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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유 마을의 메아리- 장자

장주 지음 | -
장자(莊子) - 무하유(無何有) 마을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장주 지음




▣ 『장자』 읽기

고대 중국에서 이루어진 문헌 대개가 그렇듯 『장자』 또한 장주 한 개인의 손으로 일시에 체계적으로 저술된 것이 아니다. 어떤 편들은 단일한 한 편의 논문처럼 구성됐지만, 대개의 편들은 여러 가지 일화와 고사들이 엮여져 있다. 더구나 『장자』의 「우언 寓言」편에서 말하고 있듯, 문체상으로도 우언(寓言)과 중언(重言), 치언(巵言)이라는 세 가지 형식으로 돼 있다. 또한 『장자』전체의 내용의 흐름에 따라 일관되게 책의 내용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내편」은 일반적으로 동의하듯 장주 개인의 일관된 사상을 담고 있지만, 「외편」과 「잡편」은 장주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는 다양한 색채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담겨 있어 편의 흐름에 따라 내용을 요약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통상적인 방식대로 『장자』의 자연관과 인간관을 중심으로 핵심 사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똥 오줌에도 도가 있소이다(屎尿有道)! - 도(道), 덕(德), 기(氣) 그리고 자연(自然)『장자』는 도가(道家) 철학의 대표적 문헌이다. 도가가 도가로 불리는 것은 도(道)라는 용어의 빈번한 사용과 거기에 깊은 철학적 함축을 두기 때문이다. 제22편 「지북유 知北遊」에는 지(知)라는 의인화된 인물이 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이리저리 다니며 묻고 다니는 이야기가 나온다. 황제(黃帝)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도를 알게(知道) 되느니라. 어떠한 입장에도 서지 않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에 편안하게(安道) 되느니라. 아무 것도 따르지 않고 어떤 방법도 쓰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얻게(得道) 될 것이로다... 왜냐하면 천하(天下)는 하나의 기(氣)로 통하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성인은 하나(一)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니라! 「지북유 知北遊」에서



도는 우리가 구분해서 알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몸, 존재하는 모든 것 자체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도에 관한 『장자』의 설명은 대개 역설적이고 때로 황당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도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어디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하물며 똥 속에도 도가 있다!”고 『장자』는 갈파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괴상하게 들리는 이러한 논법은 고대 도가의 우주론적 시각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 세계(天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聚散) 과정에서 생성된다. 이 때의 기는 어떤 물질적인 재료의 의미뿐 아니라 생명력을 갖추고 스스로 움직이는, 살아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생성하고 구성하는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그 과정 자체를 바로 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이 어떤 타자의 힘이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도는 또한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이기도 하다.

어떤 존재도 도 밖에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달리 말해 도는 모든 개개의 사물, 우리의 몸 속에도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몸이 생성된 것이라면, 그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의 처음부터 우리의 몸은 도의 작용 안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몸 안에 존재하는 도를 『장자』는 덕(德)이라 부른다. 얼음 조각들이 두둥실 떠다니는 호수를 상상해 보자. 호수를 꽉 채우고 있는 물이 기라면, 호수 안에서 물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흐름이 도가 되고, 그러한 물의 흐름에 따르면서 물과 살을 맞대고 제 몸을 유지하는 얼음 조각은 물(物)이며, 이 각각의 얼음 조각을 같은 기이면서도 하나의 개체(物)로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덕(德)이 되는 것이다. 도(道)가 세계 전체의 변화와 흐름 자체 그리고 그러한 흐름을 가능케 하는 힘 전체를 말한다면, 각각의 개체(物) 안에 들어와 그 개체로 하여금 자기동일성을 유지케 하는 도는 덕(德)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같고 하나이지만, 도와 덕으로 말한다면 무한한 변화와 다양한 개체들이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 바다에 가다(井蛙見海) - 천지(天地)와 만물(萬物)

오늘날의 우주(cosmos)에 해당하는 고전 중국어는 천지(天地)다. 천지는 무한한 전체로서 기로 꽉 채워져 있는 터이며, 도가 드러나는 마당이기도 하다. 이러한 천지 속에는 온갖 사물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런 개별적 사물들을 통칭해 만물(萬物)이라고 한다. 전체로 말하면 천지지만, 개체로 말하면 만물의 세계인 것이다. 『장자』에서는 만물의 발생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가 모여(聚) 형체를 이루고(形), 형체를 갖게 되면 하나의 개체(物)가 된다. 이러한 개체들을 뭉뚱그려 만물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형체를 갖는다’(有形)는 것은 “모양과 형상, 소리와 빛깔을 가진다”(「달생達生」)는 의미이다. 즉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 구별 가능한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가 하나의 개체로 모이게 될 때, 각각의 개체는 각각의 고유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다 같은 사람이면서도 얼굴이나 신체의 모습, 음성과 눈빛이 개인마다 다른 것은 바로 각각의 개체가 갖는 고유성, 즉 덕(德)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장자』가 그리는 이 세계의 모습은 기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로서의 전체를 이루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없이 많은 사물들로 가득한 다양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런 수많은 물(物) 가운데 한 종이 우리 인간이며, 또 그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하나가 각각의 개인인 것이다. 이러한 개체들은 늘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한갓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양생주 養生主」편에서는 지칠 줄 모르는 지식에의 욕구로 가득한 인간을 향해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의 삶은 한계가 있으나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좇으니 위태롭기 그지없다. 「양생주 養生主」에서



