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논 어

공자 지음 | -
논어 論語

공자 지음




▣ 『논어』읽기

씌어진 『논어』와 아직 안 씌어진 『논어』

논어에는 공자의 그와 제자들, 혹은 위정자들과 나눈 많은 대화가 나온다. 그리고 그 대화의 주된 주제는 정치였다. 이런 사실은 현실 정치에 식상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논어』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킬지 모르겠으나 바로 여기에 『논어』의 ‘생명력’의 비밀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하면 권모술수나 추악한 돈 거래를 떠올리면서 아예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정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치에 대해 무관심할수록 더욱 정치꾼들의 농간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정치 의식의 제고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정치 의식이 제고돼야 더 이상 후안무치한 정치인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공자의 태도는 옳은 것이다. 더구나 그가 생각한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 正也)”이었다. 계강자(季康子)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그대가 바름으로써 이끈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안연편)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양식 있는 정치인을 절망케 하기에 충분하리라. 따지고 보면 산다는 것이 정도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정치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정치는 남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일생 중에서 관직이 없을 때가 있을 때보다 훨씬 많았는데 만약 벼슬살이를 하는 기간이 길었다면 아마도 그는 이름 없는 관리로 일생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관직이 없을 때 그는 당시 제후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유세하면서 천하를 주유(周遊)하기도 하고 고향에 돌아와 고전을 연구하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강학(講學)을 하기도 했다. 혼란기였던 춘추시대에 천하를 주유하면서도 목숨을 보전했다는 사실은 그가 처세의 지혜에도 얼마나 밝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보신(保身)할 줄 알아야 명철(明哲)한 것이다.

일찍이 노신(魯迅)은 “제사 지낼 때 (선조가) 계신 듯이 하며, 신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신이 계신 듯이 했다(祭如在 祭神如神在)”(팔일편)는 공자의 태도에 주목해 이 점이 바로 공자의 ‘위대함’의 비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신이 볼 때 공자는 신이나 선조의 혼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나 선조의 혼령이 있다고 믿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무조건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신 듯이(如)” 행동했다는 말이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다는 지적이다. 『논어』가 씌어질 당시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내용을 죽간(竹簡)에 새기거나 비단에 써야 했다. 따라서 한 글자 한 글자의 배치를 상당히 세심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왜냐면 잘못 쓸 경우에 간단히 지워버리거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미(精微)한 말 속에 심각한 뜻(微言大義)을 담을 수밖에 없는 물질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압축파일’을 풀면서『논어』를 읽는 재미는 안 씌어진 『논어』를 창조하는 즐거움에 비견될 수 있겠다.

권력자들에 남․오용된 공자의 충효

흔히들 공자를 무턱대고 위대한 성인이거나 혹은 까다롭고 근엄한 도덕군자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말에서처럼 매우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속된 이해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견해가 널리 유포되기에 이른 것은 상당 부분 역대의 제왕과 같은 권력자나 그에 기생한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공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을 사랑하라(愛人)”는 공자의 인(仁) 사상을 이용해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한다(愛民如子)”는 구호를 내건 것은 자신들을 아버지처럼 섬기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주 공자가 말한 인의(仁義)나 예(禮)를 명분으로 삼아 ‘무지한’ 백성의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눌려 왔다. 그렇기 때문에 봉건시대 말기에 가서는 노신이 비판한 것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람잡아 먹는 예교(禮敎)’로 전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공자의 사상하면 일반적으로 인(仁)을 떠올리고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 가운데에서 실질적으로 동양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인이라기보다는 충효이다. 공자가 말한 인(仁)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사실 고도의 통치술(統治術)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에 대한 규정이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내용도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정해 말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런데 충효의 사상은 매우 간단하고 명백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다른 사람’에게 충심을 다하라! 이런 사상은 권력자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다. 그래서 곧 이렇게 변질되기에 이른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권력자(당시에 타인 중에서 가장 무시할 수 없는 존재는 말할 것도 없이 군주와 같은 권력자였다)에게 충성하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부모를 섬기듯이 ‘나(권력자)’를 섬겨라.

