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거울에 티끌이 끼겠는가-육조단경
혜능 지음 | -
육조단경(六祖壇經)
혜능 지음
▣ 『육조단경』 읽기
『육조단경』의 본래 명칭은 『육조대사법보단경 六祖大師法寶壇經』이다. 이 책은 혜능이 소주(韶州)의 대범사(大梵寺)에서 설법한 내용을 소주 자사(刺史)인 위거(韋據)의 명에 의해 제자 법해가 기록한 것이다. 이 책에는 많은 이본(異本)이 있고, 그 내용의 구분과 목차도 각기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같다. 이 책의 앞 부분은 혜능이 육대조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그 다음부터는 설법이 펼쳐진다. 다음의 내용은 돈황본(敦煌本)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무식장이 나무꾼 혜능(慧能)이 육대조사(六代祖師)가 되기까지
혜능은 세 살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어느날 장터에서 손님이 『金剛經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고 한번 들으니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치고서, 손님에게 이 경전을 읽게 된 동기를 묻자 손님은 오대조사(五代祖師)인 홍인이 사람들에게 ‘『금강경』 한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自性)을 봐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곧 어머니께 인사하고 길을 떠나 오조(五祖) 홍인을 찾아가 예배하고는, 부처되는 법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오조대사께서 혜능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길,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거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했다. 오조스님은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것을 보시고 다시 더 말씀하지 않았다. 그리고 혜능을 내보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오조대사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모은 다음, 각기 게송(偈頌) 한 수를 지어 오라고 하면서, 그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전수해 육대(六代) 조사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문인들은 서로 대화하길 “신수(神秀)가 우리의 교수사(敎授師)이고, 가장 뛰어난 경지에 있으니까 신수가 법통을 이어받는다면 저절로 모두가 그에게 의지하게 될 텐데 굳이 게송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하고, 다들 감히 게송을 바치지 않았다. 신수는 다른 사람들이 게송을 짓지 않는 까닭을 알고서, 일단 자기의 경지를 오조스님께 보여드리기로 결심하고는 남쪽 복도 벽 사이에 가만히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써 놓았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오조스님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 사람들에게 “모두 이 게송을 외워라. 외는 자는 바야흐로 자성(自性)을 볼 것이며, 이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조스님은 신수를 따로 불러 신수의 게송이 아직 자기의 본성을 본 경지를 드러내지는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혜능은 신수의 게송을 듣고서, 이 게송이 견성(見性)하지도 못했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은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서쪽 벽 위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써 놨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부처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어디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니 어디가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明鏡本淸淨 何處染塵埃
오조 스님께서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곧 큰 뜻을 알아봤다. 사람들 몰래 한밤중에 혜능을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시니, 혜능이 한번 듣고 문득 깨쳐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조스님은 혜능에게 “이 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해칠 것이니 남쪽으로 떠나서 삼년 후부터 법을 널리 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께 인사하고 곧 남쪽으로 갔다.
마음을 알아서 성품을 보다 (識心見性)
일체의 모든 이치와 원리와 사물(一切萬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데, 어찌 자기 마음을 따라서 진짜 나(眞如)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 菩薩戒經』에서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맑고 깨끗하다’고 했으니,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하면 스스로 부처님 도(佛道)를 성취하는 것이니 곧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十二部)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어서 본래부터 있다고 말하니, 자기의 성품을 깨치지 못했다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성품을 볼아야 한다... 보리(菩提) 반야(般若)의 지혜는 세상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갖고 있는데, 다만 마음이 미혹해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봐야 한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령된 생각이 있어서 진짜 나를 덮고 있으니 망념이 없어지면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니라...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불법(佛法)을 배워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곧 큰 뜻을 깨칠 수 있다... 자성(自性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다... 마음의 크기(心量)가 넓고 커서 허공과 같은데, 허공은 해, 달, 별, 대지와 산, 강과 모든 나무와 풀, 악한 사람과 악한 법,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다 포함하니, 세상 사람들의 자성도 이와 마찬가지로 비어있다(世人性空). 모든 것(萬法)을 포함하는 자성이 곧 큰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악함과 착함,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지만,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또 거기에 물들지도 않아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데, 것이 곧 큰 실행(行)이다.