여기서 『장자』가 조롱하는 지식이란, 인간 세계의 끝없는 다툼과 혼란의 원인이 되는 시비(是非)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일이든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늘 다를 수 있고,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기준에 따라 진상은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 내가 속한 집단의 기준으로 다른 집단을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장자』는 지적한다.

그래서「추수秋水」에서는 자신이 크다고 자만하다가 바다의 광대함에 놀란 황하(黃河)의 신 하백(河伯)에게 북해(北海)의 신 약(若)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물 속에 사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보았자 소용없는 것은 자신의 좁은 소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너는 좁은 강에서 나와 이 큰 바다를 보고 놀라지만...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 또한 마치 자갈이나 작은 나무가 거대한 산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꼴이다... 도(道)의 입장에서 보면 사물에 귀천(貴賤)이 없지만, 사물(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하는 법이다. 「추수秋水」에서



여기서 『장자』는 보편주의적 관점(以道觀之)과 상대주의적 관점(以物觀之)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장자』의 인식론적인 관점을 회의주의로 보는 시각도 있고, 불가지론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고자 한 것이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다양성의 존중’ 혹은 ‘다름의 인정’이라는 친근한 주제로 이해할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을 관통하는 정신이 무엇보다도 다원주의의 옹호에 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잘 살고 싶다면 - 양생(養生), 상망(相忘), 심재(心齋), 좌망(坐忘)

그렇다면 모래펄의 수많은 모래알 가운데 하나와도 같은 우리네 물(物), 인간은 어떠한 존재일까? 『장자』에 따르면 인간은 무엇보다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다. 몸(身)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게 욕구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락至樂」에서 말하듯, 인간은 “경제적 성공과 신분 상승, 명예, 신체의 안락함, 맛 좋은 음식, 화려한 의복, 아름다운 노래와 미녀에 둘러싸인 쾌락적인 삶”, 생리적 욕구를 넘어서는 외물(外物)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한 경쟁적 삶은 “서로 아웅다웅 거스르고 부대끼며, 때론 말달리듯이 치닫기도 하나 이를 그치게 할 수 없기에 슬픈” 것이다. 그래서 「변무 騈拇」에서는, “소인들은 몸바쳐 이익을 추구하고, 선비들은 몸바쳐 명예를 추구하고, 대부들은 몸바쳐 영토를 넓히려 하고, 성인은 몸바쳐 천하를 다스렸다. 이들이 한 일은 서로 다르고 명예도 다르지만 자신들의 본성(생명)을 해치며 외물을 추구한 것은 다를 바 없다”며 한탄한다.



그래서 『장자』가 말하는 “생명 보전하기”(養生)는 신체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몸을 보전한다는 것은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 다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의 논리까지 포함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기묘한 논리가 병존한다. 『장자』는 한편으로는 어리숙하고 소박한 삶의 태도를 권장한다. 「산목山木」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산 속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옹이와 잔가지가 많아 쓸모가 없어 나무꾼의 칼에 베이지 않았다. 한편 장자를 손님으로 맞은 그의 친구는 장자를 대접하기 위해 울 줄 모르는 기러기는 살려두고 울 줄 아는 기러기는 가마솥에 삶아졌다. 이 두 상황을 지켜 본 제자가 어느 쪽을 지지하겠느냐고 묻자 장자는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중간에 처하겠다”고 대답한다. 혼탁한 흙탕물 같은 세상에서는 섞여 살아야(相與相忘) 하는 법이다. 칼도 뽑을 만 할 때 뽑아야 하는 법이다. “진정으로 능력 있는 사람은 그 힘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조용히 어리숙하게 사는 것이 양생의 비법이다. 이것이 진인(眞人)의 삶이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진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틀거리는 욕망이란 쉽게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상당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장자』는 이러한 욕망의 절제를 위한 비법으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이야기 한다. 심재란 마음을 비우고 투명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마음 공부라 할 수 있고, 좌망이란 욕망의 주체인 몸을 잊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허정(虛靜)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장자』에서 허정은 사려(思慮)와 대비되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 말하는 사려란 오늘날의 긍정적 의미와는 달리, 지나치게 정신력을 소모하여 몸을 쇠잔하게 하는 걱정과 근심이라는 뜻이다. 한의학(漢醫學)에서는 건강을 상하게 하는 심각한 원인으로 사려를 꼽는다. 욕망은 크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사람은 걱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虛靜)은 매우 중요한 양생의 비법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이와 같은『장자』의 양생 사상은 후대에 한의학(漢醫學)과 도교(道敎)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제왕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帝王之道) - 무위(無爲)와 대용(大用)