따라서 공자를 존중할 것을 크게 선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남들은 공자의 가르침대로 하기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예외로 행동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오히려 글자도 모르던 ‘무지한’ 일반 백성 가운데 공자의 가르침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산 사람이 많았다. 공자의 매력을 말하기에 앞서 이 점 명확히 지적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

첫 문장에서 뿜어나오는 공자의 매력

내가 『논어』를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 초년생 시절 한문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사실 논어가 중요한 것은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 다른 저작에서 차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읽지 않으면 다른 고전을 읽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가령 노신의 『공을기』라는 소설에 보면 공을기가 “군자는 재능이 많은가? 많지 않다.”라고 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내가 어렸을 때 생활이 곤란했기 때문에 비천한 기술을 배워 잘했다. 군자는 재능이 많은가? 많지 않다”고 한 언급을 풍자적으로 따온 것이다. 노신의 붓 끝에서 천대받는 거지와 같던 공을기와 성인 공자가 묘하게 오버랩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당시에 공자에 대해 별다른 호감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커다란 편견이 있지도 않았다. 다만 『논어』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막연히 공자를 좀 답답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논어』의 첫 구절도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공자님은 못말려. 역시 공자는 근엄한 도덕군자야. 공부가 뭐가 재미있어 노는 것이 재미있지, 누가 근엄하신 공자와 같은 사람과 있는 것이 좋다고 찾아왔겠어.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해. 나는 여태 내 멋에 겨워 잘 살아왔는데... 그렇다면 혹시 나도 군자 아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대단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노신(魯迅)이 한 작품집을 펴내면서 “그후 신청년 그룹은 뿔뿔이 흩어졌다. 혹자는 출세하고, 혹자는 물러나 숨고, 혹자는 전진했다. 같은 진영의 동지들마저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나는 또다시 경험했다.”고 토로한 그러한 심정을 나도 어렴풋이 동감하게 될 만큼 세월이 흘렀을 때 그래서 다시 접하게 된 『논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평등하고도 평심(平心)한 눈으로 행간에 주목하게 되자 그것은 헌책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을 담은 책이었다. 아니 수수께끼로 가득 찬 아직 다 씌어지지 않은 소설 같았다.

나는 첫머리의 구절을 읽고 마음이 저려왔다. 이것은 공자가 나를 위해 한 말 같았다. 그래 배우고 때로 익혀 즐겁지 않으면 어쩔 것이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고 ‘군자’가 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나와 같은 심정의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와 서로의 흉금을 터놓고 한 잔의 술을 기울인다면 정말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그리고 생각했다. 공자는 남이 알아주는 않는 고통 속에서 즐거움의 자리를 발견했구나. 이러한 구절을 『논어』의 첫머리에 배치한 것을 보면 이 책을 편찬한 제자들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스승의 위대함이 돋보일 수 있는 줄을 아는구나. 그들을 길러낸 공자라는 이의 인격은 정말 어떠했을까. 천고(千古)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들과 벗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창과 같은) 자긍심은 있지만 다투지 않는(矜而不爭)” ‘군자’가 되고 싶었다. 그때서야 많은 사람들이 『논어』에 매혹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비로소 샘물 솟아나듯 우박 퍼붓듯 궁금해졌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였기에 기뻤을까. 그들이 공부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더 읽어 내려가 보자.



전편을 꿰뚫는 치국(治國)의 도리

제자인 유자(有子)가 말하길,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런 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길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하나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겨날 것입니다. 효도와 우애는 인의 근본입니다(인을 행하는 근본이라는 설도 있다).”

다시 공자의 말이 나온다.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잘 꾸며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자 중에 어진(仁) 자가 드물다.” 이어 증자가 말하길,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반성합니다.”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함에 정성을 다했는가(爲人謀而不忠乎)?” “친구와 사귀면서 믿음 있게 행동했는가(與朋友交而不信乎)?”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을 재차 익혔는가(傳不習乎)?”

증자가 날마다 반성한 세 가지 내용의 순서를 거꾸로 해보면 정확히 공자의 말과 대응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자. 마치 증자의 말은 스승인 공자의 말에 대한 주석 같다. 공자가 첫째로 학습을 말했다면 증자는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의 복습을 말하고 있으며, 공자가 두 번째로 말한 친구에 대해 증자는 친구 사이에 신의가 있어야함을 강조했으며, 세 번째로 공자가 제시한 나에 대한 남의 인정 여부의 문제에 대해 증자는 충심을 다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학습의 내용이 조금 분명해졌다. 학습의 내용은 스승에게 전수받은(傳)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스승과 제자는 무슨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던가. 공자와 증자는 모두 사제 관계(學習)와 친구 관계(朋友)와 대인 관계(人)를 말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유자가 말한 부모 형제와의 관계를 덧붙이면 타인과 맺을 수 있는 중요한 관계(단 남녀 관계 제외)를 거의 모두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말인가. 당연히 남에게 정성을 다하고(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과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왜 이러한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어서 나온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되 일을 공경스럽게 해 믿게 하고, 쓰임을 절도있게 하면서 남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때에 맞춰 하여야 한다. 「학이편」에서