경험론적인 철학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이 몸 안에 있고, 마음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지식과 분별력의 성장을 겪게 되고 육체가 소멸하면 마음도 소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조단경』에서는 마음이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과 바다와 대지와 같은 일체의 것이 마음 안에 있고, 모든 이치와 모든 부처님의 설법과 경전들의 가르침과, 그리고 추론적 이성을 초월하는 지혜가 이 마음 안에 본래 갖춰져 있다고 말한다. 헛된 생각들이 마음의 참된 성품을 덮고 있어서 사람들은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품을 스스로 깨치지 못하고 있지만, 좋은 스승의 지도를 받든지, 아니면 스스로 마음을 관찰해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게 되면 부처님의 도(佛道)를 성취한다.
오직 진리를 단박에 깨닫는 법(頓悟)만을 전함
해와 달이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여서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잘 보이지 않지만 문득 지혜의 바람이 불어와 구름과 안개를 말끔히 걷어 버리면 온갖 것이 일시에 모두 나타난다.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청정함도 마치 깨끗한 하늘과 같으며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아 지혜가 항상 밝은데, 밖으로 경계에 집착한 망령된 생각이 뜬구름처럼 덮여 있어 자기의 성품(自性)이 밝을 수 없다. 그러므로 참다운 법을 열어 주는 선지식을 만나 미망(迷妄)을 없애 버리면 안팎이 환해져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萬法)이 저절로 나타난다. 이것을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부른다... 자기성품의 심지(心地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觀照)해 안팎이 환해지면 자기의 본래 마음(本心)을 알게 되니, 본래 마음을 하는 것이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하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 지혜 자체와 하나가 된 상태)요,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無念 기억과 시간이 없음)이다... 육진(六塵 감각대상세계) 속에서 사그라들지도 물들지도 않아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무념행(無念行)이라고 부른다... 오직 돈교법(頓敎法)만을 전해 세상에 나와있는 여러가지 가르침을 없애려고 한다... 돈교는 대승(大乘)이라 부르는데, 미혹할 때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깨우치면 잠깐이다... 마땅히 지혜로 관조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망령된 생각이 다 없어지는데, 이것이 곧 나의 진정한 선지식이니 한번 깨쳐 곧 부처님을 알게 된다.
종교인들과 수도승들 중에는 진리를 깨닫는 과정이나 신(神)과 영혼이 합일하는 과정이 마치 철광석에서 순금을 만드는 과정처럼, 또는 우유에서 양질의 치즈를 만드는 과정처럼 많은 단계의 정화와 향상을 포함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진리를 깨닫는 과정은 구름에 덮여 있는 태양이 구름이 걷힐 때 일시에 밝은 빛을 드러내 사방에 비추는 것처럼 단번에 이뤄진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불교에서는 전자의 입장을 ‘점차 닦는다’는 의미에서 ‘점수(漸修)’라 하고, 후자의 입장을 ‘단박 깨친다’는 의미에서 ‘돈오(頓悟)’라 부른다. 한편 불도(佛道)를 이루는 과정은 흙탕물에서 순전한 물만 얻고자 할 때에 흙이 밑에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흙앙금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비록 번뇌에 물들지 않고 부처성품을 갖췄다고 해도 완전한 정화(淨化)를 위해서는 어리석음과 업력(業力)을 제거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수행(修行)을 계속 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를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 혹은 오후점수론(悟後漸修論 깨친 뒤 점차로 닦는다는 이론)이라 부른다.
이와 반대로 불도(佛道)를 이루는 과정은, 악몽에 시달리다가 잠에서 깨는 것과 같아서 잠에서 깨고 나면 본래 악몽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악몽의 영향력은 정신이 깬 후로는 계속되지 않는 것처럼, 일단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의 성품(本性)을 보고 나면 더 이상 과거의 업력(業力)과 헛된 기억을 정화시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깨어난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면 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를 돈오돈수론(頓悟頓修論)이라 부른다. 돈오돈수론에서는, 깨달은 뒤(悟後)에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修行佛行)는 것이며, 마음을 닦는 수행이 더 필요한 단계에 있는 사람은 잠에서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육조단경』은 돈오점수론을 강하게 반대하고, 오직 돈법(頓法)이 선(禪)의 진면목이자 참된 가르침이라고 강조한다.
무념(無念 모든 기억과 집착을 버림), 무상(無相 모든 모양을 떠남), 무주(無住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음)의 가르침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相)이 사그라드는 것일 뿐 자성의 본체(本體)는 청정한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여러가지 견해를 일으키므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모든 헛된 생각들이 이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는다...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만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있다(自在). 『유마경』에 말하길 ‘밖으로 충분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니, 안으로 첫째뜻(第一義)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였다... 무념(無念)이란 모든 것을 보되 그 모든 것에 물들거나 매달리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끄달리지 않는 것이다.