첫째 글 「소요유 逍遙遊」에서 혜시는 자신에게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줄기가 울퉁불퉁하고 가지가 꼬여 전혀 쓸모가 없다고 한탄하자, 장자는 혜시가 큰 것을 쓰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송(宋) 나라에 손 안 트는 약을 만들어 솜 빠는 일을 대대로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 나그네가 이 소문을 듣고 백금(百金)을 주고 약 만드는 비법을 사서는 오(吳) 나라의 왕을 찾아가 설득해 장군이 되어 전쟁에서 크게 이겼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혜시에게 “손을 트지 않게 한 것은 같으나 한 쪽은 영주가 되었고, 다른 한 쪽은 평생을 솜 빠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약을 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라고 장자는 말한다. 「소요유 逍遙遊」에서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것이 갖고 있는 가치는 쓰는 사람의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자의 대용(大用)의 사상이 나온다. 구만리 하늘 위의 대붕을 비웃는 매미와 비둘기가 ‘자잘한 쓰임새’(小用) 밖에 모른다면 대붕은 ‘커다란 쓰임새’(大用)를 아는 제왕의 상징인 것이다.

도가의 가장 핵심 용어인 무위(無爲) 또한 이 대용(大用)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장자』에서 무위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는, 허정(虛靜)과 같은 의미로써 고원한 정신의 경지와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의 행태를 형용하는 말이다. 둘째는 신하들의 행위 방식인 유위(有爲)와 대립되는 말로써 제왕의 통치 행위를 표현하는 말이다. 셋째는 권력에 간섭받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가리키는 의미이다. 서로 모순돼 보이는 이들의 용례는 그리 불협화음인 것은 아니다. 둘째 편인 「제물론 齊物論」에서 하늘의 퉁소 소리(天籟)에 대해 남곽자기(南郭子綦)는 이렇게 말한다.

수많은 것에 바람이 불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있어도 각기 스스로가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각자가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사나운 소리가 나게 하는 것은 누구이겠느냐?” 「제물론 齊物論」에서



제왕은 전국 시대 중국에서 전란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가져다 줄 신성한 구세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쟁과 혼란이 그치지 않던 당시 사회에서 장자는 어쩌면 옛 신화에 의지해 구세주 제왕(帝王)의 도래를 염원하던 선지자의 모습인 듯하다. 그런데 앞의 인용문에서도 나타나듯 그가 바라던 제왕은 천하통일의 군주라기보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수호하고, 개체의 온전한 삶을 보장해 주는 자연의 순응자로서의 군주였다. 그래서 「응제왕 應帝王」편에서는 “각각의 사물의 스스로 그러한 본성에 순응하고 사사로움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이다”라는 대원칙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장자』에서 말하는 제왕의 무위 정치는 “다양성의 공존”을 인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을 드러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전자방 田子方」편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옛 주(周) 나라의 문왕(文王)이 꿈에 본 노인을 만나 그를 기용하였는데, 그는 어떠한 법령도 인사 이동도 없이(無爲) 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런데 삼년이 지나자 온 나라가 화합하여 잘 다스려졌다는 것이다. 「전자방 田子方」에서





무하유 마을에서 들려오는 메아리(無何有之鄕) - 지덕지세(至德之世), 태평(太平)

어느 사상가든 그가 꿈꾸는 이상 사회의 모습은 그 사상의 궁극적인 요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는 『장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장자』에서 나타나는 이상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극한 덕의 세상’(至德之世)이고 다른 하나는 ‘태평(太平)’이라 할 수 있다. ‘지극한 덕의 세상’에 대해 「마제 馬蹄」에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지극한 덕의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행동이 유유자적하며 눈매가 밝고 환했다. 산에는 길이 없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으며 만물이 무리지어 생겨나 사는 곳에 경계를 두지 않았다. 사람들이 새나 짐승과 함께 살았고, 만물과 나란히 모여 있었다. 그런데 어찌 군자와 소인을 따졌겠는가! 어리숙하여 아무 지식도 없어서 제 본래의 덕(德)을 떠나지 않았다. 어리숙하여 아무 욕망도 없었으니 이를 소박(素朴)이라 한다. 소박하므로 백성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얻어졌다. 「마제 馬蹄」에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이 보장된 태고의 추억으로서 ‘지극한 덕의 세상’은 그려지고 있다.

이와 달리 「천도天道」편에 묘사된 ‘태평’은, 유가와 법가의 원칙까지 포용하는 종합적인 사상 체계를 나열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서술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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