결국 이들이 학습하고 토론한 것은 치국(治國)의 도리였다. 즉 권력에 참여해 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平天下)하는 정치의 길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메시아 컴플렉스’가 있었다. 이는 앞서도 밝혔듯이 『논어』 전편을 꿰뚫고 있는 중요한 정신이다.



우주의 중심에 선 멋진 사람

그러나 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이를 논의했다고 해서 삭막하기만 하리라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논어』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는 부분을 보자.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모시고 앉았다. 공자:내 나이가 다소 너희들보다 많다고 나를 너무 어렵게 여기지 말라. 너희들이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자주 말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 하겠느냐. 자로:(큰 생각없이) 전차 천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의 나라가 대국 사이에 놓여 밖으로는 군대가 쳐들어오고 안으로는 기근이 들었어도 제가 다스릴 경우 3년이 지나면 백성들을 용맹하게 할 수 있고 또 의리를 향해 나아갈 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빙그레 웃었다.



공자 : 구(염유의 이름)야.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염유:사방 6-7십리, 혹은 4-5십리쯤 되는 작은 나라를 제가 다스릴 경우 3년 정도 지나면 백성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지만 예악(禮樂)에 관한 일은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공자:적(공서화의 이름)아.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공서화:제가 이런 것을 잘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배우고자 해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종묘의 일과 제후들이 회동할 때 예복을 입고 예모를 쓰고 작은 집례자(執禮者)가 되기를 원하옵니다.공자 : 점아 너는 어떠냐.



그는 비파 타기를 점점 드문드문 하다가 (할 말이 생각이 난 듯이) 쟁하고 비파를 놓고 일어나 대답했다.

증점:제 뜻은 다른 세 사람과 좀 다릅니다.

공자:무슨 상관이 있느냐. 각자 자기 포부를 말한 것인데…….

증점:늦봄에 봄옷이 갖춰졌으면 관을 쓴 성년 남자 5~6명과 동자(童子) 6~7명과 함께 기수(沂水) 가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단(舞雩壇)에 올라 바람을 쐬고 노래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겠습니다.공자:(길게 탄식하면서) 나는 증점의 생각에 동의한다.

「선진편」에서



공자와 제자가 격의 없이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한가한 풍경이 증점의 비파 소리와 함께 눈에 선하다. 특별히 증점과 공자의 풍모가 멋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에만 집착하지 않고 삶에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때 어떤 신문사에서 명사들에게 “제주도를 그대에게 준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어떤 소설가가 “노형 가지시오”라고 대답해 세인의 감탄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설가인들 제주도 땅의 값어치를 어이 모르랴.

자로와 염유와 공서화의 대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정치적 포부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증점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공자의 말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공자는 멋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에 대해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發憤忘食), 즐거울 때면 근심을 잊어 자신이 점차 늙는 줄도 모르는 사람”(술이편)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옹야편)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우주의 중심’에 선 자이다.



장차 벼슬살이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공자의 비애를 본다. 그가 이토록 즐거움에 주목한 것은 아마도 우환(憂患)의 고통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우환이 많았을까.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하니 호학(好學)했던 공자는 얼마나 근심 걱정이 많았겠는가. 그러나 그보다는 기본적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대범한 말의 이면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莫我知也夫)”(헌문편)라는 탄식이 교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하다(古來聖賢皆寂寞)”는 이백(李白)의 싯귀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천하 우주’를 품은 한 사람의 문인(文人: 지식인)으로서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정치권력을 가진 자(가장 중요한 남이다)가 자신을 알아줘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다른 권력자가 자신을 알아준다면?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더구나 힘과 논리로 빈틈없이 압박해 들어온다면 어쩌겠는가. 권력자 양화와 지식인 공자의 불꽃튀는 활극(活劇)이 여기에 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