북종선(北宗禪)에서는 청정한 부처성품[佛性]을 방해하는 망령된 생각[妄念]의 작용을 인정해, 그 망념을 떠나는 ‘이념(離念)’을 강조한다. 흙탕물에서 순전한 물만 남기려면 우선 흙을 가라앉혀야 하듯 선한 성품에 대립되는 악한 생각들을 멀리 하고 안정된 성품에 대립되는 마음의 혼란을 통제하고 게을러지기 쉬운 마음을 주의하는 등의 노력을 하면서 보다 깊고 정화된 정신통일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혜능은 이념(離念)의 입장을 의식하고 그걸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려 한다. 즉 자성(自性)이 본래 하나의 법도 얻어야 할 것이 없으며, 마음은 있고 없음(有無)이나 선악(善惡)처럼 상대되는 두 모양이 없고 청정(淸淨) 그 자체여서 떠나야 할 망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러움과 사악함과 망념을 피하려는 것 자체가 집착을 낳아서 앞 생각과 뒷 생각이 계속 이어지고 시간과 기억의 차원 속에 마음을 한정시키기 때문에, 혜능은 이념(離念) 대신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아서 어떤 것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혹은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두 모양의 분별을 영원히 떠나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지혜로써 관조하되,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도록 가르친다.
선정(禪定)과 지혜의 관계는 불과 불빛의 관계와 같다(定慧體一)
나의 이 법문(法問)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먼저 혜와 정이 서로 다르다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어서 둘이 아니니, 곧 정의 혜의 몸(體)이요 혜는 정의 작용(用)이니라. 곧 혜가 있는 때에 정이 혜 속에 있고 정이 있는 때에 혜가 정 속에 있나니,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함께 함이니라...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느니라.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곧 두 몸이 있으나 두 갈래가 아니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다... 정과 혜가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은 법에 두 모양이 있느니라(法有二相).
선(禪)은 인도어 ‘드야나Dyana’의 한자 음역인 선나(禪那)의 준말로 사유수(思惟修), 정려(靜慮) 등으로 번역한다. ‘바른 이치를 생각하고 닦음으로써 잡념. 망상을 버리는 것’, 또는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 진리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보통 지관(止觀)과 정혜(定慧)로 나눠 말하기도 하는데, 지(止) 또는 정(定)은 망상․번뇌를 그치는 정신통일을, 관(觀)․혜(慧)는 바른 이치를 보는 밝은 지혜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점수(漸修)의 수행법을 가르치는 북종(北宗)에서는 인도에서 전래된 전통을 이어받아,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정(定)과 여러 다른 수준의 혜(慧)를 상정하고서 정(定)을 먼저 이뤄 그 정(定)에 알맞은 지혜를 성취하고자 하거나, ‘정(定)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혜(慧)로써 흐리멍텅한 상태를 다스리고자’ 한다.
그런데 『육조단경』은 인도의 명상전통을 이어받은 북종(北宗)의 수행법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엎고자 한다. 즉, 명상의 의미를,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하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무는 일이 없는 마음의 자유로운 활동에 눈뜨는 일로 바꾸려는 것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의 본체에는 저절로의 앎이 있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은 곧 편안함(定)이니 편안함과 깨달음은 완전히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단경』은 한적한 곳을 찾아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앉아서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지켜보거나 호흡의 수를 센다거나 하는 명상법 대신, 언제 어디서나 바른 마음(直心)으로 행동해 모든 것에 물들지 않고 바로 정(定)과 혜(慧)가 하나인 일행삼매(一行三昧)를 가르친다.
서방정토(西方淨土)는 어디에 있는가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실 때 서방정토를 통해 사람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셨다. 경전에 분명히 말하길 그곳은 ‘여기서 멀지 않다’고 했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해 멀다 하는 것이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가 높은 사람을 위해서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해 거기에 도달하려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할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나라(佛土)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느니라... 다만 마음에 더러움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해 왕생하고자 해도 이르기 어렵다.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八邪, 사악함)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처럼 쉽다,.. 만약 태어남(生) 없는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敦敎)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해도 왕생할 길이 먼데,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마음이)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방정토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