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세계 2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지음 | 고전문학
가정과 세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지음
제6장
니킬의 이야기며칠 뒤, 스승님께서 판추를 데리고 내 방을 찾으셨다. 판추의 얼굴에는 절망이 깊게 패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주 하리시 쿤두가 그에게 백 루피의 벌금을 부과하고, 당장 땅에서 쫓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죄목은 단지 외제 옷감을 팔았다는 것뿐이었다. 판추는 빚을 내어 산 물건이니 제발 재고만이라도 처분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하리시 쿤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 그 물건들을 불태우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강요했다. 궁지에 몰린 판추가 홧김에 대들었다. “저는 그럴 형편이 못 됩니다! 나리께서는 부자시니, 차라리 나리가 이 물건을 사서 직접 태우시지요!”
이 말에 격분한 하리시 쿤두는 건방지다며 하인들을 시켜 신발로 그를 매질하게 했고, 결국 판추는 모욕을 당한 채 벌금까지 물게 되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자리에 산딥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산딥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잿더미를 집어 들고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고 한다. “형제들이여! 이것은 외국 상업의 장례를 치르는 성스러운 첫 번째 화장터의 재다. 이 재를 몸에 바르고 스와데시의 맹세를 다져라!”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즉시 산딥을 불렀다. 그가 방에 들어오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네가 이 사람의 옷감이 불타는 현장을 목격했겠지? 증인이 되어 주게.” 산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증인이 되어야지. 하지만 난 반대편 증인석에 설 거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진실을 외면하고 위증을 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따져 묻자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일어난 일만이 진실인가?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진실을 위해서는 수많은 거짓이 필요한 법이야. 역사를 봐. 제국을 건설하고 세상을 지배한 자들은 진실을 맹목적으로 따른 게 아니라 창조해 냈어. 지배하려는 자는 거짓을 두려워하지 않아. 진실이라는 족쇄는 지배당하는 자들의 몫이지.”
그의 궤변에 말문이 막힌 나를 향해 산딥은 더욱 거침없이 자신의 철학을 쏟아냈다.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밭을 갈아엎고 흙을 짓이겨야 해. 나는 기꺼이 거짓이라는 쟁기로 밭을 갈 거야. 인간의 목표는 진실이 아니라 성공이니까.” 산딥이 방을 나가자 스승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니킬, 산딥은 종교가 없는 게 아니다. 그는 진실의 어두운 이면, 즉 빛이 잘못된 쪽으로 넘어간 ‘검은 달’을 숭배하고 있는 게야.”
나는 여전히 그를 미워할 수 없는 나 자신이 괴로웠다. 우리는 서로 운율은 맞지 않지만, 삶을 대하는 리듬만큼은 같다는 묘한 동질감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당장 곤경에 처한 판추를 구해야 했다. “제가 판추의 땅을 사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제 소작인으로 삼으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불타버린 옷감도 제가 다시 마련해 주지요.”
