우친 나머지 현상과 실천을 등한히 여기는 지식인의 폐단을 많이 본다. 중용은 그렇게 먼 것이 아니요, 우리 주위 일상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는 그야말로 어리석기 때문에 중용의 소재도 가치도 당위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지혜롭다는 자는 너무 지나친 까닭에 어리석은 자는 너무 모르는 까닭에 중용의 도가 행해지기 어려운 것이다. 현명하다는 자가 중용의 도를 행함에 너무 지나친 까닭은 이미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의식이 앞서기 때문이다. 자신은 남과 다르기 때문에 무언가 남다른 생각과 행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너무 남다른 것을 추구한 나머지, 나타나는 생각과 행실이 아예 기벽(奇癖)이나 기행(奇行)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다.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지혜나 현명함을 자랑하지 않는 자이며 아예 느끼지도 않는 자이다. 평범 속에서 진리를 찾고 묵묵히 일상에서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자이다.

지혜를 과신하면 덫에 빠진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지혜롭다’고 하지만, 그들을 몰아서 그물이나 덫 또는 함정 속에 들여보내도 피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지혜롭다’고 하지만, 설령 중용을 선택한대도 한 달이라도 지킨다고 장담하지 못한다.”(『집주』 7장)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참다운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자신을 남달리 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사에 자신의 생각이 최고이며 최선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독선과 독단으로 흐르기 쉽다. 독선과 독단이 가져오는 폐해는 사실 심각하다. 작게는 한 가정에서 가장이 독선과 독단에 빠짐으로써 가정의 파탄을 불러오기까지 하며, 한 회사에서 사장이 독선과 독단에 빠짐으로써 회사를 망치고 사원을 궁지에 빠뜨리며, 크게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독선과 독단에 빠짐으로써 독재를 낳는다. 모든 것이 결국 자신이 망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는 것은 결국 그물, 속에 빠져드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여기서 그물, 덫, 함정 속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사실 스스로 빠져드는 것이다.

천하, 국가, 작위, 봉록과 중용 - 중용은 최선의 바른 길을 찾는 것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와 국가는 평정하여 다스릴 수 있으며, 작위와 봉록은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은 밟을 수 있으나, 중용은 할 수 없다.”(『집주』 9장)

제아무리 유능하고 정치를 잘 해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요, 제아무리 청렴결백하다 해도 작위와 봉록을 사양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요, 제아무리 용감하다 해도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을 밟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오직 그 한 가지에만 집착하여 전심전력하면 능히 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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