판추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나리, 높은 분들끼리 싸우는 동안 구경꾼들은 즐거워하겠지만, 결국 죽어나는 건 저 같은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제 집을 불태우고 아이들까지 해칠 겁니다!” 스승님께서 아이들은 당신이 지키겠다고 안심시키셨고, 나는 그날 바로 판추의 땅을 매입하여 소유권을 이전받았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내가 소유권을 주장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판추의 죽은 숙모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짐 보따리와 묵주를 들고 판추의 집에 눌러앉아 모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판추는 숙모가 오래전에 죽었다며 항변했지만, 그들은 그 죽은 숙모는 첫째 부인이고 이 여자는 삼촌이 생전에 맞이한 둘째 부인이라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냈다. 삼촌이 첫째 부인이 살아있을 때 몰래 결혼을 했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브린다반으로 떠나 성지에서 지내다 이제야 돌아왔다는 완벽한 각본이었다. 지주 하리시 쿤두와 그 일당이 쳐놓은 치졸하고도 거대한 거짓의 그물이, 진실을 짓이겨 성공을 거둔다는 산딥의 말처럼 우리를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유난히 업무가 짓누르던 오후였다. 사무실로 비말라가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큰 마님도 아닌 작은 마님이라니. 그녀가 나를 부른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마치 한 세기라도 지난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다리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안채로 향했다. 방에 들어선 순간, 나는 낯선 충격에 휩싸였다. 비말라는 잔뜩 치장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주인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멍한 기운이 감돌던 방은 오늘 오후 기이할 정도로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오른손으로 왼팔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더니, 정적을 깨고 대뜸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온 벵골에서 우리 시장만 외국 상품을 팔게 놔두는 게 옳아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옳겠소?” “당장 싹 치워버리라고 명령하세요!” “그 물건들은 내 것이 아니오.” “시장은 당신 것이잖아요?” “그곳은 시장을 터전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오.” “그럼 인도 물건을 팔게 하면 되잖아요.” “나도 그러길 바라오. 하지만 그들이 원치 않는다면 어쩌겠소?” “말도 안 돼요! 감히 어떻게 그렇게 건방질 수가 있죠? 당신은….”
“오늘 오후엔 몹시 바빠서 길게 논쟁할 시간이 없소. 하지만 난 폭군 노릇은 거절하겠소.” “그건 사리사욕을 위한 폭정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일이에요.”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 그게 바로 나라에 대한 폭력이오. 하지만 당신은 영영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왔다.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투명할 정도로 맑게 빛나 보였다. 내 존재 깊은 곳에서 솟구친 기쁨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나는 이 벅찬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곧 깨달음이 왔다. 밤낮으로 내 마음을 짓누르던 족쇄가 끊어진 것이다. 안개가 걷히자 비말라의 모습이 카메라 렌즈에 맺힌 상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서 그 금지 명령을 얻어내기 위해 일부러 치장한 것이었다. 전에는 그녀의 단장이 그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신비로운 매력으로 다가왔으나, 오늘 영국식으로 한껏 부풀린 그녀의 머리 모양은 그저 값을 흥정하러 나온 장식품에 불과해 보였다. 나에게 그토록 귀중했던 것이 이제 헐값에 팔리려 하고 있었다.
부서진 침실이라는 감옥을 빠져나와 황금빛 햇살 아래로 걸어 나왔다. 바우히니아 꽃들이 핀 자갈길 위로 찌르레기들이 지저귀고, 멀리서는 짐을 푼 황소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멍에를 벗은 황소 한 마리는 풀을 뜯고, 다른 한 마리는 편안히 눈을 감은 채 등 위의 까마귀가 벌레를 쪼아 먹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대지의 따스한 숨결이 꽃향기와 함께 내게 밀려왔다. 나는 이제야 대지의 소박한 심장 박동에 다가선 느낌이었다.
우리는 자유라는 이상을 좇는 기사들이다. 집안에서 마법의 그물을 짜 우리를 옭아매는 여인의 변장을 걷어내고, 그녀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나의 욕망과 상상으로 그녀를 덧입혀 우리의 진정한 탐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오늘 나는 승리를 예감한다. 나는 단순함의 문턱에 도달했고, 이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만족한다. 나 자신이 자유로워졌으니 남에게도 자유를 허락하리라. 때때로 가슴이 아려오겠지만, 그 고통의 진실을 이해한 이상 더는 문제 되지 않는다. 진실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시는 거짓된 환상의 낙원을 탐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진실의 북소리만이 나를 승리로 이끌게 하소서.
산딥의 이야기비말라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단번에 그녀가 니킬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며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으나, 나는 처음부터 그 확신을 믿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약점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지만, 남자가 강하게 버티는 지점에서는 도무지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법이다. 창조주가 남자를 만들 때는 계율과 원칙이 가득 든 가방을 멘 엄격한 교장 선생님 같았지만, 여자를 만들 때는 교장직을 내려놓고 붓과 물감만 든 예술가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상처 입은 자존심으로 얼굴을 붉힌 채 말없이 서 있는 그녀는 마치 비를 잔뜩 머금고 번개를 품은 먹구름처럼 위태롭고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나는 다가가 떨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나는 저항하지 않는 그녀를 의자로 이끌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거세게 흐르던 파드마 강물이 수면 아래 숨겨진 사소한 장애물에 부딪혀 방향을 틀듯, 나의 저돌적인 격정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벽에 가로막혀 멈춰 섰다.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내 신경은 팽팽하게 조율된 현처럼 울렸으나, 그 교향곡은 첫 악장에서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무엇이 나를 가로막았는가? 그것은 명확하지 않은, 얽히고설킨 수많은 감정의 타래였다.
자리에 앉은 비말라는 잿빛으로 창백해졌다. 그녀 역시 위기의 순간이 스치고 지나갔음을, 혜성의 꼬리가 자신을 휩쓸고 갔으나 상처 없이 남겨졌음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녀가 평정심을 되찾도록 도와야 했다. “장애물은 있겠지만 끝까지 싸워봅시다. 기죽지 말고. 그게 최선 아니겠소, 여왕님?” 비말라는 목을 가다듬으며 작게 대답했다. “네.” 내가 캘커타에서 온 일꾼들의 명단을 작성하며 계획을 설명하려 하자, 그녀는 피곤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 “그건 나중에 해요. 저녁에 다시 올게요.” 그녀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업무가 아니라, 침대에 엎드려 실컷 울어버릴 혼자만의 시간이었으리라. 홀로 남겨지자 해가 진 뒤 더 짙어지는 노을처럼 뒤늦은 취기가 나를 감쌌다. 그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다니, 나는 얼마나 비겁한 겁쟁이였던가. 그녀는 내 망설임에 질려 떠난 것이 분명했다.
그때 우리 소년 대원 중 하나인 아물랴가 들어왔다. 그 아이의 등장은 나를 몽상에서 깨워 현실의 투쟁으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소금과 설탕, 옷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러면서 내 머릿속의 몽롱한 안개는 걷혔다. 나는 꿈에서 깬 듯 벌떡 일어났다. 반데 마타람!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했다. 하리시 쿤두의 소작인들인 상인들은 대부분 우리 편으로 넘어왔고, 니킬의 관리들조차 은밀히 우리 편에 서서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마르와리 상인들은 벌금을 낼 테니 재고만이라도 처분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오직 몇몇 무슬림 상인들만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그중 한 무슬림 상인이 가족을 위해 독일제 숄을 가져오다가 우리 마을 소년들에게 발각되어 숄이 모두 불태워지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는 인도산 모직물을 대신 사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 싼값에 캐시미어 숄 같은 걸 구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상인은 니킬에게 달려가 하소연했고, 니킬은 그저 법에 호소하라고 조언할 뿐이었다. 물론 그 재판이 흐지부지되도록 손을 쓴 건 다름 아닌 우리 편으로 넘어온 니킬의 법률 대리인이었다. 니킬의 정의는 그의 집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불에 탄 외국 옷을 매번 우리 돈을 들여 국산으로 바꿔주는 건 자금상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전략적으로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외국 물건을 파괴할수록 수요가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외국 상인들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아닌가. 나는 주저하는 아물랴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봐! 우리가 외국 물건을 압수한 자들에게 국산품을 선물로 바칠 수는 없어. 벌칙은 그들에게 떨어져야지 우리 몫이 아니란 말이다. 그들이 법을 들먹이며 소송을 걸면 우리는 그들의 곡식 창고를 불태워 보복해야 해! 자네, 뭐가 그리 두려운가? 기억해, 이건 전쟁이야. 고통을 주는 게 두렵다면 가서 연애질이나 해, 이 일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나는 외국산 물품에 대해서는 그 어떤 타협도 불허했다. 비록 국산 양모가 거칠고 볼품없다 해도 예외는 없었다. 화려한 외제 숄이 없던 시절처럼 농민들은 투박한 솜이불로 버텨야 했다. 겉보기에 초라할지라도 지금은 멋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뱃사공이 우리 편으로 넘어와 외국 상품 운송을 거부했지만, 우두머리인 미르잔만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나는 매니저를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뒷일이 두려워 망설이는 그에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노라 장담했다. 어둠이 내린 뒤, 쓰레기를 실은 미르잔의 배는 강 한가운데서 구멍이 뚫린 채 침몰했다. 미르잔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하고 울며 내게 달려왔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리….” 그는 내 발밑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배 값인 2천 루피만 당장 쥐여줄 수 있다면 그를 영혼까지 매수하여 우리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결국,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막대한 자금이었다.
저녁에 비말라가 거실로 들어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여왕님! 모든 준비가 끝났고 성공이 눈앞에 왔지만,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라니요? 얼마나 말인가요?” “그리 큰 액수는 아닙니다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5만 루피가 있어야 해요.” 비말라는 그 액수에 속으로 질겁한 눈치였으나, 이미 시작된 싸움에서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패물을 떠올리는 기색을 보이자 나는 단호하게 선수를 쳤다. “당신의 패물은 비상금으로 남겨둬야 해요. 이 돈은 남편의 금고에서 나와야 합니다.”
비말라는 더욱 당황하여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이의 돈을 가져온단 말인가요?” “그의 돈이 당신 것이기도 하지 않소?” “아, 아니에요!” 그녀의 상처 입은 자존심이 다시금 욱신거리는 듯했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그녀의 죄책감을 애국심으로 포장했다. “그렇다면 그 돈은 남편의 것도 아니오. 조국이 필요로 할 때 그가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 조국의 돈이란 말이오! 당신은 그 돈을 가져와야만 해. 반데 마타람! 이 주문이 철제 금고의 문을 열고 벽을 허물어 줄 것이오. 자, 따라 해보시오! 반데 마타람!”
“반데 마타람!”
제7장
산딥의 이야기우리는 남자이자 왕이니, 이 세상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였다. 태초부터 우리는 대지를 약탈해 왔고, 우리가 더 많이 요구할수록 대지는 더 순종적으로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던가. 대지의 깊은 곳간을 털어내고, 그 살을 파헤쳐 상처 입힘으로써 비로소 대지는 비옥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여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자신의 행복이라는 다이아몬드와 슬픔이라는 진주를 우리 남자의 왕실 금고에 쏟아부음으로써 진정한 가치를 얻게 된다. 그러니 남자가 받는 것은 곧 주는 것이요, 여자가 주는 것은 곧 얻는 것이다.
비말라에게 5만 루피라는 거금을 요구한 것도 바로 이런 이치였다. 처음엔 나조차도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어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그녀를 이 거친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나약한 양심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곧 깨달았다. 여자의 그 평온하고 밋밋한 행복을 뒤흔들어 고통의 심연을 맛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남자의 사명임을. 게다가 푼돈을 요구하는 것은 거지나 하는 짓이다. 천 루피나 이천 루피 정도라면 좀도둑의 짓거리처럼 보였겠지만, 5만 루피라면 낭만적인 도적의 거대한 야망처럼 보일 테니까. 니킬에게 그 돈은 그저 남아도는 잉여일 뿐이지만, 나 같은 타고난 제왕에게 가난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때, 나의 이 웅대한 상념을 깨뜨리는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미르잔의 배를 침몰시킨 사건에 대해 경찰이 냄새를 맡고 추적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니킬의 관리인이 뻔뻔한 얼굴을 들이밀며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살길을 도모하고 있었다. “제가 곤란해지면 선생님도 끌고 들어갈 겁니다.” 그의 눈에는 비열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나는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나를 옭아맬 밧줄이라도 있나?” “선생님 편지와 아물랴의 편지를 가지고 있죠.”